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 체제 정리(4)
지수는 쐐기를 박았다.
“쫄리면 말고.”
“오냐, 어디 그 잘난 실력 좀 보자!”
사실 지수를 벼르고 있는 후계자들도 꽤 있었다. 특히 무진과 연관되어 개망신당한 화염적가로선 갚아 주어야 할 빚이 산더미였다. 이후에 화염가는 아카데미 공식 호구라는 소문이 돌기까지 했다.
적운태가 나섰다.
그는 적운길의 형으로 6학년 생도다. 고학년이 저학년을 괴롭히는 구도라 아카데미에선 나서지 못했었다.
하지만 이 자리는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쓸 필요가 없는 데다, 지수가 먼저 도발했다.
슈웅!
절호의 기회를 빼앗길 수 없었다.
적운태는 곧장 지수에게 쇄도했다. 후배에게 3초 양보 따윈 하지 않았다. 지수를 상대한 애들 대부분이 그런 식으로 여유를 부리다 당했다. 은밀히 반성운맹에 가담하여 무진과 지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 보람이 있었다.
‘네년을 제물로 삼아 주마!’
속성 [연쇄폭화]를 개방한 후, 가문의 절기 염살장을 펼쳤다. 진천염화공을 7성까지 끌어 올린 상태였다. 도발하는 그 즉시 한 방 먹일 각오를 하고 있었다.
죽어랏!
꽈아앙!
화르르르르!
***
‘지수는 잘하고 있으려나?’
사부님이야 싸우다 뒈지면 호상이라는 권왕가의 근본을 세우신 분답게 이런 좋은 기회를 그냥 보낼 리 만무했다.
대외적으론 정식으로 대가주를 선임하는 날로 비치겠지만, 실제는 사부님의 회포를 푸는 날이었다. 우리나라 제일검 검신을 공식적으로 꺾고 싶어 하셨다.
‘그래도 견제는 필요한 법이지.’
공산당이 아닌 이상.
겸사겸사 사부님의 나쁜 버릇을 고쳐 줄 필요도 있었다. 지나치게 분별없이 혼자서 날뛰면 적이 많아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정령가의 화석을 이용했다.
때가 되면 사부님이 알아서 멍석을 깔 테니, 회복 포션을 사용하라고. 평상시라면 체면을 고려하겠지만, 이미 망가졌다면 전후를 가리지 않게 된다.
‘사부님도 멍석말이는 처음이겠지.’
새장가를 가는 기분일 수도.
다 같이 싸우다 보면 정도 들고, 해묵은 감정을 씻어 낼 좋은 기회였다.
여하튼 대가주를 단순히 명분만으로 세우는 건 위험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이상, 최강자여야 한다. 그래야 다른 가문들도 군말 없이 따르지. 자기들 수장들도 개 맞듯이 처맞는데, 용가리 통뼈가 아닌 이상 충실히 따를 수밖에.
예나 지금이나, 주먹 앞에서는 평등했다.
‘지수도 보여 줄 때가 됐지.’
다크니스의 노림수를 봉쇄할 힘이 있는 이상,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편이 나았다. 숨기기만 해선 도리어 의심만 쌓이게 된다. 정상적인 범주 내에서 벽을 넘을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단계를 뛰어넘을 때 개연성을 부여받는다.
광활한 연무장.
집 내부 공간을 확장해서 족히 새만금 간척지만큼 넓었다. 경치 좋은 안면도의 풍경처럼 하늘은 파랗고, 구름은 유려하게 유영한다. 연중 내내 맑아서 대련하기 참 좋은 날씨를 구현했다.
던전을 연구하여 심상 구현과 조합한 결과였다. 하나, 만족하진 않았다. 꾸준히 연구하여 공간을 확장하고, 창조의 영역에 도달해야 했다.
중력장을 이용해 하늘에 달아 놓은 인공 태양이 가려지며 흑점이 생겼다.
쩌어엉!
철퍼덕!
무형의 공간이 어긋나는 굉음이 들린 후, 떨어져 내린 사람.
흑점은 아버지였다.
저런.
무진은 얼른 아버지의 바이탈을 확인했다. 아버지의 건강을 위해서 의료 자격증은 없어도, 명의의 경지에 도달한 상태였다.
“괜찮으세요?”
“네 눈엔 이게 괜찮은 것으로 보이냐?”
“아버지, 힘내세요.”
“미치겠구나.”
아들의 응원이 보약인지, 아버지는 투지를 잃지 않았다. 일어서서 기세를 발산했다.
응원받을수록 산하의 속내는 썩어 갔다.
‘내 자식만 아니면, 이놈을 그냥!’
아비를 하루라도 괴롭히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라도 돋던? 왜 편한 날이 없어? 업무를 끝내고 돌아오면 TV 보며 맥주 한 캔의 여유를 즐기려고 했건만, 야근하고 싶어질 지경이다.
회사에선 노가리라도 깔 수나 있지, 집에선 쉴 틈을 주지 않는다. 근로기준법에도 2시간 연속으로 일하면 15분은 쉬게 해 준다고. 남의 아들이면 무시하면 그만이지만, 내 아들이라서 속만 터진다.
‘말해 뭐 해!’
그러나 아들 탓을 할 순 없다. 아비를 괴롭히려고 안달이 났다면 모를까,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란다.
그나마 절대경이라도 되면 편한 줄 알았는데, 다 같은 절대경이 아님을 실감했다. 아들이야 얼마나 강한지 가늠도 되지 않지만, 눈을 부라리며 다가오는 저 노인네는 달랐다.
‘상상 속에 있는 사람까지 끌고 올 줄이야.’
차원을 넘어온 무신.
아들이 심상 구현을 할 때까지만 해도, 창조된 존재인 줄로만 알았다. 웬걸,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해 지박령이 되었다. 그리고 시간만 되면 대련을 빙자해서 사람을 팬다.
‘아들에게 당한 걸 왜 나한테 푸는 겁니까?’
망할 놈의 내리사랑이 족보도 없이 위아래가 엉망진창이었다. 대련이 끝나는 즉시 아들이 복수해 주겠다고 할 때부터 잘못된 만남이었다.
악순환의 연속.
결국, 애먼 약자만 고생이다.
이 바닥이 이렇게나 험난했다. 약하면 억울해도 어디 가서 하소연도 못 한다. 무협소설 속 삼류 무인의 서러움을 절대경이 되어서도 느껴야 했다.
이러면 강호에 발을 들인 것을 후회해야 하나. 엎질러진 물은 주워 담을 수가 없는 법이다.
‘강해지고 싶긴 하지.’
시작은 회사원이지만, 이제는 무인으로 가야 할 판이었다. 짜증 나고, 화나고, 지겹고, 지루함에도 불구하고 노괴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렇게 처맞았는데도, 포기하지 못했다.
“허허! 이제는 샌님 같은 먹물이 빠지고, 제법 무인 티가 나는구나.”
“아침에 계란으로 눈 비비고 있는 거 다 봤습니다. 눈깔에 먹물이 빠진 건 제가 아니라 노괴십니다.”
“그 요망한 주둥이를 함부로 나불거리지 말거라. 하긴, 그 아들에 그 아비겠지.”
“화풀이나 하는 주제에 신선놀음은 하지 맙시다!”
“주둥이부터 예절을 다시 가르쳐야겠구나.”
“제 아들부터 가르쳐 주시지요! 그럴 배짱이 있다면.”
무진은 흥미진진하게 지켜보았다. 아버지도 무인답게 입담도 강력해졌다. 진 회장을 다독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배신의 충격이 어찌나 컸는지, 진 회장의 의존증이 높아졌다. 이 세상에 믿을 놈이 없다는, 진리에 가까운 각성을 하셨다.
‘그러게, 못나도 자식인데 홀대하면 안 되죠.’
장남이 아닌 손주를 밀어주면서 예견되었던 일이다. 혹여 아름답게 양보하길 바랐던 건가? 세종에게 밀렸던 양녕도 나중에는 세조에게 붙어먹고 단종의 죽음을 부추겼었다.
하물며 어려서부터 부족한 것 없이 왕의 아들로 살아왔다. 당연히 내 것인 줄 알았는데, 빼앗긴다고 상상해 봐라. 핏줄이고 자시고, 눈이 돌아가지.
과거나 현재나 권력과 재력이 차고 넘치면 승계로 인해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적당히 행복하고 평범하게 살 거 아니면 너무 많은 재산은 재앙의 씨앗이었다.
‘그러고 보면 아버지와 나는 완벽하구나. 헤헤.’
아버지가 물려줄 재산보다 많이 벌어서 안심했다. 부모의 등골을 빨아먹으며 성장하지 않는 건 효의 당연한 발로였다. 간혹, 어릴 때 버리고 나중에 자식의 재산을 탐하는 버러지가 있기는 해도.
아버지는 진 회장을 컨트롤하여 재계를 통합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진 회장도 백두 그룹의 조 회장이 밑으로 들어오자 서서히 기력을 회복하고 있었다.
실제로 백두 그룹은 다크니스와 연관되어 초상집이었다. 조 회장은 불난 데 기름을 붓고 있었다. 치명적인 약점이 잡히는 바람에 조 회장은 진 회장에게 쩔쩔매고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서열 정리에 들어갔었다.
굴리는 맛이 있다나.
우리나라처럼 서열 세우는 걸 좋아하는 나라도 드물었다. 회장들 사이에서도 서열 경쟁은 굉장히 치열했다.
재계의 서열은 누가 더 많이 벌었는지가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성운 그룹의 매출과 순이익은 하루가 다르게 뛰었다.
특히 쉐도우 길드가 음지에서 양지로 올라오면서 아이템, 장비, 포션의 판매량이 급격하게 올랐다. 공급량을 조절해야 했던 시절과 달리 생산 공장을 늘릴 수 있게 된 부분이 컸다.
‘최대한 모든 체계를 하나로 규합해야 해.’
다크니스가 다시 돌아오게 된다면 확실한 패를 가지고 올 것이다. 일원화되지 않은 상태로 다크니스를 맞는 사태는 위험했다.
물론, 통합에 방해되는 불순물까지 안고 가진 않는다. 어차피 섞이지 못하는 부류는 끝까지 방해를 일삼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배신당하기보다는 중용하는 척하며, 기회를 내어 주는 편이 낫다. 어차피 배신한다면 다크니스를 유인할 제물로 써 주면 대의를 위한 소의 희생이 되는 거니까.
‘조만간 연락이 오겠지.’
중국과 일본을 정리한 이후라고 봐야 했다. 확실하게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다시 우리나라로 오진 않을 것이다. 이 부분을 적절하게 노린다면 이득도 챙기면서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여태까지 주도적이기보다는 수세적으로 움직였다는 점도 다크니스를 교란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공수를 교대할 차례기도 하고.
쿠다다당!
다크니스 공략을 정리하는 동안 투귀 어르신도 처맞고 날아와 바닥을 굴렀다. 정확히 발치까지 날아오는 걸로 봐선 투신 어르신이 힘 조절을 한 것이다.
힐끔 보다가 투신을 보았다.
“나한테는 묻지도 않는 게냐?”
“죽도록 싸울 상대로 나쁘지 않잖아요. 혹시, 자신보다 약한 사람들하고만 싸우고 싶은 건가요?”
“누가 그렇대!”
“그럼 보여 주세요. 누가 더 싸움에 미쳤는지를.”
힘겹게 일어선 투귀는 함부로 말을 씨불이면 좆된다는 걸 절실히 체감했다. 투귀라는 별호처럼 싸움에 미쳐 살기는 했어도, 승패를 반복해야 싸우는 맛이라도 있지.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기만 했다. 가르침이라고 해 봤자, 독에 받친 악기뿐이다.
‘어디서 자기 같은 것들만 데려오는 거야?’
앞서 나간 권왕도 그렇고, 이번에 데리고 온 투신도 자신보다 더한 징그러운 인간들이었다.
“어린놈아, 언제까지 엄살을 피울 셈이더냐?”
“어리긴 누가 어리다는 거야!”
“어허, 너 200살 넘었냐?”
“이 미친 노괴가, 그걸 말이라고!”
“100살도 안 된 놈이 혓바닥도 반 토막이구나. 나 때는 안 그랬다.”
백세 시대긴 해도, 진짜로 100세까지 정정하기란 어렵다.
어쨌거나 투귀는 배알이 뒤틀렸다. 살면서 처음 들어 보는 개소리였다. 막 나가긴 했어도, 저 노괴보다는 정상적이었다. 어쩌다가 동네북 신세가 됐는지, 삶이 참 거지 같았다.
‘도통 이길 놈이 없잖아!’
투귀는 예전에 비해서 월등히 강해졌다. 언제나 강해지기를 소원했으니 만족할 법도 한데.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는 중이다.
한강후랑추전랑(漢江後浪推前浪)처럼 뒷물결이 앞물결을 자연스럽게 밀어내면 그나마 조바심이 덜할 테지만.
권왕과 노괴가 말도 못 하게 강했다. 그런 가운데 추격하고 있는 산하도 만만치 않았다.
앞에서 막고, 뒤에서 추격하고.
투귀는 샌드위치 진형의 막막함을 느끼고 있었다. 차라리 나이라도 적으면 이해라도 하지. 악마 같은 노괴는 왜 점점 젊어지고, 지랄인지 모르겠다.
‘방구석에서 드라마만 보는데도 강해진다니!’
이해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경지에 이르면 굳이 훈련하지 않아도, 심상만으로도 영역을 넓힐 수 있었다.
투귀도 현재 그러한 경지에 올라섰지만, 완숙함에서 밀렸다. 초입과 초월은 앞 단어만 같을 뿐, 의미는 전혀 달랐다.
도통 수가 보이지 않는 절망 같은 현실이었다. 그러나 투귀 사전에 포기는 없다.
죽더라도 전력을 다한다.
“이제야 싸움 귀신답구나.”
“빌어먹을 노괴여, 지옥에나 떨어져라!”
“할 수 있으면 해 보거라, 애송아!”
“누가 애송이야! 나도 먹을 만큼 먹었어!”
아버지와 투귀는 재차 투지를 불태운다. 이쯤 되면 용기가 가상해서라도 손 속에 사정을 둘 만도 하겠으나, 상대는 죽지 못해 사는 노괴들이었다.
속이 좁다 못해 간장 종지만도 못했다. 나이가 들수록 어려진다는 학설이 정석이었다.
노괴의 어리광이 자연재해를 일으켰다. 인간은 자연의 광세무변에 휩쓸릴 따름이다.
착!
무진은 가랑잎처럼 추락하는 아버지를 공주님 안기로 받은 후 절대마도를 발휘해 치료했다.
철퍼덕!
안타깝게도 팔이 2개인지라, 투귀를 잡지는 못했다.
한 움큼 피를 토한 후.
“허공섭물은 국 끓여 먹으려고 놔두…… 커억!”
아버지와 투귀는 장렬히 산화했으나, 대련 자체는 싱겁게 끝이 났다. 격의 차이를 좁히기엔 시간이 필요했다.
무엇보다 무신과 투신도 발전하는 중이다.
“몸 풀렸으니 본격적으로 하겠습니다.”
“이제는 의향을 묻지도 않는구나!”
“물어보고 처맞나, 안 물어보고 처맞나 똑같잖아요.”
“……이 수련은 네가 시킨 것이 아니더냐!”
“그래도 아버지가 맞는 건 아들로서 맘이 아프더라고요. 알다시피 제가 효자라서요.”
“이쪽으로 넘어오는 게 아니었거늘!”
“에이, 좋으면서. 다 알아요.”
“알긴 뭘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