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 체제 정리(3)
대가주회의를 위해 칠대가문의 수장이 권왕가에 모였다.
토론과 다수결을 기대했던 그들로선 당혹스러운 광경이 펼쳐졌다.
처음부터 말로 할 생각이 없지 않고서야.
권왕의 함정이었다.
돌아선들 문이 닫힌 지 오래였고, 밖에는 기레기들이 언제 나오나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 통합은 무슨, 낙장불입을 강요하는 대가주회의였다.
더더군다나 눈앞에서 기대했던 대결이 펼쳐졌다. 일반인도 차마 눈을 돌리지 못할 텐데, 무인이라면 외면하지 못한다.
부르르!
칠대가문의 수장, 장로, 후계자들은 흔들리는 동공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혀를 내두르게 만드는 광경이 펼쳐졌다.
푸아아앙!
검과 주먹이 충돌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파괴력이 사방을 거칠게 휘저어 놓았다. 일검일권(一劍一拳)의 공수가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더욱이 단순히 육체의 충돌이 아닌 권과 검의 극의에 도달해 있었다.
촤아아아, 퍼어엉!
검과 권에 담긴 절륜한 강기.
패도무쌍의 기세에 숨을 내쉬는 것마저 잊게 한다. 무인이라면 닿기를 소망하나, 티끌만큼도 쉬이 허락하지 않을 천의무봉의 영역이었다.
검강과 권강의 파괴력에만 신경을 쓴다면 제대로 보고 있지 않은 것이다. 검과 권의 연환과 기만이 쉼 없이 펼쳐지고 있었다. 눈도 깜박이기도 전에 공수의 전환이 극적으로 바뀌며, 전혀 새로운 세계를 개방한다.
하합!
꺾이지 않은 결의가 담긴 검의와 권의가 연이어 충돌하여 마지막을 향해 거침없이 내달렸다. 누가 더 강한가, 원초적인 힘의 겨룸이었다.
이윽고.
챙그랑!
부러진다는 표현보다는 부서진다는 표현이 적합했다.
검신류의 십검, 검의 총화인 천검만리(天劍萬里)를 담은 천총신검(天摠神劍)이 파편이 되어 검자루만 남겨졌다. 천총신검 그 자체로도 ss급의 장비였다. 극강의 단단함을 추구하여 절대 부서지지 않는다고 알려졌었다.
천총신검은 검신의 상징과도 같은 애병이거늘.
주먹으로 깨부쉈다.
허어!
털썩!
맥이 풀리며 무릎을 꿇었다.
모두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당대에 검으로는 적수가 없다고 알려진 검신(劍神) 천무룡이 패배한 것이다.
권왕이 한창 날뛰던 시절에도 검신과는 승부를 내지 못했었다. 결판에 집착하는 권왕이 무승부로 만족할 리 없을 텐데도 물러섰다면 결과는 보나 마나였다.
하물며 검신은 최근 폐관수련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다. 과거보다 진일보한 검을 보여 주었다. 그걸 증명하듯 마지막에 선보인 십검은 심검이었다.
‘검신이 질 줄이야!’
‘망할, 이러면 나가리잖아.’
‘저놈은 언제 이렇게 강해진 거야?’
‘이젠 어쩔 수가 없구나.’
도제 진철웅, 염왕 적천산, 용신 김호천, 수왕 소연풍은 인상을 찌푸렸다. 권왕이 대가주를 다시 정할 기회를 내어 주겠다고 했을 때 혹시나 했었다. 검신이라면 권왕을 이기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제어할 역량을 보여 줄 줄 알았다.
검신조차 상대가 되지 않는다면 자신들이 나선들 의미가 없어진다. 한편으로 권왕의 노림수에 제대로 걸려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가문의 후예들을 이끌고 온 자리였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능력을 증명한 이상, 꼼짝없이 대가주의 권한을 인정해야 했다.
-대가주는 4년마다 대결로 정한다.
얼핏 공정해 보였지만, 현재로선 권왕의 노쇠화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저 인간! 점점 회춘하고 있었다. 재수 없는 소리지만 반로환동할지도 모른다. 대체 뭘 먹기에 저리 강해졌는지 의구심이 들 지경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차이라니.’
‘언제부터 이토록 간격이 벌어졌단 말인가?’
‘그다지 놀지 않았는데.’
무공은 처음이 가장 빨리 늘고, 경지가 높아질수록 단계를 뛰어넘기가 어렵다. 마주한 벽을 넘기 위해 일생을 갈아 넣는 무인도 부지기수였다. 그런데도 벽을 넘기는커녕 좌절하여 주화입마를 당하곤 한다.
권왕은 예전에 완성된 무인이었다. 그때도 대한민국에선 적수가 많지 않았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이렇지 않았는데, 기연을 얻었다고 해도 불가능했다.
‘비슷한 수준, 아니 그 이상의 무인과 종일 싸우며 깨달음을 얻지 않고서야.’
‘그런 무인이 어디 있단 말인가?’
싸움에 미친 권왕이 만족할 만한 대결 상대가 있기나 할까? 단순히 내력이나 레벨의 상승만으로 이루어 낼 경지가 아니기에 놀람은 더 컸다.
심권을 쓴다는 것도 놀랍거늘, 완숙에 가까워 보였다. 검신과의 대결을 복기할수록 거대한 벽을 느꼈다. 그들도 칠대가문의 수장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무인이었다.
분했다.
개망나니 같은 놈이 잘나가는 것도 보기 싫고.
그들의 감정과는 별개로 검신은 내려놓았다. 겪어 보지 못했던 패배에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졌네.”
“그만 내려놓을 때도 됐지.”
“자네랑 나랑 꼴랑 두 살 차이네만.”
“어허, 두 살이면 하늘과 땅 차이지.”
“그런데 말을 놓나?”
“까탈스럽기는, 민성이 형처럼 수백 년 차이 나는 것도 아니잖아.”
“여전하군.”
자기 편한 대로 해석하는 심보는 나이가 들어도 변하지를 않는다. 걱정, 근심 없이 세상 편하게 사니 점점 젊어지는 모양이다. 스트레스가 만병의 근원이기는 했다. 무인조차도 걱정, 근심 때문에 병이 드는 걸 보면.
천무룡은 격차를 인정했다.
팽팽해 보이긴 했어도, 경지의 차이가 확연하다. 만약 연무장이 아니라 전장이었다면 과연 버텨 낼 수 있었을까? 객관적으로 돌아볼수록 회의적이었다.
‘너무 오래 쉬었군.’
세간에는 폐관수련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지만, 실제는 아예 다르다.
심득이 아닌, 둘째의 계략이었다.
검의 끝을 보겠다는 욕심이 화를 불렀다. 닿지 못할 미몽에 사로잡혀 주화입마에 걸렸었다.
그러는 사이 둘째는 첫째를 처리할 계획을 세웠다. 만약 조금만 늦었다면 정령가처럼 씻지 못할 유혈 사태로 번졌을 것이다.
의도했다고 보긴 힘들어도, 권왕이 다크니스를 공표하고 색출하면서 가족이 칼을 맞대는 최악의 사태를 면했다. 검신으로선 평생 갚지 못할 은혜를 입었다.
일례로 소싯적에나 밤새 술 마시고, 친구 없으면 못 살 것 같지. 나이가 들수록 가족이 제일이었다.
“고맙네.”
“초대 대가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했을 뿐이다.”
“그 말은 역겨워서 못 들어 주겠군.”
“그러면 이기든가.”
“이긴다고 장담은 못 해도, 추후에도 안주할 수 없게 해 주겠네.”
“아주 좋아.”
검신은 과거보다 강해졌다.
둘째가 가져온 현혹의 신기 악마의 성유물 흑마천서(黑魔天書)로 인해 미몽에 빠지긴 했어도. 깨어나지 못했다면 미몽에 사로잡혀 실혼인이 되었겠지만, 극복하면서 심득을 얻었다. 하나, 아직은 심득을 완벽히 갈무리하지 못한 상태였다.
‘심검의 극의에 도달한다면 자리를 내어 주어야 할 걸세.’
은혜와는 별개로 검신은 대가주를 포기하진 않았다. 권왕이 벽을 넘었듯이 시간만 주어진다면 가능했다. 더욱이 자신에겐 뒤를 이을 완벽한 후계자가 있었다.
‘놀랍구나.’
손녀의 검기는 실로 놀라운 경지에 이르렀다. 못 본 사이에 일취월장이란 표현도 부족할 정도로 발전했다. 왕년의 자신조차 넘어서는 성장 속도였다.
‘우리 혜진이를 위해서라도 뒤처질 순 없지.’
가문 내의 패륜이 소리 소문 없이 정리되긴 했어도 할퀴고 간 상처는 크게 남았다. 정상적으로 돌아가려면 정진하여 강해져야 했다. 손녀의 앞길을 터 주려면 한국제일검으로서 권왕과 자웅을 겨룰 수 있어야 한다.
스윽!
메인을 맛볼 대로 본 권왕은 다음 먹잇감을 찾았다.
도제, 염왕, 용신이 타깃이었다.
수왕은 진작에 꼬리를 말고 시조의 뒤에 서 있었고, 창황은 대결 자체에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한 판 어떠냐? 혹, 도가 검보다 못하나?”
“이 자식이, 말이면 단 줄 알아!”
도객과 검객의 자존심 싸움은 예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일반인이 보기엔 도나 검이나 다 같은 칼일 뿐이나, 업계에선 예민한 문제였다.
“검은 만병지왕이지, 아마.”
“오냐, 한판 붙자!”
애피타이저 완성.
권왕이 입맛을 다시며 회심의 미소를 짓자, 용신과 염왕은 미간을 찌푸렸다. 개 같은 수작이 분명한데, 도객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발언이었다.
더욱이 뭘 입어도 산도적 같은 진철웅은 생긴 대로 인내심과는 거리가 먼 성향을 지녔다. 애초에 다음 타깃으로 노리고 있었다고 봐야 했다.
실력 차이는 극명하다.
‘대놓고 팰 셈인가?’
‘방심하다 뒈졌으면 좋겠는데.’
도제의 성명절기 적운도법은 파괴력만 놓고 보면 적수가 많지 않았다. 천하의 권왕이라도 얕보다가는 당황할 만한 구도가 나올 수 있었다.
권왕의 일권을 보기 전까지는.
까아앙!
도제의 애병, 적령도(赤靈刀)가 도강과 함께 반 토막이 나서 연무장의 천장을 두드린 후 맥없이 떨어져 내린다.
권왕은 남의 애병 파괴자였다.
심권을 맛본 도제는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연무장의 벽면을 거칠게 두들겼다.
꿈틀, 꿈틀!
살려는 드렸다고 봐야 하나?
아무리 그래도 도제를 단 한 방으로 제압하다니, 알고 봤더니 검신은 선전한 편이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권왕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의아할 지경이다.
용신과 염왕은 짜증이 치밀었다.
이전에는 이긴다고 장담은 하지 못했지만, 진다고도 생각하지 않았었다. 이제는 차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무위가 벌어졌다.
도전한들, 결과는 명약관화였다.
용신과 염왕은 이쯤에서 끝내야 한다는 걸 안다. 굳이 망신을 자초할 필요는 없었다.
“다음.”
“……?”
“쫄았나?”
“……?”
“인심 썼다. 합공해도 좋아.”
부글부글!
저 인간 말종이 보자 보자 하니까 우리가 보자기로 보이나. 용신과 염왕이 더는 참지 못하고 같이 나섰다.
퍼퍼펑, 화르르르!
칠대가문의 역사적인 대가주회의가 난장판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권왕가에 들어오자마자 문을 닫고, 연무장으로 안내할 때부터 예상했어야 했다. 공정성과 명분은 개뿔, 권왕은 싸우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었다.
‘아주 그냥 살판이 났구나.’
소민성은 권왕을 우리에서 풀어놓은 무진이 원망스러웠다. 저 말종에게 대가주라는 감투까지 씌워 놨으니 이제 누가 통제를 한단 말인가.
그렇다고 무진이 말려 주리란 기대는 하지 않는 편이 이로웠다. 옆에서 부추기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크하하하하하!
권왕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연무장을 뒤흔들었다. 물 만난 물고기가 따로 없었다. 생사의 간극에서 희열을 느끼는 변태답게 연무장을 전장의 한복판으로 만들었다.
‘네놈 뜻대로 되게 둘 순 없지.’
소민성은 무진에게서 산 포션을 넋 나간 도제에게 먹였다. 마시고 난 후, 도제에게 말했다.
“병법의 제일 전략은?”
“……다구리.”
“정신은 온전하군.”
“그래도 다구리는 좀.”
“어차피 합격하고 있잖아.”
도제는 용신과 염왕의 합격이 밀리는 걸 보고 혀를 내둘렀다. 이제는 체면을 따질 때도 아니었다. 더욱이 자신은 체면을 고려해 주기는커녕 한 방으로 끝을 내 버렸다.
“네가 자초한 거다!”
“그렇지.”
도제가 합세했다.
소민성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서 확률을 높이기 위해 검신에게도 할 의향이 있냐고 넌지시 시선을 주었다.
스윽!
도리!
창황에겐 묻지 않았다. 저 마구니까지 합세하면 조금 반칙 같았다. 가만히 있어 주는 게 도움이 되기도 하고.
“원래 모난 돌이 정을 맞는 게다! 자업자득이니 달게 받거라!”
자고로 아비와 아들은 일심동체, 소민성은 수왕과 함께 달려들었다. 수왕도 권왕에게 당한 게 있어서 전력을 숨기지 않았다.
쐐액!
창황과 검신을 제외한 가문의 어른들이 권왕을 에워쌌다. 사방이 겹겹이 가로막힌다.
어?
권왕도 이때만큼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3명은 몰라도, 5명은 너무하잖아.
자존심 강한 놈들이 이런 식으로 합공을 할 리는 없을 텐데, 대체 누가?
“이 망할 화석이!”
“그러게, 평소에 어른을 공경했어야지.”
소민성이 의기양양하게 웃고 있었다.
각 가문의 후계자들은 사문의 어른이 밀리고 있는데도, 망연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이 끼어들기에는 판이 너무 큰 데다가 지나치게 사나웠다.
‘이게 무슨 개판이야!’
‘난장판이 따로 없구나!’
가문을 대표하는 수장의 모임이었다. 다음 대 가문을 이끌어 가야 할 후예들로서는 기대를 품고 있었다.
그런데 개판도, 이런 상개판이 없었다.
대체 뭘 보고 배우란 건지?
저벅!
우왕좌왕하는 각 가문의 후계자들은 귀를 파고드는 발걸음에 고개를 돌렸다.
지수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우리도 서열 정리 좀 할래요?”
“하, 씨발!”
어이가 없었는지 욕이 튀어나왔다. 그럴 만도 한 게 각 가문의 후계자들 중에는 생도도 있고, 졸업생도 있었다. 다들 지수보다는 나이가 많았다.
비록 지수가 아카데미에서 압도적인 실력을 선보이긴 했어도, 그 차이는 컸다. 까마득한 후배가 발칙하다 못해 괘씸하게 여겨질 만한 도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