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8. 계약 성립(3)
유일하게 핵 폭격을 두 방이나 맞아 본 민족이라 적응이 빠를 줄 알았지만, 가주들은 부들부들 떨었다. 대놓고 치부를 들추는 것도 그렇고, 반박하기에는 명백한 사실이었다.
공주가 가만히 있는 것만 봐도 놈의 말이 사실이란 의미였다. 그간 공주의 정보 출처 기반이 궁금했었는데, 애송이가 단순한 광대가 아님을 깨달았다.
이제는 부정하기도 타이밍이 늦었다. 그들도 인정할 건 인정하고 넘어가야 했다. 다만, 순순히 내어 주기에는 무진의 태도가 괘씸했다.
“합당한 보상을 해 주마. 그 대신 이번 사태를 해결할 수 있어야만 한다.”
“가문당 4조야.”
이 미친놈이, 그렇다고 4조를 불러!
그것도 가문당이라니?
“40조면 되겠네.”
……?
상식선을 가볍게 넘어선 천문학적인 액수는 그렇다 쳐도, 빠진 가문이 4개였다. 여기에 오지도 않은 가문까지 더하는 셈법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단 말인가? 하물며 환검가는 다크니스의 수족을 자처한 적대 가문이었다.
“우리를 어찌 보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받아들일 것 같으냐!”
“대신 당신들 전부를 이해시키지 못하면 한 푼도 받지 않을게.”
“그러는 네놈 말은 어떻게 믿지?”
“계약서를 작성하자고.”
40조는 기간산업급 계약으로 원전을 수십 개 이상 짓고도 남을 액수였다. 당연히 거절해야 마땅하나, 가문의 명운이 걸려 있었다. 더욱이 계약 사항에 모두가 납득했다는 사인이 적혀야 효력이 발한다. 누구 하나라도 탐탁지 않으면 계약은 그 즉시 무효가 된다.
“내뱉은 말을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다.”
“이왕 할 거면 이자는 1,200%로 하자.”
“그래, 할 거면 그 정도…… 뭬야? 야쿠자도 그딴 식의 폭리는 취하지 않는다!”
“쫄려? 늦지만 않으면 되잖아.”
맞다, 늦지 않으면 된다.
약관에 명시한 이상, 실제로는 가치가 없는 계약이었다. 그러나 이대로 무진의 의도대로 끌려가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좋다. 대신에 너도 이 계약 그대로를 받아들여라.”
“그래.”
합의가 끝난 이상 누가 봐도 무진에게 불합리한 계약이 되었다. 이딴 계약을 겁도 없이 함부로 하다니, 이제껏 오만을 떨던 놈이 맞나 싶었다. 나이가 어려서 그런가, 계약의 무서움을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이만하면 나쁘진 않군.’
‘어떻게든 사인만 하지 않으면 되지.’
‘네놈의 정보력은 유용하게 잘 쓰마.’
‘평생 노예처럼 굴려 주마.’
잘하면 한국을 대표하는 권왕가를 끌어들일 수도 있었다. 애송이의 가치보다 권왕가라면 차후 한국 진출에도 도움이 되었다. 이쯤 되니 이놈은 어릿광대에 호구였다.
계약서를 각자 나눠 가진 후 무진은 재차 확인했다. 마지막으로 선택의 기회를 준 친절함이었다.
사형수도 죽기 전에는 만찬을 즐기잖아.
“다들 계약한 거지?”
“그렇다.”
“진짜지?”
“우리가 납득할 만한 방도나 내놓거라.”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계약서는 완성되었다.
무진은 주둥이로 40조를 번 현실에 만족했다. 이제 저들이 원하는 방도를 알려 주면 된다.
짝짝!
박수를 치자 공간이 바뀌었다. 감추어졌던 장막이 벗겨지면서 심상으로 구축한 공간이 구현되었다. 응접실이 일순 새만금 개척지처럼 넓어졌다.
“이놈,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는 것이냐?”
“공간 결계야. 보여 달라며?”
“대체 뭘 보여 주겠다는 거지?”
“이제 우리밖에 없으니 납득해야 할 거야. 아니면 내가 많이 상처받거든.”
“헛소리 그만하고, 당장 결계를 풀어라! 네놈의 장단에 놀아 주는 것도 여기까지다.”
“일단 한 대씩 맞자.”
“이 미친 광대 놈이!”
할 말이 끝난 무진은 행동으로 나섰다. 주먹을 가볍게 움켜쥔 후, 정면으로 뻗었다.
퍼억!
쿠다다다당!
철퍼덕!
무진에겐 잽이지만, 가주들에겐 핵 펀치였다. 제공권을 형성하기는커녕 기척조차 감지하지 못하고 권격을 허용했다. 일직선으로 날아가 바닥을 구르다 엎어졌다.
검가의 자부심들치곤 한 방에 의식이 끊어져 버렸다. 살의는 사라지고, 공허함이 자리를 대신했다.
헐!
경악한 미츠키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대부를 팰 때도 느꼈지만, 봐도 봐도 적응이 되지 않는다. 무진의 개짓거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면서도 찍소리도 못 한 연유였다.
‘저건 대체 뭐 하는 인간이지? 인간이 맞기는 해?’
고작 스무 살이다.
앞으로 뭐 하고 살지 고민해도 부족한 나이에 무쌍을 찍고 있었다. 인생의 끝은 없다고 하나, 6대 가주를 일격에 기절시키는 존재보다 강해질 수 있기는 한가?
너무 강해서 지나치게 이질적이다.
이럴 거면 혼자 다 하지.
우리가 필요 없다?
미츠키는 강한 불안감을 느꼈다.
지금도 완성된 괴물인데, 시간이 흐른다면 어떤 괴생명체가 될지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돋았다. 저 인간의 눈 밖에 나 봤자 이롭지 않았다.
그러나.
‘눈에 든다고 해서 좋은 것도 아니잖아!’
이도 저도 못 하는 사면초가였다. 눈에 들수록 피 빨릴 걸 각오해야 하고, 눈 밖에 날수록 위험에 대처하기 어렵다. 다크니스의 강함을 확인한 이상, 무진은 본국의 필요악이나 다름이 없었다.
있으면 돈 빨리고, 없으면 멸망하는.
공주가 상념에 젖은 사이.
컥!
퍼억!
비명이 터졌다.
일찍 일어나는 벌레가 새의 먹이가 되듯, 가장 먼저 정신 차린 천검가주는 멱살이 잡힌 채 두들겨 맞고 있었다.
뺨이 좌우로 시원하게 돌아간다. 처맞으면서도 현실을 부정하는 천검가주였다. 이런 상황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악몽이 분명하거늘, 고통은 아니라고 항변한다.
“당신이 가장 강해.”
“……크으으, 이 괴물 같은!!”
특급 칭찬을 해 줘도 지랄한다며 더 험한 꼴을 당해야 했다. 정신없이 얻어터지는 현실 속에서도 천검가주는 도무지 납득하지 못하고 있었다.
‘……일격에 기절하고, 깨고서 또 맞았다는 건가?’
처음은 기습적이라 무방비라 치자. 깨어났으면 이래선 안 되는 거 아닌가. 자신은 명색이 십대검가를 대표하는 천검의 주인이었다. 천검은 써 보지도 못하고, 천박한 광경에 몸을 맡겨야 했다.
분하고 억울해서 억장이 무너지고 있는 사람 앞에서 칭찬받았다고 기뻐하라니?
이놈의 인성은 여론에 알려진 대로 인간 말종이었다. 표리부동하진 않다고 해야 하나?
겉과 속이 같아서 환장할 것 같았다. 차라리 달랐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었다.
“이만하면 됐으니까, 1년 치로 해 줄게.”
“……무슨 짓을…… 흐어어어억!”
뇌검가주, 지검가주, 화검가주, 사검가주, 폭검가주가 차례로 일어났다. 깨는 순서대로 무진은 일방적인 폭력을 가했다.
자는 척해 봤자 소용없는 짓이었다. 안 일어나면 발로 밟았다.
나이, 명성, 배경, 국적은 무진 앞에서 공평했다. 차별 없이 처맞아서 억울하진 않겠지.
퍼퍼퍼퍽!
크아아아악!
……악마!
무진은 태연했다. 어차피 만연한 일상일 뿐이다. 믿음을 얻기 위해서라면 가슴 아프더라도 해야만 했다.
믿음이 부족하다면, 폭력이 부족했던 거다.
덜 맞으니까, 믿지를 못하지.
촘촘히 맞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해를 할 수 있게 된다. 그때까지 무진은 폭력을 아끼지 않았다. 어차피 남의 나라 사람이니, 후폭풍까지 고민할 필요도 없고.
바들바들!
바르르르르!
추운 날 빙판에 버려진 슬픈 개처럼 심하게 경련을 일으켰다. 안면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졌고, 발버둥은 극악으로 치닫는다. 어떤 고통을 느끼고 있는지 모르지만, 자동 재생이 되고 있었다.
울고, 분노하다가.
다시 울고, 분노한다.
흐어어억!
기함을 토했다.
겨우 정신이 든 가주들은 눈앞에 선 무진의 미소를 보고 마른침을 삼켰다. 자신들이 뭘 건드렸는지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건 인간을 가장한 악마, 대악마, 대마왕이 분명하다.
인식의 변화를 확인한 무진은 사인펜을 내어 주며 물었다. 선택의 기회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제공이 되었다.
“사인할 사람?”
……?
아까 했던 계약서였다.
불현듯 가주들은 고민하고 말았다. 계약은 함부로 하지 말라는 정상적인 사고였다.
불행하게도 상대가 정상인일 때나 통하는 방식이었다.
물론, 무진은 항상 정상이었다.
알지?
“납득이 안 가는구나.”
“……잠깐!!”
“늦었어.”
“이 악마 같은…… 크아아아아!”
심상 구현의 단계를 높이고, 시간을 늘렸다.
현실에서 곧바로 지옥으로 떨어진 가주들은 눈물, 콧물, 침까지 질질 흘려 가며 아등바등했다. 정말로 죽을 것 같아서 비명을 질렀지만, 그런다고 돌려보내 주지 않았다.
부르르르!
가주들은 학질에 걸린 듯 경련을 일으켰다.
무진은 탁자를 앞에 놓고 의자를 꺼내 앉았다. 언제 어디에서나 준비된 필수 도구였다. 항시 집처럼 편안한 장소를 지향했다.
미츠키를 불러서 의자에 앉혔다. 황실의 다과를 주었으니, 수제 차와 과자를 내어 주었다. 받은 게 있으면 돌려주는 인간적인 매력을 과시한다.
“자, 마셔.”
“이 와중에 차가 넘어가?”
“납득이 안 된다잖아.”
“그렇다고 고문을 해? 이런 무식한 계약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어?”
“방도를 알려 달란 건 저 사람들이야.”
그동안 뻗대던 가주들이 마음에 안 들긴 했어도, 나이와 명성을 떠나 최소한 사람대우는 해 줘야 하는 것 아닌가. 그 앞에서 영상으로 남기는 꼼꼼함은 최악이었다. 두고두고 우려먹겠다는 심보였다.
“꼭 저런 식으로 해야 해?”
“아니면 네가 대신 할래?”
“그렇게까지 안 친해!”
“그럼 됐네.”
남의 일에 왈가왈부하지 않기로 미츠키는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가주들이 불쌍하다고 내가 지옥으로 들어가진 않는다.
이만하면 하야토에 대한 의리는 다했다. 자기 아버지가 자초한 일이기도 하고.
그냥 무진이 하라고 하면 할 것이지, 굳이 매를 벌고 그러세요.
‘대신 한다고 하면, 진짜로 집어넣겠지.’
신소리가 통할 인간이 아니었다. 오지랖과 정의를 논하는 순간, 삶에 대한 회의를 느끼게 될 것이다. 앞길이 구만리인 아름다운 소녀보다, 살 만큼 산 분들이 고통을 받는 편이 나았다. 나이가 들수록 통각이 무뎌지기도 하고.
추우욱!
무진은 늘어진 가주들을 강제로 깨운 후 다시 계약서를 들이밀었다. 채권 추심하듯 강요하지 않았지만, 선택은 강제했다.
“납득?”
“……그게!”
“늦었어.”
“아니다, 할…… 크아아악!”
재차 심상에 빠진 가주들은 지옥에서 몸부림을 치다 현실로 돌아왔다. 다시는 심상에 들고 싶지 않았다. 이제는 잠을 자는 것도 두려울 지경이다.
“납.”
“……뭐?”
“늦.”
“아니, 할…… 크아아아악!”
점점 물어보는 것도 귀찮았는지 말부터 줄여 버렸다.
미츠키도 무진의 번아웃에 기가 막혔다. 문장이 길거나 단어가 어려우면 말도 안 한다. 그거 귀찮다고 정신도 못 차린 어른들을 달달 볶나. 우리가 한국에 정말 못 할 짓을 많이 한 모양이다. 그 당시 선조의 죄가 후예에게 되돌아오고 말았다.
이제라도 진심으로 반성한다.
“…….”
“……설마?”
“…….”
“하겠…… 크아아악!”
이젠 말도 하기 귀찮은지 눈빛만 보냈다. 할지 말지를 스스로 알아서 최선의 결정을 내려야 했었다.
‘인성 뭐야?’
미츠키는 무진의 성질을 최대한 건드리지 않기로 다짐했다. 사람을 괴롭히는 방식이 참신하다 못해 악마 같았다. 이 녀석과 비교하면 사탄은 선량한 천사였다.
“할게, 하겠습니다!”
“완전 납득했습니다!”
“누가 납득 못 했어? 너냐? 너야?”
“사인합니다. 아니, 혈장을 찍겠습니다!”
“절대복종합니다!”
“이제야 복종하다니, 저는 복종한 지 오래입니다.”
자기들이 얼마나 다급하고 추한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더는 지옥으로 끌려가고 싶지 않은 인간 본연의 모습이었다.
미츠키도 검가의 주인으로서 지조를 지키라고 말 못 했다. 그딴 게 통할 상대가 아님을 깨달았다.
“진작에 할 것이지. 왜 나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 생각할수록 괘씸하네.”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전부 우리의 잘못입니다!”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아야지.
무진은 석고대죄 대신으로 원자폭격을 시켰다.
일본에선 원자폭격이 맞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