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9. 생즉사 사즉생(1)
[검가연합 항복 불가, 결사 항쟁 결의]
-다크니스의 주구, 환검가는 들으라. 연합은 결단코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다. 설령 모두가 죽는다고 하여도 다크니스의 도구가 될 순 없다. 노예로 살 바에는 자유로운 죽음을 택하리라.
검가를 순차적으로 멸문시키며 천검가로 향했던 환검가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저항하지 않으면 살 수 있으나, 무인으로 죽겠다는 생즉사 사즉생의 의지를 불태웠다. 슬슬 분위기가 넘어가려고 한 시기에 불타오를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여론은 죽음을 각오한 사무라이 정신으로 포장하며 검가연합을 응원했다. 그간 십대검가를 대하는 여론은 강압에 가까웠으나, 이번에는 진심이 실렸다.
국민 여론도 환검가가 다크니스의 주구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검가연합이 변변한 저항도 못 하고 일방적으로 밀리자 차라리 굴복하는 편이 낫다는 여론도 형성되었다. 개죽음을 당할 바에는 강자에게 고개를 숙여야 한다는 편승론이었다.
일거에 쓸어버리지 않고, 하나씩 멸문하는 것도 힘을 과시하기 위한 계책이었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지만, 사람은 개나 고양이가 아니다. 검가연합 내부의 배신을 종용하여 분란을 일으키기만 해도 성공적이었다.
이젠 그럴 수 없게 되었다.
검가연합이 천검가에서 자웅을 겨루자고 벼랑 끝 전술을 편 이상, 환검가는 받아 주어야만 했다. 검가연합의 선전포고를 피한다면 환검가는 그간의 당위성을 잃게 된다.
그럼에도 대다수는 검가연합의 승리를 점치진 않았다. 1차 전투에서 일방적으로 패배했고, 터전을 내주며 도망쳤다. 전력에서 압도적으로 밀린다는 의미였다.
환검가로서도 끝장을 보는 편이 여러모로 손실을 줄일 수 있었다. 더욱이 세간의 이목이 천검가를 향했다. 이번에야말로 증명할 기회였다.
이번 전쟁이 방송국으로선 시청률 보증수표와 같았다. 그럼에도 영상 시청은 불가하다. 사람이 죽는 장면을 고스란히 내보낼 정신 나간 방송국은 없다. 일부 돈에 환장한 스트리머와 관종들이 목숨을 걸기는 해도.
“제법 머리를 굴렸어.”
“방도가 없으니까, 항복을 위한 명분을 쌓으려는 걸 수도 있지.”
“우리가 방심하기를 바랐을 수도 있지 않나?”
“그렇다면 뼈아픈 실수가 되겠지.”
마스터들로선 예측을 빗나간 대치였다. 검가연합에서 백기 투항하거나, 이탈자를 활용해 분란을 일으키려고 했었다.
한데, 둘 중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았다. 그 점이 그들의 신경을 건드렸다. 여태 아무런 방도도 찾지 못했던 무능한 자들이 아니던가.
죽기 위해 싸운다?
인간의 본능을 무시한 처사였다. 모두가 그렇진 않다고 해도, 죽음을 각오하기란 말처럼 간단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반기를 들기 마련이다.
“어쩌면 방도를 찾았을 수도 있어.”
“일본에 그만한 저력이 있을까?”
“전대의 무인이 있지 않나?”
“관에 들어갈 나이가 됐으면 보내 줘야겠지.”
최후의 수, 전대 검가주가 금분세수를 깨고 나올 가능성이 있었다. 과거의 이력을 비추어 봤자, 현재 어느 정도의 전력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한국의 권왕과 비슷하다면 귀찮을 순 있었다.
“기대되긴 하는군.”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그것도 나쁘진 않지.”
검가연합이 한국이나 중국에 원조받았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한중이 나설 이유도 없거니와 그런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만약을 위해서 한국과 중국에 요원을 보내 놓았다. 주요 인물이 사라졌다면 보고가 올라왔을 것이다.
애초에 순수한 협조는 기대하기도 어려웠다. 한·중·일은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 평행선이다. 일본 내 분란을 한국과 중국은 강 건너 불구경할 가능성이 크다.
설령 다음 차례가 된다 해도.
***
천검가에 검가연합이 모였다.
수는 2천으로 제한했다.
애꿎은 희생을 늘리기보다는 정예로 상대하기로 했다. 대신, 만약을 대비해서 가문의 후예를 황실로 보냈다.
결사 항쟁을 위해서 검가연합은 은거했던 전대 가주와 장로를 불러들였다. 패배한다면 이제는 뒤를 돌아보기 어려웠다. 후예를 남긴다고 해도, 아직 어렸다. 현재에 전부를 건 일생일대의 베팅이었다.
천검가의 외성과 내성을 잇는 모든 입구에 결계와 함정을 설치했다. 최대한 전력을 분산해서 각개격파 할 수 있도록 전략을 짰다. 공성전을 선택한 이상, 합리적인 전략이었다.
다만, 희생을 늘리지 않기 위해서 결계와 함정이 뚫리는 즉시 내성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같이 살거나, 같이 죽거나. 환검가의 전력을 확인하기 위한 희생양으로 쓰진 않았다.
“왜 그런 눈으로 보십니까?”
“솔직히 내 의견을 따라 줄 줄은 몰랐거든.”
“우리도 자존심은 있습니다.”
“자존심이 목숨보다 소중하진 않지.”
천검가주를 비롯한 가주들의 만장일치는 명검가, 수검가, 용검가에겐 의외였다. 가주를 잃은 자신들과 달리 그들에겐 후대를 도모한다는 명분이 있었다.
명검가의 전대 가주 히메지 카나는 아들을 잃고 복수를 천명했었다. 그러나 자식을 잃은 어미의 분노를 외면하고, 가문의 보신에만 연연했던 가주들의 태도가 마땅치 않았었다.
그런데 황실에 갔다가 돌아온 날, 가주들이 결사 항전을 합의했다. 그저 명분을 쌓기 위한 요식행위로 보기에는 사활을 걸었다.
그녀는 가주들에게 분풀이한 지난 일을 사과했다. 그들도 가문을 건사하기 위한 선택을 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용기가 없다고 비난했으니 부끄러울 따름이다.
“미안하다. 내 업보를 강요해서.”
그녀의 정중한 사과에 가주들은 놀라는 눈치였다.
명검가가 지금이야 천검가에 가려졌지만, 그녀는 과거 최강으로 군림했던 철혈의 검객이었다. 혈검후란 별호처럼 외골수적인 독불장군이라 설득이 통하지 않았었다. 그녀에게 시달리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 그녀도 나이가 들었던가.
‘이 괴팍한 노괴에게 사과를 다 받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군.’
‘최강의 여인도 결국은 어머니였어.’
‘노괴의 심정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지만, 후환이 두렵구나.’
‘항쟁을 우리의 의지라고 할 수 있나?’
아들의 죽음을 따지며 들들 볶기는 했으나,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자신들이라도 자식의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이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다만, 이번 선택은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진행되었다. 일방적인 강요와 막대한 지출을 더해서.
종전 후 날아올 청구서를 상기할수록 머리가 아파 왔다.
‘나눠서 내줄 수 있으려나?’
‘안 내면 독박인데?’
‘이 노괴가 순순히 줄 리 없잖아!’
‘사과로 ‘땡’치진 않겠지?’
그렇다고 자신들끼리 뿜빠이로 낼 액수가 아니다. 조 단위의 청구서는 그들에게도 무지막지한 부담으로 다가왔다. 종전 후 청구서를 받고 나 몰라라 한다면 합당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맘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전말을 밝히고 싶었지만, 일단은 참아야 했다. 자칫 무진과의 협상이 탄로 날 수도 있고, 돈 때문에 전의가 꺾일 수도 있었다.
오늘 이겨도 내일은 빚쟁이가 된다는데 의욕이 생길 리 만무했다. 적당한 빚이면 자산이라고 우기겠으나, 조 단위는 적당하지 않았다.
‘우린 모르는 일이다!’
‘우리도 당한 거라고!’
‘누가 됐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우리 잘못은 아니다!’
불가항력에 가주들은 현실도피를 택했다. 어차피 자신들이 해결할 수 있는 범주는 벗어났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우리만으로 환검가를 제압하면 빚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괴물이 내어 준 최소한의 양심이었다. 도움도 몇 개 더 받았고. 어떻게든 검가연합으로 끝장을 봐야 했다. 그래서 전대의 무인들까지 박박 긁어서 전쟁에 끌어들였다.
‘이기면 돼, 이기자!’
‘이길 수 있어, 할 수 있다!’
‘할 수 있겠지?’
‘안 되면 좆되는 거지!’
가주들은 그 어떤 때보다 진심이었다. 패배라는 단어는 기억에서 지웠다. 환검가가 다크니스의 지원을 받았어도, 검가연합의 정예라면 해 볼 만했다.
그러다 가주들은 깜짝 놀랐다.
명검가의 노괴가 어딘가를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저 권왕가의 버릇없는 아해는 어째서 이 자리에 있는 거지?”
“자기도 힘을 보태겠다고 했습니다.”
“천지 분간 못 하는 녀석이로구나.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와.”
“어려울 때 돕는 게 진정한 친구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권왕이 직접 왔어야지!”
“성의로 봐 주시지요.”
“괜히 애먼 피를 볼 필요는 없다. 내 따끔히 충고할 테니, 너희들은 상관하지 마라.”
충고라고 하기엔 노괴의 분위기가 험악했다. 어느 정도는 예견된 일이었다. 권왕의 패악이 오늘내일 일도 아니고, 수십 년이 흘러도 여전히 회자했다. 과거 노괴와의 충돌도 없지 않았다. 자세한 내막까지는 모르나, 노괴로서도 탐탁지 않았던 것으로 보였다.
성큼, 성큼!
한다면 하는 화끈한 성격답게 대뜸 무진에게 다가가서 앞에 섰다.
“어린놈아! 용기는 가상하나 목숨을 보전하고 싶으면 지금이라도 천검가에서 도망치거라.”
“사부님하고 한바탕하셨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힘들겠네요.”
말투는 날이 서 있지만, 목숨을 소중히 여기라는 선의가 담겨 있었다. 고맙다고 절을 해도 부족하거늘, 자기 사부를 언급하며 비교를 해.
“뭬야? 지금 내가 늙었다고 괄시하는 것이냐?”
“그만큼 사부님이 강해졌다는 의미예요.”
“그놈의 제자답게 입심은 대단하구나. 하나, 자리에 없다고 아무 말이나 지껄이진 말거라!”
“제 말을 믿지 못하겠다면 증거를 보여 드릴게요. 잠시 제 방으로 들어오실래요?”
“내가 왜 그래야 하느냐?”
“들어와 보시면 충분히 납득하실 수 있을 거예요. 아니라면 제 사문의 이름을 걸고 책임지겠습니다.”
어린놈의 행태가 방자하긴 해도, 권왕가의 도움을 얻을 수 있다면 나쁘진 않았다. 비록 권왕이 본국에서 벌인 개짓거리는 용서할 수 없어도, 실력만큼은 인정하고 있었다. 그 당시에도 대단했던 권왕이 더욱 강해졌다면 자부심을 느낄 만했다.
“나를 납득시킬 수 있어야 할 게다. 아니라면 반드시 후회하게 해 주마.”
“아무렴요.”
납득?
괴물과 노괴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가주들은 화들짝 놀랐다. 노괴가 고지식하고, 앞뒤 분간을 못 하긴 해도. 연세가 무려 90세가 넘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괴물의 방에 순순히 들어가는 거지?
저 녀석 방에 들어가면 안 되는데.
‘노인을 패진 않겠지?’
‘그래도 노괴가 호락호락하진 않잖아.’
‘어쩌면?’
괴물의 강함이야 두말할 나위 없긴 해도, 노괴도 만만치 않았다. 고래로 인간은 생로병사에서 벗어나지 못하지만, 지금은 세상이 바뀌었다. 노인은 노괴로 변하고. 간혹, 괴수에 도달하기도 한다. 전대물의 왕국인 우리나라라면 노괴가 sss급 괴수화를 이룬다 한들 놀랍지 않았다.
괴물을 잡는 괴수가 되어 주기를.
두근, 두근!
둘이 나올 때까지 가주들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보았다. 제발 좋은 쪽으로, 최소한 비벼 볼 만한 상황이 나왔으면 했다. 그래야 환검가와의 전쟁에서도 유리한 고지를 취할 수 있었다.
시간이 길게 느껴졌다.
가주들은 노괴의 선전을 기대했다.
저벅!
1시간이 지난 후, 문이 열렸다.
무진이 먼저 나왔다.
그 뒤로.
엥?
못 보던 여인이 다소곳한 자세로 조심스럽게 무진의 뒤를 따랐다. 노괴는 어디로 가고?
흐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젊은 여인에게서 노괴의 젊은 시절과 얼추 비슷한 태가 나왔다.
무진이 여인을 보며 말했다.
“앞으로 잘해 보자.”
“예, 주군.”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는 여인, 수줍다고 하기에는 두려움이 깃들어 있었다. 공포를 마주하지 않고서는 나오기 힘든. 가주들은 공감대를 형성했다.
‘설마?’
‘노괴?’
‘회춘을 하다니!’
‘안에서 대체 무슨 짓을?’
‘이러면 나가린데!’
노괴가 반로환동하여 여인으로 돌아왔다. 가주들로선 좋은 일이 분명한데도, 굉장히 찝찝했다.
오늘을 분기점으로 회광반조를 기대했거늘. 이러면 앞으로도 명검가를 대하기가 껄끄럽게 되었다. 승전 후 명검가를 쪼개서 나누어 먹으려던 계획을 대폭 수정했다.
툭툭!
무진은 카나의 어깨를 두드려 준 후 안으로 들어갔다.
믿고 맡긴다는 의미였다.
호랑이가 떠나면 여우가 왕인 법이다.
카나가 한심한 눈으로 가주들을 노려보았다. 자발적으로 용기를 낸 줄 알았더니, 모든 일이 주군의 덕이었다.
“네놈들이 그러면 그렇지.”
“……뭐가 말입니까?”
“전쟁 중인 걸 감사해야 할 거야.”
“이유가 어쨌든 우리의 힘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다 큰 사내놈들이 끝까지 변명이구나.”
서슬이 실린 카나의 안광에 가주들은 마른침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