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7. 전쟁의 정석(1)
실패는 염두에 두지 않았다. 계획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수행했었다. 그러다 처음 실패했단 보고가 올라왔다. 대단치 않은 일이기는 했다. 동방의 작은 나라, 한국이 실패한다고 대세에 영향을 끼치진 않는다.
오점이 남기는 했으나, 만회할 수 있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것이 오판의 시작이었다. 나비의 날갯짓이 지구 반대편엔 태풍을 일으킬 수 있음을 간과한 것이다. 매번 성공했기에 타성에 젖어 초심을 잃었다.
문제가 된다면 완벽히 제거했어야 했다. 해결되지 않은 실패를 가볍게 여겨 작금에 이른 것이다.
정체는 대외적으로 드러났고, 지배력은 약해졌다. 실패가 쌓이면서 세계는 대적할 만하다는 인식이 생겼다.
새롭게 판을 짜려면, 실패의 원흉부터 제거해야 했다.
권왕가.
애당초 권왕은 살아 있어선 안 되었다. 가문의 내분으로 목숨을 잃고, 권력 구도가 바뀌어야 했다.
그러나 계획은 틀어졌고, 권왕은 건재하다.
어째서 그리됐을까?
권왕의 무위와 권왕가의 저력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동방의 소국에 가려져 진실을 외면하고 자만했으니 실패는 당연한 결과였다.
암중으로 세계를 지배하려던 대계가 실패한 이상, 다크니스의 힘을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권왕가의 파멸은 시작에 불과하다.
이제 방심은 금물이다.
권왕의 신위는 초인들을 연이어 무너뜨리면서 검증이 되었다. 천하제일이란 평가가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능히 그리 부를 만한 무위를 입증했다.
그들에게도 적지 않은 놀라움이었다.
인간이 이만한 무위를 쌓기란 일반적인 방도론 불가능했다. 마치 로드의 권능을 부여받은 것처럼 권왕은 초극의 강자가 되었다. 더욱이 권왕가의 전력도 만만치가 않았다.
전력을 숨겼다고 하기엔 수상한 점이 많았다.
밝혀진 진실은 그들에게도 충격을 주었다. 권왕가가 성좌의 비밀을 밝혀내 관문으로 이용했을 줄이야.
이때까지의 실패가 자연스럽게 이해가 되었다. 권왕가의 전력을 무시할 순 없는 현실이다. 손해를 최소화하면서 권왕가를 정리하려면 분산시켜야 했다.
두드드드드!
우우우우웅!
대지와 대기가 공명하듯 파문이 번져 일순 권왕가를 뒤덮는다. 마치 우산을 거꾸로 씌우듯, 권왕가가 장악되며 외부와 차단되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내외부는 허둥지둥할 뿐, 별다른 수를 쓰지 못한 채 망연자실했다.
흐름은 익숙하다.
그래서 무인들은 의아했다.
“던전 침식?”
“브레이크?”
“던전화?”
권왕가는 던전 침식을 일으키며 생소한 공간이 되어 버렸다. 외부와의 연락도 끊어져 우왕좌왕했다. 가문의 무인들이 부랴부랴 방도를 찾기도 전 외인들이 나타났다.
“뭐야?”
“당신들, 누구야?”
대답 대신 기습을 해 왔다.
당황하긴 했어도 무인들은 속절없이 당하지 않았다. 투명청룡오관을 수료한 무인들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습격자들의 배후가 있었다.
프라이드 마스터, 웨인.
글러터니 마스터, 헨리크.
러스트 마스터, 브루클린.
그들은 오버로드가 발동할 때를 노렸다.
던전이 과부하가 걸려 일정 경계를 넘어서면 폭주하거나, 새로이 결계가 구성된다. 이를 오버로드라고 하는데, 일반적으론 일어나지 않는다. 지금처럼 던전의 계절이 되면 던전 침식이 생기고, 이를 집적화 결계로 끌어들이면 오버로드를 발동할 수 있었다.
“만만치 않군.”
“자칫 오버로드를 가동하기도 어려울 뻔했어.”
“보통 결계가 아니긴 해.”
오버로드를 이용한 던전화가 되자 데몬 나이트를 풀었다. 권왕가가 발전했다고 해도, 데몬 나이트는 다크니스의 정예 무력대였다. 게다가 권왕가의 가주와 주력은 던전을 공략하기 위해 빠져 있었다. 권왕가가 예상보다 잘 버티긴 하나, 공략은 시간문제였다.
“이제 기다리는 것도 지치는군.”
“머리를 치러 가 보세.”
던전화가 되면서 길이 사라졌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결계는 탐지 아이템과 연결되었다. 이를 통해 내부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 수 있었고, 권왕가에서 가장 강력한 기운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패배는 염두에 두지 않았다. 혼자도 아니고 셋이었다. 일전 에도성과 달리 권왕가는 오버로드를 통해 통제가 가능한 공간이 되었다.
“권왕의 낯가죽이 기대되는군.”
“기가 죽을 인간은 아닐세.”
“그것도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
전투를 위해 태어난 사나이, 권왕을 뜻했다. 굽힐 줄 모르는 용맹이 과도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세간의 평가는 그들의 안중에 없었다.
본모습은 언제나 궁지에 몰려 봐야 나오는 법. 그들은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대가 세다고 알려진 자들도 끝까지 버티진 못했다.
다만, 다크니스를 이렇게까지 궁지에 몬 자는 권왕이 유일하다. 그래서 기대가 되었다.
절대 굽히지 않을 권왕이 비굴해지는 광경을. 세상이 다 그렇듯, 절대란 믿음이 꺾일 때의 쾌감은 짜릿할 수밖에 없다.
오버로드가 풀리기 전까지는 외부 개입은 불가능했다. 철석간담의 권왕이라도 인공적인 던전화는 경험해 보지 못했을 테니, 당황하는 모습이 기대되었다.
저 앞에 있다.
세 마스터는 두 눈을 의심했다.
응?
300m 거리.
던전화로 인해 시야가 방해받는다고 해도, 각성자에겐 지척에 불과했다. 왜곡됐다고 하기에는 버젓이 시야를 장악하고 있었다.
“허! 세간의 평가가 사실이었군.”
“상식 밖의 인간이라더니,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우리가 당황하기를 바란 걸 수도 있다.”
허를 찌른 연출이라면 제대로 먹히긴 했다. 이 와중에 저런 개짓거리를 하는 인간이 있을 줄이야.
권왕은 운동 중.
가문이 던전화에 갇혀 공간이 왜곡되었는데도, 당황하기는커녕 평소와 다름없는 루틴이었다. 운동은 평소에 해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스윽.
벤치프레스 40t, 100개를 1초 안에 끝낸 권왕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우유에 탄 단백질 파우더를 벌컥벌컥 마셨다. 쉐도우 길드에서 개발한 단백질 파우더, 슈퍼로드 프로틴으로 일반 단백질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함량과 흡수력을 지녔다. 각성자를 위해 만들어진 단백질 파우더라서 일반인이 마셨다간 그 자리에서 간과 콩팥이 망가져 황천길 프로틴으로도 불린다.
상체를 훤히 드러낸 권왕은 자부심을 드러내며, 아들이 주는 수건으로 몸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운동 중에 찾아오다니, 매너가 없구나.”
영국 속담에 운동이 사람을 만든다고 했지, 아마.
이렇듯 나는 배운 사람이다.
권왕의 부리부리한 동공이 마스터들에게 향했다.
꿈틀!
웨인, 헨리크, 브루클린은 미간을 순간적으로 찌푸렸다. 이 와중에 운동을 방해받았다고 역정을 낸다? 알면 알수록 정상적인 인간과는 거리가 멀었다.
당황은 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사태를 해결할 성의라도 보여야 했다. 아니면 그조차도 상관하지 않을 자신감의 발로이거나.
전자든, 후자든.
그들의 심기를 언짢게 하는 데는 성공했다. 단, 이후의 사태는 전적으로 권왕이 책임을 져야 한다.
“자신만만하군.”
“보통 같잖은 것들이 대단한 척 허세를 떨더라고. 그래 봤자 이 주먹 앞에선 도금이 벗겨지다 못해 발골되었지.”
“사태 파악이 안 되는 건지, 안 하는 건진 상관없겠군. 한데, 네 여유와 오만으로 인해 혈육이 죽는다고 해도 상관이 없을까?”
“내 아들과 손녀는 강해. 그러니 남의 가족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어리석구나. 혈육을 다 잃고도 그딴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인질을 잡고 협상을 들먹이는 놈들치고, 제대로 된 새끼들을 못 봤다. 내가 왜 그딴 놈들의 말에 따라야 하지? 어차피 들어줄 것도 아니잖아.”
태연함을 가장한 여유라기엔 권왕의 부동심이 흔들리지 않았다. 프라이드, 웨인의 [소울아이즈]는 감추어진 상대의 진의를 들여다볼 수 있는 권능이 있었다.
-내 자식들은 강하다.
권왕의 확고부동한 신뢰였다.
마스터들로선 예상하지 못한 사태가 아닐 수 없었다. 자식 중 특히 손녀를 애틋하게 여긴다고 했다. 인질로서의 가치가 있을 줄 알았거늘, 저 믿음은 눈으로 보지 않고선 일절 흔들릴 틈을 주지 않는다.
‘터무니없는 신뢰가 아니지 않나?’
이럴 거였으면 권후를 잡아다가 그 앞에서 사지를 잘랐어야 했다. 외부와의 개입이 단절된 이상, 당장 증거를 가져올 순 없다. 힘을 빼기 위한 분산 전략이 권왕의 외골수를 강화하는 꼴이 되었다.
그들이 원하던 전개와는 딴판이었다. 그것이 자존심을 상하게 해, 어떻게든 권왕의 심기를 흔들어 보려고 했다.
“진정, 손녀가 어찌 돼도 상관이 없단 말이더냐?”
“내 손녀를 어쩐다고? 나보단 확실히 못해도 제법 비견되는 지수를 네깟 것들이 뭘 어떻게 한다는 게냐?”
“손녀에 대한 정이 깊다더니, 정신이 나가 버렸군!”
“그러니까 너희들이 안 되는 거다.”
제자의 위장술은 천의무봉의 경지에 도달했다. 진실을 말했는데도, 도무지 들어 처먹지를 않는다. 인간의 상식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제자의 사악한 심계에 재차 따봉을 누른다.
우리 시대는 따봉이 최고지.
따따봉은 말할 것도 없고.
이쯤 되니 마스터들에겐 자존심 싸움이 되었다. 저 뻔뻔한 낯가죽의 권왕이 피눈물을 흘리는 걸 봐야 했다.
“네놈이 신뢰하는 아들과 손녀는 반드시 죽는다. 또한, 권왕가와 연관된 놈들은 다 죽는다.”
“내 자식들만 무사하면 돼.”
……?
협박이 씨알도 안 먹힌다. 이게 단순한 허언이 아님을 알 텐데,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저러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지경이다. 차라리 감정을 숨기려고 했다면 모를까, 전혀 그렇지 않았다.
더더군다나 권왕은 초대 대가주다.
다른 가문의 생사에 초연하다 못해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무책임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이런 자가 칠대가문을 대표한다니, 한국은 망조가 든 나라였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소문과는 다를 줄 알았더니, 너무 똑같아서 마스터들의 속을 썩였다. 이렇게 보니 머리 쓰는 것과는 어울리지도 않았다. 마법을 사용하기보단, 마법으로 패는 데 익숙한 인간이었다.
‘이것도 놈의 페이스일지도.’
‘어지간하면 밝히지 않으려고 했거늘.’
‘언제까지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지 보겠다.’
인질이 통하지 않자, 다른 방도를 찾았다. 당장, 놈을 때려눕히는 건 그들의 품위에 어울리지 않는 하책이었다. 권왕 스스로 무릎을 꿇게 해야 했다.
“패륜을 저지른 아들을 살려 두고 곁에 두다니, 피도 눈물도 없는 권왕답지 않군.”
“사람이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는 거지. 대체 언제까지 주둥이로 싸울 거야? 시시하게 말싸움이나 하자고 이 지랄을 떤 건 아니겠지?”
“한 번 배신한 자는 또 배신하기 마련이지.”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웨인의 눈이 권왕의 배후에서 땀수건을 들고 있던 유경운에게 향했다.
유경운은 미간을 찌푸렸다.
“밝히지 않기로 합의하지 않았나?”
“상황이 바뀌었으니 어쩔 수 없지.”
밝혀지지 않기를 바랐던 유경운은 화가 치밀었는지 주먹을 세게 쥐었다. 그러다 아버지를 보기가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이놈이, 또 저놈들의 수작에 넘어…… 억!”
멀쩡하던 권왕이 비틀대더니 바닥에 무릎을 짚었다. 예상치 못한 사태에 권왕이 부들대며 이를 갈았다.
빠드드득!
마스터들은 의기양양한 얼굴을 했다. 강함에 취해 발밑을 보지 못했고, 정이 깊어 혈육을 확실하게 끊어 내지 못한 탓이었다.
“마물의 독을 배양하여 결합한 초혈갈산독이다. 초인이라도 지속적으로 복용하면 견디지 못한다.”
1회분으로도 웬만한 절대고수는 중독시킬 수 있으나, 권왕에겐 시간을 들여 10회분을 투여했다.
초혈갈산독은 마기를 주입하여 마인으로 만드는 특성이 있었다. [마인발동] 스킬을 개방하면 중독된 육체의 통제력을 잃게 된다.
“네놈 손으로 애지중지하는 권왕가를 무너뜨리게 해 주마.”
“이 추잡한 새끼들이 끝까지 치사하게…… 젠장!!”
“그러니까 잘난 체하지 말았어야지.”
“……그렇게 될 바엔 차라리 자결하고 말겠다…… 허억!”
권왕이 수도를 역으로 들어 천령개를 치려고 하자, 마스터들은 급히 움직였다. 자살방조죄는 허락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다크니스에 막대한 손해를 입히고, 대계를 방해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자기 손으로 권왕가를 무너뜨려야 진정한 의미의 복수였다. 육신을 제압해 마인이 될 때까지 시간을 끌어야 했다.
응?
찰나.
[싸이렌] 속성이 발동했다. 목숨이 위태롭지 않은 이상은, 감지되지 않는 헨리크의 속성이었다. 생존 본능과 결합한 [싸이렌]이 발현되었다면 반드시 피해야 했다.
한데, 그런 상황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 자리에서 위험 요소라고 해 봤자 중독된 권왕……?
“눈치 빠르네.”
신화천권 총화 무형식 패도무쌍.
말보다 빠른 권왕의 정권이었다. 독에 중독된 양 내력을 폭주시키면서 권력을 응집했다. 상대가 득의할 때를 노린 회심의 권경이었다.
쿠아아아아앙!
헨리크가 위험하단 경고를 하기도 전 신화천권의 총화가 담긴 권공이 강타했다.
후아아앙!
심권의 권능이 담긴 권왕의 결의가 그대로 재현되었다. 선수에 모든 걸 걸었기에 가능한 파괴력이었다. 다음을 돌아보지 않는, 권왕의 정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