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3. 도와줘요(2)
결국에는 지구력 싸움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내 선택이 틀렸다고? 그럴 리 없다! 네년의 개수작에 당할 성싶으냐…… 헉!”
“나불거릴 힘이 있으면 검이나 들어라.”
과거의 혈검후가 불같은 성향이었다면 오늘의 혈검후는 북해처럼 차가웠다. 어느 한순간도 흔들리지 않고, 냉철하게 현실을 바라보았다.
스왁!
빈틈을 발견하자 명왕검형기를 일으켜 환영검막을 베어 냈다. 급히 환영보를 발동하여 거리를 벌리지 않았다면 두 동강이 났을 것이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이런 일은 불가능해!”
혈검후만 그렇다면 이해라도 되지. 검가연합의 가주들도 마나 스텟이 무한이라도 되는 양 줄지를 않았다.
지금쯤이면 검가연합을 끝장내고도 남았어야 했는데, 가주들의 활약에 환검가의 주력이 밀리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이긴다고 해도 엄청난 피해를 각오해야 했다.
‘네놈이 억울해하는 것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냉정을 유지하는 것과는 별개로 혈검후는 환검가주의 검공에 놀랐었다. 반로환동을 하기 전에도 환검가주를 반 수는 아래로 보고 있었다. 당연히 이번 대결에서 손쉽게 이길 줄 알았다.
하나, 뚜껑을 열어 보니 아들이 대적할 수준을 넘어섰다. 순수 검공만으로도 자신과 필적할 실력을 갖추었다. 대비하지 않았다면 자신했던 것과 달리 되레 당했을 수도 있었다.
‘주군의 혜안이 실로 놀랍구나.’
어리다고 하여 경시할 수 없는 무위와 심계였다. 이리될 줄 알았다는 듯이 착착 맞아떨어졌다. 실로 소름이 돋는 현실과 마주했다. 실제로도 주군이 준 아이템이 아니었다면 환검가주의 지구전에 낭패할 수도 있었다.
‘내력이 끊임없이 들어오는데.’
원리를 모르겠다. 그저 짐작할 뿐이다. 환검가의 대결계 전용 병기로 인해 성의 결계는 사라졌지만, 주군의 결계는 남아 있었다. 결계와 내어 준 아이템이 공조하면서 마나가 부족할 때마다 채워 주었다. 마르지 않는 무한 에너지 샘이라도 발견하지 않고서야.
‘이럴 때가 아니지.’
아들을 잃은 어미는 살아도 산 게 아니다. 반드시 복수를 이루어야 했다.
“날 죽인다고 끝일 것 같으냐?”
“네 가문이나 걱정하거라. 나는 후환을 남겨 두지 않으니.”
“……이 미친년이!! 아들을 잃더니 돌아 버렸구나!”
“혹, 네놈으로 끝날 줄 알았더냐.”
환검가를 아예 없애 버리겠다는 혈검후의 공언이었다.
환검가주는 허투루 듣지 못했다.
저 미친년이라면 능히 그리하고도 남는다.
일본 제일검가가 되기 위해서 다크니스의 수족을 자처했었다. 그런데 이게 뭐란 말인가?
환검가주는 절대 이대로 끝낼 수 없었다.
‘버티면 된다!’
그들이 나서면 혈검후라도 전세를 되돌리지 못한다.
흥!
누굴 기다리는지 알고 있기에 혈검후의 입가에 비릿한 조소가 맺혔다.
“네년이 언제까지 여유를 부릴 수 있을 것 같으냐?”
“오고자 했다면, 진작 왔겠지.”
“그따위 어설픈 격장지계는 통하지 않는다!”
“믿고 싶은 대로 믿거라.”
환검가주는 혈검후의 말투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지금까지 아무 소식이 없는 것도 이상했다.
그러고 보니 연락이 끊어졌다.
‘설마?’
***
흐으으으으!
조웬, 가이스터, 테르안은 신음하며 흐느적거렸다. 기력은 물론, 생기마저 빨려 버린 채 앙상한 모습이었다. 태평양처럼 마르지 않았던 마나도 제로에 가까워졌다. 곧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뼈에 가죽만 붙어 있었다.
“……이런 짓을 하고도 네놈이 무인이더냐!”
“세상이 다 그렇지. 에너지로 잘 썼다.”
“알려진다면 네놈도 절대 무사치 못할 것이다!”
“알려지면 그렇겠지.”
“네놈은 영웅이 아니라 효웅이다!”
“구질구질하네. 졌으면 깨끗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일 줄 알아야지.”
그들은 철저하게 당했다는 걸 깨달았다.
이기지는 못해도, 최후의 영광스러운 승리를 바랐거늘. 공주를 구하기 위해 화급했던 모습도 자신들을 속이기 위한 미끼에 불과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철저하게 놀아난 것이다. 더욱 냉정하고, 신중하게 상대했어야 했다.
돌아가는 전말을 깨달았지만, 너무 늦어 버리고 말았다. 승기를 잡은 줄 알고 전력을 쏟아 내는 바람에 회복할 수도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렇더라도 이토록 지독한 수법을 쓰다니, 악마 같은 놈이 아니던가.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신들보다 더한 괴물이었다.
생기흡혈진.
무진이 사용한 진법이었다. 위장한 결계가 무너졌을 때, 깔아 놓은 진법을 발동했다. 진법은 내성의 결계와 공조하여 내어 준 아이템과 연결된다. 전력을 발휘할수록 검가연합의 동력원으로 쓰였다.
“네놈들이 할 말은 아니지.”
무진의 수법이 지독하지만, 이놈들도 그에 못지않았다. 금제, 자폭의 권능을 발동하며 죽더라도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동귀어진의 수법을 펼쳤다. 그런 주제에 역으로 당했다고 분노하다니, 우월한 척해 봤자 인간 군상에 불과했다.
그들도 모르지 않았다. 패자의 구구절절한 변명이자 발악이었다. 그러나 이대로 무진의 장단에 맞춰 놀아나다 속절없이 당할 순 없다. 죽더라도 놈의 일그러진 얼굴을 봐야 했다.
“공주의 안위가 걱정되지도 않더냐!”
“우리나라 공주도 아닌데. 이런! 우리는 공주가 없네.”
“악마 같은! 공주마저 이용했구나!”
“국가를 위해서라면 가미카제도 할 수 있지.”
무진은 놈들이 원하는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른 채 답답하게 뒈져야 했다. 그것이야말로 배후에서 세상을 조종하려고 했던 흑막에게 어울리는 최후였다. 자신들은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으면서 속 시원하게 뒈지면 안 되지. 염라대왕한테 가서도 왜 뒤졌는지 몰라야 정답이었다.
무진은 이후의 일도 말해 주었다.
“너희들은 일본을 정복하려고 했던 수뇌가 되는 거야.”
“네놈, 우리까지 이용했구나!”
“덕분에 수고를 덜었다. 후후후.”
“절대 용서치 않겠다, 이노옴!”
“끝까지 포기 말고 저항해 봐. 아, 이젠 일어설 기력도 없구나. 하는 수 없지.”
“우리에게서 아무것도…… 크아아아악!”
그들은 무진의 치밀함과 사악함에 분노할 겨를도 없이 기억을 빼앗길 처지였다. 실상, 진법과 동화되어 이미 너무 많은 정보를 넘겼었다.
“좋은 정보 고맙다.”
“……죽어서도 저주……하겠다……!”
심기체를 전부 흡수당한 마스터들의 육신은 모래성처럼 허물어지며 부서지고 있었다. 죽어 가고 있는데도, 자폭은커녕 무기력함에 절망했다.
‘슬슬 눈치를 챘겠지.’
이렇게나 지랄을 했으니 모를 수 없다. 상식에 어긋난다고 해도, 인과를 맞춰 보면 답이 나오기 마련이다. 외면한다고 해서, 현실을 바꾸진 못한다.
‘이젠 어쩔 수 없구나.’
***
“……이 찢어 죽일 놈들이.”
검가연합의 가주들은 일대에 펼쳐진 참상에 이를 갈았다. 혈검후의 활약과 괴물의 도움으로 승기를 잡을 때까지는 순조로운 편이었다. 다소 희생이 있었으나, 그 정도는 시간만 있으면 얼마든지 회복할 수 있었다.
문제는 환검가의 검수가 절반으로 줄어들 때였다. 수적인 차이가 이제는 10배였다. 환검가주도 혈검후의 검에 치명상을 입은 이상 승기를 잡았다고 여겼다.
슬슬 포위한 후, 항복을 권유하려고 했었다. 이대로 전멸전을 각오한다면 검가연합의 피해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안일함은 커다란 패착이 되었다.
궁지에 몰린 환검가의 검수 30명이 검가연합의 포위 진형으로 쇄도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일체의 미련도 없이 자폭할 줄이야.
더더군다나 검가연합은 환검가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겹겹의 포위 진형을 갖춘 상태였었다.
자폭으로 인해 600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것뿐이라면 말을 하지 않겠지만, 자폭한 검수의 선혈이 증발하면서 발생한 혈무는 마나를 무력화하는 치명적인 독소가 있었다.
“이따위 짓을 하다니, 네놈들이 사람이더냐!”
“전멸전에서 인의를 따지는 것이더냐?”
자폭한 검수들, 제정신으로 보이지 않았다. 일전 공주께서 발견한 불멸검대의 제조와 연관이 있는 듯했다.
“최소한 가문의 검수를 생체 실험의 도구로 쓰진 않겠지!”
“가문을 위한 헌신이다.”
환검가 대장로 사환마검(死幻魔劍) 카메다 요시토는 번들거리는 광기와 살기를 숨기지 않았다.
오늘 이기지 못하면 그 어떤 것도 얻지 못한다. 그럴 바엔 여기서 모두 죽고 말지. 더욱이 혈혼강시를 자폭시켜 환혈몽(幻血夢)을 뿌려 놓았다. 단순히 마나를 무력화하는 것으로 알았다면 오산이다.
비틀!
가주들도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마력 무력화는 스킬과 아이템으로 제어하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그마저도 오판이었다. 혈무(血霧)에 환영을 일으키는 성분이 포함되었다. 마나 무력화는 이를 숨기기 위한 연막이었다.
“이놈들, 끝까지 저열한 짓을!!”
“패자의 구차한 변명 따윈 듣지 않겠다.”
가주들도 혈무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하필이면 결계로 인해서 바람이 불지 않고 고여 있었다. 몸에 침투한 혈무를 내력으로 제어하면서 전투를 치러야 했다.
요시토의 환검이 마검이라 불리는 연유가 있었다. 지독한 데다가 [매드니스] 속성과 결합하여 상대하기가 굉장히 까다롭다. 게다가 순수 검공도 환검가주와 비교하여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자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선천진기까지 사용하고 있었다.
요시토는 환검가에 매몰된 검의 악마와 같았다. 마검에 물든 검형이 공간을 뒤덮자 대기가 뒤틀리더니 지옥을 완성한다.
‘이런 미친!’
‘죽음이 두렵지 않은 건가?’
‘이대로는 위험하다!’
가주들은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합공을 펼쳤다. 그런데도 제압은커녕 일순 마검의 흐름을 놓치고 말았다.
주변의 흐름도 좋지 않았다.
환검가의 검수들은 죽음에 연연하지 않았다. 혈안을 번들거리면 사생결단의 살의로 검가연합을 위협했다. 이미 엄청난 피해를 봤지만, 검가연합의 재건조차 어려울 수 있었다.
“크하하하, 어디 나를 죽여 보거라!”
죽음을 초월한 환검가의 광기에 친족의 죽음에 분기했던 검가연합의 검수들마저 질려 했다. 환검가는 100명밖에 되지 않았지만, 검가연합은 기세에서 밀렸다.
서걱!
크아아악!
사방에서 피육이 베이는 소리와 함께 허공으로 목과 사지가 날린다. 적아의 구분이 존재하지 않았다.
거짓말같이 밀리는 쪽은 검가연합이었다. 환검가의 검수들은 오른팔이 잘리면 왼팔로, 두 팔이 잘리면 이빨로 달려들었다. 죽음을 도외시하는 환검가의 살의에 잠식되고 있었다. 점점 승패가 중요하지 않은 흐름으로 변질되었다.
스왁, 커억!
요시토의 마검에 지검가주의 팔이 잘려서 허공을 날다가 떨어져 내린다. 급히 천검가주와 화검가주가 막아서지 않았다면 팔이 아니라 목이 떨어졌을 것이다.
믿기 힘들겠지만, 6명이 합격을 하는데도 밀린다. 죽기 살기의 사생결단뿐만 아니라 뭔가를 복용한 듯 요시토는 미쳐 날뛰고 있었다.
“이거야! 이것이야말로 환검의 극의로다!”
요시토는 궁지에 몰리면서 가주가 내어 준 마혈단을 먹었다. 이는 환검가의 검수들 전부가 해당되었다.
“모두 환검가의 제물이 되어라!”
“마약을 복용한 주제에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가주들도 자존심이 있었다. 6명이 합공을 하는데도 밀린다니, 그들은 인정하지 못했다. 그러나 요시토는 마지막 불길을 태우듯 산화하고 있었다. 막아 내지 못하면 최소한 동귀어진을 당할 위기였다.
이대로라면 검가연합은 끝장이 난다. 그런 꼴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도와주시오, 미스터 강!”
마지못해 쥐어짠 가주들의 개미 같은 목소리였다. 사실,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 말을 하는 순간, 뒤를 이을 후폭풍을 자신하기 힘들었다.
“정신 나간 짓을. 그런다고 내가 살려 줄 것 같으…….”
잘난 척 거만을 떨던 가주들을 조롱하며 비웃으려고 했던 요시토는 말을 끝까지 잊지 못했다.
푸슥!
요시토의 대가리가 사라졌다. 마치 레이저 캐논이 스치고 지나간 듯, 목 위만 녹아 버렸다.
꽈앙, 푸아앙!
이어서 벌어지는 광경은 가주들은 물론 검가연합 모두를 경악으로 물들였다. 인간적인 범주를 아예 벗어난, 천외천이 무엇인지를 경험하고 있었다.
내지른다.
사라진다.
환검가가 있었는데, 없어졌다.
단숨에 전장을 지배해 버린 무진이었다.
환검가의 최후 발악은 허무하게 끝이 났다. 주먹을 내지를 때마다 수십 명이 사라진다.
단 세 번의 주먹질이었다.
“이게 다 얼마야?”
화사한 미소를 짓는 무진이었다.
가주들의 인상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