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7. 계약 성립(2)
[검가연합 패배]
-용검가, 수검가, 명검가 가주 사망.
-검가연합 2,230명 검객 중 1,237명 사망.
다크니스의 수족이 되어 일본을 전복시키려 했던 환검가를 단죄하기 위해서 나섰다. 사전에 황실, 정부와 연계하여 법적인 절차까지 끝마친 상태였다.
환검가의 무조건적인 항복을 검가연합, 정부, 황실, 여론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다크니스의 지원을 받았다고 해도 9개의 가문이 정예를 이끌고 갔다. 이만한 전력이면 소국 정도는 간단히 굴복시킬 만했다.
조만간 일본 내 다크니스와 연결된 세력을 완전히 끝장낼 수 있다고 보았다. 웬걸, 전혀 다른 결과가 뉴스 1면을 장식했다. 검가연합의 패배는 모두를 충격의 소용돌이에 빠뜨렸다.
-이게 말이 되는 일이야? 저 전력으로 어떻게 져!
-이게 질 수가 있는 구도야?
-환검가가 그렇게나 강했다는 거야?
-검가연합이 합심했는데도 일방적인 피해라니, 이럴 순 없다고!
-지금이라도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야 해!
-정부에서 나선다고 될 것 같냐, 구대검가를 압도한 환검가를 어떻게 막아!
-각성자들 전부 끌어모아서 대항해야지, 이대로 나라를 팔아먹은 역적을 내버려 둘 거야?
-예상치 못한 일이지만, 힘을 모으면 가능할지도 몰라.
-그렇게나 나라가 걱정되면 너희들부터 지원하지. 자기들은 죽지 않는다고 떠벌리기는.
던전이 오픈된 이후로 가문 간의 경쟁에서 이토록 많은 유혈 사태는 처음이었다. 더욱이 대의(大義)가 무너지고, 비의(非義)가 승리했다.
일본으로선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고 말았다. 가문의 주요 전력을 잃었고, 가주가 죽은 가문도 있었다. 이대로라면 일본은 암흑기를 벗어나기 힘들어 보였다.
설상가상으로 충격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검가연합의 폭거]
-본가는 정당한 대응을 했을 뿐. 유언비어와 의혹만으로 본가를 공격한 검가연합은 투항을 권고하는 바이다. 혹, 대항하겠다면 이후의 모든 책임은 검가연합이 져야 할 것이다.
검가연합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환검가는 역으로 항복을 권고했다. 똥 싼 놈이 방귀 뀐 놈에게 성낸 모양새가 되었다.
몰염치한 행태를 규탄해야 마땅하나. 패배하기 전이라면 모를까, 환검가의 경고를 가볍게 여길 수 없었다.
***
“이래도 내 탓인가?”
“네가 확실한 정보를 줬다면 당하지 않았어!”
“꼭 실패한 것들이 변명하지.”
“자자, 지금은 화풀이할 때가 아니지 않나.”
그들은 일본의 검가연합을 무너뜨렸다. 그런데도 승리를 만끽하기는커녕 짜증스러운 대화가 이어졌다. 결과도 중요하지만, 과정이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사실 결과마저도 우격다짐에 불과했다. 자신들이 나서는 건 계획에도 없던 일이다.
그리드 마스터 조웬.
레스 마스터 가이스터.
엔비 마스터 테르안.
이번처럼 자신들은 물론, 넘버 내 핵심 요원을 전부 동원하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현실이 불만을 키웠다.
특히 레스 마스터와 엔비 마스터는 이번 작전을 성공리에 마쳐서 그리드 마스터의 지분을 얻으려고 했었다. 한데, 자신들도 그리드 마스터와 다르지 않은 결과를 자아냈다.
‘꼴이 정말 우습게 됐구나!’
‘빌어먹을, 이런 개망신을 당할 줄은!’
차라리 나서지 않으니만 못한 처지가 되고 말았다. 입꼬리에 호선을 그린 그리드 마스터의 조소에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더욱이 다른 마스터들이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고 있었다. 조만간 회복하실 로드를 상기한다면 더 이상의 실패는 용납하지 못한다.
“이젠 뒤를 돌아볼 수 없게 됐군.”
“적당히 날조하고, 왜곡하면 그만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그게 된다고?”
“자네들은 일본을 잘 모르는군.”
거짓말도 계속하다 보면 진실이 되는 사회구조였다. 그런 점에 있어서 일본은 순종적인 면이 강하다. 정부에서 그렇다고 하면 어지간해서는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번 일도 제압한 후, 지속적인 여론 조작을 하면 된다.
100번의 거짓말과 날조로 진실을 덮는다.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정보를 자유롭게 수집할 수 있게 됐지만, 홍수처럼 넘쳐 나는 정보가 판단을 흐리게 하곤 했다.
“고분고분하게 만들려면 주제를 모르는 것들에게 불가항력의 절망을 선사할 필요는 있겠지.”
“이번 기회에 일본을 시작으로 중국까지 처리하세. 그 정도는 되어야 우리도 할 말이 있지 않겠나.”
“그 전에 그놈이 마음에 걸리는군. 아무래도 뭔가 있어. 이번 사태의 핵심을 간과할 수도 없고.”
순탄하게 흘러가던 계획이 공주와 이상한 놈이 끼면서 어그러졌다. 일례로 후기지수의 모임인 암천회만으로 후쿠시마 지부를 처리한 것도 이상했다. 레스 넘버가 파견된 상황에서 애송이들로 해결 가능한 사안이 아니었다.
이번 검가연합을 무너뜨리면서 확신이 생겼다. 검가연합이 나섰다면 사전에 정보가 샐 테고, 결국은 소수 정예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숨겨진 힘이 있다곤 해도, 레스 넘버가 도망조차 치지 못했다는 점이 걸렸다.
게다가 그 이상한 놈은 한국에서도 어떤 식으로든 사사건건 개입했다. 우연으로 치부하기에는 지나치게 공교로웠다. 일개 생도 주제에 대업의 초석을 무너뜨렸다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았다.
“그 어린놈을 죽이자고?”
“관계가 없다고 해도 이젠 상관없다.”
“하긴 그렇군.”
거슬린다면 죽이면 그만이다. 검가연합과의 전쟁에서 전면에 나선 이상, 더는 숨기고 말 것도 없어졌다. 압도적인 힘으로 모든 걸 제자리에 갖다 놓을 생각이었다.
“일단 검가연합부터 하자고.”
“지금부터는 확실하게 정리해야 할 거야.”
“발버둥 치는 꼴을 봐야겠어.”
환검가는 껍데기에 불과했다. 검가연합은 드래곤의 역린을 뽑지도 못하고 건드린 꼴이었다.
***
-폭검가 멸문.
-사검가 멸문.
-명검가 멸문.
하루에 하나씩 검가가 멸문당하고 있었다. 검가의 본부가 불타 잿더미가 되었다. 항복하지 않은 자들은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 각성의 시대가 되었다곤 해도, 현대사회였다. 비인도적인 행위가 버젓이 자행되자, 일본은 물론 세계가 경악했다.
환검가는 억울한 누명을 씌운 검가연합을 단죄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순순히 투항하고 환검가에 복속하겠다면 살려 주겠다는 전제를 달았다.
물론, 멸문당했다고 해서 인명 피해가 크냐고 묻는다면 또 그렇진 않았다. 환검가는 사전에 어딜 칠지 경고했다. 본가에 남아서 끝까지 저항할 사람을 빼곤 대비를 한 상태였다.
멸문이라고 공식적으로 밝힌 이유는 환검가의 힘을 대내외적으로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저항할수록 씻기 힘든 피의 대가를 치른다는 일종의 협박이었다.
검가연합으로선 3개의 검가가 멸문하면서 궁지에 몰렸다. 환검가와 정면 대결이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실제로도 환검가의 검객과 각성자는 기존에 알고 있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된 검가연합은 어떻게든 방도를 찾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뾰족한 수가 없음을 실감했다.
환검가는 저항을 용납하지 않았다. 오체투지를 한 채 완전한 굴종만을 원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검가연합의 체계도 위태로워졌다. 개죽음당하기보다는, 항복하려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미츠키는 검가연합의 가주들을 에도성으로 불렀다. 환검가의 마지막 목표가 에도성인 이상 당장은 위험하지 않았다.
검가연합의 가주들은 황급히 에도성으로 모였다. 평소라면 따르지 않겠지만, 방도가 있다는 공주의 확신 어린 표명에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판이었다.
6검가의 가주들.
3명의 빈자리가 크게 다가왔다. 그들이 죽고 나선 가주들은 몸을 사리게 되었다. 죽을 수 있다는 공포가 뇌리를 스친 것이다. 검가의 주인이라는 타이틀이 자신들을 지켜 주지 못하는 냉혹한 현실과 마주했다.
가주들은 공주의 응접실에 앉았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며 공주가 들어왔다. 그 옆에 공주의 소모품이 같이 따라온 건 의아했다. 기밀을 요하는 일인 줄 알았는데, 괜한 발걸음을 한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바쁘신 분들을 오라고 했네요.”
“불러 주신 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
사태가 급박한 것치고는 인사치레에 신경을 썼다. 여유가 있거나, 방도가 없어 내려놓았거나. 둘 다 아닐 것 같기는 했다. 최악의 사태가 벌어졌을 때를 고려한 인상이다. 인간이란 저항할 수 없는 절망에 대항하기보다는 굴복하는 편이기도 하고.
후르륵!
파삭, 파삭!
인사 후 별다른 말 없이 시간이 물처럼 흘렀다.
무진은 일본 전통 간식 아라레를 먹고 있었다. 달지 않고 짭짤해서 차와 잘 어울렸다. 명색이 황실이라고, 과자 하나도 신경을 쓴 듯했다. 납품 업체를 알면 따로 도매로 떼 오고 싶어질 정도다.
꿈틀!
무진은 방정맞게 다리를 건들거렸다. 가주들은 이맛살을 구겼다. 공주의 의도가 있긴 해도, 이놈에게 망신당한 것도 탐탁지 않아 하는 요인이었다.
참다못한 뇌검가주 이치라이 카츠로가 침묵을 깨고 포문을 열었다. 대화를 나누기 전에 이놈부터 치우기로 한 것이다. 검가의 중대사를 논하는 자리에 있어선 안 되는 불순분자였다.
“관계도 없는 외인이 어째서 이 자리에 있는 건가?”
“당신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려고.”
가주들은 황당무계한 눈으로 무진을 노려보았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가 가주에게 하대를 한 건 둘째 치고,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저딴 망언을 하는 건지?
상기할수록 속에서 화가 끓어올랐다. 작정하고 자신들을 농락하는 게 아니고서야. 본국에서 몇 번 승승장구하더니 주제도 모르고 기고만장이 하늘을 찔렀다.
화가 치밀었지만, 섣부른 행동은 하진 않았다. 오랜 세월 일가를 다스려 온 관록은 허술하지 않았다. 이럴 때일수록 냉철하게 상황을 주도해야 했다. 차라리 잘된 측면도 있었다. 애송이에게 냉혹한 현실을 알려 줄 기회였다.
“그 말은 환검가를 제압할 방도를 알고 있단 뜻이렷다?”
“당연하지.”
“방도를 안다면 어디 한번 말해 보게.”
“아주 쉬워.”
말해 보라니까, 쉽다니?
우롱당하는 기분이었다. 한 번은 실수로 넘어가도, 두 번은 고의였다. 점차 분위기가 험악해지며 응접실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철석의 강단을 지녔다고 해도, 숨이 막혀서 하얗게 질릴 기세였다.
흠.
무진의 태연함에 가주들은 보통이 아님을 인정했다. 꼴 보기는 싫지만,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은 놀라웠다.
배포는 대단하나, 저딴 식의 태도는 용납하지 못했다. 한국에선 어떤 교육을 하기에 저런 망종이 나왔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지경이다.
폭검가주가 분기를 드러냈다.
가문의 이름대로 폭검가주는 굉장히 호전적인 성향이었다. 그래서일까? 다른 가주들은 이번 전투에서 그가 가장 먼저 뒈질 줄 알았었다. 여태 살아 있는 것으로 보아 불같은 성향도 때와 장소를 가렸다.
“애송이가 겁도 없이 까부는구나.”
“방도를 안다고 했을 텐데.”
“진정이더냐? 그렇다면 우리가 납득할 방도가 아닐 시엔 네놈의 사지를 부숴도 불만은 없겠지?”
“거래란 쌍방인데, 납득할 만한 방도면 어쩌려고?”
“그만한 대가를 내주마.”
“말로만?”
“네놈이 감히!”
가주들이 합심해서 기세를 발출했다. 무형의 기운이 뭉쳐져서 하나의 거대한 살상 병기가 되었다. 닿기만 해도 내상을 입을 가공할 포화였다.
솨아아아아!
그러거나 말거나 무진은 할 말을 해 나갔다. 명성만으로 본인들을 믿으라고 하는데, 그런 상황이 아님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당신들은 일전 가문 내 암약하는 독버섯을 제거할 때 내준 정보료도 주지 않았어. 그뿐인가? 자식들을 구해 줬는데도 보상조차 없었지. 두 번이나 날로 먹었으면서 당신들을 무조건 믿으라고? 상대를 믿게 하려면 최소한의 성의라도 보여야 하지 않나? 그렇게 예의를 중시한다면 말이야. 내 말이 틀렸으면 반박이라도 해 보든가.”
“……이놈!”
반박 불가의 팩트 폭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