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6. 계약 성립(1)
일본의 황실, 정부, 십대검가는 대혼돈에 빠졌다.
내부에 다크니스와 연결된 끄나풀이 있다는 사실은 감지했지만, 이토록 광범위하게 거미줄처럼 촘촘히 연계되었을 줄은 몰랐다.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모를 만큼 깊이 관여되어 있었다. 특히 황실, 검가, 정부에 하나의 유기적인 시스템이 갖춰졌다. 한 곳만 타깃을 정해서 손을 쓰기에는 늦었다. 결국, 과감히 발본색원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착수는 은밀히 진행되었다. 내막이 알려지기 전까지 최대한 내부에 숨은 독버섯을 정리해야 했다. 시간이 많지 않았기에 속전속결로 처리해 나갔다. 다행이라면 배신자들보다 한발 빠르게 움직여 희생이 상대적으로 크진 않았다는 점이다. 정보의 중요성을 실감하게 하는 순간이었다.
문제는 이후였다.
황태자와 신왕들이 다크니스와 연결이 되었다. 그간 서로 반복했던 분쟁이 전부 다크니스의 농간이었다. 다크니스와 손을 잡고 행했던 미제 사건까지 들춰지면서 황태자와 신왕들의 평가는 바닥을 기었다.
다음 대 천황을 놓고 자웅을 겨루었던 황태자파와 신왕파는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덮고 가기에는 소문이 일파만파로 번진 상태였다. 더욱이 그간의 다툼이 우연이 아닌 계획적인 만행임이 밝혀지자 국민 여론은 불문곡직 엄벌을 요구했다.
특히 천왕의 암살에 황태자파와 신왕파가 동시에 가담했다는 정황이 드러나면서 일본은 충격에 휩싸였다. 다크니스는 둘 사이에서 줄타기하며 교묘하게 엮어 놓은 것이다. 따지고 보면 억울한 면도 없진 않으나, 천황의 죽음으로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
-황태자와 신왕들은 진실을 규명하고 반성해야 해.
-반성하면 끝나나, 이건 패륜이잖아. 다른 사람은 몰라도 황태자까지 이럴 줄은 몰랐다고!
-황태자가 반질반질하게 잘생기긴 했지. 이러면 관상은 과학이 아닌 건가?
-어느 하나의 잘못이 아니잖아. 황실, 검가, 정부, 재벌까지 연계가 되었다고.
-대일본 제국의 영광을 위해서라도 발본색원 후, 합당한 처벌을 내려야 해.
-진짜 믿을 놈이 없구나. 어떻게 나라를 팔아먹을 생각을 하지! 처벌이 아니라 처형이 필요할 때라고!
-맞아, 이런 것들은 할복도 아깝지.
여론은 잔잔하다가 갑자기 타오르며 과격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황태자파와 신왕파에 대한 강력한 처벌 규탄 시위가 일어났다. 국가의 명성에 먹칠한 그들을 단죄해야 한다는 명목이었다.
그런 와중에 새로운 빛이 떠올랐다. 스스로 영광을 버리고, 오욕을 뒤집어쓰고도 꿋꿋하게 일어난.
-폐하의 죽음을 밝힌 분이 공주님이었어. 적을 속이고,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기 위해서 오욕과 수모를 받고 계셨던 거였어.
-아버지의 죽음을 밝히려는 딸의 정성을 오빠란 작자들과 사촌들이 방해한 거구나!
-나 같으면 밝히지 못했을 거야. 우리 공주님! 홀로 고군분투하느라 그간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뿐이 아니야. 공주님은 암천회란 비밀결사대를 조직했고, 다크니스와 연관된 자들과 그 증거를 찾기 위해서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더라.
-황실, 검가, 정부, 재벌의 개혁을 끌어낸 공주님이야말로 이 시대의 등불이 확실해!
-게다가 천둥벌거숭이 같은 조센징을 조련해서 시선을 회피한 것을 보면 지략을 겸비하신 분이야.
-조센징은 광대나 다름이 없었구나. 이용당하는 줄도 모르고, 지가 잘하는 줄 알고 으스대더니 꼴좋다!
사람의 기억이란 진실만을 대표하진 않는다. 실제로 전후 사정은 중요하지 않았다. 결국은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미화하는 경향이 있었다.
당장에라도 아버지의 죽음을 밝힐 수도 있었지만, 대의를 위해서 참고 인내한 공주는 일본 국민의 영웅이 되었다. 자연스럽게 공주가 저질렀던 행동들 전부가 아름답게 포장되어 대의로서 천명되었다.
그와 함께 깎아내리기 좋은 대상도 있었다.
본인이 이용당하는 줄도 모르고 오만했던 한국에서 온 광대. 그간 공주의 평판을 떨어뜨렸던 일체의 사건들을 광대에게 뒤집어씌우며 조롱했다.
한국은 그걸 또 서둘러 뉴스의 헤드라인에 올려 여론을 부추겼다. 다만, 예상과는 다른 반응이었다.
-공주한테 당했구나. 고거 참 쌤통이다!
-이 새끼도 당할 때가 있어야지.
-그래도, 초대해 놓고 이용하는 건 아니지 않나?
-그것도 모르고 설친 놈이 바본 거지, 누가 당하래?
-이제 좀 정신을 차렸으면 좋겠다.
-그놈이 정신을 차릴 놈이면 진작에 달라졌지!
-그간 얹혔던 체증이 싹 내려가는 기분이다. 앞으로도 이랬으면 좋겠다.
-행복하다.
폭군을 조롱하며 광대 취급하면 한국에서 난리가 날 줄 알았던 일본으로선 예상과는 다른 반응에 당황하는 눈치였다.
-어째서 편을 안 들지?
-폭군의 악명이 한국에서도 대단한 모양이야.
-아, 재미없어. 반응을 해야 물고 늘어질 텐데!
-솔직히 한국 놈들이 아니라고 발악할 줄 알았거든.
-순순히 인정하는 데다가 같이 욕하니 이상하잖아.
-쩝, 아쉽다.
이러면 공주를 전면에 내세워 우월함을 과시하기가 힘들었다. 한국에서도 무시당하는 폭군을 일본이 무시했다고 우쭐할 순 없었다. 좋은 먹잇감을 놓쳤는지 아쉬워하는 일본의 여론이었다.
“사람 참 무안하게, 다들 너무하네.”
“타격감은커녕 일부러 유도하고서 그딴 소리를 해도 되는 거야?”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거지. 게다가 이용이라니? 너도 좋고, 여론도 좋고, 나도 좋고. 다 좋자고 하는 일이었잖아.”
“아까부터 돈 내놓으라고 한 주제에 누가 좋다는 거야? 국민들도 내막을 알아야 한다고.”
“그러니까, 언제 봤냐고. 이러면 나 엄청 섭섭해.”
“설득하는 중이라고 했잖아. 한두 푼도 아니고, 그걸 하루아침에 어떻게 마련해.”
조 단위의 액수였다.
황실의 이름으로 일정 부분 마련하고, 재계의 힘까지 빌려야 했다. 이에 더해 후원금까지 모금하는 중이다. 일이 잘 풀려서 그런지 몰라도, 긍정적 여론에 힘입어 짧은 시간 막대한 후원금이 쌓였다.
그럼 뭐 하냐고?
‘내 것도 아닌데.’
나는 거쳐 갈 뿐, 전부 무진의 수중에 들어갈 돈이다. 나중에 세금까지 계산하려면 머리깨나 깨질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그런 데다 아직도 갚으려면 한참을 더 모아야 했다. 늙어 죽을 때까지 빚에 허덕이는 공주로 남을 것 같았다.
일본을 구한 영웅이고 나발이고, 빚 좀 어떻게 하고 싶다. 늦을수록 이자까지 붙는다.
‘안 줄 수도 없고!’
아버지의 죽음을 파헤친 결정적인 증거를 무진이 찾아 주었다. 그 빚은 죽어서도 갚지 못할 큰 은혜였다. 최소한 받은 은혜를 갚아는 주어야 했다.
그마저도 외면한다면 배은망덕인데, 그보다 앞서는 건 무진의 강함이었다. 이 인간이 돈 안 주면 어떤 짓을 할지 보지 않아도 선했다. 지금 잘 살고 있는 역사적인 터전이 한순간에 날아가 버릴 수도 있었다.
설마는 사람을 잡는다. 무진은 지나가는 말이라고 변명하지만, 농담으로 치부할 수 없다. 태풍은 지나가도, 상처는 남기 마련이었다.
흠.
셈이 맞지 않자 마땅치 않은 무진이었다.
“검가에선 왜 이럴까. 성의라도 보여야 봐주지.”
“우리가 찾아낸 확실한 증거는 보상할 수 있지만, 네 활약상을 사실대로 전달하기는 여의치가 않다고. 너 같으면 생도가 가주들보다 훨씬 세다고 하면 믿을 수 있겠어?”
“지금이라도 믿게 해 줄까?”
“……하지 마!”
미츠키는 검가의 가주를 불러서 패고 있을 무진이 그려졌다. 저 인간은 돈 앞에서 경로사상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검가의 주인이라는 명패는 아무런 효력이 없었다. 괜히 뻗대다가 더 맞는 수가 있었다.
“황실 내부는 정리가 됐으니, 다행이지 않아?”
“……그렇지.”
황실의 어른들과 친위대에도 세작이 있었다. 배신자를 골라내고, 내부의 반발을 억누른 존재가 바로 무진이었다.
어떻게 억눌렀냐고?
‘명색이 황실의 큰 어른인데!’
미츠키는 물론 아버지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던 황실의 대부를 비 오는 날 먼지가 날리도록 두들겼다. 솔직히 믿어지지 않는 현실이었다.
다닐로프와 붉은 전갈을 처리할 때와는 달랐다. 그때는 긴가민가했지만, 황실의 대부를 팼을 때부턴 달랐다.
대부 이전에 황실 최종 병기였다. 나이가 들기는 했어도 여전히 현역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대단했다. 검가가 쉬이 황실을 넘보지 않았던 것도 대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엠페러나이트, 세이토 하나타.
멋진 이름만큼이나 나이가 들어도 신사의 검으로 불렸던 분이다. 황실 최종 병기로서 품위를 잃지 않으며, 항상 멋들어진 품새를 가지셨다.
그것도 무진을 만나기 전까지였다.
괜히 폼을 지키겠다고 검을 뽑았다가 황실에서 내어 준 ss급 ‘무사시의 검’이 반 토막이 났다.
-이놈, 감히 내 병기를!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거기는?
-나이도 있고, 이젠 쓸데없잖아.
-쓸데가 왜 없어~~~!
황실의 대부고 나발이고, 정신이 없이 처맞더니 울며불며 살려 달라고 무진에게 애걸복걸했다. 그 엄청난 광경에 황족들과 친위대는 얼어붙었다. 그 앞에서 누가 함부로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다행이라면 황실 내부의 기밀에 부쳐져서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게 알려졌으면 대대손손 황실은 능욕을 당했을 것이다.
“이건 안 사나?”
문제는 저 새끼가 보디캠으로 찍었다는 점에 있었다. 영상의 유출은 반드시 막아야 했다. 하지만 액수가 상상을 초월한다.
영상 하나 지우는 데 조 단위는 너무하잖아.
팔 생각이 없는 게 분명했다. 내 일 아니니 모른 체하려고 했으나 대부가 걸렸다. 노인네의 치부를 가려 달라는 간절한 부탁을 차마 외면하지 못했다.
“황실과 재계는 정리했지만, 검가는 아직 미진해. 그런 데다 암천회는 가문 내에서 영향력이 적어. 당장 돈을 마련하기는 힘들다고. 그러니까 오늘만 참아. 내가 최선을 다해서 설득해 볼게.”
“오늘 환검가를 칠 생각이군.”
“다른 가문 내에서도 다크니스의 끄나풀이 있기는 해도, 환검가는 다크니스 그 자체라고 봐도 무방하니까. 이번 기회에 환검가를 정리하는 선에서 타협하려는 것 같아.”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은 어딜 가나 똑같구나.”
“검가가 무너지면 본국은 세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돼. 이권을 놓지 않으려는 욕심이지만, 이해타산을 마냥 나쁘게만 볼 수는 없어.”
“그거야 너희들 선택이지.”
돈 앞에서 조바심을 냈던 모습과는 다르게 대수롭지 않은 무진의 반응에 미츠키는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이 새끼가 얌전히 있는 것부터가 사실 이상했다. 그간 나대지 못해서 안달이었는데, 그 이후로는 돈 달라는 투정 빼곤 조용히 지냈다.
말이 나와서 말이지, 언론에서 시도 때도 없이 대놓고 조롱하는데도 ‘너희들은 짖어라, 나는 외화벌이 중이다’였었다. 실제로 엄청난 국부 유출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불안했다.
더 많은 국부를 유출할 것 같아서.
“뭔가 있구나.”
“응.”
“그래, 아닐…… 있다고?”
“당연하지.”
“어째서?”
“다 잃게 됐는데 눈 돌아가는 건 인지상정 아닌가.”
“……그걸 왜 인제 말해.”
“물어보질 않았잖아.”
“망할!!”
미츠키는 울화가 치밀었지만, 검가가 먼저 무진을 배제했었다. 그런 주제에 지금 와서 말을 하지 않았다고 비난해 봤자 자기 얼굴에 침 뱉는 격이었다.
“그러게, 모르면 물어보기라도 할 것이지, 쯧쯧쯧!”
미츠키는 일단 전화라도 해 보기로 했다. 이제라도 사태의 전말을 알 필요가 있었다.
떠그럴!
배는 떠나고, 연락은 두절되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겠지?”
“전멸당하면 무소식이지.”
미츠키의 희망 사항을 무참히 짓밟아 버리는 무진이었다. 저 인간의 무심함과 태연함에 화가 치밀었다. 사람의 목숨이 걸려 있었다. 고작 자존심 때문에 입을 다물다니, 너무한 처사였다.
“너나, 나나 말해 봤자 저들은 듣지 않을 거다. 아니냐?”
“그거야.”
너희들론 안 되니, 손을 빌리라는 소린데.
검가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발언이었다. 무진의 발언 따윈 선택에선 중요하지 않았다. 검가는 결단을 내렸을 테고, 당장은 물러서지 못한다.
‘이 괴물 같은 놈!’
무력을 떠나 귀계가 말도 못 했다. 어차피 안 되긴 했을 거다. 돌아가는 경위를 알기에 입을 다문 것이다. 무의미한 설전에 불과할 테니. 겪어 보지 않은 이상, 검가가 순순히 따를 리 만무했다.
여론을 의식해서라도, 공적을 세우려고 혈안이 되었을 터. 귓등으로라도 들으면 다행이었다.
배신자를 색출하는 과정이 순탄한 것도 한몫했다. 자기들이 잘나서 성공적인 줄 아는 것이다. 그 모든 정보를 무진이 내어 주지 않았다면 적지 않은 피해를 보았을 텐데도.
‘제발, 무사해라!’
미츠키로선 검가의 희생이 최소화되기를 바랐다. 그들이 비록 잘하진 못했어도, 일본을 위해서 꼭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