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6. 한중 수교(3)
‘경고는 됐겠지.’
떨어져 있는 본체에 직접 충격을 주려면 심상의 연결이 가능해야 했다. 심상은 천성이나 속성만으로 가능하지 않았다. 최소한 절대경의 극한을 넘어서야만 한다. 신중하게 움직일수록 우리로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손을 털며 돌아섰다.
부르르!
하아아!
장 주석과 요원들은 강요된 침묵 속에서 몸을 떨다가 겨우 숨을 토해 냈다. 눈앞에서 펼쳐진 지옥도는 끝이 났지만, 악몽처럼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이만하면 충분한 선의가 됐을까요?”
“……아무렴, 차고 넘치네!”
“호의가 계속되면 당연하다 여기는 부류가 많아서요.”
“절대적으로 협조할 테니, 그런 섭섭한 말은 하지도 말게!”
“소국이 어찌 대국과 겸상을 하나요.”
“한국이 어찌 소국인가, 동맹국일세. 아니, 이제부터는 상국으로 모시겠네!”
우리 아버지가 달라졌어요.
장위는 아버지도 별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요원들이라도 나서서 위신을 살려 드려야 하나, 자기 발등에 떨어진 불도 끄기 힘들었다. 누가 감히 강 대형 앞에서 소신 발언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소신 발언도 사실은 인과를 심하게 따지기 마련이다.
“상국은 모르겠고, 비관세 수교라면 또 모르겠네요.”
“한국은 무조건 무비자, 비관세일세.”
“무조건은 메리트가 없는데.”
“권왕가에 모든 협상 권한을 맡기겠네. 이러면 되겠나?”
나쁘지 않은 히든카드였다.
권왕가와 연결된 기업에만 비관세 혜택을 준다면 너도나도 달려들겠지.
한국과 중국의 우호적인 협약에 지수는 흡족한 듯 수줍게 웃었다.
‘우리 자기는 흑염룡도 간지 넘치네.’
여자는 남자 하기 나름인 것 같긴 했다.
***
5분 전.
쿨럭, 주르르!
땅바닥을 짚은 검신은 선혈을 흘리며 힘겹게 일어섰다. 소모된 내력을 한 번 되돌렸기에 더는 원상 복구도 어려웠다. 전신을 감싼 고가의 무복 슈트는 원래의 기능을 잃은 지 오래였다.
‘5할가량 남았나.’
시간이라도 끌기 위해 어떻게든 버티고 있을 뿐, 후퇴하기도 어려운 지경이다. 설마 그 상황에서 1명이 더 추가될 줄 누가 알았겠나. 이런 말도 안 되는 속성은 반칙이었다.
‘분신을 쓰고서도 똑같다니.’
분신을 썼으면 전력도 반으로 나뉘어야 하는데, 하나가 둘이 되니 전투력은 몇 배가 되었다. 게다가 넷이 일사불란하게 공간을 막아서며 일방적으로 몰아붙였다.
‘도움을 바라긴 글렀고.’
구대문파는 팔대세가와 격전을 치르는 중이다. 아무래도 여기서 뼈를 묻어야 할 판이었다. 실제로 놈이 분신 하나라도 전투에 보냈다면 양상은 백팔십도로 바뀌었다.
팔대세가와 협조는 하지만, 전력의 약화를 바라는 뉘앙스였다. 협력이라기보다는 상하 수직 구조를 원하는 듯했다.
‘내가 유인한 게 아니었어.’
이놈들을 붙잡고 있는 사이에 구대문파가 팔대세가를 제압해 줘야 했다. 어느 것 하나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녀석의 말을 진작 들었어야 했다.
꼴 같지 않은 자존심이 발목을 잡았다.
“그만 끝을 내지.”
“누구 맘대로 끝을 내! 나 검신이야, 천하제일검!”
그들은 히죽거리며 비웃을 뿐이다. 고작 그 정도로 천하제일을 논해도 되겠냐는 조롱이었다.
검신은 역정조차 내지 않았다.
‘끝이구나!’
어떻게든 물고 늘어졌었다. 그것만 해도 따지고 보면 전력 이상의 과부하였다. 이제 본원진기를 이용해서 격돌하는 수밖에 없다. 어차피 죽는다면 최후까지 대중화의 무인으로서 부끄럽지 않도록.
각오를 다지고, 본원진기를 끌어 올리려는 찰나.
크윽, 비틀!
포위 진형을 갖추고 다가오던 놈들이 신음을 내지르며 휘청였다.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학질에 걸린 놈들처럼 식은땀을 흘리며 경련을 일으켰다.
부들, 부들!
크아아아아아악!
이게 뭔 일이야?
검신은 의아한 기색이었다. 수작을 벌이는 걸 수도 있어서 조심스러웠다. 혈강시의 자폭을 경험했기에 섣불리 다가서지 못했다.
털썩!
이제는 그냥 땅바닥에 주저앉는다.
‘뭐야, 이건?’
혹, 분신을 너무 많이 해서 과부하라도 걸렸나? 그렇다면 절호의 기회였다. 서둘러야 했다. 시간을 주었다가 회복한다면 그땐 답도 없었다.
“아아, 마이크 테스트. 나야, 검신.”
“……뭐?”
“나라고, 너 목 잡고 팬 사람.”
“……그게 무슨!”
“됐고, 이놈들로 팔대세가와 자폭할 거니까, 뒷정리나 해.”
빈틈을 노리려다가 검신은 멈춰 서고 말았다. 녀석과 자신, 둘밖에 모르는 비밀이었다. 하지만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는 하나도 모르겠다.
“의심하지 마라, 아니니까.”
“이놈아, 말을 해 줘야 할 거 아냐! 앞뒤 잘라먹고 의심하지 말라니 이게 말이야, 방귀야!”
“주석궁을 노렸어, 됐지?”
“그런, 장 주석은 살아 있느냐?”
“당연하지.”
그제야 돌아가는 사태가 짐작되었다. 오늘 습격은 주석궁과 동시에 이루어진 것이다. 일거에 처리한 후, 총리와 팔대세가의 체제로 바꾸려는 계획이었다.
‘저놈이 없었다면?’
이번 작전은 분명히 성공했다. 이로써 주석과 구대문파는 녀석에게 갚지 못할 커다란 빚을 졌다.
한편으로, 이게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
그런 의문이 들었다.
‘아무래도 지독한 덫에 걸린 것 같구나!’
권왕가가 돌아가지 않고 주석궁에 있는 것부터 이상하긴 했다. 아무래도 이렇게 될 줄 예상하였을지도 모른다.
꽈아아앙!
푸아아앙!
결전을 끝내는 굉음이 터졌다. 이제는 빼도 박도 못 하게 생겼다. 어떤 요구를 해도 들어줘야만 하는 현실이다.
혹여, 나 몰라라 하는 날엔 최악의 결과를 초래할 테지.
***
주석궁은 4개 더 있었다.
주석은 중국의 왕이나 다름이 없다. 예로부터 왕을 노리는 세력은 많았다. 당연히 위치 정보를 분산해야 했다.
물론, 이번처럼 감히 대놓고 노릴 줄은 미처 몰랐었다. 주석의 위치는 기밀에 해당하니, 내부에 배신자가 있다는 의미가 되기도 했다. 차후에 배신자를 색출할 필요성이 있었다.
귀빈실.
넓고, 세련된 최첨단의 편의 시설이 전부 들어가 있었다. 본인들 제품이 최고라고 광고한 것과는 별개로 외제가 절반이 넘었다.
무진은 지수와 소파에 누워 있었다.
둘은 가로세로 5m의 탁자에 산더미처럼 쌓인 산해진미를 맛만 보며 깔짝대었다.
숟가락과 젓가락은 허공섭물이 대신했다. 고수가 되어야 하는 이유였다.
사람이란 일단 앉게 되면 눕게 되고, 누우면 껴안게 되기 마련이다. 다시 일어나서 뭔가를 하기는 굉장히 귀찮다.
고수가 되면 그런 걸 하지 않아도 된다. 무엇보다 전립선이 건강해서 야뇨 격정도 없다. 막 단잠에 들려는데, 불 끄기는 매우 귀찮았다.
휙휙!
허공에 수저가 어지럽게 난립했다. 이제 막 절정에 든 무인이 봤다면 기겁할 광경이었다. 자신들은 꿈에서라도 닿기를 소원하는 경지가 이미 도달한 자들에겐 편의 사항에 불과했으니.
따지고 보면 무공 경지도 빈익빈 부익부였다. 공동 부유를 주장하는 중국이라면 무공도 평등하게 나눠야 할 텐데. 어째서 빈부 격차가 더 벌어지는 걸까?
‘이것들이 대체 뭘 하는 거야?’
‘우리는 보이지도 않나?’
‘보여도 할 말이 없긴 하지.’
구대문파는 결국 팔대세가와의 경쟁에서 이겼다. 그러나 승리의 주역은커녕 조연도 아닌 엑스트라에 불과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자폭이 있었다. 처음에는 팔대세가가 혈강시를 쓰나 했는데, 자살골이 되었다. 팔대세가는 같은 편인 줄 알고 방심하다 수뇌부 절반을 잃었다.
자폭이 있은 직후에 나타난 검신에게 자초지종을 물었었다.
소파에 누워서 빈둥거리며 일어날 기미도 없는 연놈의 도움이라고 했다. 당연히 믿지 않았다. 이 모든 사태가 이 권왕가의 음모인 줄 알았다.
설령 아니라고 해도, 권왕가의 도움은 받고 싶지 않았다. 더욱이 인정하지만 않으면 어떻게든 몰아갈 수 있었다. 대국이 그렇다는데, 소국이 어쩌겠느냐는.
그렇게 찾아온 날.
구대문파의 장문인들은 춘추절 개 맞듯이 처맞았다.
인과를 따지면 배은망덕하나, 비딱한 자세로 초면부터 하대하는데, 참을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과거 권왕이 한 만행을 안다면 예의를 갖추어야 했다.
일방적으로 처맞은 게 분해서 일어났지만, 더 처맞았다. 검신이 했던 말이 사실이었다.
-하지 말지.
-그래서 권왕가에 고개를 숙이란 말입니까?
-고개 숙인다고 닳지 않아.
-우린 죽으면 죽었지, 그렇게는 못 합니다!
-그럼 죽겠네.
그땐 빈말로 하는 말인 줄 알았다. 아무리 권왕가가 대단해도 구대문파의 장문인이 전부 출동한 자리였다. 일부러 기세를 숨기지도 않았었다.
그래서 더 맞았다.
뻗댄다고, 죽일 듯이 팼다. 소림사 방장이 떡이 되어 살려 달라고 외치던 모습이 떠오른다. 아미파의 장문인은 어떻고. 아프다고 어찌나 징징거렸던지.
‘이놈은 스님에 대한 존경심도 없나?’
‘도사는 어떻고?’
‘열반시켜 주려고 한 것이냐?’
‘강제 우화등선할 뻔했다고!’
상승의 무공, 특이 속성, s급 스킬은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었다. 이 연놈은 괴물이자, 권왕을 뛰어넘는 성격 파탄 말종이었다. 살려 달라고, 아프다고! 대국의 어른이 비는데도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턱주가리를 날려 버렸다.
문제는 또 있었다.
그 비참한 광경을 고스란히 영상에 담았다.
나중에 문파의 제자들에게 삶을 살아가는 지혜를 가르쳐 줄 교육 비디오로 만들면 어떻겠냐고 했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우리의 체면과 위신은 어쩌라고? 황사로 인해 제 컨디션이 아니었단 변명은 통하지 않았다. 몇 번이고 회복, 부활로 일으켜 세운 후에 팼다.
한국발 황사라고 개소리했던 공동파 장문인은 문파의 절기인 칠상권에 처맞았다. 그로 인해 오장과 육부 중 위와 소장이 상했는지, 아침마다 피똥을 싸는 듯했다.
처맞고 연무장에 쓰레기처럼 널브러진 것을 뒤늦게 검신이 찾아와 깨웠었다.
그날 검신의 말과 표정도 잊히지 않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살려 달란 소리가 궁 전체를 울리더군.
죽음으로 지조를 지키기는커녕 괜한 소리를 하는 바람에 체면만 더 깎였다.
그렇다고 이대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크니스의 무서움을 경험했기에 도저히 물러서지 못했다. 때에 따라선 적의 손도 잡을 필요가 있기는 하나, 다크니스는 산 사람을 제물로 쓰는 공적이었다. 이제는 허울뿐인 정파가 되었지만, 최소한의 도의는 있었다.
“권왕가에 협조하겠네.”
“간도는?”
“갑자기 연길도는 왜?”
“누구 땅?”
“……이거 혹시 한국 땅이라고 해야 하는 건가?”
“협상의 기본이 안 됐네.”
……이 미친!
인간 망종이 누구보고 기본을 운운하는 게냐!
맘 같아서는 당장 자리에서 뛰쳐나가고 싶지만, 잡지를 않는다. 가는 사람 막지 않는 한국식 쿨함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
구대문파의 장문인은 검신에게 협조를 부탁했다. 오지 않겠다는 걸 사정사정해서 간신히 데려왔다. 검신의 자세만 봐도 둘 간의 우열은 명백했다. 그러니 더더욱 권왕가와 손을 잡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검신 양반, 이래서야 협상이 되겠어?”
“그럴 거면 차라리 만주를 달라지 그러냐?”
“주려고?”
“그 순간 모두가 분리하겠다고 난리를 칠 거다. 이후의 후폭풍을 지금도 귀찮아하는 네가 감당할 수 있겠느냐?”
“다시 보니 주둥이가 매끄러워졌네.”
“힘이 없으면 수그려야지, 어쩌겠느냐.”
“보기보다 현실적인 분이셨군.”
역량의 차이가 한 수 정도였으면 저자세로 가지도 않았다. 검신이라도 구대문파의 장문인을 혼자서 두들겨 패진 못한다. 한편으로 어이가 없었다. 권왕은 대체 어떤 놈이기에 저딴 괴물을 만들었단 말인가.
“우린 다 내어 줄 준비가 되어 있으니, 그만 간을 보게.”
“이제야 협상에 임할 기본이 됐구나.”
장문인들은 속으로 이게 무슨 협상이냐고 구시렁거렸다. 차라리 대낮에 강도에게 삥 뜯기는 편이 그나마 정의로울 것 같았다.
각성의 시대가 되면서 무인으로서 대접받지만, 한편으로 개인의 역량이 국가를 대신하게 되었다. 따지고 보면 굉장히 불합리한 현실이었다.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해야 마땅하거늘, 개인이 너무 강했다.
“다들 너무 얼지는 말지. 내가 그렇게 무례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럼, 말투부터 고쳐야지!
너는 어미 아비도 없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