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7. 아카데미의 폭군(3)
인간의 신체는 태어날 때와 달리 자라 오면서 조금씩 균형이 어긋나게 된다. 각성자의 경우 각성 시 체질 개선으로 일반인보다 균형이 맞기는 해도, 차이는 강해질수록 더 커진다. 이는 속도와 파괴력의 상관관계와 비슷하다.
그러나 당장의 김정산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요나를 상대하기도 벅찬데, 빈틈이고 나발이고 알고도 못 막는다. 그나마 겨우 만든 역공의 기회도 의도된 바였다.
“……환영?”
“안됐네.”
무진은 환술로 암시를 걸어 잔상을 공격하도록 유인했다. 김정산에게 정령과 환술의 조합을 시험한 것이다.
벼랑 끝 전술이라도 펼칠 각오였거늘, 배수진이 통하기는커녕 일말의 빈틈도 허락하지 않았다. 육체적인 대미지를 넘어 정신적으로도 완벽한 농락이었다.
“……악마 같은 놈!”
“어허! 선량한 후배한테 못 하는 말이 없네.”
“……그러는 너야말로 선배 대접이나 하고…… 크악!”
맞는 말을 하면 처맞아야지.
무진은 불리한 진술 따윈 하지 않는다. 이럴 땐 사전에 상대의 입을 봉해 버리는 편이 효과적이었다.
더욱이 수다가 늘면 실수가 잦아지기에 선배로선 다행이기도 했다. 무진도 사람인지라, 자꾸 성질을 돋우면 선배 대접을 잘하기도 힘들고.
착!
완벽히 제압한 후.
무진의 전매특허가 된 ‘허수아비 패기’였다. 마지막은 꼭 표식을 남겨 누구한테 처맞았는지를 각인시켰다.
“저것 좀 하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 거냐?”
“잔인한 놈, 예쁜 여자는 제발 빼고 쳐라!”
“남녀가 평등한 세상에 남자는 괜찮은 거냐?”
“무진이가 공평하기는 하지!”
“공평은 무슨 얼어 죽을 공평이야, 저게 잘하는 짓이냐?”
“항복은 할 수 있게 해야 줘야지!”
“간디가 비폭력운동을 한 건, 더 맞아 보지 않아서가 확실해.”
비참한 패배에도 굴하지 않고 재도전한 김정산의 용기는 칭찬받아 마땅하나, 상대가 악질이었다. 결투를 신청하든, 받든 한결같이 두들겨 주었다. 어중간한 마음가짐으론 다시 도전하지 못하도록 싹을 잘라 주었다.
“내 주먹은 영약이야. 많이 먹어.”
그러면서 한다는 소리가 추궁과혈이란다.
보통은 말도 안 되는 개소리였다. 진기타혈을 수반하는 추궁과혈은 아무나 시전하지 못한다. 고수의 경지에 이르러야 하고, 사람마다 혈의 흐름이 다르기에 섬세하게 조절해야 했다. 실제로 조금만 어긋나도 불구가 될 수도 있었다. 일개 생도가 하기에는 고(高)난도의 수법이었다.
“저거 맞을 때는 존나 아프긴 해도 존나 개운하긴 하지!”
“젠장, 회복이 잘되기는 해!”
“진정한 의미의 병 주고, 약 주고야!”
“씨발, 고쳐 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거냐!”
“최소 1억 가치는 있지.”
“유전도 아니고, 주먹에서 왜 돈이 샘솟아!”
무진과의 결투가 도움이 되긴 했다. 일방적으로 처맞고 난 후 마력의 흐름이 한층 원활해진다. 태어나면서 쌓인 탁기와 노폐물이 빠지면서 육체도 한결 업그레이드되었다.
그런데도 도전하기 껄끄러운 연유는.
크아아아아아악!
도저히 봐주기 힘든 꼴불견과 상상을 불허하는 고통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저건 맞아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공짜로 추궁과혈을 받으니 엄살떨지 말라고 하는 부류도, 당해 보면 그런 말 못 한다.
무진에게 한 번 이상 도전한 자가 별로 없는 것도 추궁과혈 때문이다. 기연은 분명하나, 정신이 붕괴하는 고통을 재차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추궁과혈 받을래, 없어진 군대 갈래?
물어보면 십중팔구 군대에서 말뚝 박겠다고 할 정도다. 왜냐고? 맞고 난 후 후유증으로 한 달 내내 추궁과혈 받는 악몽에 시달린다. 저 악마를 꿈에서도 본다고 상상해 봐라.
“저건 진짜 한 번 이상 해선 안 되는 일이야!”
“도전하는 것 자체가 큰 용기라고!”
“저놈 주먹은 인간적이지가 않아, 영육의 살인 주먹이라고!”
“내력이 없을 때도 육체는 인간적이지 않긴 했지!”
피지컬만으로도 학년 내에 적수가 없던 무진이 이제는 각성하여 내력의 사용이 원활해졌다. 마나 흡수율의 평범한 각성이 불러온 파급력은 상당했다. 기존의 체계를 완벽히 부수고, 전세를 역전시켰다.
따지고 보면 대기만성의 끝판왕이었다. 보통의 생도라면 흡수율이 최악이란 판정을 듣고 좌절하기 마련인데. 기어이 흡수율을 정상화하여 잠재된 마력을 개화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포기하지 않는 생도의 칠전팔기로 아름답게 미화하겠는데, 그럼 아카데미의 폭군으로 불리지는 않았겠지.
또 악당이냐고 물어보면, 모호하다.
무진은 3학년이 되기가 무섭게 본색을 드러내더니 지수와 나란히 아카데미 최강의 반열에 올라섰다. 다행히 저학년은 내버려 두고, 고학년만 건드리고 있었다.
“둘이 너무 다 해 처먹는 거 아니냐고!”
“권왕가의 앞날이 창창하다 못해 독과점이잖아!”
“차라리 둘만 해 먹어라, 왜 주변까지 다 강해지는 건데!”
“쟤들 주변도 또라이들 천지야!”
무진을 따르는 생도들의 면면이 화려했다. 별 볼 일 없었던 장구용, 4인방, 상원도 이제는 명실공히 아카데미를 대표하는 생도였다. 이쯤 되면 무리에 들고 싶어 하는 생도가 많아야 하는데, 꼭 그렇지도 않았다.
무진의 주변에 있으려면 대련은 필수였다. 하루에 최소 한 번은 두들겨 맞는다. 그런데도 주변에 있다면 살아남았다는 의미가 되었다.
스윽!
무진은 다음 상대를 살폈다.
“수연 선배, 한 판 어때?”
“닥쳐, 불경한 눈깔 안 치워!”
청룡 길드의 남수연은 길드장의 독녀로 테이머였다.
그녀가 길들인 백호는 곧 영수가 될 자질을 갖추었다. 하나, 이미 한 번 호되게 당했는지 변신한 채 수연의 어깨에 앉아 있던 백호가 부들부들 떨었다.
“백호답지 않네.”
“네가 이상한 거라고, 그게 무슨 뿔고양이야?”
“조련사의 능력이지.”
“씨발! 대체 뭘 먹였기에 백호보다 크냐고!”
백호와 뿔고양이, 등급의 차이가 현격했다. 대충 봐도 사이즈나 견적이 나올 법도 한데, 역으로 아예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나 하고 붙었다가 백호는 털 빠진 고양이가 되었다. 이후로 크림이가 쳐다보기만 해도 백호는 오줌을 질질 쌌다.
씨발, 어깨에 또 쌌네!
지린내에도 남수연은 차마 백호를 나무라진 못했다. 저 빌어먹을 뿔고양이가 이상한 거고, 그 주인은 더더욱 이상한 놈이었다.
저 봐, 저 봐.
소환된 크림이가 우쭐해서 비웃고 있었다. 허공에서 트리플악셀을 가동하다니!
그 주인에 그 마물이었다.
“싸고돌면 버릇 나빠져, 강하게 키워야지.”
“너한테 그딴 소리 들을 이유 없어!”
“정말? 그런 식이면 도전하고 싶어지는데. 오늘 힘 좀 과하게 써 볼까?”
“……금과옥조처럼 달게 받을게.”
테이머는 대상과의 공유를 위해서 항시 같이 행동한다. 그래야 서로의 교감과 동화율을 높여 전투를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반면 무진은 크림이가 필요할 때만 소환했다. 그뿐이면 말을 안 한다. 조금만 못해도 애를 쥐 잡듯이 잡았다. 옆에서 요나가 훈수까지 두는데, 테이머로서도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든 마물 학대였다.
‘학대하는데 왜 강해지냐고!’
테이머와 동물 애호가가 들고일어날 만행이었다. 그런데도 말 못 하는 이유는 크림이의 눈부신 성장 속도에 있었다. 마물이 신수나 영수가 될 수 있다곤 하나, 뿔고양이는 최하 등급의 마물이었다. 태생적인 한계로 영수는커녕 중급 마물도 되기 어려웠다.
“유리는 요즘 뜸하네.”
“……노력하고 있어!”
남수연 선배의 거절에 무진은 타깃을 바꾸어 고유리에게 의향을 물었다. 여장부 기질을 갖춘 고유리는 분명 과거에 비해서 월등히 강해졌다. 땅의 정령 토군도 중상급 정령에 도달했다. 발전 속도는 정령사 중에서 발군이나, 요나에겐 조족지혈이었다.
“그놈의 노력, 노력! 대체 언제까지 노력만 할 거야. 내가 기다리는 거 안 보여!”
“저번 주에 맞았잖아!”
“이번 주는 안 맞았잖아.”
“주마다 어떻게 맞아?”
“4인방은 하잖아.”
다들 4인방을 불쌍하게 바라보았다. 하나, 4인방의 충성심과 또라이 기질은 성운맹의 전신이었던 마조군단의 근본이었다. 맞고, 또 맞고, 계속 맞으면서 성장하고 있었다. 주변의 동정 어린 시선과는 별개로 맛 들렸다. 어쩌면 진정한 의미의 마조히스트로 각성했는지도 모르겠다.
‘동기부여가 그래서 중요하지.’
4인방은 일전 던전 투어를 통해 본인들을 되돌아보았다. 당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구경꾼으로 전락했었다. 일말의 도움도 되지 못한 무력감에 좌절하고 말았었다.
다시는 그런 무력감을 느끼고 싶지 않았는지 혹독한 학대…… 훈련도 마다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4인방의 발전 속도는 남달랐다. 주변에서 스페셜 마조히스트로 불리는 연유였다.
‘상원이가 문제야.’
작심삼일의 표본이었다. 던전 투어를 끝내고 돌아올 때만 해도 의욕적이었으나, 언제 그랬냐는 듯이 농땡이를 피우거나 도망쳤다. 유정이를 좋아한다면서 이젠 거의 포기하다시피 했다.
“아카데미가 언제부터 눈치를 보게 된 건지 원, 유혈이 낭자했던 예전이 좋았지. 요즘 생도들은 근성이 없어요, 근성이. 쯧쯧쯧!”
무진의 푸념에 결투장에 모인 생도들은 혀를 찼다.
다른 사람은 다 해도, 무진은 저런 말을 해선 안 된다. 자기가 주도해서 만든 성운맹이 눈에 불을 켜고 생폭을 찾고 있었다. 아직도 남아 있는 생폭을 근절하기 위한 대의명분에 다들 몸을 사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젠 조금만 건드려도 생폭이라고 하잖아!’
‘유치원 때 했던 일까지 나오는 건 너무하지.’
‘잘했다는 게 아니라, 좀 적당히 하자고!’
‘그래도 생폭은 근절되어야 하는 게 맞아.’
‘우리나라는 남 잘되는 걸 용납하지 않아.’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듯, 괴롭힘의 주체가 잘되는 걸 용납할 리 만무했다. 선을 지키지 않은 부작용도 없진 않았다. 그럼에도 결투장이 아닌 곳에서 지속적인 괴롭힘은 근절되어야 했다.
그건 그거고.
이제 3학년인 주제에 세상 다 산 듯한 말투는 역겨웠다. 누가 들으면 자기 때는 고생을 많이 한 줄 알겠다. 따지고 보면 무진은 자업자득이었고, 누구보다 편하게 아카데미를 다녔다.
“오늘도 보람찬 아카데미였다. 내일도 재밌겠네. 후후후후.”
무진의 푸념에 이은 자평에 생도들의 안색이 검게 죽어 갔다. 본인은 즐겁다고 했지만, 일방적으로 당하는 생도들로선 최악이었다. 따지고 보면 이것도 억압이자 전횡이 분명했다. 하지만 성운맹이란 칼을 쥐고 있기에 대의명분이 압도적이었다.
아카데미의 폭군.
평지풍파에서 한층 업그레이드되었다. 저학년, 고학년 가리지 않고 자신만의 세상을 구축했다.
자비 업는 폭군의 행보에도 트집 잡기가 어렵다. 성운맹을 배후로 두는 것도 있지만, 실제로 아카데미의 수준이 상향되고 있었다. 눈에 띄게 성적이 좋아지고 있으니, 생도의 부모들이 일타 강사 대하듯 무진을 찬양했다.
자식들이 엇나가지 않고, 생도로서 본업에만 충실하니 좋아할 수밖에. 반면 생도들은 숨이 막히는 현실과 마주해야 했다. 수업과 수련에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아카데미의 삶이 굉장히 피곤해졌다.
‘세월이 빠르다면서 저 자식은 어째서 아직도 3학년이냐고!’
‘4학년이 돼도 3년이나 더 있잖아!’
‘젠장, 차라리 고학년이 나은 거 아냐?’
‘고학년은 저 새끼의 도전을 받아야 한다고!’
‘졸업한 선배들이 위너였어!’
‘우린 졸업해도 저 녀석은 권왕가잖아!’
졸업해서 안 보면 그만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무진의 배후가 권왕가였다. 권왕가는 현재 칠대가문과 팔대 길드를 통합하고 있었다. 무진이 활개 치고 다니는 세상을 졸업하고서도 봐야 한다.
차후, 아카데미 최고의 전성기라고 불릴 이 시기가 암흑기로 불리기도 하는 연유였다.
빛과 어둠.
무진은 둘 다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