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0. 생즉사 사즉생(2)
젊은 시절 호되게 당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제야 무진의 심중을 파악했다. 이렇게 될 줄 애초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다른 무엇보다 노괴는 믿음의 가치를 신용하는 외골수였다. 한번 믿음을 주면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 주종 관계를 맺었다면 끝까지 믿고 따를 것이다.
“가만, 네놈들이 알고서도 방으로 들어가는 나를 말리지 않았네.”
“이야기가 왜 그렇게 흘러갑니까?”
“나이 든 것도 서럽거늘, 네놈들이 나를 제물로 썼구나!”
“당신이 나선 거지, 우리가 떠민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당신? 천검가의 애송이가 많이 컸어.”
애송이라니, 자신들도 내일모레면 환갑이다. 그런 말을 들을 때는 지났다. 그러나 함부로 대립하기에는 노괴의 반로환동이 걸렸다. 저 모습을 봐서는 전성기의 기준마저 넘어선 듯했다.
누군 맞기만 하고, 누군 반로환동이라니!!
세상 불공평한 현실이었다.
“전쟁만 아니었으면 다 뒤진 거 알지?”
“……압니다!”
외모만 젊은 시절로 돌아온 줄 알았더니, 성깔도 업그레이드되어 돌아왔다. 앞으로도 마귀가 설치고 다닐 걸 상기하니 골이 지끈거렸다. 하지만 마귀의 말대로 전쟁에서 이긴 다음의 문제였다.
‘빌어먹게도 승산은 높아졌구나.’
‘어쩌다 이리 꼬인 거지?’
‘괜한 짓을 벌인 게 아닐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긁어 부스럼으로 치부하기엔 다크니스의 수족이 되어 도구처럼 사용되고 싶진 않았다.
여전히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고심하는 가주들을 혈검후는 한심하게 보았다. 갚지 못할 도움을 줬으면 감사한 마음을 가져도 부족하거늘.
이런 놈들이 뭐가 예쁘다고.
“주군께서 네놈들에게도 기회를 주신다고 했으니 보채지 말거라.”
“정말입니까?”
“견뎌 낼 수 있다면 말이지.”
“그냥 괴롭히고 싶은 건 아니고요?”
“싫으면 말라고도 하셨지.”
공짜가 아님을 직감한 가주들이었다. 무진의 고문에 가까웠던 구타가 떠올렸다. 맞아 봐야 맛을 안다고 했지만, 그건 익숙해지지 않는 맛이었다.
취두부에 삭힌 청어를 비벼 먹는 맛이랄까?
그런데도 거절할 수 없는 명백한 증거가 눈앞에 떡하니 있었다. 반로환동이 단순히 운이 좋아서 도달할 경지는 아니지 않는가.
‘나만 낙오될 순 없잖아.’
‘같이 하면 모를까?’
‘제기랄, 이놈들을 어떻게 믿어!’
눈치 게임으로 미래를 걸 순 없는 현실이었다. 가주들은 알고 있었다. 이 중에 배신자는 꼭 나온다는 사실을.
쯧쯧!
그 한심한 작태에 혈검후는 재차 혀를 찬 후, 가문의 무인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지금은 깨달은 경지를 온전히 파악하고, 갈무리할 때였다.
‘내 손으로 반드시 피 값을 받겠다.’
***
환검가는 총 300명으로 구성되었다.
냉병기에서 화병기로 바뀌면서 전쟁의 양상이 바뀌었지만, 각성의 시대가 되면서 숫자가 중요한 시대는 지났다.
지금도 봐라.
양적인 차이로는 대충 7배나 된다. 한데도 전투의 구도는 반대였다. 검가연합이 수성전에 나서고, 환검가가 공성전을 펼치는 양상이었다. 이론적으론 수성을 펼치는 쪽이 압도적으로 유리하지만, 환검가는 기존의 전술을 버렸다.
천검가의 내성으로 들어가는 10개의 입구 중 2개를 빼고 전부 막혔다. 침투할 루트를 지정해 놓은 것이다.
환검가주 에이조 카이토는 입구가 아닌 천검가의 견고한 성벽을 마주하고 있었다.
-계획대로 한다.
“예.”
환검가주는 지령대로 따랐다.
다크니스는 지원만 하고 전면에 나서진 않았다. 배후에서 필요할 때만 개입했다. 실제로 마스터는커녕, 넘버 내 요원도 개입을 최소로 줄였다.
이유는 있었다.
환검가는 그간 전력을 드러내지 않았었다. 검가연합이 전쟁을 선포한 후에야 감추고 있던 역량을 보였었다. 또한, 다크니스에서 지원한 아이템과 장비도 검가연합보다 한 단계 이상 높았다.
이번 전쟁을 위해 다크니스는 환검가에 마나정수까지 제공했다. 기존의 마나정수보다 월등히 뛰어난 효과와 안정성을 갖추었다. 환검가는 검가연합과의 수적인 차이를 무시하고도 남을 정도로 월등히 강해졌다.
환검가주는 천검가의 견고한 성벽을 바라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사운드 증폭을 이용해서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했다.
[본 가주는 천검가의 항복을 다시 한번 권유한다. 저항은 무의미하다. 쓸데없는 피를 흘리지 않기를 바란다. 10분을 더 주겠다.]
검가연합도 불의에 항복하지 않겠다며 재차 천명했다.
작금의 구도가 공영방송으로 나가진 않더라도, 개인 계정으로 송출이 되었다. 주변의 수많은 눈과 귀가 있는 이상 눈 가리고 아옹이더라도 대의를 표명해야 했다.
환검가도 다크니스의 주구로 알려졌지만, 실제로 그런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사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보이는 곳에서는 명분을 쌓을 필요가 있었다.
[서로의 뜻이 다르기는 하나, 검가연합의 의지는 존중한다. 그 뜻을 본가는 외면하지 않겠다. 지금부터 정면으로 뚫고 지나갈 테니, 피하도록.]
이 이후로 벌어지는 사태는 전부 검가연합의 책임이라는 말과 함께 준비한 무기를 꺼냈다. 긴 원통 형태로 지름 3m에 육박하는 포신이 천검가를 가리켰다.
-대결계 전용 실드버스터.
다크니스에서 개발한 각성 병기로 지하 벙커를 뚫는 벙커버스터를 응용하여 만들었다.
“발포하라.”
슈우웅!
***
꽈아아앙, 꽈아앙!
푸아아앙!
폭발은 단발로 끝나지 않고, 연쇄적으로 일어나며 안으로 파고들어 간다. 성을 에워싸는 결계에 닿자 폭발력은 더더욱 거세졌다. 마치 결계에 포진한 마나를 흡수하여 폭발하는 것처럼 보였다.
쩌저저저적!
실드버스터는 고속 드릴처럼 성벽을 뚫고 들어가며 관통력을 과시했다. 폭발력과 회전력이 마력과 결합하자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지름 3m의 실드버스터가 지나간 흔적은 족히 50m에 육박하고 있었다. 믹서에 갈린 듯 지척에 있는 모든 것들이 분말이 되어 흩날렸다.
휘이이이잉!
성벽은 강화 철근콘크리트로 되어 있었다. 미사일을 융단으로 폭격해도 견뎌 낼 내구성을 자랑했다. 더욱이 결계의 마나를 압축시켜 성벽의 방어력을 높였다. 정문도 아니고 성벽을 뚫고 들어온다는 발상 자체가 비현실적이었다.
검가연합이 천검가를 최후의 격전지로 내세운 것도 견고한 방어력과 수성의 용이성에 있었다. 이를 가뿐히 무시하는 환검가의 대결계 전용 병기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사전에 대피하라는 권고가 없었다면 그 피해는 상상을 초월했을 것이다.
막아설 최소한의 인원을 발 빠른 자들로 구성했고, 내성의 신속한 대처에 그나마 피해를 최소화했다. 인명 피해가 전혀 없을 수가 없는 광경이지만, 워낙 파괴력이 강력해서 블라인드 처리한 듯 가려졌다.
꽈아앙, 퍼어엉!
실드버스터는 대결계 전용이 확실했다. 결계의 마나를 흡수하여 동력원으로 사용하니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 압도적인 파괴력에 내성으로 대피했던 검가연합은 기가 질렸었다.
“파괴력만 놓고 보면 핵 폭격보다 더하구나!”
“저게 여기서 폭발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싸워 보지도 못하고 전멸하는 거 아닌가?”
“이런 식의 개죽음은 바라지 않았다고, 제기랄!”
차마 항복을 입에 담지는 못했지만, 공포에 질려 이성적인 판단이 흐려졌다.
허!
검가연합의 전대 가주, 가주들, 장로들도 병기의 파괴력에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내성까지 뚫고 들어오면서 결계의 에너지를 흡수하고 있었다. 혹, 내성 중앙에서 폭발이 일어난다면 최악이었다.
짐작은 곧 현실이 되었다.
우우우웅, 두드드드드!
차원이 다른 소름 돋는 마력의 파문이 번졌다. 모골이 송연해지며 다들 마른침을 삼켰다. 피하기엔 늦었다. 내성의 결계가 버텨 주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꽈아아아아앙!
후아아아아앙!
지축을 뒤흔드는, 관동대지진의 몇 배나 되는 에너지가 분출되었다. 주변까지 영향을 받아 크게 흔들렸다.
천검가를 기웃거렸던 관종들도 가벼운 여흥이 아닌, 진짜로 죽을 수도 있다는 위험에 약 처맞은 날벌레처럼 뿔뿔이 도망쳤다.
쐐애애액!
속전속결.
실드버스터의 배후로 환검가가 쇄도해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전투가 아닌 전장의 정리를 그리는 모습이었다.
실드버스터는 전술핵에 버금갔다. 내성의 방어력으론 버텨 내지 못한다. 결국, 살아남았다고 해도 전투를 치를 상태와는 거리가 멀었다.
“……아니!!”
내성이 흔적도 없이 날아가야 했다. 버섯구름을 형성한 이상, 최소한 반파라도 돼야 했거늘. 천검가의 내성은 원래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실드버스터를 견뎌 냈단 말인가?”
환검가주는 검가연합이 천검가에서 수성전을 펼치리라 예상하였다. 결계, 성벽, 함정으로 시간을 끌거나, 공성 피해를 누적시키려는 계획에 대응해 실드버스터를 활용했다.
실드버스터가 대결계 전용 병기인 이유는 결계의 마력을 흩어 내고, 흡수하는 성질 때문이다. 흡수한 마력을 압축하여 단번에 토해 내는 대폭멸이야말로 실드버스터의 가장 무서운 특성이었다.
그걸 견뎌 내?
그 자체로 천검가의 내성은 특별했다. 아니, 특별한 결계였다. 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검가연합을 완전히 복속시켜야 했다.
결계가 특별했을지는 몰라도, 실드버스터를 견디면서 사라졌다. 내성만 남았다면, 얼마든지 힘으로 뚫어 낼 수 있었다.
“편히 갈 수 있었을 텐데, 괜한 짓을 하는군.”
“네놈이야말로 편히 죽을 생각은 하지도 마라!”
살기 가득한 여인의 포효가 환검가주를 노렸다. 능히 압축된 사자후라고 봐도 무방했다. 이만한 기운을 가진 여인이 있다는 소린 못 들었다.
흠.
여인은 소녀라고 해도 무방할 외형이었다. 다만, 과거에 본 기억이 있었다. 잊힌 악몽 속에 남아 있는 형상이 현재를 확인시킨다.
“혈검후?”
“정신은 똑바로 박혔군. 이제부터 각오하는 게 좋을 것이다.”
“반로환동을 했구나.”
“네놈의 운도 다한 게지.”
“회춘했으면 외진 산기슭에 숨어서 조용히 여생을 보낼 것이지. 모자가 나란히 저세상으로 가겠군.”
“생사는 오롯이 이 검으로 판단할 것이다.”
“자신만만했던 네년의 아들도 결국에는 살려 달라고 빌었었지.”
“맘대로 지껄이거라.”
환검가주의 검미가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실드버스터가 실패한 이후로 또다시 예상을 벗어나는 존재의 등장이었다. 명검가의 전대 가주인 혈검후가 반로환동을 하여 돌아왔을 줄이야.
께름칙한 느낌이 스쳤다. 이 흐름을 되돌리려면 혈검후를 제물로 삼아야 했었다.
‘마귀 같은 년!’
고수일수록 작은 빈틈이 치명적인 허점을 제공했다. 혈검후의 평정심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죽은 명검가주를 거론했거늘. 자식을 잃은 어미라곤 상상하기 힘든 부동심이었다.
환검가주는 이 싸움이 녹록지 않음을 직감했다.
“예전의 나로 알고 있다면 큰 오산이다.”
“그러길 바라는 바다.”
명검류의 극한에 도달한 혈검후는 빛살이 되어 쏘아졌다. 무형무음 신속의 경지였다. 자연히 휘두르는 검에 빛이 모여들며 검형을 이룬다.
명왕검형기(明王劍形氣).
빛을 인도하는 명왕의 검이 일대를 순백으로 수놓는다. 인간을 단죄하는 명왕의 판결이었다.
단죄의 심판자로 화한 혈검후였다.
차아아아앙!
환과 쾌의 검이 충돌하며 치열한 전쟁의 서막이 열렸다. 눈이 따르지 못하는 격전은 뒤늦은 굉음으로 전달이 되었다. 과거와 현재의 일본 최강의 검이 자웅을 겨룬다.
와아아아!
자연스럽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검가연합이 내성 밖으로 나와 환검가와 격돌했다. 스텟의 차이를 검합으로 대응한다.
채채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