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8. 연막(1)
하아!
한숨을 대체 몇 번이나 쉬는 거야? 이러다간 가는 곳마다 땅을 파고 다니겠다.
미츠키는 사이트마다 1면을 장식한 인터넷 기사에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이렇게 될 줄 어느 정도 예상했음에도 감당하기가 벅차다.
한편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굳이 이런 짓까지 해야 하는 건지, 일전의 일로 충분하지 않은 건가.
‘그리고 여긴 또 왜 온 거야?’
필요할 때는 연락도 안 되는 인간이 갑자기 찾아온 것부터 불안했었다. 어째서 시키는 대로 한복을 입고 나갔을까? 난 그런 타입 아니라고, 뭔가에 홀린 기분이었다.
대놓고 한류 빠순이 짓을 하는 바람에 평생 사람들의 뇌리에 박제되어 이불킥 할 흑역사가 되었다.
최대한 심신의 안정을 취해야 했다. 이런 기분으론 냉정한 판단이 어려웠다. 주변의 돌아가는 흐름이 심상치 않았다. 조금만 방심해도 최악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왠지 찜찜하다.
-강무진 군이 찾아왔습니다.
한국식 속담에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하던데, 아니나 다를까 잘도 찾아왔다. 에도성의 무료로 개방된 공간을 제외하면 길도 잘 모를 텐데. 더욱이 손님방에서 오오쿠까지 오려면 황실 경호팀을 거쳐야 했다.
드륵!
무진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 왔다.”
“벌써, 어떻게?”
“이거 줬잖아.”
“아, 그렇지.”
황궁의 허락된 구역을 제외하면 일반인은 철저히 검열한다. 각성의 시대가 되면서 경계가 강화되었다. 하지만 황실의 은인에게 주어지는 황실패 중 은패 이상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황실의 가족과 비슷한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특히 테마파크, 공원, 주차장까지 포인트 카드와 잘 연계하면 최대 90%까지 할인도 가능하다.
“잠깐, 그걸 보여 주면서 내 방까지 왔다고?”
“그런데?”
“오늘 볼 거였으면, 언질이라도 해 줬어야지!”
“쓰라고 줬으면 언제 쓰든 내 맘이지.”
미츠키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황실패는 개인적으로 무진에게 준 사례였다. 황실패엔 식별 일련번호에 따른 문양이 달라서 주인이 누구인지 모를 수가 없다.
황실패를 내보이면서 여기까지 왔다면 무진에게 황실패를 주었다고 대놓고 광고를 한 격이다.
일국의 공주가 한국 남자에게 홀려 시중을 든다고 말들이 많은데, 황실패까지 주었다면 어떤 말이 나올지 뻔했다.
“황궁엔 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족속들이 한 트럭이라고!”
“미안.”
“……씨발, 미안하다면 다야!”
“이미 벌어진 일을 가지고 후회해 봤자 시간 낭비고, 사과했으면 받아 줘야지. 안 그래? 내가 미안하다잖아.”
이게 미안하단 인간의 태도가 맞아?
하나도 미안하지 않으면서 입으로만 나불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지난 일을 가지고 왈가왈부하지 말라는 확언까지, 성질을 제대로 돋워 주었다.
“그건 됐다 치고,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황실 보고에 들어가려고.”
저녁에 찾아와서 황실의 보고를 이용하겠다니. 게다가 허락을 구하는 태도가 아니라 통보에 가까웠다. 마치 제 물건을 맡겨 놓고, 내놓으라는 듯했다.
황실의 정규 일정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다. 황족만 있는 것도 아니고, 처리하는 인원은 공무원이다. 당직은 서겠지만, 일과가 끝난 다음이라 절차가 복잡해진다.
“내일 해도 되는 일이잖아.”
“내일은 도쿄 구경해야지, 일정 꼬이지 않게 테마파크 위주로 섭외해 놓도록 해.”
“안내를 나보고 하라고?”
“그럼 누가 하냐? 참고로 난 낯을 가리는 편이다.”
“그냥 혼자 다녀! 한국인들 도쿄에 자주 오잖아. 내가 모르는 곳도 다 알던데.”
“난 몰라.”
진짜로 아무것도 모르게 해 주고 싶다. 저 대가리에 극강격의 광야포를 날리면 되는 일이다. 교류전 이후로 전신류의 성취가 진일보했다. 대회장에서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았으니, 최소한 한 대 정도는 되돌려 줘도 괜찮잖아.
“꼭 내가 해야 해?”
“할 때는 확실하게 하는 편이 나아. 괜히 어중간하면 나중에 억울하기나 하지.”
“황위 계승권에서만 멀어지면 되지, 이젠 황궁에서도 쫓겨나게 생겼잖아.”
“이제부터는 야인처럼 편하게 살아.”
“자기 일 아니라고 막 말하는 것 보소!”
“내 일이 아니니까, 편하게 말하는 거야.”
필터링을 거치기는커녕 너무 솔직해서 말문이 막혔다. 말투조차 화를 내는 게 아니라 평이해서 더더욱 띵 받게 했다.
일개 생도에 불과한데, 한국 언론에서 왜 그렇게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이 새끼는 사람의 속을 근원적으로 흔들어 대는 천성을 타고났다.
쓰읍, 하아아아!
미츠키는 인내심을 발휘했다. 화가 나는 것과 별개로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다.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욘 없지만, 확실한 사후 보장 서비스였다.
“보고 이용은 승인부터 받아야 해.”
“언제 되는데? 내일 테마파크는 갈 수 있는 거지?”
“절차상의 관례니까, 아침까지 될 거야.”
“괜히 왔네.”
이 빌어먹을 인간이!
이 지랄을 떨고서 할 소린가? 동네방네황궁에 소문을 내고선 저따위 태도를 보이다니. 신속히 이 인간을 내보내고, 이너피스를 얻고 싶어졌다.
-타쿠토 왕자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오늘 진짜 마(魔)가 꼈나?
미츠키는 골이 지끈거렸다.
한편으로 예상된 일이기도 했다. 이 좋은 빌미를 그대로 넘어갈 위인이 아니었다. 전통적으로 황실의 직계, 천황의 자식이 아니면 왕자나, 공주로 간주되지 않으나. 황법이 바뀌어 천황의 형제, 자매와 연을 맺은 조카에게도 황위 계승권을 주게 되었다. 이는 각성자의 혈통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지나치게 폐쇄적일수록 황족의 능력치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타쿠토는 미츠키보다 세 살 위다. 능력은 나쁘지 않은 편이지만, 사고를 치는 바람에 황위 계승권과는 멀어졌다. 어지간한 사고가 아니라면 조용히 넘어갈 수 있었으나, 생도 특수폭행으로 뉴스의 1면을 장식했었다.
반면 얼마 전까지의 미츠키는 황족의 일원으로 다음 대 천황이 될 자질을 갖추었다는 평가를 받으며 승승장구했다.
타쿠토는 열등감 때문인지 몰라도, 알게 모르게 신경을 건드렸었다. 그러다 같은 처지가 되자 더욱 노골적으로 나오고 있었다.
불쑥!
자기 집처럼 숙녀의 방 문을 열고 들어왔다. 굉장히 무례한 행동임에도 타쿠토는 거리끼지 않았다.
씨익!
비릿한 조소를 머금었다. 인중에 히틀러 수염이라도 있었다면 전형적인 일본인이었다. 혼혈이 많아지는 추세긴 해도, 황실은 비슷한 신분과 혼인을 하기에 달라지진 않았다.
“대일본 제국의 황족으로서 체면도 잊고, 천한 조센징 따위와 정분을 나누다니! 이 오빠로선 통탄을 금치 못하겠구나!”
“뭐야, 이 쪽바리는?”
……?
오해하지 말라고 항변하려던 미츠키도.
동생을 조롱하며 즐기려던 타쿠토도.
말문을 막히게 하는 폭언이었다.
나라님 없는 자리에선 욕도 하는데. 한국 내에서 자기들끼리 비하했다면 그럴 수는 있다.
여긴 일본이며, 황궁이었다. 이 안에서 일본 황족의 면전에서 저딴 망언을 하다니, 이이제이를 넘어선 미친놈이 아닐 수 없었다.
“네놈, 정녕 죽고 싶은 것이냐?”
“됐고, 한 판 붙을래? 승자에게 1,000억 어때?”
“정신 줄이 나간 놈이구나. 너는 이런 미친놈한테 정을 준 것이냐?”
“쫄리냐? 쫄리나 보네. 하긴 쪽바리가 그렇지 뭐.”
정신 나간 놈과 대화하기보다는 미츠키를 끌어들여서 화살을 돌리려고 했거늘. 타쿠토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애초에 미츠키를 조롱하려고 찾아왔었고, 조센징은 유흥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하찮은 조센징이 면전에서 대놓고 망언을 내뱉고, 도발할 줄은 몰랐다.
“빌어먹을 조센징! 다시 말해 봐라!”
“똑똑히 들었으면서 뭘 다시 말해. 귓구멍이라도 뚫어 줘?”
“이 천둥벌거숭이 같은 조센징이 감히 나를 놀려! 그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
“무사하겠지. 계승권에서도 멀어진 잡것이 뭘 할 수 있는데?”
무진의 비릿한 조소는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말투며, 표정이며 그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이 완벽하다. 이 정도면 일본의 유명한 고승도 열불이 터져서 날뛰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부글부글!
위장이라고 하기에는 진짜로 하찮은 미물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타쿠토는 살아생전 처음 들어 보는 폭언에 잠시 넋을 놨다가 정신을 차릴수록 극대로했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과 파르르 경련하는 눈가가 이를 증명한다.
“그 말 책임질 수 있느냐? 오늘 일이 외부에 알려지면 본국과 한국의 외교는 치명타를 입을 것이다!”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인데?”
“네놈도 조센징이면서 그딴 식으로 말을 해!”
“망나니 주제에 누굴 걱정해.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네가 애국잔 줄 알겠다.”
한국과 일본의 수교가 망가질 수 있다고 협박하면 흔들리거나 걱정이라도 해야 하는데, 시큰둥하다. 저걸 연기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태연했다. 그러면서 너 따위가 외교에 무슨 영향을 줄 수 있냐고 비아냥거린다.
실제로도 그래서, 더더욱 화가 치밀었다. 마치 약점을 잡힌 채 농락당하는 기분이었다.
부르르르르!
타쿠토는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더는 화를 억누를 수가 없었다. 이런 모욕을 받고도 도전을 외면한다면 대일본 제국의 황자로서 간과할 수 없었다. 반드시 저 무도하고 무식한 조센징을 징치해야 했다.
“오냐, 붙어 보자!”
“이런, 황실의 혈통이라 끝까지 빼지는 않는구나.”
설마 진짜로 받을 줄 몰랐다는, 무진의 표정이 기가 막혔다. 일본인의 쓰미마셍 남발을 기대한 것처럼.
“미천한 조센징 따위가 황족을 능멸한 대가를 치르게 주마!”
“젠장, 괜한 짓을 한 거 같네.”
“이제 와 빌어 봤자 소용없다, 더는 봐줄 수 없느니라!”
“계승권에서 멀어져서 쭉정인 줄 알았는데, 기세가 대단하군.”
악랄하게 도발하던 무진이 움츠리며 뒤로 빼자, 타쿠토는 의기양양해졌다. 타쿠토도 아예 생각이 없지는 않았다. 교류전에서 활약했던 놈이라 실력은 있다고 봤다.
하나, 자신과는 나이 차이가 있었고, 황실의 보고를 통해서 영약을 복용했다. 황위 계승권에서 멀어지기는 했어도, 실력은 녹슬지 않았다.
“그럼 1,000억은 없던 걸로 하고, 정정당당하게 싸워 보자.”
“어림도 없는 수작 부리지 마라!”
“혹시, 계약서도 작성해야 하는 거냐?”
“나를 농락한 대가이니라.”
1,000억은 타쿠토 왕자에게도 적은 액수가 아니다. 아니, 엄청난 액수였다. 이놈이 돈이 많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 돈이 자신의 쌈짓돈이 된 듯 의기양양해졌다. 오늘 밤 주지육림의 환락을 즐기기로 했다.
허!
눈 뻔히 뜨고도 코가 베이는 장면이었다. 미츠키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일련의 과정이 정말로 말려들지 않을 수가 없는 악랄한 함정의 연속이었다. 같은 편인지 의심이 드는 광역 도발에는 미츠키조차 적아를 망각하고 광야포를 먹이고 싶어졌었다.
‘누구 편을 들어야 하는 건지, 원.’
타쿠토가 실력이 없지는 않지만, 무진은 알려진 것 이상으로 대단했다. 마녀에게 혼을 지배당할 뻔했을 때 모두를 구해 주었다. 교류전조차 나가 보지 못했던 타쿠토가 무진을 이길 리 만무했다.
이렇게 되니 타쿠토가 불쌍해졌다.
연속 도발로 도전에 응하게 만들고, 한 발 뒤로 빼서 안달 나게 했다. 타쿠토를 말려 봤자, 무진의 편을 든다고 타박이라도 듣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도움을 줄 수도, 받을 수도 없는 사악한 함정이 아닐 수 없었다.
후회해 봤자 늦었다.
이미 공간을 이용한 결투장이 개방되었다. 무진과 타쿠토가 마주하며 맹렬히 기세를 발산한다.
응?
제삼자의 보증을 위해서 미츠키도 무진과 타쿠토의 계약서를 보았다.
‘뭐야?’
액수는 맞는데, 단위가 KRW가 아니라 JPY였다.
깨알같이 적힌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일본에 왔으니 일본 환율을 따른다나.
미츠키는 이래도 되나 싶어 만류하려고 했으나, 대결은 끝난 지 오래였다.
쿨럭!
일격이었다.
타쿠토는 결투장의 투명 결계에 부딪혀 핏빛 줄기를 그린 후 바닥에 고꾸라졌다.
씨익!
무진의 해맑은 미소가 미츠키에게는 악마처럼 비쳤다.
“관광비 벌었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