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7. 네고(4)
‘다 엎어 버릴까?’
국가의 미래가 걸린 중대사거늘, 경직됐던 분위기가 다소 어처구니없이 풀어져 버리고 말았다.
미츠키는 강한 부정은 긍정으로 치부하기로 했다. 더 강하게 부정해 보라고 했다간, 목숨을 부정당하는 수가 있었다.
“협상할 거야, 말 거야?”
“10명으로 하자.”
“너무 적잖아.”
“7명.”
“……젠장!”
네고 따윈 씨알도 안 먹혔다.
내부의 반발을 최대한으로 억제하고, 힘을 키우기 위해선 암천회가 강해져야 했다. 권후와 그 친구들에 견주진 못하더라도, 비슷하게만 된다면 검가연합의 견제를 벗어나 정국을 장악할 수 있었다.
20명은 12명까지를 고려한 던지기였다. 협상도 해 보기도 전에 숫자를 반으로 줄여 버렸다. 설상가상으로 이대로 끝날 수 없어서 엄살을 부렸더니 7명이 되었다.
‘나에겐 권한이 없구나!’
무진은 말하고 있었다.
누가 갑인지를.
협상은 내어 줄 게 있어야만 할 수 있다. 차라리 돈만 바라보는 편이 대하기가 수월했다. 그 외에는 협상 테이블에 올려놓을 무기가 없었다. 일방적인 협상이었고, 7명도 따지고 보면 일본에 베푼 아량이었다.
권후와 그 친구들의 무력은 최소한 검가의 가주들 이상이었다. 그런 무력을 7명이나 얻게 된다면 최고의 지지 기반을 얻게 되는 것이다.
실상, 암천회 내에서도 검가연합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이들이 있는 이상, 완전히 척을 지긴 어렵다. 그들이 검가연합이 아닌 황실에 충성한다면 정국을 다스릴 온전한 발언권을 얻게 된다.
‘그 전에 나부터.’
고귀한 혈통은 현시대에 중요하지 않았다. 더 강력한 무인으로 거듭나야 했다.
“인당 1조다.”
“그래…… 뭐?”
“엘리트 1명이 나라를 먹여 살리는 시대잖아.”
“……알았어.”
7명도 많구나!
7조는 천황에게도 부담되는 액수였다. 공주 맘대로 결정했다가 나중에 탈이 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세이토와 하야토는 황실의 대부이며 암천회의 실질적인 리더였다. 이들과 사전에 얘기를 나누었고, 모든 권한을 일임받았다.
‘정보력이 대체 뭐야?’
7명이 단순히 숫자가 아님을 깨닫게 했다. 황실에서 현재 빠듯하게나마 가용할 수 있는 자금이었다. 그걸 모르고 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이제까지 무진이 해 온 일들은 체계적으로 정보를 갖추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다.
“황실을 장악하기도 바쁠 테니, 어서 가 봐.”
“준비되면 연락할게.”
미츠키는 황실 대부와 함께 무진의 방에서 나갔다.
하야토는 할 얘기가 있는지, 방에 남았다.
무진은 하야토가 남아 있는 연유를 알고 있었지만, 친구들과 회포를 풀었다.
찌릿!
지수가 하야토를 노려보았다. 사정이 있어서 여태 기다려 주었다. 이젠 우리들의 시간이다. 긴히 할 말이 있다면 모를까, 외간 남정네는 이만 퇴장해 주었으면 했다. 스스로 하기 어렵다면 손수 나서 줄 의향도 있었다.
큭!
뭔 놈의 기세가, 이리 살벌해!
지수, 유정, 혜진의 압박에 하야토는 굴복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말은커녕 다구리로 처맞고 쫓겨날 판이다. 솔직히 일대일도 과분했다.
“누나를 고쳐 준다고 했었잖아.”
“약조를 어긴 건 내가 아냐.”
“하라는 것은 뭐든지 다 할 테니, 제발 부탁해!”
“살아만 있으면 된다고 하지 않았나.”
나미코는 살아 있었다. 다만, 의식 없이 숨만 잘 쉬었다. 건강한 식물인간 상태로. 영양제와 마나 정수만 제때 주입하면 수백 년은 거뜬히 살 수 있었다. 나무에 물 준다는 심정으로 풀이 자라면 자르고, 잘 가꾸어 주기만 하면 되었다.
이유는 있었다.
천검가에서 계약금만 주고 잔금을 치르지 않았다. 기실 언데드화된 상태에서 인간으로 되돌리고, 생기를 채우려면 안정화를 위한 기다림이 필요했다.
약조한 잔금을 치르는 날 치료하기로 되었으나, 환검가에 패배하면서 흐지부지되었다. 천검가는 자식의 치료보다는 가문의 안위를 선택한 것이다.
무진은 천검가의 대승적인 결단을 존중해 주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한 것도 아니고, 치료할 의무는 없었다. 인의를 거론한다면 지금까지 해 준 것만 해도 천검가는 감지덕지해야 했다.
하야토도 처음에는 살아 있는 것에 만족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크니스의 도구가 되어 캡슐에만 있었던 누나가 평생 식물인간으로 살아야 한다는 현실에 욕심이 생겼다.
“부탁이야. 일어나게만 해 줘. 비용은 내가 어떻게든 갚아 볼게.”
“멍청하기는, 이럴 시간에 네 아버지를 설득했어야지.”
“장로들, 특히 대장로가 반대해서 어쩔 수가 없었어.”
“나미코는 살인 기계야.”
설득의 대상은 무진이 아닌 천검가의 가주와 장로들이었다. 하야토의 사정은 알지만, 돈도 안 내고 치료부터 해 달라는 건 억지였다.
그렇다고 마냥 매정하게 대하진 않았다. 방도를 알려 주었더니 한다는 소리가.
“내가 평생 잘 보살필게.”
“미츠키가 불쌍하네. 아직도 모르겠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야?”
“다크니스가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역작을 역으로 이용할 기회잖아. 감정에 호소하지 말고, 장점을 어필했어야지.”
아~!
방도를 깨닫자, 하야토는 탄성을 터뜨렸다. 아버지와 장로들을 설득하려면 가문에 이득이 되어야 했다.
투자 대비 과도한 수익.
천검가는 전쟁을 위해서 누나의 치료에 들어가는 많은 재료와 영약을 가문의 무인들을 위해서 썼었다. 전쟁에서 이겨야 하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런데 정작 가장 강력한 패를 썩히고 있었다. 매정한 소리로 들릴 수 있으나, 무진의 말을 듣고 현실을 냉철하게 판단했다.
“고마워,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을게!”
“돈은 됐으니까, 함부로 맹약은 하지 말고.”
하야토는 급히 방문을 나섰다. 아버지와 장로들을 설득해서 누나를 치료할 자금과 재료를 마련해야 했다.
하야토의 인기척이 사라지자.
“일어나게만 해 주면 되겠지.”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치료해 준 사람을 따르게 되어 있거든.”
“헐, 하야토가 알면 뒷목 잡겠네.”
의식이 오랫동안 장악되어 있었다. 육신을 깨워도 의식을 컨트롤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 대상은 정신과 육체를 치료한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어쩐지. 돈도 안 받고 치료를 해 줄 사람이 아닌데.”
“돈 없으면 몸으로라도 때워야지.”
하야토에게 금전적인 계약을 바라기엔 천검가의 재정을 반 이상 거덜 낸 상태였다. 여기서 돈을 더 뜯었다간 천검가는 폭삭 망하는 수가 있었다.
자고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는 가르지 말라고 했다. 두고두고 뽑아먹으려면 적절한 선을 지켜야 했다. 감시자로 나미코는 괜찮은 수단이었다.
지수, 유정, 혜진이 빤히 무진을 보았다. 여자로서 아주 중요한 질문이 남아 있었다.
“예뻐?”
“뭐가?”
“나미코.”
“응.”
그녀들은 미간을 찌푸렸다.
일본의 메이드 카페처럼, 왜곡된 낭만을 꿈꾸는 일부 오타쿠들이 있다고 들었다. 이 녀석도 사내니, 맘대로 통제할 수 있는 미녀를 얻는다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청춘은 아름답지만, 통제하기 힘든 혈기를 발산한다.
“일단 전투력을 강화해야겠지. 통제에 익숙하니 육체 훈련 15시간, 심상 구현 5시간 풀로 돌린 다음에 잠자는 시간에도 훈련이 되도록 정신 방벽을 새겨 넣는 거지. 이만하면 괜찮지?”
“……?”
지수, 유정, 혜진은 무진의 상상을 초월하는 대답에 혀를 내둘렀다. 저 인간의 뇌 구조는 일반인으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런데 너무나 안심이 되었다. 미녀와 방 안에 단둘이 있어도 삼대 10t으로 조질 인간이었다.
지수는 어긋난 방향을 되돌렸다. 이제는 해야 할 때가 되었다. 유야무야 어설픈 관계는 독이 될 수 있었다.
“우리 관계에 대해 할 말이 있어.”
“어떤 관계?”
“너처럼 똑똑한 녀석이 몰라서 묻는 거 아니잖아.”
“진지하게 생각해 보진 않아서.”
“그럴 줄 알고, 내가 해 주려고?”
내가 아직 아무 생각도 없는데, 남이 한다는 게 상식적인가? 이 부분은 짚고 넘어가야 했다.
“그걸 왜 네가 해?”
“다른 건 몰라도, 이 부분에 관해선 우유부단하니까.”
“그런 적 없는데.”
“서론은 이쯤 하고 좋아, 싫어?”
“어떤 결론인지 일단 들어나 보자.”
지수는 여사친으로 만족할 수 없다. 회귀 당시 고백을 이상하게 하는 바람에 수년이나 틀어졌지만, 이제는 바로잡아야 했다.
모든 일은 순리대로 흘러가야 하는 법이다.
그러면 순영인데?
미래는 정해져 있지 않았다.
“독식할 생각은 없어. 네 능력은 인간적인 영역을 넘어섰으니까. 일반적인 잣대로 평가하는 것도 부질없고. 결국 네 옆에 남으려면 네 능력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그래서?”
“네가 아무리 대단해도 모두를 지켜 줄 순 없어. 결국, 그 옆에 있는 반려도 가장 강해야 한다는 소리지.”
“……설득력 있네.”
이제까지 무진이 해 온 작업을 상기한다면 지수의 설명은 핵심을 관통하고 있었다. 홀로 독존하려고만 했다면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수고였다.
“나는 욕심이 많은 편이긴 해도, 공평한 사람이야.”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모두에게 기회를 주기로 했어.”
“어떻게?”
“날 이기면 돼.”
지수의 선언에 무진은 헛바람을 삼켰다.
의외의 결단이었다.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연인을 무공으로 결정하겠다니, 무인의 사고방식으로 이해해야 하는 건가?
한편으로 지극히 지수다운 결단이었다.
무진은 이래도 되나? 의구심이 잠시 들었지만, 지수의 박력에 끄덕이고 말았다.
확답을 얻은 지수는 유정, 혜진을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공평하지?”
어디가?
지수의 현재 무력은 할아버지와 쌍벽을 이룬다. 발전 가능성만 보면 따를 자가 많지 않다. 그것도 현역을 기준으로 한다면 다들 한자리를 차지한 최강자들이었다.
무진과 같은 또래를 고려한다면 지수보다 강한 생도는 전 세계를 뒤져 봐도 없다.
“양심이 헬이네, 진짜!”
“억울하면 도전해.”
지수는 안 돌아가는 머리로 최적의 답을 찾아냈다. 내 자리를 넘보는 년들을 나름 합법적으로 두들겨 패겠다는 심보였다.
혜진과 유정은 인상을 찌푸렸다. 어느 정도는 지수를 무진의 짝으로 인정하고 있었는데, 이렇게까지 나오니 오기가 발동한다. 포기하려는 마음도 다잡게 하는 강력한 도발이었다.
“네 발등 네가 찍은 거야!”
“이겨 줄게.”
무진은 지수의 박력에 수긍했지만, 유정과 혜진의 반응을 보니.
‘괜찮은데.’
실력을 끌어올리는데, 이만한 동기부여는 흔치 않았다. 본인도 안주하지 않고 매진할 테고.
“날 가지고 싶으면 다들 노력해.”
한술 더 뜨는 무진의 자부심에 지수, 혜진, 유정은 미친놈이라며 쌍욕을 퍼부었다.
갑자기 의욕이 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