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 일망타진(3)
무진은 방학이라고 해서 놀지만은 않았다. 사부와 지수의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해서 심상 연결을 꾸준히 발전시켰다.
균열과 침식을 이용한 연구를 맡아 했던 기우선 박사가 힌트를 제공해 주었다. 원래 하던 연구였는지, 발전 속도가 무척이나 빨랐다. 확실히 이 분야에서 대가의 반열에 들 만한 실력이었다.
기우선 박사의 연구 성과를 이용하여 심상과 던전을 연결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그 결과.
무신과 투신은 드라마에 중독되었다. 종일 소파에 누워서 TV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한 우물을 파 본 무인들이라서 집중력 하나는 천하제일이었다.
“대체 언제까지 드라마만 보고 있을 겁니까?”
“우린 다음 편이 목마르다.”
“아무 말이나 합성하지 말라고요.”
“집중 안 되니까, 말 시키지 말거라. 하아, 저 쌍년, 지독하네! 권환으로 쳐 죽였어야 했는데!”
“난 저 쌍년보다 이리저리 휘둘리기나 하는 저 줏대 없는 사내새끼가 더 짜증 난다네.”
이젠 말도 못 걸게 하네, 다른 세상에 왔으면서 궁금하지도 않나?
방콕이 웬 말이냐고!
무진은 한숨을 내쉬다가 이 사태의 원흉을 노려보았다.
어쭈!
고티아는 반성하기는커녕 맑은 눈을 치켜뜨며 피하지 않았다. 반년 사이에 성격이 아주 되바라졌다. 눈만 마주쳐도 비 맞은 개처럼 바르르! 떨던 때가 엊그제이거늘.
“넌 이걸 보고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거냐?”
“내가 뭘 어쨌다고? 드라마 아니었으면 저분들은 넘어오지도 않았을 거야. 자기 때문에 안 넘어오려는 분들을 겨우 달래서 데리고 왔으면 칭찬을 해 줘야지. 그래, 안 그래?”
“……그래.”
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랄인 거야? 대체 어디서 보고 배운 건지 모르겠다.
“평소에 잘 좀 하자고.”
“너 원래 이런 성격이었냐?”
“자업자득이거든.”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구나.”
오랜만에 무진은 말문이 막혔다. 논리적으로 빈틈을 못 찾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그 말 그대로 죄를 지은 것도 사실이었다. 예상과 달리 무신과 투신은 이 세계로 넘어오지 않으려고 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생사를 오가는 전투를 원한 거 아니었나?’
심상 연결을 던전의 균열과 연동하여 차원을 열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차원과 차원의 연결이 쉬웠다면 진작 누군가는 해냈을 것이다.
두 사람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지 않았다면 애초에 연결 자체가 되지 않았다. 더욱이 한 번 연결하는 데 소모되는 자원도 만만치 않아서, 빨리 넘어오라고 했더니 칠색팔색 하며 물러섰었다.
‘자기 때는 밥도 안 먹고 싸웠다고 큰소리쳤으면서!’
정 안 되면 자신이 직접 싸워 주겠다고 협상안을 제안했었다. 싸울 상대가 없어서 고독한 것보다 얼마나 좋아.
무신과 투신답게 싸우다 뒈지는 호상의 기회였다. 그런데도 다가설 때마다 물러서고, 공간을 완전히 열어 주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닫으려고 했던 것 같기도 했다.
신세계를 보여 주려고 한 성의를 무시당했을 때 얼마나 짜증이 치밀던지. 화가 나서 나도 모르게 주먹을 내지를 뻔한 걸 간신히 참았었다. 그러나 주도권을 쥐고 있는 쪽은 무신과 투신이었다. 일단 넘어오도록 살살 어르고 달래야 했었다.
넘어온 후엔 노인 공격의 진수를 보여 줄 테지만. 그렇게 상당한 시간 쓸모없는 실랑이를 벌였다.
와라, 싫다.
-일단 넘어와서 말씀하시죠.
-네놈의 수작에 넘어갈 것 같으냐?
-제가 상대해 준다니까요.
-그게 더 싫어!
답이 없는 평행선에 답답해할 때 고티아가 나섰다. 이런 쪽으론 자신이 전문가라나?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고, 그때는 그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했었다. 다른 차원에서 넘어온 선배로서 차원 이동 전 후배의 고충을 이해할 수도 있겠다는.
명백한 오판이었다.
이 세계의 장점, 단조로운 무협 세상과는 다른 신문물만 보여 주면 간단하다고 했다. 그런데 그게 게임, 드라마, 영화, 라면이었을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명색이 신선이란 인간들이 고민도 없이 이토록 간단히 타락하다니, 우화등선의 기준점이 잘못된 거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저런 인간들이 열반과 우화등선을 할 수 있다면 정말 문제였다.
천마 등선.
혈마 등선.
투마 등선.
모두 실패하고 이계로 떨어지는 이유가 있었다.
“너는 공기처럼 의식하지 않고도 언제든 볼 수 있으니 자극적이고 인공적인 맛이 얼마나 재밌는지 모르는 거라고.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금방 적응하고, 식상해질 거야. 이분들이 설마 평생 드라마만 보진 않을 거 아냐.”
“너무 잘 대해 줬나?”
무진의 중얼거림에 고티아는 세계수를 돌봐야 한다며 잽싸게 튀었다. 한창 드라마를 신나게 보던 무신과 투신도 느낌이 쌔했는지 필사적으로 돌아보지 않았다.
‘이번 일만 아니었어도.’
속전속결의 일망타진을 쓰느라, 암중 세력이 우리나라를 어찌 대할지는 불을 보듯 자명했다. 당장 손을 쓰지 않는다고 해도, 전력을 투입할 수도 있었다. 손이 부족할 때를 대비해서 불러왔더니, 불필요한 군식구만 늘었다. 집에 수저만 놓아도 될 인간들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더럽게도 많이 처먹지.’
누가 신선은 이슬만 처먹는다고 했냐고.
특제 벽곡단은 쳐다도 안 본다.
게다가 화식(火食)을 왜 이렇게 좋아해?
원래 먹는 거 가지고 치사하게 구는 성격은 아니었는데, 돌려보낼 수도 없는 낙장불입이었다.
삼시 세끼 간식까지 다 처먹고 한다는 소리가.
“라면 없냐?”
“누가 들으면 굶기는 줄 알겠네요. 적당히 좀 드세요. 대체 새벽 2시에 라면을 20봉이나 처먹는 인간들이 어디 있어요?”
“먹는 거 가지고 그러는 거 아니다. 평소 못 먹고 살아서 그런 건데, 이러기냐?”
“젠장!”
그러니까 또 할 말은 없네.
라면이야 언제든지 주문하면 그만이었다. 문제는 한 트럭어치나 주문했는데도, 며칠 사이에 동이 났다는 점이다. 일주일 후에 다시 배달 온 택배 기사의 얼척이 없는 얼굴에 할 말을 잃었다.
이 인간들, 게임만 중독이 아니라 인스턴트 음식에도 사족을 못 썼다. MSG의 위대함이라고 해야 할까? 다시다를 개발한 연구원들이 진짜 대단했다.
‘고기 방패라도 하려면, 잘 먹이긴 해야겠지.’
살 만큼 산 분들이니, 언제 가도 호상이긴 했다.
살아 있는 화석이 들으면 서운하려나.
그래도 사는 데까지는 사람답게 살라고, 주민등록 서류 작업을 진행했다. 가장 바쁜 와중에도 제인 누나는 신경을 써 줬다.
‘늦게 배운 도둑질도 아닌데, 왜 이렇게 좋아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긴 해도, 제인 누나는 살맛이 나는 모양이었다. 누가 복수는 허무하다고 했던가. 복수야말로 가장 신나는 어드벤처였다.
제인 누나는 천화 그룹의 종자들을 배신자로 낙인을 찍어 잘근잘근 짓밟아 주고 있었다.
궁지에 몰린 천화 그룹이 발버둥을 칠 때마다 제인 누나는 계열사를 하나씩 빼앗았다. 돈 앞에 부모 형제 자식도 없는 인간들에게 최악의 복수였다.
주도권을 완벽히 쥐고 있는 상황에서 오빠들의 자금줄과 자식들을 인질로 삼았다. 같은 아버지를 둔 핏줄을 언급하여 속죄하며 사정하지만, 제인 누나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피눈물을 흘려야 제맛이긴 하지.’
배운 사람답게 제인 누나는 복수할 줄 알았다. 잘못을 인정했다고 해서 봐주지 않았다. 가족들까지 전부 싸잡아서 절망의 늪에 빠뜨렸다. 헤어 나올 수 없는 절망에 몸부림을 치다가 자결하기를 바랐다.
내막을 안다면 가족끼리 너무한다고 할 수 있지만, 이복 오빠들은 제인 누나의 어머니를 죽이고 은폐했었다.
일전 죄악의 심판자, 종속의 보도로 불린 아이템을 원했던 이유가 바로, 어머니의 죽음을 밝혀내기 위해서였다. 물체에 담긴 기억을 읽을 수 있는 아이템이었다.
‘천화 그룹을 시작으로 재벌도 개혁할 때가 됐지.’
아버지와 함께 사전 작업에 들어간 지 오래였다. 제인 누나와 함께 조사한 실체 중에 성운 그룹도 포함이 되었다.
때마침 아버지한테서 문자가 왔다.
-움직였다.
***
경기도 연천의 별장.
진 회장은 그룹의 명운이 걸린 일이나, 중대사를 결정할 때 연천 별장을 찾는다. 심신을 차분히 다스리기 위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실상은 껄끄러운 일을 조용히 처리하기 위해서다.
연천 별장이야말로 은밀함이 보장되었다.
거대 그룹을 이끌려면 불가피한 일도 하게 된다. 모든 일이 적법하게 처리가 되면 좋겠으나, 순리대로 되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후우우!
진 회장은 건강을 위해서 어렵게 끊었던 담배를 피웠다. 그만큼 심적으로 상실감이 컸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남 실장의 배신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나마 사전에 낌새를 알아채고, 성운십위를 동원하여 잡아 왔다.
성운십위(星雲十衛)는 성운 그룹을 지키는 수호검으로, 10명에 불과하나 전원 백작급의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남 실장이 각성자긴 해도, 성운십위가 전부 나선 이상 도망치진 못한다.
털썩!
저항이 심했는지 남 실장의 상태가 많이 망가져 있었다.
진 회장의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자신의 수족이 되어서 오랫동안 움직였었다. 그간 해 준 일들이 있어서 계열사의 사장으로 보내 줬더니 뒤통수를 쳤다.
“계열사의 사장으론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냐?”
“저는 회장님을 위해 30년을 개처럼 일했습니다. 그 대가가 고작 덤프트럭이나 관리하라는 겁니까?”
“그래서 내 뒤통수를 치려고 천화 그룹과 손을 잡아? 시기가 좋지 않아서 조용히 처리하는 걸 다행으로 알거라. 아니었다면 각종 죄를 뒤집어쓰고 평생 감옥에서 썩어야 했을 거다. 그간의 정을 생각해서 가족은 챙겨 주마.”
“안됐지만, 다행은 아니야.”
기광을 번뜩이는 남 실장의 눈빛에 진 회장은 위화감을 느꼈다. 저항할 수 없는 상태였다. 성운십위에 제압되어 구속구를 씌워 놓았었다.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구나.”
“정신을 차려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당신이야.”
이질적이었다.
진 회장은 그간 자신이 알고 있었던 남 실장이 아님을 직감했다. 열 길의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하더니. 이제까지 복심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이상하다.
“그만 저항하고, 편히 가거라.”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봐. 하긴, 일선에서 손을 놓고 지시만 내린 지 오래되긴 했어. 그러니 자기 주변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모르지.”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구속구가 풀리면서 무릎을 꿇었던 남 실장이 일어섰다.
화들짝 놀란 진 회장이 뒤로 물러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