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류최강 남사친-335화 (336/374)

335. 방관자(5)

진심이라고는 한 톨도 느껴지지 않는 AI 목소리처럼. 말로만 동조한다고 할 뿐, 암천회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실제로도 오늘 처음 본 연놈들이다. 생판 모르는 남을 위해 자기희생을 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오싹!

암천회는 느꼈다. 어쩌면 자신들이 다크니스를 증명하기 위한 희생양으로 선택되지 않았나 하는. 이 일이 외부에 알려진다면 다크니스는 일본에서 발을 붙이지 못한다.

목적을 위해 사람을 소모품으로 여기는 섬뜩한 계획이면서도, 일거양득의 계책이었다.

“뭐 하는 거야, 이 씨발 놈아! 어서 개입하지 못해! 원하는 건 전부 해 주면 되잖아. 계약이고 돈이고 나발이고! 내가 이대로 해 보지도 못하고 죽으면 처녀 귀신이 되어서도 널 용서하지 않을 거야!”

……?

창고 안에 일순 정적이 흘렀다.

생사가 걸렸다고는 하나, 다른 누구도 아닌 공주가 저딴 폭언을 할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인간은 벼랑 끝에 몰려 봐야 본성이 나온다고 하더니, 공주의 본성은 완곡한 호박씨였다. 저 정도면 신데렐라가 타고 다녀도 되겠다.

씨익!

무진이 미소를 지었다.

듣고 싶은 발언이다.

백지 약속.

빠각!

무형무음.

움직임도, 소리도, 반동도 없다.

그런데 나타난다.

무진은 아키코의 팔을 자른 붉은 전갈의 머리를 부숴 버렸다. 언제, 어떻게가 빠진 육하원칙을 무시한 움직임이었다. 창고의 벽면에 기대고 있던 무진이 아키코의 뒤에 서 있었다. 마법이었다면 마력파동이라도 생겼을 텐데.

착!

잘린 팔을 들어서 피가 흐르는 어깨에 맞추었다.

아키코가 조립 프라모델도 아니고. 일본이 아무리 프라모델 대국이라도 이건 좀.

“붙어라.”

본드냐?

그런다고 붙게?

어?

붙네.

왜?

저게 붙을 수 있는 건가?

무진은 아키코의 팔을 쓰다듬으며 주술처럼 속삭였다.

“움직여라.”

아키코는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잘렸던 팔을 접었다 폈다 했다. 절단면이 깨끗해서 봉합 수술을 한다면 재활이 가능하긴 해도. 그냥 갖다 붙이고, 움직이란다고 움직일 수가 있는 건가?

그런데 또 움직였다.

기적이었다.

무진이 설령 사이비 교주라고 해도, 두 손을 모아 기도를 올리고 싶게 했다.

“나았어!”

아키코도, 암천회도 기적에 말문이 막혔다. 거짓말 같은 일이 현실에서 벌어진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퍼퍼퍼퍼퍼어엉!

무진은 재차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타났다를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붉은 전갈은 머리통에 시한폭탄을 심은 듯 폭죽처럼 터져 나갔다.

퍽, 털썩!

100명에 달한 붉은 전갈이 머리 없는 시체가 되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촌음도 길었다. 암천회가 죽을 둥 살 둥 해도 일방적으로 밀리다 역으로 제압된 것과는 완연히 비교되었다.

스윽!

움찔!

주검 속에서 무진이 암천회를 무심하게 보았다.

암천회는 마른침을 삼키며 떨었다. 격이 다른 이질감이 전해졌다. 강함의 차원이 다르다. 그런 자를 조롱하고, 배척했었다니 살아남은 것이 기적이었다.

무진이 말없이 계속 빤히 바라보자.

“오해예요. 우린 시노스케와는 뜻이 달랐어요!”

“맞아요, 미토시의 언행이 심하긴 했어요!”

“우린 당신을 환영합니다, 아리가또 구다사이!”

“뇌검가와 수검가는 처신을 잘했어야 했습니다.”

한순간에 역적이 되어 버린 시노스케와 미토시는 억울했다. 다 같이 뜻을 모으자고 하더니, 이제 와서 자신들을 팽시킨 것이다. 다가오지 말라며 벽을 치는 행동에 어이를 상실할 지경이었다.

“지금 그게 할 소리야! 내가 언제 나 혼자…… 우욱!”

“아닙니다. 조또마떼 쓰미마셍!”

시노스케와 미토시가 행여나 헛소리를 지껄일까, 암천회는 그 어느 때보다 신속히 입 구멍을 차단했다. 따지고 보면 한심한 작태지만, 무진의 가공할 무력을 본 이후로 정당성이 부여되었다.

세상은 시대를 막론하고 언제나 강자존이었고, 억울해도 약자는 고개를 숙여야 했다. 그것이 일본의 진리였다. 약한 주제에 설치는 것은 강자를 모욕하는 행위였다. 반드시 강자를 알아보고 공경해야 했다.

저벅, 저벅!

무진이 천천히 걸어와 암천회 앞에 섰다.

“고자이마스.”

“예?”

“아리가또 고자이마스라고, 일본어도 몰라?”

“……아!”

“조또마떼 구다사이라고 해야지.”

“……친절히 알려 주셔서 가문의 영광입니다!”

사람이 당황하면 실수할 수도 있지, 어순이 틀렸다고 굳이 지적할 필요가 있나 싶다. 그것도 주검의 시산혈해 속에서.

정상적인 범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난해한 정신세계였다. 그래서 더 무섭다. 언제든 미친 짓을 당연하게 할 수도 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광인을 범인의 기준으로 해석해 봤자 의미가 없다. 하물며 미친놈이 강하기까지 하면 답이 나올 리가 있나. 그걸 분석하겠다고, 현미경을 들이대 봤자 고장 수리비만 더 나온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자, 미츠키가 나섰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자신은 암천회주였다.

“지금 그딴 걸 따질 때가 아니잖아.”

“다 들어주겠다는 말, 진심이겠지? 혹시나 몰라서 녹음했다.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약속은 중시하는 편이거든. 혹, 맘이 안 좋으면 에도성이 사라질 수도 있어.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 안 그래?”

미츠키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정신이 없어서 마구 지껄였는데, 되짚어 보면 공주로서 할 언행은 아니었다. 기억에서 지워 버려야 할 흑역사가 또 하나 생겼다. 레드 썬을 사용해서 모두의 기억을 지워 버리고 싶어질 지경이다.

그렇다 쳐도, 약속 안 지킨다고 황실을 날려 버리겠다니. 농담으로 들리지 않아서 섬뜩했다.

“아까 그 새끼…… 그놈 도망쳤잖아.”

“그러네.”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면 너한테도 좋지 않을 거야!”

“알아.”

붉은 전갈을 지시했던 다닐로프는 자리에서 사라졌다. 가장 강했던 자가 싸우지도 않고, 도망칠 줄 예상하지 못했다. 이번 일이 놈들에게 알려졌을 때의 파문이 걱정되었다.

미츠키와 암천회의 심정과 달리 무진은 초지일관 태연했다.

“나가자.”

무진이 먼저 창고 밖으로 나가자 암천회가 조신하게 뒤를 따랐다. 창고에 들어왔을 때와 나갈 때가 상전벽해였다.

꽈아앙!

푸아앙!

창고 밖 멀지 않은 지점에서 폭발음이 들렸다. 어둠 속 어딘가에서 누군가 대량의 마력을 발출하고 있었다.

“결계를 조금 손봤지.”

“뒤에서 따라온 이유가?”

“만약을 대비하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지.”

“평소에 뭘 하기에?”

미츠키와 암천회는 오싹한 전율에 몸을 떨었다. 이런 사태가 될 줄 미연에 알았다는 뜻이 아닌가. 철저하게 무진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난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이번 작전을 위해서 자신들도 최대한 은밀하게 행동했다. 대체 어떻게 알고 있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처음부터 함정에 빠질 줄 알았던 거야?”

“당연하지.”

“어째서?”

“내가 나서지 않았으니까.”

너희들이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봤자 소용없다는 확신이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그 위에 있었다. 무력도 심계도 차원이 다른 천외천이 아닐 수 없다. 과연 저 인간을 일본이 감당할 수나 있을까. 미국에서 핵을 처맞고 설설 기었던 시절보다 더 암울해졌다.

크아아앙!

울부짖음이 들렸다.

마력을 퍼부어도 안 되자 이성을 잃고 날뛰었다. 어떻게든 빠져나겠다는 결의가 전해졌다. 안타깝게도 결계 안의 무의미한 발버둥이 되었다.

“누클리어 벙커가 참 궁금하다.”

“……설마?”

“내가 아니었으면 너희들이 거기 들어갔을 텐데. 이대로 끝내도 괜찮겠어?”

“아니! 받은 대로 돌려줘야지!”

미츠키와 암천회는 적극적으로 동조했다. 정확히는 몰라도, 끔찍한 실험을 자행했을 것이다. 한편으로 무진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면서도 소름이 돋는다. 저항하면 고대로 갚아 주겠다는 협박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통발을 확인해 볼까.”

무진은 결계 안으로 들어갔다가 바로 나왔다.

달라진 게 있다면 목이 잡힌 해 허공에서 발버둥을 치는 사내의 모습 정도.

바동바동!

부르르르!

다닐로프는 악몽을 꾸는 기분이었다. 넘버4, 5가 죽고 난 후 잔뜩 경계하고 있었었다. 그런데도 움직임을 보지 못했다. 흐릿한 잔상도 남기지 않고 붉은 전갈을 몰살시켰다.

이런 괴물이 일개 생도라니, 믿기 힘들었다. 어쩌면 생도로 위장하여 조직을 무너뜨리려는 대적일 수 있었다.

다닐로프로선 사실을 알려야만 했다.

괴물을 죽이는 일보다 시급한 사안이었다.

다행히 수하를 희생시켜 기회가 생긴 줄 알았지만, 그마저도 희망 고문에 불과했다. 애초 결계에 장난질을 쳐 놓고 도망칠 수 있도록 길을 터 준 것이다. 결국 놈의 손바닥 위에서 발버둥 치다 허무하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억울하고, 분했다.

되갚아 주지 않고서는 분이 풀리지 않는다.

“……마스터께서 네놈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드 마스터가 올 줄 알았는데, 연이은 실패로 바통을 터치했거나 등쌀에 못 이겨 지분을 내줬겠어.”

“……네놈은 대체 뭐냐? 어떻게?”

“찍었는데.”

“……죽여 버리겠다! 네놈도 네 가족도 전부 다 죽일 테다~~~!”

무진의 심리전은 다닐로프뿐만 아니라 암천회도 벌벌 떨게 했다. 저게 사람이 할 짓인지, 철저하게 농락하고 있었다. 만약 자신들도 당했다면 버텨 낼 수 있다고 장담하지 못했다. 다닐로프의 심정이 이해되는 걸 보면 말 다 했지.

“어이구, 무서워라. 말을 너무 무섭게 한다.”

누가 누굴 무섭다고 하는 건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발악하는 다닐로프보다 엄살 부리는 무진이 더 악당 같았다. 사태의 전말을 알지 못하면 오해하기 딱 좋은 구도였다.

“기억 좀 보자. 그래도 되지?”

“내게서 아무것도 듣지 못할…… 흐어어어어엉!”

“꽤 많은 걸 알고 있었네. 친절한 도움 잊지 않을게.”

“……안 돼……. 안 된다고…… 차라리 날 죽여!”

“금제가 발동하지 않도록 살살 볼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 괴물…… 제발 죽여 줘~~!”

남의 집에 무단 침입 후 태연히 삼겹살을 구워 먹다가 주인이 오면 빨리 와서 마저 구우라고 할 놈이다. 보여 주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쳐도 기억을 강제로 엿보고 있었다. 저항하는 것치고는 다닐로프의 반응이 지나치게 절박하다.

‘금제도 안 통한다는 건가?’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저런 건 본 적이 없다고!’

‘엄마, 나 무서워!’

‘여기 오지 말걸!’

사람의 기억이란 예민하고 복잡해서 함부로 들여다볼 수 없었다. 그것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상식이지만, 무진 앞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몰래 건전한 야동을 보다 걸린 듯,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슥!

휙휙!

무진이 살짝살짝 고개를 돌릴 때마다 암천회는 대차게 눈을 꺾었다. 치부를 들키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는 혈기 넘치는 젊은 남녀였다.

추우우우!

뜨거운 아스팔트에 말라비틀어진 개구리처럼 다닐로프는 기력을 전부 잃었다.

“복수할 기회를 줄게.”

“……안 돼!”

다닐로프는 가지 않으려고 발악하지만, 힘이 실리지 않았다.

무진은 비밀 기지 내부에 있는 누클리어 벙커의 문을 열었다. 마물의 폭사로 찌든 피 냄새가 났다.

다닐로프를 넣고 닫았다. 곧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지만, 초인이 되는 과정으로 치부했다. 고통 없이 초인이 되지는 않을 터. 안에서 변신 중인 마물과 혼합돼도 괜찮다.

탓탓!

무진이 밖으로 나와 홀가분하게 손을 털자 암천회는 기겁했다. 오늘 하루 죽인 사람의 수만 해도 족히 100명에 가까웠다. 그런데도 심적인 압박을 보이기는커녕 오늘내일과 같았다.

“증거 수집부터 하자.”

“제가 돕겠습니다!”

“저도 할 수 있어요!”

“오늘 밤도 잘해요!”

무진에게 반감을 품었던 초심과는 다른 적극성이었다.

불량 학생들이 반성하고 회개하여 훌륭한 사람이 되었듯. 올바르고 굳은 의지와 적극성을 보여 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특히 시노스케와 미토시의 적극성이 눈물겨웠다.

‘다들 눈 밖에 나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는구나!’

저 꼴을 보려고 암천회의 회주를 맡은 건 아닌데. 미츠키는 삶에 회의감이 들었다. 이런저런 사건 사고가 잦아도, 결국에는 힘이 강하면 장땡이었다.

“그 적극성, 높이 사지.”

“아리가또 고자이마스!”

“진정성이 있구나.”

“여부가 있겠습니까, 쓰미마셍, 스미마셍!”

이제야 일본인다워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