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6. 재회(1)
[나는 괜찮다. 탑의 기현상은 나의 특별함을 보여 준 고귀한 증명이다. 고위 성좌의 선택으로 내 스텟과 속성은 몇 배로 상승했다. 나보다 더 긴 시간을 보낸 생도는 세계에 없다. 나야말로 최강의 각성자이자, 무인임을 보여 준 명백한 사례다. 반박 시 무조건 너희들이 틀렸다.]
SNS에 ‘잠자는 아카데미의 폭군’이란 해시태그와 함께 무진의 건강한 사진과 글이 올라왔다. 글 자체는 길지 않고 짧았지만, 임팩트 하나만큼은 상상을 초월했다.
탑 기현상으로 무진은 장기간 수면에 들었으나, 세간의 관심은 크지 않았었다. 세계는 탑의 기현상이 일어난 원인과 재발 방지 대책에 이목이 쏠려 있었다.
사람이든, 국가든 제아무리 유명해도 자기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끄기 마련이다. 관심도 본인에게 여유가 있을 때나 보일 수 있었다.
따라서 통상적으론 소외 대상이 되어야 마땅하나, 한국에서는 달랐다. 여태 무진이 해 왔던 짓거리, 순화해서 행동을 돌이켜 보면 파급력은 당연했다.
얌전히 있어도 부족한 판국에 자기가 먼저 나대니 여론을 뜨겁게 달구었다. 개인 계정에 달린 댓글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사진과 글에 좋아요 1만, 싫어요 200만, 20만 개가 넘는 댓글이 적혔다. 초당 방문자가 갑자기 폭증하는 바람에 계정이 다운되는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다.
-일어나기는 했나 보네. 난 또 죽은 줄 알았지.
-이거 어째, 쪽팔려서 일부러 잠자는 척한 거 아냐?
-한국인에게 아픈 것보다 쪽팔린 게 치명적이긴 하지.
-굳이 그럴 이유가 있나? 신기록을 세운 건 맞잖아.
-신기록인지, 공간이동 아이템을 쓴 건진 아무도 모르지.
-거기 있던 교장과 교관들이 눈뜬장님들이냐, 말이 되는 소릴 해!
-죽을 뻔했던 생도가 일어났으면 축하를 해 줘야지, 악담을 퍼붓냐.
-저딴 개소리를 하는데 축하하고 싶어지냐, 죽다 살아났으면 사람부터 됐어야지.
-천생 관종이 잘난 체 좀 했다고, 죽으라고 하는 인성은 뭐냐. 그게 그렇게나 죽을죄냐? 꼭 사람을 벼랑 끝으로 몰더라.
-관종에게 관심은 마약과도 같아, 히로뽕처럼 죽기 전엔 못 끊을걸.
세계기록 보유자임에도 무진은 탑의 기현상으로 피해를 본 생도로 언론을 탔었다. 성좌의 선택이 잘못되어 영영 일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기적적으로 일어났으면 격려받아야 마땅한데, 욕이 태반이었다.
기록을 세우고도 욕을 먹고, 사실을 전하면 쌍욕을 먹고.
따지고 보면 고귀한 증명은커녕 억울한 사례였다.
-폭군이 없는 사실을 말한 것도 아니고, 이 정도로 욕을 먹는 것도 신기하다.
-그간 해 온 짓을 보면 업보지.
-엄밀히 따지면 나쁜 짓을 하진 않았어. 오히려 아카데미를 위해서 좋은 일을 했지.
-어, 그런데 왜 다들 욕하는 거야?
-몰라서 묻냐, 재수가 없는 거지. 잘했어도 조용히 좀 있으면 알아서 칭찬할 텐데. 먼저 나대니까 여론의 열등감을 건드린 거지.
-결국, 무진이 존나 부러운 거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단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냐. 하물며 잘난 체 관종이 잘나가는 걸 두고 볼 익명은 많지 않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겸손과 겸양을 미덕으로 삼아서 유별나게 설치는 걸 경계했다. 누구 하나라도 특출 난 짓을 하면 간과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약점을 잡고, 트집을 잡아 자신들과 같은 자리로 끌어내리지 못해서 안달이었다.
어떻게 보면 무진이야말로 먹고, 뜯고, 맛보고, 씹고, 뱉기에 최적의 요건을 타고났다. 평범한 사람은 꿈도 꿔 보기 힘든 일들을 해 온 데다, 모두의 부러움을 살 만한 실력도 갖추었다. 그럼에도 무진에 대한 반감이 강한 연유는 겸양과 미덕이 없기 때문이다.
-약간의 물욕은 있어도, 무진 군은 그런 사람이 아닌데.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나는 무진 군의 진심을 믿어.
그러던 중 이름 뒤에 ‘군’을 붙이는 오타쿠적 특이한 댓글이 눈에 띄었다. 당연히 무진의 가족이나 친구냐며 욕이 달렸다. 내심 무진이 직접 달았을 수도 있다고 추측하는 사람들도 꽤 많았다. 보통은 이쯤이면 끝내야 하는데, 아니라는 반박 글이 이어졌다.
이를 수상히 여긴 네티즌 수사대가 나섰다. 프로필의 작은 사진이 전부임에도, 기어이 추적해서 정체를 밝혀냈다. 찾아낸 네티즌 수사대도 대단했지만, 댓글을 단 사람의 정체가 뜻밖이었다.
-헐, 일본 공주가 왜?
-이 새끼 친일파였어!
-댓글이 워낙 많아야지, 공주의 일방적인 구애잖아.
-국내로 부족해서 이젠 국제적으로 노는구나.
-권후는 어쩌고?
-말만 하면 사귀냐, 친구로 지내자는 거잖아.
-남녀 사이에 친구가 어딨어!
-모솔도 아니고, 친구가 왜 없어? 넌 남사친, 여사친도 없냐.
-응, 네 연인들 남사친, 여사친하고 5박 6일로 여행이나 가 버려라.
-남사친이고 여사친이고, 취하면 동물 친구더라.
교류전에서 안면이 있으니 연락처를 주고받았을 수도 있었다. 공주도 한류에 관심이 많고, 함께 사고를 겪었으니 이해는 되었다. 다만, 그 대상이 무진이란 점은 고개를 갸웃하게 했다.
한국에선 공주의 한때 일탈로 봤지만, 일본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자신들의 공주가 한류 팬인 데다가 한국 남자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탐탁지 않았다.
더더군다나 일본 내 기류가 심상치 않았다. 천황이 갑자기 죽으면서 차기 천황을 정해야 했다. 하물며 십대검가가 개입하면서 경쟁이 치열해진 상황이었다.
-일전에 도움도 받았고, 한국에 일본의 문화를 소개해 주고 싶었어요. 과거는 잊고, 서로의 문화가 발전된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바랐을 뿐이에요.
일본 내 여론의 질타가 심해지자, 공주는 에둘러 변명을 올렸다. 계정에서 한류 일부는 지우고, 사진은 비공개로 전환했다.
황실의 안정을 위해 자중해도 부족한 판국에 공주의 철없는 행실은 여론의 도마 위에 올라 내려오질 않았다.
한편으로 공주의 일탈은 안타까운 일이기도 했다.
세상이 변하면서 공주도 황위 계승권을 가질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교류전에서 자질을 보였고, 또래에선 적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여론의 집중포화를 받는 이상, 천황이 되기는 불가능했다. 자기 스스로 복을 찼다는 조롱 섞인 풍자까지 나왔다.
***
슈웅!
한계까지 끌어 올린 감각마저 왜곡하는 극한의 찌르기. 점의 점으로 벼린 날카로운 관통력은 영혼마저 꿰뚫어 버린다. 닿기도 전에 영혼이 관통하여 소멸하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슈슈슈슝!
일점일극(一點一戟)은 극점에서 창영(槍影)을 그리며 주요 부위를 노린다. 실로 완벽한 극쾌살수 마라십혈섬(摩羅十血閃)의 진의였다. 분영된 창극이 10개의 사혈을 노리는 사로(死路)를 완성했다.
이를 마주한 생도.
퍼퍼퍼펑!
회피하는 수세적인 방어와는 거리가 멀었다. 마라십혈섬과 정면충돌을 마다하지 않는다. 거울 치료처럼 권로십영(拳路十影)이 마라십혈섬과 충돌하며 미증유의 파문을 불러온다.
솨아아아!
깨진 유리잔처럼 피가 흐를 듯 섬뜩한 기파가 일대를 일그러뜨린다. 결투장의 결계가 임계점을 넘어 버릴 것처럼 위태롭다.
파파팟!
격돌은 멈추지 않았다.
오의가 막혔음에도 창로는 쉬지 않고 다음을 그린다. 생도도 지지 않고 권로를 유지하여 팽팽함을 완성한다.
치열함과 광폭함이 교차했다.
후아아아앙!
먹잇감을 노리는 사나운 맹수의 포효처럼 살의가 담긴 전력이 연거푸 부딪친다. 가까이 접근하기를 불허하는 창로와 권로였다. 때론 파격적이고, 때론 유연하며, 때론 섬전처럼. 패도무쌍이면서도 변칙과 변수에도 강했다.
푸아아아앙!
끝이 다가오지 않을 것 같았으나, 최후의 권격과 창격이 펼쳐졌다. 내외력이 합일을 이룬 극의가 경지와 맞물리자 강기를 완성했다. 격돌에 강기가 부서지며, 서로의 결의가 결투장을 뒤흔들었다.
휘이이잉!
피육을 갈아 버리는 광폭한 와류가 거짓말처럼 가라앉는다.
헐!
대결의 여파를 음미하는 두 사람과 달리 결투장 주변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생도와 교관의 결투였다. 누가 봐도 명확한 결과가 나와야 하거늘, 동수를 이루었다.
하물며 상대는 철혈십관의 일좌.
마라창 정명길 교관이다.
비록 일선에서 물러나 후학 양성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지만, 현역으로도 동수를 이룰 상대는 많지 않았다.
“놀랍구나, 이미 나를 뛰어넘었어.”
“운이 좋았습니다. 더욱이 아직은 넘었다고 할 정도는 아닙니다.”
“폭군답지 않게 겸손해할 필요 없다.”
“만족할 순 없으니까요.”
“하하, 나도 이젠 밀려날 물결에 지나지 않는구나.”
“제가 더 잘나가면 되는 겁니다.”
4학년이 되면 교관과 결투할 자격이 생긴다. 교관에게 인정받는다면 수업의 자율권을 준다. 4학년이 개인 훈련을 위주로 주 3일 수업을 한다지만, 자율권은 상징하는 바가 남다르다. 실제로 4학년이 되자마자 교관의 인정을 받은 경우는 일부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철혈십좌에 속하지 않은 일반 교관이었다.
‘지금도 이런데, 후일엔 적수가 없겠구나.’
정명길은 창대에 남은 흔적에 혀를 내둘렀다. 도저히 맨주먹에 당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권흔이었다. s급의 창에 내력을 둘러 어지간한 충격은 흔적도 남지 않거늘. 창대를 타고 들어온 전사경은 또 어떤가.
‘권왕께선 제자 복을 타고났나 봅니다.’
오만하기는 해도, 실력이 뒷받침되었다. 더욱이 권경에 담긴 결의는 가볍지 않았다. 아카데미의 폭군, 그보다 적합한 별호는 없었다.
“레알, 실제냐?”
“교관님이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알았던 거야?”
“우리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대체 무슨 성좌를 받았기에 사람이 저렇게나 달라져!”
“드래곤처럼 수면기에 들었던 것도 아니고!”
“이젠 졸업해도 되겠다!”
“현역으로 뛰어도 거의 백작급은 될걸!”
탑의 이상 현상으로 수면병에 빠졌다고 들었다. 기적적으로 수면에서 깬 후 개인 SNS에 개소리할 때까지만 해도 허세를 부리는 줄 알았다. 관종일수록 본인의 약점을 들키지 않으려고, 더 짖는다고 봤었다.
“어쩌면 우리도 가능할지도!”
“그래, 우리도 성좌의 선택을 받았잖아!”
“교관님도 일선에서 물러난 지 꽤 됐으니 나이는 못 속이지.”
“쉿, 듣겠다.”
“설마…… 죄송합니다!”
정명길 교관의 눈가가 꿈틀거리며 정확히 개소리를 지껄인 생도를 노려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결투장에서 떠났지만, 헛소리한 생도는 울기 직전이었다.
어울렸던 생도들은 최대한 거리를 벌렸다. 자고로 벌집은 옆에 두는 게 아니라고 배웠다.
‘이제 자유롭게 다녀도 되겠군.’
무진은 아카데미에 연연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 아카데미를 다닌 이유는 전적으로 성좌의 선택을 받기 위해서였다. 성좌가 어떤 시스템으로 양성되는지 알아냈으니, 굳이 아카데미의 수업을 들을 까닭이 없어졌다.
둘째로 개연성의 확보가 중요했다. 탑의 기현상으로 치부했겠지만, 여하튼 신기록을 세웠다. 성좌에게 많은 버프를 받았다면 현재의 성취가 이상하지 않았다.
‘받을 것도 있고.’
무진은 주변의 부러움을 사며 결투장에서 나왔다.
이후로도 교관과의 결투는 이어졌다.
3년간 쌓은 생도들의 실력을 확인할 목적도 있겠지만, 교관의 나태함과 방만을 경계할 목적도 있었다.
지수, 혜진, 유정이 교관의 인정을 받았다. 태수와 예슬은 6학년이라, 굳이 받을 필요가 없었다. 또한, 4인방과 상원이 선전하면서 생도들의 경쟁심을 부추겼다. 특히 상원의 성장은 의외로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드라마가 되었다.
솔직히 누구도 상원의 선전을 기대하지 않았다. 본인은 무려 2cm나 컸다고 자위했지만, 1학년 때나 지금이나 외형은 그대로였다. 주변과 비교하면 어중간한 실력이라, 교관과 접전을 펼칠 줄은 아무도 예상 못 했다.
-저 새끼도 하는데, 우리라고 못 할 건 없지!
-잼미니한테 지면 집에 가서 엄마한테 혼난다고!
-씨발, 마마보이도 할 수 있을 거야!
-근데, 쟤들은 왜 다들 성장이 빠른 거야?
-어떤 훈련을 하는 건지, 엄마가 알아 오라던데.
그러나 의지나 오기만으로 되는 일은 아니었다. 교관에게도 체면이 걸려 있는 사안이라, 최선을 다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