363. 공개(2)
담담히 미소를 짓는 무진이 화면에 나왔다.
시작 멘트가 기대되었다.
“세계를 구한 대영웅 강무진입니다. 제 덕에 현실이 무사히 흘러가고 있으니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가지시면 됩니다.”
……?
맞는 말인데도, 사람을 빡 치게 하는 건 여전했다. 저딴 말을 세계를 상대로 대놓고 하다니, 상식적이길 기대했다면 명백한 오산이다. 그나마 무진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만 겨우 평정심을 찾았다.
-크크크크, 역시 폭군이시다. 카아, 시작부터 멘트가 아주 주옥같다!
-자랑하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나! 전생에 과시하지 못해서 죽은 귀신이 달라붙은 게 확실해!
-아직 폭군 맛을 보지 못한 세계인들은 넋이 나갔을걸. 다들 말문이 막혔겠지.
-그래서 틀린 말 했냐? 다 맞는 말이잖아. 여태 해 온 일만 나열해도 역사적인 위인 아니냐!
-난 천성을 안 믿는 편인데, 이쯤 되면 타고났다. 태생이 그런데 어쩌랴!
국내는 무진에게 단련이 되어 이 정도로 흔들리지 않았지만, 세계 각국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중구난방이었다. 처음부터 워낙 상식 밖이라 채팅은 인사치레는커녕 묵언 수행을 강제당했다.
그런데 화면 오른쪽 상단 후원 금액은 무섭게 오르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후원금 계좌를 열었다고 욕을 할 수도 있겠으나. 실시간 계좌 이체를 통해서 다이렉트로 우리나라의 불우한 이웃, 가정, 병원으로 송금되고 있었다. 후원금 계좌는 말 그대로 거쳐 가고 있었다.
후원금의 사용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권왕가의 이름으로 후원하고 있었다. 간이 어지간히 크지 않고선 권왕가의 후원금을 횡령하지 못한다.
한편으로 세계에서 삥을 뜯어서 국내의 불우한 이웃을 돕고 있었다. 무진의 기상천외한 발상에 다들 애국심이 불타올랐다. 돈 있으면 국내의 불쌍한 사람을 도우라는 사람들의 속내를 절묘하게 관통했다. 국내 여론도 눈치가 있어서 그런 불편한 채팅은 거론하지 않았다.
“일단 제가 한 일부터 차근차근 설명하겠습니다. 아카데미로 가겠다는 마음을 먹었을 때부터였습니다.”
본인을 자랑하는데, 한 점의 흐트러짐도 없이 차분히 나열하기 시작했다. TMI의 끝판왕. 이런 식으로 길어질 줄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시청률은 여전히 폭발적이었다.
순간 시청률 79%.
이게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세계에서 그렇다. 존대하는 말투로 본인을 자랑하면서 세계인들을 돌려 까고 있었다. 한데, 욕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해서 치고 들어가기가 어렵다.
본인 위주의 자랑으로 1시간이 순삭되었다. 1시간을 텀 없이 독백으로 채우는 무진의 입담에 혀를 내둘렀다. 말을 저렇게나 잘할 수 있단 사실에 놀랐다.
“주변의 질시와 질타에도 꿋꿋하게 잘해 나갈 수 있었던 건 아버지의 전폭적인 응원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이러니 효자가 안 될 수 있겠습니까? 효의 근본을 바로 세워야 세계는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
효자는 주변에서 말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본인이 효자라고 하는데도, 요지부동이었다.
저 뻔뻔함에 세계의 시청자들은 넋을 놓고 바라보아야 했다. 겸손이 미덕이긴 개뿔. 그들이 익히 알고 있는 동양에 대한 관점이 명백한 편견이었음을 깨닫게 해 주었다.
“우리 아버지라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대신해서 저를 키우려고 온갖 고생을 다 하셨습니다. 그걸 일일이 다 표현하면 여러분들은 눈물이 마르지 않을 겁니다.”
듣고 있던 산하는 손을 저었다.
‘그렇게 고생하진 않았는데.’
네가 알아서 컸잖아.
그렇다고 아비가 돼서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들이 그렇다고 하면 어쩔 수 있나.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야지.
이쯤 되니 다들 이걸 왜 듣고 있어야 하나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시청률이 빠질 수 없게 다크니스를 양념처럼 사용하고 있었다. 빠질 만하면 빠지지 못하도록, 화술이 진정 악마적이었다. 재미는 담백한데, 악마의 편집을 생방으로 하고 있었다.
생방송을 독백으로 3시간이나 잡아먹었다. 시청률이 빠지기는커녕 3시간이 흐르자 더 늘었다.
-이게 뭐라고 눈을 떼지를 못하냐.
-재미가 없는 건 아닌데, 그렇다고 아주 재밌지도 않잖아. 자기 자랑을 화장실도 안 가고 보게 될 줄 누가 알았나.
-밖에서는 폭군이고, 집에서는 효자라니! 이런 근본 없는 혼종은 대체 어떻게 태어난 거냐?
-악인도 자기 식구한테는 잘하는 편이잖아.
-그렇다고 폭군이 악인은 아니지.
-세계인들, 폭군 테러에 정신을 못 차린다, 크크크!
-이 정도면 테러 맞아.
간간이 중요한 설명이 이어지면서 그간 이해하지 못한 부분을 명백하게 밝혔다.
드디어 막바지에 도달했다.
여기까지 참고 봤는데, TV를 돌리기엔 본 시간이 아까웠다. 그런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으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영상을 촬영하는 스태프들도 혀를 내둘렀다.
‘악마의 혓바닥이 분명해!’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방송인보다 잘하잖아!’
‘데리고 오면 무조건 대박인데.’
‘시청자 게시판이 난장판이 될 테지만.’
장단점이 뚜렷하다 못해 지나치게 극단적이었다. 욕을 먹지만, 시청률은 보장받는다. 그러나 강제하기는 어려웠다. 세계 최강의 각성자를 무슨 명분으로 스카우트한단 말인가. 듣자 하니, 재산도 우리나라 탑이었다.
“자, 본론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다크니스의 마스터를 전부 처리한 건 맞습니다. 하지만 마스터들의 주인인 로드가 남아 있습니다.”
……?
정적이 흘렀다.
우리가 지금 뭘 들은 거지?
다크니스를 끝장냈다고 들었었는데, 지금 와서 이러면 반칙이지.
충격적인 발표에 공황 상태에 빠졌다.
당황은 곧 분노로 바뀌었다. 여태 개소리를 지껄였다며 시청자 게시판에 항의가 빗발쳤다.
-저 말을 먼저 했어야지! 지금 한가하게 자기 일대기를 자랑하고 있을 때야!
-다크니스의 마스터도 로드의 따까리에 불과하단 소리잖아. 대체 로드는 얼마나 강한 거야?
-아직 완전하지 않을 때 쳐야 하지 않을까? 온전한 상태로 강림했을 땐 답이 없을 수도 있잖아!
-봉인했는데, 괜히 건드려서 화를 자초할 필욘 없지 않을까? 어쩌면 긁어 부스럼일지도 모른다고.
-여태 다크니스를 무너뜨렸다고 자화자찬하더니, 정작 수장은 잡지도 못하고 설레발만 친 거잖아!
-조금 뜬금없는 말이긴 한데, 폭군은 다크니스를 전멸시켰다곤 하지 않았어.
시청자 게시판이 난리가 났고, 항의 전화가 쇄도했지만 정작 무진은 평온했다. 기대한 반응이라 놀랍지 않았다.
다크니스의 목적과 과정을 돌이켜 볼수록 분노와 공포는 당연했다. 그런 와중에 다크니스의 수장이 남아 있다고 했으니, 재앙의 불씨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굴욕을 감수하고 다크니스의 로드에게 화친을 제의하기엔 강을 건넌 지 오래였다. 자기 기반을 전부 부숴 놓고 이제 와 안 될 것 같으니 손을 내밀면 누가 잡아 줄까. 손을 내미는 제안 자체가 약을 올리는 행위가 된다.
“자, 이제부터 일문일답하겠습니다. 상식적인 질문에는 최대한 성실하게 답해 드리겠습니다. 첨언하자면 쓸데없는 질의로 발언권을 날려도 책임은 지지 않습니다.”
실시간 댓글이 폭주하고 있지만, 일문일답은 사전에 정해진 대로 진행이 되었다.
-봉인이 풀릴 가능성은 얼마나 되는 겁니까?
“차원을 강제로 여는 일이라, 확률을 말씀드리자면 얼마 되진 않습니다. 다만, 봉인이 안전하다고는 장담하지 못합니다. 우리 쪽에서 막았어도, 다른 차원에서 연다면 장소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크니스 로드, 편하게 다크로드라고 하겠습니다. 그는 얼마나 강합니까?
“겨뤄 보지 않았으니 정확히 판단할 수 없는 데다, 전투란 단순 스텟으로 계산되는 분야가 아닙니다. 그러나 로드를 위한 맞춤 전략을 완벽히 세운다면 기대한 상황이 나올 순 있습니다.”
-강무진 군과 비교한다면 어떻습니까?
“누차 말하지만, 붙어 보지 않은 이상 모릅니다. 다만, 현세에서 붙는다면 3차 대전 이상의 파급력을 불러오지 않을까 예상합니다.”
시끄러웠던 게시판과 실시간 댓글이 조용해졌다. 로드의 강함이 피부로 와닿고 있기 때문이다.
3차 대전은 핵전쟁을 의미했다. 지구 전체가 영향을 받고, 잘못하면 망할 수도 있었다. 종말을 불러온다면 지구에서 싸워선 안 되었다. 최소한 다른 차원으로 가서 해결해야 했다.
-해결 방도는 있는 겁니까?
“모두가 알다시피 두 가지입니다. 이대로 봉인이 풀리지 않기를 바라며 일상을 누리든가, 봉인이 풀리기 전에 로드와 맞서 싸우든가.”
해결 방도는 간단했다.
봉인이 풀리지 않도록 방비하거나, 불안의 근원인 로드를 제거하거나. 선택지는 분명하지만, 누구도 선뜻 답하지 못했다.
전자는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말자는 주의겠고, 후자는 위험을 남겨 두고 살 바엔 제거하자는 부류였다.
-세계의 평화를 위해선 로드를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이 시대의 혜택을 받은 각성자가 나서야 할 문제라고 봅니다.
“타당한 의견입니다만, 저는 전자를 택하겠습니다.”
대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을 거론했던 미국이었다. 세계 평화를 위한다는 명분도 훌륭했다. 하지만 시작부터 난항에 부딪혔다. 로드를 최전선에서 상대해야 할 중요한 패가 안주를 택해 버렸기 때문이다.
-나서지 않겠다니요? 세계 평화를 위한 일입니다!
“상대의 전력을 모르는 데다, 적의 안마당으로 가서 싸우자는 건 불합리한 처사입니다. 혹, 제가 패배라도 하는 날엔 다음을 기약할 수도 없고요.”
-지구에서 싸운다면 종말이 올 수도 있다면서요?
“제가 지면 종말입니다. 그러니 다 같이 동참해야 한다고 봅니다.”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는, 무진의 세속적인 반응에 세계는 말문이 막혔다. 일반적인 영웅이라면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자기 한 몸을 희생하길 주저하지 않거늘.
그렇다고 따져 묻기에는 자기만 살자는 주의도 아니었다. 도망친다고는 하지 않았고, 오면 협심해서 싸우겠다고 하니. 너 하나 희생하라고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칠 겁니다. 그걸 감당할 자신이 있습니까?
“논점이 잘못되었군요. 다크니스가 저지른 패악을 이제는 여러분들도 알고 있을 겁니다. 그걸 해결한 사람이 바로 접니다. 상을 줘도 부족한 판국에 여러분들이 무슨 권리로 제게 희생을 강요합니까?”
무진의 대응은 이성적이고, 팩트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공을 세웠고, 모두를 위해서 싸웠다. 그런데 최후까지도 희생을 강요하는 건 폭압이었다. 세계는 무진에게 빚을 갚아야 하는 처지였다. 안전보장세를 따로 받지 않은 것을 감사해야 했다.
“강한 힘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개소리는 지껄이지 마시길. 혹여 수작을 부린다면 각오해야 할 겁니다. 알다시피 저는 아직 나이가 어립니다. 판단이 미숙할 수 있으니, 그 점 양해 바랍니다.”
-……?
나이가 어린 점을 이용하려던 국가나 세력들은 입을 닫아야 했다. 오히려 나이가 어려서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따지고 보면 무진은 걸어 다니는 핵폭탄이나 다름이 없었다. 다크로드도 무섭지만, 당장 눈앞에 있는 무진도 수틀리면 돌변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