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 산 넘어 산(3)
“어서 놈들을 처리해!”
“또 돈이군요.”
가주의 앙탈은 깔끔하게 무시했다. 그래도 아주 약간은 미안한 감정이 있었다. 기실 소민성은 지시만 할 뿐, 모든 돈은 가주가 알아서 냈었다.
꽈아앙!
뱀파이어 나이트와의 격전도 끝이 나고 있었다. 더는 저항하지 못한다. 막다른 길목에 다다르자, 그들은 주저하지 않고 자폭했다.
퍼펑, 퍼퍼퍼펑!
폭발하면서 터져 나가는 파편은 흉기였다.
눈치 빠른 수왕이 [수중결계]를 중첩하여 막아 내지 않았다면 위험했다.
“핏물도 막아.”
“예?”
“퀸에게 흡수되잖아.”
“아!”
승부가 기울었다고 판단해 동귀어진 하는 줄 알았더니, 사실은 뱀파이어 퀸을 위한 희생이었다. 자신들의 피를 제물로 삼아 진혈의 역량을 증폭시키는 최후의 수법이다.
마제와 교장의 합공에 고전하며, 마나와 체력을 쭉쭉! 소모한 엘리자베스는 딸피를 면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 대만 치면 죽을 것 같은 빈사 상태라, 결국 권속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었다.
“아끼는 권속이 죽어서 화났나 했더니, 자기 먹을 것을 뺏어서 화난 거였구먼.”
“닥쳐랏!”
부정해 봤자, 최후의 보루처럼 남겨 두었다는 걸 외면하긴 어려웠다. 설상가상으로 흡혈 증폭이 완벽하지도 않았다. 엘프가 눈치를 채고 결계를 치는 바람에 채 반도 흡수하지 못한 것이다.
꽈아아앙!
다급해진 엘리자베스는 분신과 유령화를 동시에 펼쳐 공간이동을 강행했다. 더는 위험하단 판단이 섰다. 다행히 흡혈 증폭으로 블러드 익스플로전을 펼쳐 회피할 공간을 만들어 냈다.
다 죽어 가던 년의 발악이라고 하기엔 위력이 상당했다. 막아서면 심각한 부상을 입을 수 있었다.
“교장, 거기서 물러서면 어떻게 해?”
“나보고 고기 방패라도 하란 겁니까?”
“좀 다친다고 닳는 것도 아니고!”
“아니, 마제께서 나서도 되는 거 아닙니까?”
“됐고, 어서 잡아!”
공간 장악을 쓸 타이밍을 놓쳤다. 이대로라면 저 계집은 어둠을 이용해서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놈이 난리 칠 텐데!’
다 잡아 놓은 고기도 못 잡느냐고 놀려 먹을 걸 상기하자, 마제와 교장은 다급해졌다. 솔직히 부정하기 어려웠다.
슈우웅!
엘리자베스는 주저하지 않고 도망쳤다. 뱀파이어 나이트가 남아 있지만, 생존이 더 중요했다. 저 앞의 결계만 벗어나면 공간이동 스크롤을 발동할 수 있었다.
오싹!
폐부를 찌르는 섬뜩함.
쐐애애액!
푸우욱!
한 발만 떼면 되었다. 다시 돌아와서 복수할 작정이었거늘, 마지막 일보가 닿기 전에 날카로운 무언가가 날아와 심장에 박혔다. 간발의 타이밍으로 비켜 맞기는 했지만, 피의 근원인 심장에 타격을 입었다.
까아아악!
비명이 터진다. 이어서 창에 담긴 마력이 폭발하며 엘리자베스의 심장 옆으로 왼쪽 팔과 옆구리를 날려 버렸다.
콰다다당!
바닥에 볼품없이 구르는 그녀의 앞으로, 숨어 있다가 느긋하게 걸어 나오는 거구의 사내가 있었다. 마치 주인공은 마지막에 등장해야 한다는 듯이 화려한 조명을 찾았다.
하!
마제와 교장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자가 나타날 거라고는. 예상을 벗어나는 전개였다. 이쯤 되면 뱀파이어 퀸에겐 지독한 머피의 법칙이었다.
“잘들 있었나?”
환하게 웃는 사내.
마제와 교장은 무진이 자신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사람을 가지고 노는구나.’
***
하아, 크아아아!
숨을 크게 내뱉으며 포효하는 레오, 그 안에 담긴 분노는 하늘을 뚫을 만큼 강렬했다. 그러나 먹이를 사냥하는 포식자가 아닌 상처 입은 짐승처럼 느껴졌다.
“빌어먹을, 어째서~~~!”
사자처럼 우아했던 풍채는 너덜너덜해진 지 오래였다. 윤기가 나던 털도 갈기처럼 풀렸고, 군데군데 타 버린 채 볼품이 없었다. [라이언킹]의 4단을 개방한 상태였다. 의식의 통제력마저 벗어난 본능의 영역이었다. 그런데도 일방적인 흐름을 바꾸기는커녕 의식이 돌아올 때까지 두들겨 맞았다.
하나를 막아도, 세 방향에서 공격이 날아왔다. 막는다고 끝나지도 않았고, 피해를 감수했는데도 맞지 않았다. 답답하고, 원사이드 한 흐름이 계속되었다.
-제자야, 2단 파워업이다.
-갑니다, 2단 파워업.
대결 도중 한 말이 레오의 속을 긁었다. 허장성세였다면 비웃고 말 일이지만, 진짜로 2배로 강해졌다. 속도, 파워가 기존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4단 개방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아서, 억지로 기량을 끌어올렸었다.
그런데 한다는 말이.
-제자야, 3단 파워업이다.
-갑니다, 3단 파워업.
수치상으로 4배의 파워업이었다. 말이 되는 일인가? 무시하고 전투에 임하려고 했지만.
왜 빨라지냐고?
왜 세지냐고?
그뿐인가, 피스트킹 1, 2호도 덩달아 강해졌다. 게다가 피스트킹은 망가짐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자폭 공격을 서슴지 않아 굉장히 까다로웠다. 어차피 부서져도 재생이 되기에 완전 소멸을 시키지 않은 이상, 제거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피스트킹에 전력을 쏟기엔 권왕과 무진이 얌전히 지켜보지 않았다.
무진과 권왕은 신화천권의 오의는 물론, 화염마도를 펼치며 레오에게 일체의 희망도 주지 않았다. 실제로 빠져나가는 것도 불가능했다. 무진이 절대마도를 아이템과 융합한 결계가 펼쳐졌다.
퍼억!
푸악!
일방적인 폭력.
무진과 권왕은 사이좋게 레오를 두들겨 주었다. 사제의 신명 나는 구타 행진이 이어졌다.
레오의 본능이 폭발하여 전력을 쏟아 내면 피스트킹 1, 2호가 방패막이가 되었다. 무진과 권왕은 빠져나가 전력을 쏟아 낸 레오의 빈틈을 공략했다.
뭘 해도 안 된다.
스킬, 속성, 아이템을 전부 사용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압도적인 우위에 방심이라도 한다면 모를까. 조금만 낌새가 이상해도 무진과 권왕은 대응을 달리했다.
처억, 처억!
시간이 흐를수록 레오는 천근만근이었다. 이대로는 도저히 방도가 없음을 체감했다. 분노가 치밀지만, 현실을 파악할수록 피가 차갑게 식었다. 얄미운 것과는 별개로 권왕과 무진은 강했다. 일 대 다수의 비겁한 전투 스킬은 중요하지 않았다.
레오도 전투에서는 비겁함을 따지지 않았다. 적이 다수였어도 언제나 압도적으로 이겨 왔기에 가리지 않았으나, 오늘은 달랐다.
“참으로 비겁한 놈들이구나. 네놈들은 무인으로서의 자존심도 없는 것이더냐!”
“아, 이런! 그러면 안 됐는데. 사부님, 우리가 너무 비겁했습니다. 이제라도 일대일로 해야 할 듯싶습니다.”
레오는 이제야 통했나 싶었으나, 권왕이 물러서는 척하다가 별안간 기습을 날렸다.
퍼어엉!
신화천권 염화식 화천폭이었다. 물러서는 시간을 이용해서 기를 집중하여 화력에 마도를 담았다.
“교육이 안 됐네, 아까도 당했으면서. 아, 사자 대가리라서 퇴화했구나.”
진짜로 일대일을 바라다니, 안타깝도다.
이 어리석은 중생을 어찌할꼬.
화르르르르!
무진은 불에 탄 사자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따라붙으며 고환, 명치, 눈두덩이에 삼연타를 날렸다.
퍽, 퍽, 퍽!
크아아악!
하나같이 공격하면 안 되는 부분이었다. 특히 사내라면 고통이 얼마나 심할지, 보는 순간 하체를 잡고 바동거릴 후손 절멸의 파괴력이었다.
“이 버러지 같은 것들…… 죽엇!”
분노한 레오가 무시하고 사자의 발톱을 발동했지만, 무진은 여유롭게 스텝을 밟으며 유유히 빠져나갔다. 그 타이밍에 피스트킹 1, 2호가 양방향에서 치고 들어갔다.
“……더는 안 당해!”
레이지 스트라이크!
무진을 놓친 후, 피스트킹을 마주한 레오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달려들었던 피스트킹이 몸으로 사자의 발톱을 받아 주었다.
솨아악!
종잇장처럼 잘린 피스트킹.
사람이면 죽었겠지만, 멈추지 않고 레오에게 쇄도했다.
상체가 사지선으로 잘린 상태로 뭘 하겠다는 거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의아함을 느끼는 찰나.
“자폭.”
“……이런!”
늦었다.
매번 실패하던 공격이 성공했을 때의 방심을 노린 무진의 자폭 공격이었다. 피스트킹의 찢어져 버린 잔해 일부를 제물로 내주어 자폭시킨 것이다. 질량보존의 법칙을 깡그리 무시하는 피스트킹은 삼분지 일만 남아도 재생이 되었다.
인간은 하기 힘든,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하는 이대도강이야말로 피스트킹이 가진 최강의 무기였다.
퍼어어엉!
꽈아아앙!
권왕은 폭발하는 공간을 유도 추적하며 신화천격의 괴멸식 패왕멸을 발출했다.
쩌어엉!
투아아앙!
무진, 권왕, 피스트킹 1, 2호로 이어지는 연계는 무시무시했다. 방심은커녕 상대의 심리까지 이용해 전술적인 전투의 미학을 완성한다.
헐!
철저하게 관전 중인 상원은 말문이 막혔다. 보이지도 않는 속도였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확대 마법으로 확인은 할 수 있었다. 필사적으로 마법을 사용했기에 보이기는 했다.
‘와, 씨발! 전투 참 좆같이 하네!’
상대편이 걱정되는 전투였다. 자신이 반인반수, 사자 인간과 같은 처지라고 상상하자 절로 쌍욕이 터져 나온다. 뭘 해도 안 된다. 그런데도 방심은커녕 기상천외한 수법으로 심리전까지 걸며 흔들어 댔다.
‘지독한 인간들이잖아!’
악의로 똘똘 뭉치다 못해 철철 넘친다. 악당이 오히려 불쌍하게 보일 지경이다. 더욱이 일대일로 싸워도 질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도 다구리와 자폭을 사용했다.
저런 인간들을 상대로 이기려고 했다니, 무모하기 짝이 없었다. 애초에 상대하지 않는 편이 정신적, 육체적으로 이로웠다.
‘전사(戰死)가 아니라 질식사네!’
숨 막히게 만드는, 가슴이 옹졸해지는 전투였다. 누구라도 저 수법에 당하면 사자 인간과 다르지 않을 듯하다.
철퍼덕!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듯, 전투가 종착지를 향해 갔다. 레오는 힘이 다했는지 쓰러졌다. 바닥에는 앉아 본 적도 없었던 그로선 처음 당해 보는 굴욕이었다. 그러나 반격은커녕 일어설 기력마저 남아 있지 않은 듯 비틀거렸다.
크으으!
레오로선 받아들일 수 없는 결과였다. 이토록 어처구니없는 일방적인 패배라니! 반격이 아니라 1대도 날리지 못했다. 억울하고, 분해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
레오는 마지막 수법을 숨기며, 놈들이 다가올 때를 숨죽여 기다렸다.
“홀드.”
“화염사슬.”
바닥에 엎어졌던 레오는 육신을 옥죄는 마력과 강렬한 화염의 사슬에 기겁했다. 차라리 반격이라도 했다면 시간을 끌기라도 했을 텐데. 죽은 척 방심을 노리다가 되레 싱겁게 제압당하고 말았다.
“마법 무효화 스킬이 있지 않을까요?”
“숨겨 둔 한 수를 조심할 필요는 있겠지.”
구속 아이템을 꺼냈다. 저항의 불씨를 완벽히 차단했다. 원래대로 돌아온 피스트킹으로 검증을 마쳤다. 반격할 기미가 있다면 재차 자폭을 시켰을 것이다.
차자자자작!
삼중의 구속구와 입으로 들어온 이상한 단약. 그럼에도 안심할 수 없었는지 육신을 통제하기 위한 점혈을 가했다.
시간이라도 벌어 주길 바랐던 라이언 기사단도 전멸당하고 말았다. 지수, 유정, 혜진의 합격술은 이제 완벽에 가까웠다. 물론, 대부분은 지수가 처리했다.
지수가 무진의 옆으로 다가왔다.
전투의 흔적이 확연한 유정이나 혜진과는 달리 지수는 멀쩡했다. 친구들을 지휘하면서도 자신의 역할을 확실하게 수행한 걸 보면 점점 벽을 넘어서고 있었다. 확실히 주변에 라이벌이 있으니 자극이 되어 분발할 동기를 제공했다.
“어쩌려고?”
“자백을 받아야겠지.”
“금제가 발동할 텐데.”
“국내 한정이야.”
암중 세력의 본진을 털기는 불가능할뿐더러, 물어보는 즉시 금제가 발동한다. 무리수를 두지 않는 선에서 교차 검증을 통해 국내의 곪아 터진 부위를 도려내야 했다.
지금까지 만난 그리드 중에 실력자로 꼽히는 이상, 국내 한정으로 많은 정보를 알고 있을 것이다. 덤으로 일본과 중국의 정보를 알고 있다면 금상첨화였다.
‘비싸게 팔아먹을 수 있겠지.’
화급을 다투는 문제긴 해도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다. 어설프게 잡아들이면 반격의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는 자유민주주의로 개인의 인권을 중시한다. 은밀하게 잡아들여서 몰래 죽일 거 아니면 증거는 필수였다.
‘갱생이 안 되면 어쩔 수 없고.’
무진은 곧바로 살생부를 작성했다.
독마를 통해 어느 정도는 윤곽을 잡아 놓았다. 이놈에게서 얻은 정보로 교차 검증만 끝나면 작전을 실행할 수 있었다.
사전 준비는 제인 누나와 함께 해 놓았다. 최대한 이놈들의 실패가 알려지기 전에 끝을 내야 한다.
스윽!
무진은 구속구와 금제를 당한 레오를 내려다보았다.
사자화가 풀리면서 금발의 사내로 돌아와 있었다. 티끌 하나 없이 완벽해 보였던 젠틀한 신사는 넝마처럼 구겨져서 더운 날 개처럼 헐떡였다. 그런데도 안타까운 사실은 잘생겼다는 점이다. 미남은 어떤 상태에서도 미남이었다.
비통해하는 레오에게 넌지시 말했다.
“애인을 곱게 죽이고 싶으면 순순히 불어. 지금쯤 아주 험한 꼴을 당하고 있을 거야.”
……?
다들 저게 생도가 할 말인가 귀를 의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