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 일망타진(1)
소란은 끝이 났다. 다행이라고 하기엔 결과가 아쉽다. 사전에 결계를 쳐 놓고, 만반의 준비를 했음에도 본가가 반파되었다.
낡을 대로 낡아서 재건축하기 편하게 됐다고 하기에는 재산 피해가 상당했다. 위안으로 삼자면 인명 피해는 없다는 점이었다. 침투를 예상했기에 망정이지, 몰랐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쩝!
소민성의 입맛이 썼다.
온전히 가문의 역량으로 제압해야 했다. 칠대가문의 한 축을 담당하는 대가문의 역량을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그동안 너무 실망스러운 모습만을 보였던 것도 사실이었다. 이번 기회에 만회하려나 했더니, 남가지몽에 불과했다.
‘망신살이 뻗치는군!’
늙으면 조금 추해도 된다고 말하기엔 실패의 연속이었다. 어디까지 품위가 추락해야 만족할는지.
흠!
정령가의 화석 못지않게 마제와 교장에게도 만족스러운 결과가 아니었다. 정령가에 빚을 제대로 지우나 했더니, 자칫 상황이 꼬일 뻔했다.
‘저 인간이 나타날 줄이야?’
‘대체 언제 손을 잡은 것이냐?’
당최 이곳에 있어야 할 사람이 아닌데, 불현듯 나타났다. 그것도 아주 절묘한 타이밍에 맞추어서. 이게 과연 우연일 수 있을까?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는 걸 마제와 교장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자신들도 시간을 못 맞출 것 같아서 숨어서 기다렸으니, 저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뭘 그렇게 노려보나?”
“어떻게 온 건가?”
“알면서 물어보진 말지.”
“당했나 보군.”
“당하기는, 큰 은혜를 입었지.”
마지막 순간 뱀파이어 퀸, 엘리자베스의 가슴에 구멍을 뚫은 존재는 창황가의 전대 가주 창황이었다. 항상 반대쪽에 있었던 걸 고려하면 아이러니한 현실이다. 하지만 그의 등장을 부정적으로 볼 수는 없었다. 그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뱀파이어를 놓치고, 계획이 물거품 될 수 있었다.
흠.
창황이 벌였던 일들이 있기에 거리를 두었다. 인간 자체에 대한 불신과 같았다. 그래서 평소에 인품이나 명성 관리를 잘해야 한다. 괜한 구설수를 만들어 놓으면 하지 않아도 오해받을 수 있었다.
기웃, 기웃!
마제와 교장이 거리를 두었지만, 소민성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창황은 예전에 본 적이 있었다. 꼬꼬마 시절에 곧장 반항기 있는 모습을 보였었다. 이제는 다 크다 못해 권왕처럼 징그럽게 늙어 가지만.
‘이상한데.’
엘프는 첫인상을 중시한다고 알려졌으나, 실상은 기운을 읽는 능력을 타고났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기운은 살아온 세월을 반영했다. 창황의 삐뚤어진 성향이야 예전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다시 보니 아예 다른 사람 같았다. 게다가 전에 느껴 봤던 적이 있던 기운이었다.
“마기?”
“호오, 제법 보는 눈이 있구나. 하긴, 엘프라면 알아볼 줄 알았지.”
“설마 마족?”
“마왕이다.”
……?
뜬금없이 뭔 소리야? 다들 귀를 의심했다. 생각지도 못한 존재의 의의였다. 평소 같으면 장난치지 말라고 할 텐데.
창황이 자신의 본질을 드러냈다.
“창황을 먹은 것이냐?”
“주군께서 먹으라고 주셨다.”
“주군? 무진이?”
“함부로 말하지 않는 게 신상에 이로울 게다.”
창황가를 어떻게 흡수했는지 이제야 알게 되었다. 드러난 전말은 황당하다 못해 잔혹했다. 헬소드까지 얘기가 진행되자, 교장의 동공은 그 어느 때보다 흔들렸다.
‘이젠 하다 하다 마왕까지 부하로 부리는 게냐?’
‘불가능하다고 하기엔 본 게 너무 많잖아.’
무진이라면 능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서 의심하지 못했다. 게다가 의심해 봤자 자신들만 손해였다. 발칸이란 종자의 마기는 일반적인 경지를 넘어섰다. 절대경의 창황이 맥도 못 추고 흡수되었다면 경시할 수 없는 대상이었다.
스윽!
창황이 주변을 훑었다.
“동지라서 말해 주는 거니까, 발설하진 말고.”
너희들을 믿는다기보다는 비밀을 공유했으니, 발설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처럼 들린다. 이제는 정말로 빼도 박도 못 하는 처지가 되었다.
“아, 나는 정령가에 오지 않은 거다. 갈 테니까 고맙다고 붙잡지는 말고, 나중에 소주나 한잔씩들 하자고.”
뱀파이어 퀸만 해도 어질어질하거늘, 마왕을 붙잡을 간 큰 인간이 있겠는가.
마왕이 한국식 인사인 ‘밥 한번 먹자’는 말을 남기고 사라진 후에도 한동안 공백이 있었다.
띠리링!
정령가의 화석답게 구식 핸드폰 벨이 울렸다. 피처폰을 아직도 쓰다니 배터리가 작동하는 게 신기할 지경이다. 간혹, 골동품으로 팔아먹으려고 보존 마법을 거는 사람이 있기는 해도.
-다 끝났나요?
“그래.”
-바로 갈 테니까, 결계나 열어 놔요.
“알았다.”
전화를 끊고, 결계를 열자 곧바로 무진이 공간이동을 해 왔다. 인원이 적지 않은데도, 공간이동 시 고급 세단의 서스펜션처럼 부드러웠다.
하~!
쑥대밭이 된 본가에 유정은 헛웃음이 나왔다. 돌아가는 사태를 보니, 이중 삼중의 완벽한 함정이었다. 작전은 성공했지만, 미끼로 쓴 본가는 어쩔 건데?
특히 이번에 새로 리모델링한 자신의 방이 흔적도 없이 날아갔다. 방을 꾸미는 데 들어간 돈, 시간, 노력이 한순간에 허공으로 사라졌다.
“가족은 무사하잖아.”
“너 잘났다!”
“고맙다고 해야지.”
“……고마워.”
유정의 개인적인 사정 따윈 모른다. 무진은 공치사를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받을 수 있으면 다 받았다. 모르고 있다면 똑바로 알려 주었다. 하물며 미끼를 시조께서 자원하셨다. 이 정도로 끝난 건 전적으로 완벽한 대비가 있었기 때문이다.
“시조님, 할 말 없으세요?”
“……고맙구나.”
“돈으로 주시면 됩니다.”
“집이 이 지경이 된 걸 보고서도 돈타령을 하는 게냐?”
“공과 사는 구분해야지요.”
주관적으로 한 대만 때리면 안 되겠느냐? 사적인 감정이라고 하기엔 모처럼 정령가는 한마음, 한뜻이 되었다. 본가, 분가 나누지 않은 진정한 통합을 이루었다. 이런 거 보면 무진이야말로 통합의 화신이었다.
하나, 당황하기에는 아직 멀었다. 무진의 꼼꼼함은 난잡하고, 분주한 상황에서도 빛을 발휘한다.
“포션을 드셨네요.”
“……목이 말랐거든.”
“괜찮습니다. 계좌 번호 드렸으니 거기로 이체하시면 됩니다.”
“……이 피도 눈물도 없는 것아!”
“공짜 좋아하세요?”
“주마, 주면 되잖느냐!”
“집에 올 때도 계좌 이체는 꼭 하세요.”
“아주 돈독이 올랐구나.”
세계수를 관람하는 비용도 꼬박꼬박 받았다. 공짜 관람을 사전에 차단했다. 하는 짓이 괘씸해서 1억으로 하려다가 사정을 봐줘서 천만 원으로 DC해 주었다.
더욱이 가치는 희소성을 기반으로 둔다. 때와 장소, 상대에 따라서 가치는 다를 수밖에 없다. 세계수는 유일무이하며 정령사에겐 안식처와 같다. 더욱이 옆에 있기만 해도 친화력이 늘어서 정령력이 쌓이는 정령카우였다. 입장료치고 천만 원이 비싼 것 같지만, 비용 대비 효능으로 보면 저렴했다.
“그만하고, 심문실로 안내하세요.”
대화는 나중에 해도 되었다.
한시가 급했다.
정령가의 1급 심문실로 포로를 데리고 들어갔다.
취조의 기본을 선사해 주었다.
촤아아!
요나의 물세례가 이어졌다.
“……엘리자베스!”
“……레오!”
정신을 차린 레오와 엘리자베스가 손을 뻗으며 다가가려고 안간힘을 썼다. 당연하게도 달라붙지 못하게 강제로 떼어 놓은 상태였다. 누가 보면 로미오만 줄리엣인 줄 알겠다.
결국, 닿지 못한 레오가 분기를 터뜨렸다.
“이놈들! 엘리자베스에게 손끝 하나라도 댄다면 내 죽어서도 용서치 않겠다!”
레오는 연인인 엘리자베스를 위해 죽음마저 불사하는 당당함을 보여 주었다. 사정에 따라서 배신하는 현대인과는 다른 감동적인 광경이었다.
무진은 일어서서 엘리자베스에게 다가갔다.
뻐억, 꽈당!
엘리자베스는 무방비로 죽빵을 처맞고 바닥을 찍었다. 머리끄덩이를 거칠게 잡아 얼굴을 들어 올린 무진은 주먹을 털며 레오를 응시했다.
“다시 말해 봐.”
“네놈은 수치도, 명예도 없는 것이냐, 어떻게 레이디의 생명과 같은 얼굴을!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프랑스와 영국의 관계를 고려하면 욕먹기 딱 좋은 커플이기는 했다. 무진은 욕을 하진 않았다. 사랑엔 국경도 없다고 했으니까. 너희들끼리 지지고 볶든 자유였다.
다만, 공과 사는 구분했다.
퍼벅, 퍼벅!
무진은 바닥에 찍은 엘리자베스의 대가리를 발로 차며 다시 물었다.
“뭐라고?”
“……무슨 짓이냐? 차라리 나를 죽여라!”
무진은 엘리자베스를 좀 더 잘근잘근 짓밟았다. 원하는 대로 해 줄 리가 없는데, 저리 간절히 부탁하다니. 누가 봐도 애인한테 악감정이 있는 거다. 자기는 착한 척하며 위로하지만, 속내는 시궁창이었다.
크아아아아!
엘리자베스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성대가 찢어져라 비명을 질러 댔다. 무진은 주둥이를 발로 차 버렸다. 엘리자베스의 이빨이 우스스! 떨어져 나가며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죽일 거지만, 지금은 아냐.”
“……이 악마 같은 놈!”
무진은 인격체가 아닌, 무생물처럼 대했다. 당연한 처우였다. 무단 침입에 강도 살인을 저지르려던 연놈들이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잡것들에게 예의를 갖춰 주기를 바라는 건가? 가당치도 않았다.
“더 말해 봐.”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놈, 지옥에나 떨어져 버려라!”
레오가 격렬하게 저항할 때마다 무진은 엘리자베스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주먹을 날려 주었다. 그러면서 얼마든지 더 해 보라고 했다.
허!
매직미러 밖에서 심문을 지켜보던 이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헛바람을 삼켰다. 초장부터 너무 세게 나가서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저게 어떻게 2학년 생도인지 의구심이 들었다.
‘성질 건드리지 말아야겠다!’
‘돈을 갚으면 되지 않느냐!’
‘이건 미성년자 관람 불가 아닌가?’
심문실에 들어오기 전에 심장 안 좋은 사람은 나가 있으라는 무진의 경고가 괜한 말이 아님을 실감했다. 한편으로 어떤 일이든 무진과는 척을 지지 않는 편이 신상에 이롭다는 걸 절실히 느꼈다.
무진이 엘리자베스의 귀에 속삭였다.
“네가 맞는 이유가 뭔지 알지?”
“……이 개자식! 죽여 버릴…… 으어어억!”
레오와 엘리자베스의 사이가 얼마나 좋은지는 모른다. 그러나 코너에 몰려서도 구하려고 했다면, 가볍지 않은 사이겠지.
둘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마구마구 했겠지.
더는 생도로서 감당하기 힘든 수위라 이쯤에서 망상을 멈추었다.
무진은 연인의 애틋한 감정을 효과적으로 이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