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1. 성좌의 시련(4)
솨아아아!
천하를 뒤덮는 패기였다.
그 자체로 만물을 짓눌러 버리며 압사한다. 감히 저항 자체를 불허하는 절대의 권능이었다.
“……성좌력만이 아니었어?”
“권능으로 우리의 기세를 제압했다고?”
“대체 어떻게 영력을 늘린 거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인정할 수 없어!”
저들의 해석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무진은 탑을 등반할 때마다 흐름을 읽어 나가며 진화를 이루고 있었다. 시간의 흐름은 모두에게 공평하지만, 그 시간의 활용과 성과는 상대적이었다.
무진은 시간을 허투루 사용하지 않았다. 성좌는 성좌력을 얻기 위해서 잠재력이 높은 각성자와의 계약에 중점을 두었다. 고위 성좌가 될수록 그런 경향이 강했다. 수양의 측면에서 보면 하위 성좌의 노력이 눈물겹다.
고위 성좌는 쉬운 길을 선택했고, 고단한 길은 기피한 것이다. 그들의 편의적인 선택을 탓하진 않는다. 인간이든, 성좌든 편한 걸 찾는 건 본능이었다.
더욱이 계약으로 얻는 수치가 수양으로 얻은 수치보다 높았다. 수양의 효과가 컸다면 계약에 목을 매는 성좌가 되진 않았을 것이다.
무진은 성좌력에 의미를 부여하진 않았다. 탑의 단계, 위로 넘어갈 때마다 탑의 흐름과 지식을 분석하여 방도를 찾았다. 탑은 성좌력을 얻는 지름길이지만, 진정한 의미의 삼라만상엔 어둡게 했다.
‘악마의 유혹이지.’
본인이 깨닫지 못하면 답을 알아내기 어렵다. 쉬운 길로 갈수록 성좌력에 매몰된다. 그렇다고 성좌력이 가치가 없느냐? 그건 또 아니다. 권능을 강화하고, 영력을 극대화하여 신의 영역에 도달하게 해 준다.
다만, 탑의 의도대로 흘러간다면 신 역시도 부속물에 지나지 않았다. 탑은 신조차 통제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것이 누군가의 의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탑의 진정한 목적이었다.
‘개체를 일일이 확인하진 않는 허점이 있긴 하지만.’
무진이 막대한 성좌력을 보유하고도 탑이 인지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진계로 분산했기 때문이다.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않듯, 각기 다른 자아에 성좌를 나누어 탑이 정한 총량을 넘지 않았다.
‘나눠 봤자 결국엔 나지.’
총량의 한계를 넘지 않지만, 결과적으론 무진의 총량으로 계산이 된다. 탑이 전 성좌의 성좌력을 통제하듯. 성좌력을 전부 합한다면 초월급에 도달하고도 남을 것이다.
‘성좌력이 속성 부여에는 직빵이지.’
마나의 속성.
정령의 속성.
오러의 속성.
속도의 속성.
파워의 속성.
등등.
각각의 무한한 속성들을 증폭하여 한계를 초월하도록 해 준다. 무진계의 자아가 가진 각각의 속성에 성좌력을 부여하여 하나로 합했다.
두드드드드!
그 힘의 여파는 보는 그대로였다.
만상패도력.
무진의 성향과 합일되어 총량이 발휘되자, 고위 성좌들은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적 불가.
개개인의 무진이 합일되어 압박을 가하니, 고위 성좌들은 수적인 우위를 느끼기는커녕 한없이 초라해졌다.
자존심이 상했을까, 발악하듯 소리쳤다.
“……우릴 겁박하려는 것이냐!”
“하위 성좌 따위가 탑의 법칙을 어기고서 무사할 것 같아!”
“지금이라도 무릎을 꿇고 경건히 조아리거라!”
“고위 성좌의 위대함을 보여 주마!”
그들도 엄연히 수십만 년을 수련하여 성좌가 된 자들이었다. 권능에 지배되어 조아리진 않았다. 고위 성좌로서의 프라이드가 성좌력을 끄집어냈다.
씨익!
고위 성좌의 저항에 무진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고작 권능에 지배되었다면 실망했을 것이다. 무한의 마나를 바탕으로 하여 4원소의 마력에 권능을 담아 보고 싶었다. 가능성을 시험하는 장소로서 고위 성좌는 적격이었다.
부디 오래 버텨 주기를.
화르르르르!
화염이었다.
청염도, 백염도 아닌.
시뻘건 불길이 치솟아 공간을 덮친다. 피할 곳은 존재하지 않았다. 일대를 뒤덮은 불길은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현신하여 모양을 갖춘다.
후아아앙!
드래곤의 화염 브레스.
“……뜨겁잖아!”
“……어째서 막지를 못해?”
“권능을 녹였어?”
“성좌력을 담았는데!”
고위 성좌들은 성좌력을 한데 모았었다. 일대를 뒤덮은 화염이 대단해 보이긴 해도, 물의 권능을 증폭한다면 능히 치워 버릴 수 있었다.
그래야 하는데, 물의 권능은 닿기도 전에 증발해 버렸다. 되레 완전히 소멸했다.
극대멸절화염.
“이토록 무지막지한 소멸력이라니?”
“소멸력도 권능의 일부이거늘!”
“……이렇게나 차이가 난다고?”
“우리 설마 뒈지는 건가?”
품위를 고수하려고 했던 고위 성좌들의 얼굴이 다급해졌다. 성좌력을 빼앗기기 전 불에 타 죽을 수 있다는 공포가 밀려왔다. 적염에 실린 권능은 백염을 아득히 능가했다. 만물을 정화하기 귀찮은 소멸의 권능이었다.
크아아아악!
저항할수록 고통은 증폭했다.
뜨겁다.
뜨거워서 미칠 지경이다. 타 죽는 고통이 이다지도 무섭단 말인가.
더는 버티기 힘들다.
우웅, 팟!
불길이 사라졌다.
권능의 약발이 떨어졌나?
“더울 땐 빙수가 제일이지.”
……뭔 소리야?
맞는 소리 같은데, 고위 성좌들은 위화감을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불길이 사라지고 설풍이 휘몰아친다. 극과 극을 달리는 변화에 대응조차 못 했다.
“……춥잖아!”
“……얼어 죽는다고?”
“……왜 동상이 걸려!”
“……염화를 발동…… 컥!”
뜨겁다, 추웠다.
소멸하기 딱 좋은 형태였다.
무진은 여기서 끝내지 않고 전 속성을 하나씩 시험해 나갔다.
땅, 금속, 뇌기, 바람 등등 속성별로 실험한 후, 연계했을 때의 위력을 확인했다.
이놈, 설마?
성좌들은 깨닫는다. 자신들을 상대로 반응을 살피며 속성력을 확인하고 수정하고 있다는 걸.
울화가 치밀었다.
“우리를 가지고 노는 것이냐?”
“억울하면 분발해야지.”
회복을 걸어 주고 있었다. 고위 성좌들로서는 복장 터지는 현실이었다. 자신들을 한낱 실험실의 쥐새끼로 취급하고 있었다. 언제 이런 취급을 받아 보았던가. 고작 자신들이 내어 주는 버프에 의존했던 도구에게 역으로 철저하게 농락당하고 있었다.
“정신 계열 들어간다.”
“우릴 조종할 수 있…… 내가 누구?”
“이봐, 정신 차려…… 나는 누구?”
“그따위 허접한 마인드 컨트롤에 당하…… 나는 누구?”
‘Who am I?’가 늘어나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무진의 꼭두각시로 전락할 판이다. 그러다가 자칫 희생의 가호라도 하는 날엔?
“8할로 가자.”
하위 성좌들이 열광할 발언이었다. 오랜 세월 고위 성좌에게 당했던 분풀이를 대신 해 주고 있으니 그럴 만했다.
“이런 날강도…… 같으신 분이 있나. 어서 가지고 가세요.”
“……정신 조종으로 나를 농락할 순 없다…… 커어억!”
순순히 정신 조종에 응하면 희생의 가호로 끝나지만, 저항하면 물리력이 동원되었다.
멱살 잡힌 채 얼굴 처맞아 봤나?
이게 아픈 것도 있는데, 기분 참 좆같다.
퍽퍽!
꾸웩!
성좌나 돼지나 맞다 보면 결이 같다.
심권의 극의에 도달한 권격이 심상 구현을 동반하여 고위 성좌들의 의지를 깎아 냈다.
고위 성좌 간에도 자존심과 저항력이 달라서 절반은 끝까지 저항했다. 하지만 인간이나 성좌나 주먹 앞에서 오래 버티는 꼴을 못 봤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이었네.”
내로남불의 무진은 성좌력을 얻는 가장 빠른 방법을 포기하지 않았다. 굳이 수행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그간 고위 성좌들이 해 온 양아치 짓을 고려하면 합리적인 결단이었다. 남의 것을 탐하면 벌을 받는 권선징악을 실천했다.
땅, 물, 바람, 불, 눈, 뇌기, 심상 등등.
삼라만상이 주먹에 담겼다.
“무슨 주먹이 이래?”
“하나도 안 풀리잖아!”
“네놈도 성좌면서 같은 성좌한테 이래도 되는 게냐!”
“탑이시여, 제발!”
“나 성좌 안 해!”
고위 성좌는 권능만으로도 대적할 자가 없거늘, 약육강식의 서글픈 현실에 절망했다.
슬슬 굴복한 성좌가 나왔다.
“타진 납세한 선배들은 빠져 있어. 같이 뒈지게 맞고 싶지 않으면.”
“……고맙다.”
그나마 자의와 타의로 성좌력을 빼앗긴 성좌들은 물러섰다. 잃은 성좌력이 다시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저항한다고 답이 나오지도 않았다.
‘분배하자.’
확실히 고위 성좌라서 그런지 성좌력이 많았다. 여태 얻은 성좌력에 비견되었다. 개똥 같은 수법으로 얻은 성좌력을, 무진은 정승처럼 써 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정의의 이름으로.”
정의가 다 죽은 거냐.
성좌로서의 정체성에 혼돈이 오고 있었다. 하물며 폭발적으로 상승하는 성좌력이 무서울 지경이었다.
무진은 꼼꼼하게 털었다.
당장 성좌력으로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일단 풍족하면 인심이 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인생은 원래가 호사다마였다.
-편법 발견.
-잡았다, 요놈!
-탑 제어 시스템 가동.
-제어 불가.
-제어에 순응하라.
-왜 안 돼~~~!
탑이 무진의 꼼수를 발견하고 편법을 통제하에 두려고 강압했다. 당연하게도 무진은 응하지 않았다. 성좌력을 이용해서 탑의 흐름에 바이러스를 심었다.
두드드드드!
쩌저저저저!
탑 전체가 요동치며 멸망을 향해 치달으려고 했다. 이쯤 되자 무진과 탑의 경쟁이 아닌, 성좌들의 생사와 직결되었다.
이러다간 탑이 견디지 못하고 천지개벽의 개천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기상이변이 번지며 파문이 사나운 호풍환우로 돌변하여 위험수위를 넘나들었다.
-뭐 하고들 있어, 내가 당하면 너희들이라고 무사할 것 같아! 어서 가지고 있는 걸 전부 내게 몰빵해!
다급해진 탑이 신탑합일(身塔合一)을 거론하며, 성좌들을 인질로 잡고 협박했다. 내가 뒈지면 너희들도 뒈진다는, 설득력 최강의 네고였다. 탑 일부가 된 이상, 돕지 않을 수도 없는 인과관계의 무서움이었다.
-우리도 합세하겠다.
초월급의 성좌들도 나섰다. 그러자 탑의 모든 성좌도 염원을 담아 탑과 생사를 같이하기로 했다.
미워도 같은 성좌라 이건가? 고위 성좌가 당하고 있을 때는 쌤통이라며 좋아했으면서 무진의 뒤통수를 노렸다.
하찮은 수법이라기엔 밀린다.
“허, 이건 좀 곤란하네.”
-탑에서 꺼져! 너희 세계로 돌아가! 배덕자와 동귀어진이나 당해라!
사무적이기는커녕 매우 감정적인 시스템이었다. 본래 성깔이라면 신이라고 해서 꼭 도량이 넓을 것 같진 않았다. 아니면 성좌나 신 위에 또 다른 상위체가 있을 수도 있었다. 차원 간의 분쟁을 위한 선별 장치로 탑을 세웠다면 가능한 가설이었다.
“과연 다구리엔 장사 없구나.”
무진은 모처럼 중과부적을 체감했다. 승천을 위해서 완벽한 체화를 이루어야 했거늘. 속도 조절에 실패한 대가였다. 일대일로 성좌보다 강하다는 건 의미가 없다.
“이러면 나도 못 참지.”
이리된 거, 성좌력을 일시에 전부 개방해서 탑의 용량을 넘어서게 했다. 정해진 단계를 뛰어넘어 탑의 강제력을 엉망진창, 뒤죽박죽으로 만들려는 것이다.
시스템은 편법이라고 우겼지만, 강제한 규칙은 아니다. 엄밀히 따지면 탑이야말로 규칙을 어겼다.
단적인 예로 성좌를 동원하는 건 반칙이었다.
두드드드드드드!
시스템의 법칙 위반과 무진의 초월급 진입이 겹치면서 탑의 균형이 어그러진다. 세계관이 무너져 내린다고 보면 정답이었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위기였다.
-……뭐 하는 짓이야! 이러면 너도 위험해!
“포기.”
……?
무진은 성좌력을 무진계로 흡수했기에 탑의 강제력에서 배제되었다. 정당한 탑의 도전자로서 하차할 권리가 있었다.
성좌의 탑에 독을 심어 놓고, 자기만 떠나는 격이다.
-……이 개자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