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 던전 투어(3)
“애들이라고 해서 우습게 보면 안 되지.”
“……이놈…… 크윽!”
사태 파악 못 하고 헛소리하려고 하자, 진철순의 목에 핏빛 목걸이가 생겨났다.
혜진의 검이 좀 더 깊이 파고든 것이다.
“자를까?”
“할 말은 하게 해 줘야지.”
“무진이는 너무 착해.”
“그렇지.”
무진과 혜진의 대화에 진철순은 물론, 상원과 4인방도 식겁하는 눈치였다.
‘이년들 대체 뭐야?’
실력이 좋은 건 알고 있었지만, 이 망설임 없는 손 속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생도치곤 경험이 많다고 해도, 익숙하다 못해 능숙했다. 아카데미에서 살수를 키우는 것도 아닐진대, 생도가 이래도 되는 건가?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에 의문이 깊숙이 파고들었다.
설령 그렇다고 한들 자신들은 정부의 상급 요원으로서 어디 가서도 꿀리지 않을 실력을 갖추었다. 애송이들에게 일방적으로 당할 만큼 약하지 않거늘.
‘그게 문제가 아니지!’
어떻게든 살아남는다. 허무하게 죽을 거였으면 길드가 아닌 안정적인 정부 요원을 지원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올해 애가 나온다. 진철순은 일단 시간을 끌어 보기로 했다.
“시간 끌 필요 없어, 넌 안 죽일 거야.”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씨발, 이해가 안 된다.
동료 3명은 병뚜껑 따듯이 다 죽여 놓고, 안 죽인다니. 그걸 어떻게 믿으라고, 섣불리 받아들이지 못했다.
“너희들은 우릴 붙잡아 두기 위한 하수인에 불과하잖아.”
“그걸 어떻…… 아니다!”
대답하려던 진철순은 입을 막았지만, 놀란 가슴을 다스리지 못했다. 섬뜩한 한기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자신들의 목적을 알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곧 오겠지.”
“알고 있다면 얌전히 나를 풀어 주는 게 신상에 이로울 것이다!”
“따까리는 내가 물어볼 때만 대답하는 편이 신상에 이로울 거야.”
“그들에게 내가 잘 말해 주겠다. 그러니 이쯤 해서 나를 풀어 줘! 시간을 끌수록 너희들은 상상도 못 할 위험을 겪게 될 거야!”
감춘다고 될 일이 아님을 직감한 진철순은 되레 강하게 나갔다. 애송이의 말을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자신은 그저 조직의 명을 따르는 하수인에 불과했다.
더욱이 붙잡힌 채 그들을 맞는 것도 위험하다. 어떻게든 빈틈을 만들어서 기회를 노릴 심산이었다.
그러나 말을 잇기 어려운 사태가 벌어졌다.
“팔 하나 잘라.”
“알았어.”
혜진은 망설이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서걱, 털썩!
파득, 파득!
어깨부터 깔끔하게 잘린 오른팔이 떨어져 내리며 갓 잡은 생선처럼 살아 있다고 발버둥을 친다.
크아아아악!
비명이 뒤늦게 터졌다.
검기에 생긴 상처는 화염에 덴 듯한 작열통을 유발했다. 격렬한 고통에 몸부림을 치던 진철순은 팔이 잘려 나갔단 사실을 믿기 힘들었다.
이를 갈며 독기에 찬 눈빛으로 혜진을 노려보았다.
“찢어 죽일 년…… 가만두지…… 흐억!”
“팔보다 발목이 낫지 않을까? 아니면 주둥이를 찢자. 시끄러운 건 딱 질색이거든.”
검을 다시 목에 들이대며, 무시무시한 협박을 사무적으로 차분하게 하고 있었다. 감정이 없는 인형이 사람을 죽이고 다니는 느낌이었다. 일순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원독에 차서 독기를 발산했던 진철순마저도 무미건조한 혜진의 협박에 입을 다물었다.
흠.
무진도 혜진의 심경 변화에 조금은 놀랐다.
혹시, 내 탓은 아니겠지.
난 그저 죽일 놈은 반드시 죽이라고밖에 조언하지 않았는데. 그게 잘못은 아니잖아. 현명하고, 효율적으로 살아가기 위한 동기로서의 합당한 조언이었다.
그날부터 검에 망설임이 사라지긴 했지만. 질풍노도의 시기로 이해했다.
무진은 우선 겁먹은 근육 사슴부터 달래 주었다.
원독이 가득 찬 듯 보여도 눈망울은 포식자 앞의 사슴처럼 떨고 있었다. 이놈을 선택하기를 잘한 것 같았다.
“겁먹기는, 죽이진 않는다고 했잖아. 힐.”
“……이런 짓을 하고서 무사할 성싶으냐!”
과다 출혈로 쇼크가 올까 해서 치료 마법을 걸어 줬더니. 주둥이가 할 말 못 할 말을 가리지 못했다. 이래서 물에 빠뜨린 놈은 구해 주면 안 되었다.
무진은 현실을 조용히 자각시켜 주었다.
“곱게 살려 준단 말은 안 했는데.”
“……(빠드득)!”
역시 근육으로 감춰도 사슴이었다.
고분고분해진 진철순을 보며 무진은 히죽였다. 죽음을 각오하지도 않았으면서 나대는 걸 비웃었다. 넷 중에 진철순을 살려 준 이유였다. 다 죽어도 하는 수 없지만, 사태를 증명해 줄 증거가 필요했다.
“잘하자, 우리.”
“그들이 온다면 너희들은 결코 무사치 못할 것이다!”
“아니지.”
“그들은 나와 달라, 무서운 자들이라고!”
“설령 그렇다고 한들, 내 생각엔 너부터 죽일 것 같은데. 빌런치고 무능한 놈을 살려 둔 기억이 없어서 말이야. 이 구도로 괜찮겠어?”
사태를 자각한 무능력자의 얼굴엔 공포가 담겼다. 부정하기에는 냉정한 현실이었다. 실패자들의 최후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차라리 죽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살고 싶은 본능이 더 컸다.
“……그럴 리 없어! 젠장, 빌어먹을! 그래, 그렇다 치자! 너희들, 날 지킬 수는 있어?”
“기습이 우연히 막힌 것 같아?”
무능력자는 삭풍을 맞은 듯 잘게 떨었다. 우연치곤 작금의 현실이 공교로울 정도로 지나치다.
하나, 미리 알고 있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진철순은 ‘어떻게 알았을까?’라는 의문보다 살 방도가 떠올랐다.
“나는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아는 건 많지 않아.”
“편하게 말해.”
일단 발뺌하고 보는 삭막한 현대인에게 녹음과 녹화는 필수다. 사과폰을 쓰지 않는 연유였다. 무진은 핸드폰을 들어서 영상을 찍었다. 자발적인 증언은 기록하는 의미가 있었다.
팔이 잘려 강압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무려 하나가 더 있었다. 부족하면 다리도 있고. 생도가 정부의 상급 요원을 제압하는데, 사지가 멀쩡하면 그것도 이상하지.
“처음부터 이러려고 한 것은 아니었어. 나도 국민에게 봉사하고 헌신하는 마음으로 지원했었다고! 어쩌다 보니 나도 모르게 가담하게 된 거지, 절대 고의는 아니었어.”
예상대로 진철순이 아는 건 많지 않았다.
하수인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알아내는 정도에 불과했다. 실제로 처음부터 놈들의 하수인이 되지는 않았다. 시작은 간단한 부탁이었고, 소정의 뇌물이 들어왔었다. 또한, 상급 요원이 될 수 있도록 영약과 아이템을 제공했다.
별생각 없이 다들 하니까,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것들이 약점이 되었고. 지금에 와서는 죄책감도 없이 행동했다. 협조하는 만큼의 보상이 따르는 데다가 선을 댄 조직을 알아 갈수록 두려움도 커졌다. 자신뿐만이 아니라 정부 내에서도 많은 이들이 포섭되어 있었다.
구구절절 변명으로 일관하며, 고의가 아님을 주장했다. 살고 싶은 욕망이 넘쳐흘렀다.
스윽!
무진은 영상을 찍다 돌아봤다.
저벅, 저벅!
200m나 떨어져 있음에도 주변을 장악하는 존재감이었다. 그를 중심으로 30명이 따르고 있었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위압감이 공기를 무겁게 한다.
덜덜덜!
사내가 지그시 응시하자, 진철순의 동공이 열리면서 벌벌 떨었다. 무형의 기운이 거리를 뛰어넘어 진철순을 압박했다.
우우우웅!
고도로 정밀하게 다듬어진 무형지기, 의념을 담을 수 있는 절대경의 경지였다.
무능력자에 대한 처벌은 무진의 예상대로였다.
살인멸구.
“……살려!”
쩌어엉!
일순 허공에서 서슬 퍼런 불꽃이 맹렬히 튄다. 지수가 장막처럼 뒤덮어 오는 무형살기를 막아선 것이다.
서로의 기파는 고속으로 부딪치는 묵직한 쇳덩어리와 같았다. 어지간한 각성자라도 치명상을 넘어 육편으로 다지고도 남을 파괴력이었다.
호오.
이채를 띠며 탄성이 흘러나왔다. 사내는 금발에 훤칠하게 잘생긴 영국의 귀공자처럼 생겼다. 영화배우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고풍스러운 아우라였다. 그럼에도 호의적으로 느껴지기는커녕 섬뜩한 한기를 발산했다.
“권왕의 손녀라고 했던가. 제법이군.”
전력은 아니더라도, 사자포효(Lion's roar)를 막아 내리라고는. 권왕이 애지중지하는 연유를 스스로 증명했다. 이만한 실력이라면 차후 대업에 지장을 초래할 만한 잠재력이었다.
그래서일까,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다.
“잔챙이는 어쩔 수 없군.”
“증거인멸은 가중처벌인데.”
금발 사내는 말을 끊은 녀석을 보았다. 권왕의 손녀에게 가려져 있었지만, 모든 일의 시발점을 제공했다. 또한, 세간에 알려진 대로 방자함이 하늘을 찌른다.
“자기가 의도한 대로 흘러간다고 착각하는 꼴이 꼭 성당 안의 개구리로군.”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세상이 자기 뜻대로 흘러간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금발 사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건방지기는 해도, 재미가 있었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을 했다. 오늘 처음 본 녀석이 자신을 알아본 것이다.
그래서 조금은 어울려 주었다.
“잔챙이를 제압할 만하군.”
“당신은 아닐 것 같아?”
“아무것도 모르고 있지 않나.”
“왜 모를 거라고 확신하지?”
“질문으로 시간을 끌려는 속셈이군. 오래 끌기는 힘들 텐데. 그만한 가치가 있다면 모를까.”
“당신이 나를 얼마나 안다고 그리 자신하는 거지?”
“세상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줄 알지만, 결국은 철모르는 애송이. 그게 네 가치다.”
대면은 처음이지만, 그는 무진을 알고 있었다. 의도치 않게 사사건건 방해가 되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나, 그뿐이다. 자아도취에 빠져 현실을 망각한 애송이였다. 주제를 파악했다면 지금처럼 겁 없이 나대지는 못했다.
‘모아 줘서 고맙구나.’
권왕가, 정령가, 검신가의 직계혈족이 던전에 모였다. 나머지야 있으나 마나긴 해도. 계획대로 된다면 그간의 실패를 만회하고, 단숨에 칠대가문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 기회를 제공해 준 애송이라, 시간을 주었을 뿐이다.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현실을 실감하지 못하는 것 같은데, 이렇게 여유를 부려도 될지 모르겠네.”
“돌아가는 사태도 모르면서 자신감이 대단하구나.”
“모르긴, 우릴 인질로 붙잡고서 사부님을 부를 생각이잖아. 아, 이미 불렀구나.”
“말해 주었나 보군.”
“당신은 중요한 정보를 잔챙이하고도 공유하나? 믿음이 남다른데.”
금발의 사내.
그리드2 레오 보나파르트의 표정에 미소가 사라졌다. 생도치곤 핵심을 찌르는 통찰력이었다. 과연 그간의 실패가 우연의 산물만은 아님을 직감했다.
그러나 이 정도는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일이다. 권왕가는 사사건건 대업을 방해했고, 그 중심에 권왕이 있었다. 권왕이야말로 대업을 위해 제거해야 하는 척살 대상이었다.
“너도 권왕가의 무인이었지. 아쉽지만, 그것이 전부라면 더는 들어 줄 가치가 없구나.”
“우릴 인질로 잡는다고 사부님이 눈썹이나 까딱할 것 같아?”
“권왕의 손녀라면 그만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 싶구나. 그러니 너는 이만 퇴장하거라.”
“아직 할 얘기가 많은데, 섭섭하네.”
“더는 가치가 없다고 했을 텐데.”
“혹, 오늘 정령가를 치려고 했다면 지금쯤 상당히 곤란한 처지에 놓였을걸.”
멈칫!
레오는 이쯤에서 철모르는 애송이와 잔챙이를 처리하려고 했다. 권왕의 손녀가 예상보다 강하긴 해도, 저항해 봤자 아무 소용 없다는 절망감을 선사할 심산이다. 그러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얘기가 흘러나왔다.
아끼던 다크엘프의 죽음 이후로 레퀴엠은 분노를 감추지 못했었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려는 걸 겨우 말렸다. 일단은 정황을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정령가에 권왕이 개입한 정황을 알아냈다. 사사건건 방해가 되었던 권왕이었다. 더는 용납하기 힘들었다. 이번 기회에 권왕을 제거하고, 레퀴엠의 분풀이로 정령가를 던져 주기로 했다.
전략이 성공한다면 칠대가문의 분열을 부추기고, 권왕가에 책임을 떠넘길 수도 있었다. 어찌 되었든 던전 공략은 권왕의 제자인 무진의 요구로 이루어졌다. 사승 관계인 권왕가는 책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