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 산 넘어 산(1)
-진혼곡 1장 1절 죽음의 전주.
-진혼곡 1장 2절 죽음의 행진.
-진혼곡 2장 4절 지옥의 선율.
그리드3 레퀴엠 엘리자베스는 죽은 자의 심포니를 결합, 증폭 스킬을 통해 일대를 장악했다. 위령의 장대한 서사시가 강력한 의지, 즉 죽음으로 가는 순례길을 형성한다. 모두가 참배하고, 고개를 숙이게 하는 숙연함이었다.
연주곡처럼 들리지만, 능히 권능과 같았다. 정신력이 강한 각성자조차 현혹되어 이지를 상실케 한다. 게다가 단순히 정신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공간을 진동시켜 형태를 이루어 현혹된 찰나를 노렸다.
꽈꽈과과광!
푸아아앙!
일대가 견디지 못하고 맹렬히 충돌하여 음악이 닿는 공간을 폭발시키며 증폭했다.
쩌저저적, 투아아아앙!
사방으로 황금색 휘광이 번지며 뇌격과 마주친다. 뇌신과 악신의 강림으로 천지개벽이 일어났다. 사방을 둘러싼 단단한 건물이 견디지 못하고 터지면서 가루가 된다.
후아아앙!
사방으로 뿌연 가루가 갈피를 못 잡고 휘날리는 가운데, 서로의 영역으로 검은색 음영이 충돌했다.
파아아아아앙!
주먹과 주먹이 부딪쳤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충돌의 여파였다. 우웅! 천지 사방으로 번지는 기운은 살인 병기나 다름이 없었다. 닿기만 해도 부서지며 하늘과 땅을 거칠게 흔들어 놓는다.
휘몰아치는 기세가 끝을 모르고 상승했다. 용호상박의 대결이라 누가 이길지 모르는 혈전이었다. 그 둘을 메인으로 주변에서도 생사를 가르는 전장이 펼쳐졌다.
주륵!
한 타이밍이 늦었다. 뺨에 날카로운 생채기가 생기며 붉은 선혈이 흘렀다.
스릅.
그리드3 엘리자베스는 붉은 혀를 내밀어 피를 핥았다. 어딘지 모르게 섬뜩하면서도 선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생사투의 현장임에도 어지간한 정신력을 갖추지 않고서는, 그녀의 치명적인 매력에 홀려 영혼을 저당 잡혔을 것이다.
엘리자베스의 고유 속성 [유혹의 소나타]가 패시브 스킬처럼 발동되었다. 더욱이 단계를 높여 가고 있기에 진혼곡의 영역에 사로잡힌다면 남녀를 가리지 않고 노예로 전락한다.
전투술, 증폭 스킬, 속성의 연계로 이어지는 엘리자베스의 전투력은 능히 절대경과 견주어도 부족하지 않았다. 어떤 면으로 보면 절대경의 무인보다 상대하기가 까다로웠다. 음공의 고수가 대량 학살뿐만이 아니라, 개인전에서도 특화했다.
뇌쇄적인 마력과는 별개로 팽팽한 격전이 엘리자베스의 자존심을 긁었다. 아물기는 했어도, 하등 종족에게 상흔을 입을 줄은 몰랐다.
“죽지 못해 사는 늙은이가 감히!”
“버릇없는 아해로구나.”
“나를 속인 대가를 치러야 할 거야!”
“누구나 계획은 있지. 처맞기 전까지는 말이야.”
소민성도 그 자식한테 처맞기 전까지는 계획적인 편이었다. 하도 처맞아서 그런지 나이가 들어도 쌩쌩하던 뇌 구조가 망가져 버렸다. 이제는 그냥 될 대로 되든지, 말든지였다. 한다고 해서 될 것도 아니고. 해 봤자, 안 되고. 어설픈 짓을 벌이면 첩첩산중이었다.
‘머리 싸매고 고민할 필요가 없어서 좋다고 해야 하나?’
계획은 무진이 세우고, 자신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었다. 무념무상, 평정심만 잘 유지한다면 정신 건강에는 이로운 편이다. 하나, 사람이든, 유사 인종이든 어디 그런가. 지적 생명체로서 짜증이 치미는 건 인지상정이었다.
‘미운 놈이 떡은 안 줘도, 살려는 주는구나.’
소민성은 완치되었다. 그간 몸에 남아 있는 여독(餘毒)으로 인해서 온전한 컨디션을 찾지 못했었다. 100%의 전력에 무진의 혹독한 학대…… 훈련으로 정령투법이 한층 더 성장하고, 운뢰는 정령왕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호각지세를 이루고 있었다.
조금만 방심하거나 엇나가면 전투의 흐름이 바뀐다. 솔직히 놀라움을 넘어 경이로울 지경이다.
만약 무진이 도와주지 않고, 학대를 하지 않았다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오늘 습격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지 않았다면 막아 내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설령 막는다고 해도 지금과는 비교도 하기 힘든 대량의 유혈 사태로 번졌을 것이다. 한편으로 이 모든 상황을 계산하고, 유도한 무진의 심계에 놀람을 금치 못했다.
‘반로환동의 기인이사도 아니고!’
이제 열여덟 살, 주민등록을 늦게 했어도 열아홉 살이었다. 스무 살도 안 된 녀석의 머리통에서 나올 수 있는 전략인지 의심케 한다.
띠링, 푸아앙!
계집의 연주는 계속되고 있었다.
소민성은 푸념을 뒤로하고, 전투에 몰입했다. 운뢰와 합신을 이룬 상태로 뇌광, 전자파, 뇌전장을 섞어서 연계하였다.
빠득!
엘리자베스는 분노했다.
자신의 공격을 이렇게나 오래 받아 냈다는 것만으로도 심증은 사실로 굳혀졌다.
“네놈이 네르가를 죽였구나! 용서할 수 없어! 정령가와 한 줌이라도 관련되었다면 모조리 다 죽여 주마!”
“오해다.”
소민성으로선 억울한 일이었다. 자신이 죽인 것도 아닌데, 분노의 대상이 되었다.
“닥쳐, 변명은 필요 없어!”
“허허, 별 미친년을 다 보겠구나!”
따지고 보면 계집이야말로 가해자였다. 남의 집에 침입하고선 뭐가 이렇게 당당한지 모르겠다. 방귀 뀐 년이 성낸다고, 딱 그 짝이었다.
화아아악!
적반하장에 일침을 가하려던 소민성의 안색이 바뀌었다.
손목의 밴드를 빼자, 계집의 마나가 일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마치 인간의 껍데기로 감추고 있었던 듯 일순간에 완전히 다른 존재가 변화한다.
“……흡혈귀였나?”
“네놈은 특별히 피의 제물로 사용해 주마!”
어쩐지 아까부터 인간 같지 않은 느낌을 받기는 했지만, 설마 뱀파이어 일족이었을 줄은. 풍기는 기운을 보니 진혈에 가까웠다.
‘뱀파이어 퀸?’
썩을!!
***
퍼퍼펑!
푸아앙!
권왕과 레오의 공수가 불을 뿜을 때마다 공간이 유리잔처럼 균열이 번진다. 던전이 아닌 도시였다면 대량의 인명 피해를 양산했을 것이다.
충돌이 아닌 회피로 뻗어 나간 편린은 섬뜩한 파괴의 현장을 자아냈다. 존재의 말소를 당연시하는 급이 다른 절대자 간의 격돌이었다.
후아아앙!
둘을 중심으로 기파의 허리케인이 발생하며 접근을 불허한다. 수치로는 대략의 가늠조차 하기 힘든 파워 인플레이션의 극의를 보여 주었다. 일격, 일격의 파괴력과 폭발력이 천지 만물의 절멸을 일으킨다.
차작!
기계처럼 쉴 새 없이 이어진 공방전 후, 틈이 발생하자 거리를 두었다. 소요의 공백은 극히 촌음에 불과하지만, 둘에겐 영겁처럼 다가온다. 이미 시간과 공간마저 장악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권왕은 기꺼웠다.
“모처럼 흥이 돋는군. 원 없이 놀아 보자꾸나!”
“과연, 대계를 방해할 만하군. 인정하는 의미로 오늘 이 자리에서 반드시 끝을 내 주지.”
전투가 격렬해질수록 레오는 권왕을 제거해야 한다는 결심을 굳혔다. 권왕의 무위는 알려진 것 이상으로 대업에 지장을 초래할 만했다. 제자의 두뇌가 놀랍지만, 그걸 실행할 사부의 무력이 없다면 의미가 없었다. 권왕을 죽인다면 애송이는 컨트롤할 수 있었다.
권왕은 레오의 변화를 알아챘다. 뇌까지 근육으로 들어차 있는 것처럼 둔탁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감각은 굉장히 예민했다.
“호오, 더 있나 보구나.”
“거슬리는군.”
“거슬린다면 어서 본왕을 다급하게 만들어 보거라.”
“원한다면 그리해 주지.”
레오는 속성까지 사용하고 싶지는 않았다. 될수록 인간의 모습으로 권왕을 찍어 누르려고 했다. 굳이 변신하지 않아도 충분할 줄 알았다. 하지만 권왕은 한국 무인의 기준을 초월한 절대고수였다. 애초에 여유를 가지고 상대할 적수가 아니었다.
고유 속성 [라이언킹]을 개방했다.
이름 그대로였다.
라이언킹이란 이명이 붙은 이유를 보여 주었다. 레오의 육신이 일순 팽창하여 형태가 변이를 일으킨다.
변신하는 도중이 약점처럼 보이긴 하는데, 명색이 한국을 대표하는 무인이면서 노리……?
“신화천권 괴멸식 패왕멸~~~!”
기다리기는 개뿔, 변신하는 타이밍을 정확히 노리는 권왕이었다. 이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감추어 두었던 신화천권의 오의를 꺼내 들었다. 언뜻 무인치고는 비겁해 보이는 행동 같으나, 권왕은 당당했다.
‘적 앞에서 변신이라니, 병신 같은 짓이지.’
하려면 진작에 하거나, 시간이라도 벌었어야 했다. 무방비로 당당하게 변신하는 꼴이라니. 공격해 달라는 강력한 어필이었다. 이런데도 공격하지 않고 변신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 주는 건 매너가 아니라 무시였다.
현실은 만화나 전대물이 아니다.
꽈아아아앙!
쩌어어엉!
권왕은 한 번으로 끝내지 않고 권환을 게틀링 건처럼 퍼부었다. 약점을 잡으면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상대의 방심 따윈 애초에 봐주지 않는다.
약점은 노리고, 방심은 지우고.
“어딜!”
신화공의 전력을 퍼붓는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공격에만 치중하진 않았다. 감각을 극도로 예민하게 가다듬어 레오의 반응을 실시간으로 감지한다.
“한국을 대표하는 무인이면서, 이따위 야비한 수를.”
권환이 폭발하지 않고 흡수되는 걸 감지한 권왕은 그 즉시 내력 사용을 중단했다. 기공포를 흡수하는 스킬이나 아이템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부터 사용하지 않은 건 박투 계열에선 흡수가 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쐐액!
상심하기는커녕 권왕은 신나게 쇄도하여 주먹을 뻗었다. 허공을 단단한 지면처럼 박차며 가속도와 파괴력을 높였다. 주변을 제 의지대로, 천지 만물 제어의 경지에 도달했다.
꽈아앙!
퍼억!
내지른 주먹을 막아 내고 반격이 나왔다. 무각도의 기습적인 반격에도 권왕은 흘려 내며 접근전을 시도했다.
크어어어엉~~~!
레오는 극성의 사자포효로 접근을 불허했다. 이전과는 다른 무형지기는 살인 병기의 수준을 넘어 전략 병기로 바뀌었다. 극살의 사자후를 몇 배로 증폭한 수법이었다.
주춤!
귀를 찢어발기는 소음공해에 권왕은 제법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 수로 승부의 흐름을 완전히 가져오려고 했지만, 레오의 대응이 만만치 않았다. 사자포효에 이은 라이언 블래스트로 재차 접근마저 어렵게 했다.
쩝.
아쉽네.
입맛을 다시는 권왕의 능글거림이었다.
레오는 송곳니가 부러질 듯 이를 갈았다. 반인반수의 사자화는 제왕의 풍모와는 거리가 멀었다. 타서 부슬거리는 털과 전신에 충격의 여파가 고스란히 남았다.
그나마 만약을 대비해서 디펜스, 카운터 스킬을 사용했기에 망정이지.
“네놈은 무인으로서의 자존심도 없는 것이냐!”
“자존심은 무슨, 이기면 장땡이지. 네놈은 자존심이나 지키면서 장렬히 산화하거라.”
역사나 전투나, 언제나 승자의 기록이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산 자는 솔직하지 않았다. 자기한테 불리한 것도 과감하게 표현하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부풀리지나 않으면 그나마 솔직한 삶이었다.
“명예도 모르는 하찮은 놈이 감히, 찢어 죽인다!”
“그딴 건 승부에서 이기고서나 찾거라.”
변신의 이득을 챙기지 못한 레오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자신을 이토록 분노하게 하다니, 반드시 대가를 치르리라. 그것만이 고귀한 황족으로서 품위를 지키는 유일한 길이었다.
“주의가 부족한데.”
“……?”
뜻하지 않은 목소리가 배후에서 들렸다. 분노하여 기척을 놓친 것도 있지만, 정면에서 포효하는 권왕의 기세를 막느라 주변을 신경 쓰지 못했었다.
푸욱!
예리하게 정련된 검이 찌르고 들어왔다. [라이언킹]의 본능적인 반응으로 심장이 찔리진 않았지만, 어깨를 내주었다. 돌아선 레오는 자신을 찌른 놈의 얼굴을 보았다.
“……네놈이!”
“방심은 일러.”
검은 무한변형기였다.
찌르는 것으로 끝낼 거면 사용하지 않았다. 파고든 무한변형기가 내부에서 나뭇가지로 변환했다.
크윽!
무한변형기는 육신의 주요 장기를 노리고 있었다. 다급해진 레오가 급히 왼쪽 어깨로 몰아넣은 후 잘라 냈다.
서걱!
떨어져 내린 팔을 살피기 전에 레오는 오른팔을 휘둘렀다. 무진의 안면을 찢어발기려는 것이다.
스륵!
눈치 빠른 무진은 찌르고 난 후 일찍이 거리를 두었다.
후아앙!
사자의 발톱은 허망하게 허공을 찢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재차 무진을 따라붙으려고 했지만, 권왕이 가만있지 않았다. 제자의 암습과 동시에 권왕도 쇄도하고 있었다.
레오로선 한쪽 팔로 두 명을 상대하기는 벅찼다.
드드드드!
뼈가 자라는 소리였다. 실시간으로 돋아나고 있었다.
이쯤 되면 새살 송송 연고의 발전을 위해서 연구에 헌납해야 했다. 시체로도 아주 쓸 만한 육체였다.
파앗!
언제 없었냐는 듯이 레오는 새로운 팔로 권왕의 공격을 막아 내고, 쳐 낸다. 갓 생성된 팔치고는 부자연스러움이 없었다. 그렇다면 육체의 완성도를 원상태로 돌렸다는 의미가 되었다. 일반적인 회복력이 아닌, 단련한 DNA까지도 근육에 담겨 있었다.
게다가 두 팔만이 아닌 얼굴도 공격 무기였다.
반인반수의 사자화로 얼굴 형태도 인간적이지 않았다. 턱을 벌린 채 물어뜯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위협적이었다. 물리는 순간 살덩이가 통째로 뜯겨 나갈 수 있었다.
퍼억!
다만, 일기투가 아닌 2 대 1이었다. 한쪽을 막아도, 다른 쪽이 영화에서처럼 기다려 주지 않았다. 막는 즉시 빈틈을 노렸다. 잡으려고 할 때, 주먹이 날아오고, 회피할 때 발차기가 들어왔다. 홍콩 영화처럼 합을 주고받는 연기와는 거리가 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