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 던전 투어(4)
“헛소리도 이젠 지겹구나.”
“평생 거짓말은 입에 담지도 않을 것처럼 생겨서는. 사람은 역시 모르는 거야.”
“내 화를 돋워 봤자 신상에 이롭진 않을 텐데.”
“정령가로 마제 사부님과 교장 선생님을 보냈고, 권왕가의 주요 전력도 지금쯤 당도했을 거야.”
“……이놈!”
이쯤 되자 레오도 더는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했다. 시간을 끌어 보려는 수작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정확하다. 이건 자신의 계획을 전부 알고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다.
어떻게?
그런 의문이 들었다. 계획을 세운 후 보안을 철저히 했다. 은밀하게 진행이 되었기에 정보가 새어 나갈 가능성은 희박하다. 설령 도중에 정보가 누출되었다고 해도, 이토록 확실하게 대비를 하긴 힘들다.
저 말을 대체 누가 믿는단 말인가?
“안 오면 어쩌나 했거든.”
“더는 들어줄 수가 없군.”
“소원권을 썼는데, 안 오면 날리는 거잖아.”
“……네놈!”
그제야 레오는 돌아가는 사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정보가 새진 않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분노가 치미는 현실과 마주했다. 언제나 지배하고, 통제해 왔던 자신이 철저하게 이용당한 것이다. 놈의 손바닥 위에서 재롱을 떨고 있었다.
“우릴 끌어들이려는 거였구나!”
“조금 서둘러서 어설펐는데, 진짜로 걸려들 줄은 몰랐지.”
너희들이 멍청해서 걸려들었다는 무진의 말에 레오는 분노가 치솟다 못해 폭발할 지경이었다. 이런 식으로 농락을 당해 본 적이 있었나 싶었다.
“마제와 교장이었나.”
“사부님이라곤 생각 안 하나 봐.”
“누가 됐든 이제는 상관없다.”
“보기보다 성급하시네. 아니면 정령가로 가야 할 만큼 급하거나. 어느 쪽이든 상관은 없지.”
날카롭다.
이놈 뭐지?
작금의 판단력은 예상을 훨씬 넘어섰다. 일개 생도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예리하고, 정확했다.
오싹!
섬뜩한 한기가 레오를 뒤덮었다.
권왕이 올 때까지는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애송이와 대화했을 뿐인데. 어쩌면 이 모든 사태의 중심에 무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럴 리가!!’
일개 생도가 조직의 대업을 방해했다고? 그걸 있는 그대로 믿을 사람이 어디 있는가. 이건 누구라도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고?’
맹점.
정확히는 선입견이었다.
그 모든 것들이.
무진을 사건의 중심축에 놓고 연관성을 따지자 그간 풀리지 않았던 의문들이 단숨에 해소되었다. 여태 엉뚱한 곳에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 있었으니 답이 나올 리가 있나. 그간 실패했던 그리드가 무능했던 것이 아니었다.
“……너였구나! 네놈이 머리였어!”
“나처럼 친절한 사람도 없지.”
궁금증을 해소해 줘서 고맙다고 하기엔 레오의 얼굴이 흉신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더는 금발의 젠틀한 신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얼마나 분노했는지, 던전 전체가 요동을 치는 것 같았다.
“하하하하하, 아주 고맙구나!”
“호오, 인정할 줄은 아네.”
“대업을 방해한 녀석이 너 같은 애송이였을 줄이야. 정말 대단하구나. 나 레오 보나파르트는 네놈을 인정한다. 너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
“날 죽일 수 있을 것 같아?”
인정한다고 하면서 살의가 넘쳐흐르다 못해 활화산처럼 터져 나오고 있었다. 반드시 죽이고 말겠다는 결심이 선 것이다.
“누가 올지 모르지만, 그때까지 네놈은 살지 못한다.”
“어째서 그리 자신하는 거지?”
“생도 사이에선 군계일학일지 몰라도, 선택도 받지 못한 애송이가 너무 나대는구나. 하늘 위에 하늘이 있음을 알려 주마.”
“하늘 위는 우주라고 해 봤자, 씨알도 안 먹힐 테지.”
“말장난은 이제 끝이다.”
지금까지 참은 것도 용했다. 무진과 끝까지 대화하다니, 레오가 빌런이긴 해도 도량이 넓었다. 성인군자조차도 화가 나다 못해 폭발해서 이성을 상실하게 만드는 무진의 화법이었다.
“사부님, 안녕하세요.”
“개수작 부리지 마……??”
무진이 레오의 배후로 인사를 올렸다.
80년대 코미디도 아니고.
레오는 코웃음을 치며 비웃어 주려고 했었다. 별안간 패도무쌍의 기세가 사자포효를 짓눌렀다.
휙!
꽈아아앙!
대화는커녕 시작부터 권강이 날아왔다. 신화천력으로 중첩된 권격은 일반적인 권강의 파괴력을 아득히 초월했다. 같은 권강이라도 시전자의 무위에 따라서 하늘과 땅의 차이였다.
후아앙!
권강을 오지선으로 찢어발긴다. 다섯 줄기로 날아간 권강이 지면과 부딪히며 거대한 흙기둥을 하늘 높이 세웠다. 무시무시한 파괴력이 일대를 휘감으며 미친 듯이 소용돌이를 쳤다.
우우우웅!
사자왕의 오러를 발동한 레오가 오연히 받아 내며 권왕을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던전에 들어오기 전 권왕가에 손녀를 인질로 잡고 있다고 연락했었다. 자신 있으면 던전으로 찾아와라, 이긴다면 손녀를 무사히 보내 준다고.
그간 권왕의 성격과 행적을 보건대, 혼자 오리라 보았다. 예상대로 권왕이 혼자 오기는 했다. 문제는 계획보다 이른 시간에 도착했다는 점이다. 마치 보내기도 전에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맞아떨어졌다.
우연의 산물로 시간이 맞았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공교롭다. 만약 이 모든 게 우연이라면 골든타임을 놓치는 일은 없어야 했다.
착!
선수필승을 호각으로 맞서자, 권왕이 전의를 불태운다. 이런 상대는 제자 빼고 참으로 오랜만이다. 목숨을 걸고 싸울 만한 적수, 아주 훌륭하다.
“사부님, 늦으셨네요.”
“널 믿고 있었느니라.”
“이제부터 맘껏 싸우시면 됩니다.”
“오냐.”
사부님이 레오를 맡는 사이 지수는 30명과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레오가 데리고 온 자들 역시 지금까지와는 다른 자들이었다. 맹수와 같은 흉포함을 통제하여 단련한 자들이었다. 아무래도 레오의 직속 권솔이자, 병기인 듯하다.
무진의 예상대로 그들은 레오가 키워 낸 직속 기사단이었다. 숨어서 활동하는 자들과 달리 레오의 권위를 상징했다.
그걸 증명하듯 개개인의 전투력이 이전에 봤던 그리드들과 비슷하다. 게다가 합공에 최적화된 자들로 레오의 명령이라면 목숨도 마다하지 않았다.
퍼퍼펑!
지수와 라이언 기사단의 개전도 사부님 못지않은 파급력을 발산했다. 사방으로 기의 파문이 날카로운 원형으로 퍼지며 잠식한다. 다가오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는 거센 기파는 살인적이었다.
지수도 생도 리미트를 풀었다.
생도 기준으로 싸웠다간 저세상을 여러 번 구경하고도 남을 위험한 전투였다. 라이언 기사단은 속성을 공유하며 위력을 높일 수 있었다. 기사단에 속성 전이자가 있다는 의미다. 간파되지 않도록 숨겨 놓고 있었다.
쩌어엉!
사부님과 레오의 전투는 그보다 더 험악해지고 있었다. 눈으로 좇을 수 있는 기준점을 초월했다. 생도 중에서도 뛰어난 편에 속한 애들조차 눈이 따르지 못하고 있었다.
더욱이 속도보다 놀라운 점은 정밀한 파괴력이었다. 속도가 빠르면 파괴력이 떨어지고, 파괴력이 강하면 속도가 느려지는 상식은 벗어난 지 오래다.
쿠아아앙!
사방에 크레바스와 크레이터를 새기며 지형지물의 형태를 변화무쌍하게 했다. 원래의 모습을 완전히 탈바꿈시키는, 우리나라다운 세계 제일의 성형술이었다.
권왕이 기꺼운 듯 히죽였다.
“좀 치는구나.”
“변방의 무인 따위가 기고만장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짱개 따라 하냐?”
“닥쳐랏!”
분노하는 것으로 봐선 서양인 주제에 동아시아의 문화를 제법 잘 알고 있었다.
“양키치곤 제법이야.”
“노란 원숭이가 감히, 나는 대프랑스 제국의 황족이다!”
“금발이면 다 양키지, 뭘 따져.”
“죽여 주마!”
레오는 그 어느 때보다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을 이토록 화나게 하는 놈도 처음이었다. 하물며 일국을 대표하는 무인이 이토록 품위가 없다니, 사제가 쌍으로 지랄이었다.
헐!
상원과 4인방은 얼떨떨한 상태를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었다. 지금 이게 다 뭔지,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던전을 공략할 때만 해도 저예산 영화였는데, 별안간 아이맥스 블록버스터로 바뀌었다.
“우리가 낄 데가 아니잖아!”
“주군! 감당하기는 벅차지만, 최대한 버텨 보겠습니다!”
4인방이야 충성심 하나는 제일이니 받아들이는 모습이나, 상원에겐 충격적인 광경의 연속이었다. 요원들이 돌변해서 공격하지를 않나, 암중의 흑막이 갑자기 나타나지 않나, 이제는 권왕까지 등장했다.
상원으로선 점입가경, 설상가상, 첩첩산중이었다. 보고 있는데도 눈이 따갑다 못해 기파에 갈가리 찢겨 나갈 것 같았다.
우우웅, 후아아앙!
거리가 이만큼이나 떨어져 있는데도 이런데, 지척이면 살 수나 있을까? 레벨의 차이가 천외천이었다.
“무진아, 이게 다 머선 일이야?”
“쟤들이 근래에 우리나라를 뒤흔들고 있는 흑막이야. 정·재계는 물론 가문과 길드까지 좌지우지하더라고.”
“그런 위험한 일에 날 데리고 온 거야?”
“오라고 한 적 없는데.”
“미리 말이라도 했어야지.”
“정보가 샐 수도 있으니까.”
“나 못 믿어?”
상원이 발짝하며 언성을 높였다. 그간 친구 대접도 받지 못하고는 있지만, 최소한 의리는 있다고 자부했다. 친구를 팔아먹을 만큼 파렴치한은 아니다.
“가족이 인질로 잡힐 수도 있잖아. 그래도 확신해? 그렇다면 내가 미안하고.”
“……선을 넘는 말이잖어!”
“쟤들이 선을 지킬 것 같아? 권왕가와 정령가에 패륜을 자행했던 놈들인데.”
“……아니!”
상원은 부정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가족을 인질로 잡은 상황에서 실토하라고 하면 과연 버틸 수 있을까? 차마 그렇다고 단언하지 못했다. 친구의 의리도 중요하지만, 가족이 더 중요하다.
“당연한 거니까 자책하지 마라.”
“자책이 아니라, 이번 일이 끝난 후에는 어쩌려고?”
“거기까지는 생각 안 했는데.”
“……망할!”
각자도생이냐!
그렇다고 무진을 원망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우리나라를 좀먹고 있는 흑막과의 싸움이다. 개인이 아닌 국가를 위한 일이기도 했다. 그런 대의를 위해 나섰는데, 왜 끌어들였냐고 말해 봤자 이기주의에 지나지 않았다.
“너희들은 나서지 말고, 저쪽으로 가 있어.”
무진은 상원과 4인방에게 떨어져 있으라고 했다. 낄 판이 아님을 알지만, 무능력한 자신들에게 화가 나는 것도 사실이었다.
“뻘쭘하면, 1명이라도 상대해 볼래?”
“……아니다!”
원하면 빼 준다는 말에 상원은 신속히 뒷걸음쳤다. 오만은 용기와 다르다. 안 되는 일에 목숨을 걸 만큼 어리석진 않았다.
4인방은 탐탁지 않은 얼굴로 물러섰다. 자신들이 나서 봤자 방해만 된다는 걸 체감했다. 한편으로 주군의 진면목을 다시 보게 되었다.
‘다음에는 반드시!’
4인방은 결의를 다졌다. 이대로는 주군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금보다 훨씬 강해져야 했다. 개개인은 약할지 몰라도, 우리가 함께한다면 강해질 수 있었다.
상원과 4인방이 뒤로 빠지자, 시야엔 유정과 혜진이 남았다. 나서야 하는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지수의 무위가 이전에 봐 왔던 수준을 한참 벗어났다. 마치 지금까지 적당히 했다는 걸 과시하려는 것처럼.
까불지 말라는 협박으로 들린다.
“우리는?”
“가서 싸워야지.”
한 발 뒤로 뺐던 유정은 멈칫했다.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우린 죽어도 되는 거야?”
“사자는 새끼의 성장을 위해 벼랑에서 집어 던진다잖아.”
“……우리가 사자냐! 그리고 그거 거짓말이거든!”
“싸우다 보면 뒈질 수도 있는 거지. 친구가 백척간두의 위험에 처했는데 보고만 있을 거야?”
“망할 자식, 자기 일 아니라고!”
“친구 좋다는 게 뭐냐. 태어난 날은 달라도, 죽는 날이 같으면 보기 좋잖아.”
“넌 여자…… 됐어!”
무책임한 무진의 발언에 유정과 혜진은 발끈하기보다는 웃었다. 따지고 보면 언제는 책임을 졌나. 더욱이 이 싸움을 피한다면, 다시는 맞서지 못할 것 같았다. 해야 한다면 미리 경험을 해 보는 것도 좋겠지.
“나는 오늘 한 사람의 검객이 되겠어.”
혜진의 결연한 각오에 유정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된 게 정상이 하나도 없다. 주변에 있는 것들이 다들 미쳐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한 번 죽지, 두 번 죽냐! 가즈아!”
유정과 혜진이 나아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상원과 4인방은 힘이 없음에 그 어느 때보다 분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