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 체질 개선(5)
“간다!”
“홀드.”
사레에 걸려 기침이 나오려다 막혔다는 표현이 적합하다.
컥!
5계식의 마력이 설영범을 휘감았다. [도압]이 맥없이 정지되었고, 육신도 고정당했다. 내지른 기합이 밖으로 터져 나가지 못하고, 입안에서 맴돌았다.
씨익!
움찔!
무진의 상쾌한 미소에 설영범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인생이 그렇듯 늦었다고 생각할 때, 진짜 늦은 것이다.
꽈악!
그립감 좋고.
퍼억, 퍼억!
타격감 괜찮고.
정지 마법으로 잡아 놓은 후 멱살을 잡은 채 배를 쑤시고 있었다. 주먹이라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목을 잡아 줘서 핏물이 역류할 위험성은 없었다.
크어어어억!
홀드의 무서움이었다.
모든 흐름이 정지되어 비명까지도 삼켜진다. 소리를 지르려고 해도, 목 근육이 마법에 잠식되어 10데시벨을 넘기지 못했다. 층간 소음과 고성방가를 방지하는 최선의 수법이었다.
퍼억, 퍼억!
꺼르르!
주먹을 너무 많이 먹었나? 강제로 배탈이 난 설영범이 눈을 까뒤집으며 게거품을 뿜다 기절했다.
무진은 쓰러지지 않도록 목을 확실하게 고정한 후, 결투장 밖으로 안전하게 던져 주었다.
철퍼덕!
무진은 다음 도전자를 보았다.
“올라와.”
“……아니요, 저는!!”
설영범의 다음 주자를 예약했던 이치환은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질을 쳤었다. 하지만 이치환의 발은 지면과 닿지 않은 채 허공을 밀어 대고 있었다.
바동, 바동!
신입생이라서 그런가, 애교가 있었다.
언제 왔는지 4인방의 신광과 혈총이 이치환의 양어깨를 잡고 있었다. 귀검과 백운은 이치환 다음 순서였던 구도철, 신세현, 조광림의 도주로를 차단했다.
악!
이치환은 결투장 안으로 던져졌다. 허겁지겁 바닥에서 일어선 후 치를 떨어야 했다.
설영범이 멱살을 잡혔을 때 신속히 도망쳤어야 하거늘.
‘젠장, 소문보다 더하잖아!’
성격만 놓고 봐도 아주 지랄이다. 얌전히 가라앉아 있는 휴화산에 플러그를 뽑아 버린 꼴이었다.
결투장에 오른 이상 포기할 순 없다.
붙어 보지 않은 이상 아직 모른다. 호랑이한테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고 했으니.
‘비겁하게 마법을 쓰냐!’
솔직히 치사하다. 1학년을 상대로 정면 대결을 해도 부족한 판국에 마법을 쓰다니.
다행히 가지고 있는 스킬 중에 마법 무력화가 있었다. 최소 4계식까지는 무력화가 가능했다. 설령 통하지 않는다고 해도, 설영범처럼 무기력하게 당하진 않는다. 그 이상으로 시간을 끌다, 적당히 항복할 수 있었다.
“요나, 파이어.”
“홀드는 통하지…… 으악!”
소환된 요나가 이치환의 뒤통수에 물대포를 갈겼다.
후려쳐 맞고 날아간 이치환은 스킬을 써 보기도 전에 무진의 홀드에 걸렸다.
꽈악!
목을 잡았다.
처우는 설영범과 차별을 두지 않았다.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위하여.
퍼억!
꼴까닥!
일격에 이치환이 기절했다. 이미 눈은 뒤집힌 지 오래였다. 게거품까지 뿜는 걸 보면 걱정이 되어야 마땅했다.
“네가 곰이냐?”
“……크악!”
목을 좀 더 세게 조르자, 잃었던 의식이 되돌아온다.
사실 1대 맞고 아니다 싶었던 이치환은 기절한 척했었다. 자신의 숨겨진 필살기, ‘겨울잠 자기’였다. 동면에 드는 곰을 보고 창안해 낸 기발한 수법이었다.
다만, 통하지 않았을 때의 후유증과 여파는 책임 못 진다. 두고두고 회자하여 놀림거리가 되고도 남는다.
“선배님…… 충성을 바치…….”
“그딴 말은 맞기 전에 해야지.”
말로는 뭔 말을 못 할까? 꼭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 봐야 맛을 아는 것들이 있었다. 그럴 땐 똥통에 확실하게 담가 주어야 다시는 헛수작을 부리지 않는다.
똥독이 올라 봐야 세상 무서운 줄 알지.
무진은 신입생에게 아카데미가 어떤 세상인지 확실히 체감시켜 주었다.
퍼억, 퍼억!
“선배…… 많이 먹었…… 크악!”
“나 때는 선배가 주면 ‘예, 감사합니다.’ 하고 맛있게 먹고 그랬어, 인마!”
웃기고 있네, 네가 언제 그랬냐고?
결투장 주변의 선배들이 황당한 표정을 짓다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자기는 맞은 적도 없으면서 저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었다. 내로남불의 마이동풍이 얼마나 무서운지 깨닫게 해 준다.
추욱!
무진의 주먹을 맛있게 처먹은 이치환은 동공이 쫘악! 풀리며 영혼이 육체를 떠나려고 했다. 생사의 간극을 절묘하게 유지시켜 불효자가 되지는 않았다. 다른 건 다 참아도 패륜은 용납하지 않았다.
“다음.”
“……저는 괜찮습니다!”
“내가 안 괜찮아.”
“……교관님한테 이를 거예요!”
“그러든지, 아카데미 다니는 내내 겁쟁이란 꼬리표를 달고 다니고 싶으면.”
“……악마!”
2, 3학년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해탈한 표정들이었다. 무진에게 도전하면 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평생 잊지 못할 트라우마를 새겨 주었다. 1학년이라고 봐줄 줄 알았다면 아주 커다란 오산이었다.
‘신입생도 인정사정없네!’
‘여잔데, 피도 눈물도 없는 새끼!’
‘징그럽게 강해졌구나!’
1학년을 척도로 삼기는 어려워도, 무진의 마도가 보통이 아님을 실감했다. 특히 연계가 이전과는 달리 일절 텀이 생기지 않는다. 무공, 마도, 정령의 사용이 능수능란해졌다. 교류전의 MVP가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님을 실감했다.
“다음 없나?”
무진은 주변을 훑었다. 눈초리가 누구 하나 걸려 보라는 듯, 흉악하기 짝이 없었다. 기세등등하게 도전했던 1학년들은 저마다 고개를 돌렸다.
스윽!
휙, 휙!
소문이 과소평가되었음을 1학년들은 절실히 체감했다. 비겁하다고 하기에는 수법들이 절묘한 데다가 연계가 매끄러웠다. 결투를 되짚어 볼수록 무진의 진가를 알 수 있었다.
다시 덤빈다 한들, 수많은 경우의 수를 대비해야 했다. 이럴 때는 기량 자체로 찍어 눌러야 하는데, 그런 일이 가능했으면 소문이 나지도 않는다.
후후후후!
자라나는 새싹들을 확실하게 짓밟아 준 무진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신입생들의 썩어 가는 표정과 극명하게 대비되었다. 자신들의 앞날이 순탄치 않음을 실감했다.
“귀여운 것들.”
무진이 입맛을 다시자 신입생들은 기겁했다. 다들 결투장에서 멀리 떨어지며 뿔뿔이 흩어졌다.
절레, 절레!
유정, 혜진, 예슬, 지수, 상원은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신입생의 기를 살려 줘도 부족한 판국에 겁을 집어먹었다. 아카데미의 앞날에 먹구름이 끼고 있었다.
“무슨 수작이냐?”
“수작이라니요? 말씀이 과하세요. 저는 그저 자만하지 않도록 선배로서 미덕을 보였을 뿐입니다.”
신입생과 결투를 벌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무진은 교장의 부름을 받았다. 교류전 이후로 정부, 기업, 길드, 가문을 막론하고 찾아왔었다. 사회의 저명한 인사로서 공사가 다망하셔서 바쁠 텐데도.
교장은 코웃음을 쳤다.
“어디서 되지도 않는 개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냐!”
“누가 들었으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네가 녹음하지 않으면 소문이 날 리 없겠지.”
“말씀대로라면 제가 교장 선생님을 음해하는 줄 알겠습니다.”
이 녀석은 세월이 가면 갈수록 뻔뻔해졌다. 한다는 소리가 신입생들의 자만을 깨우쳐? 근래에 들어 본 말 중 이보다 더한 개소리가 있나 싶다.
분수를 모르는 신입생을 선배로서 훈육한 것처럼 보였지만, 이놈은 절대 아무 이유 없이 나서지 않는다. 주변에 그리 보이도록 일부러 나선 것이다.
진짜로 신입생들을 위했다면 시작과 동시에 끝내지도 않았다. 목이 잡힌 채로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고 끝났는데, 배우긴 뭘 배워.
“잡설은 됐고, 이유를 말해!”
“부탁을 드리고 싶어서요.”
“싫다.”
“들어 보지도 않고요?”
“안 들어 봐도 굉장히 껄끄럽겠지.”
“암중 세력이 칠대가문을 노리는 것 같은데, 껄끄러우시다면 저도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일단 들어나 보자.”
껄끄럽다고 외면하기엔 후폭풍의 스케일이 너무 크다. 나중에 교장으로서 생도의 의견을 묵살했다고 헤드라인에 대문짝만하게 나올지도 모른다.
‘시간 낭비를 할 녀석도 아니고.’
정령가의 반란에 암중 세력이 개입한 이상, 다른 가문이라고 무사하기 힘들다. 이미 권왕가와 창왕가도 내분을 겪었었다. 그나마 무사한 가문은 검신천가, 화염적가, 도제진가, 용신김가였다. 일곱 가문 중 네 가문은 안전하다고 하기엔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 문제가 없다고 자신하긴 어렵다.
“다른 가문에도 암중 세력의 끄나풀이 있다고 보는 게냐?”
“제가 보기엔 그래요. 물론, 대형 길드도 자유로울 순 없죠.”
“정부도 관여했다면서. 이런 지경에 처하고도 누구 하나 몰랐다니 눈뜬장님이 따로 없구나.”
“알고 있어도 모른 체했거나, 쥐도 새도 모르게 제거됐겠죠.”
암중 세력은 시간을 들여 회유, 포섭, 제거를 반복해 왔을 거다. 회유되지 않은 사람은 약점을 쥐고 흔들었을 테고, 그래도 포섭이 되지 않으면 누명을 씌워 제거했겠지.
“제인 누나가 인망이 좋았던 사람 중에 불미스럽게 떠난 이들을 조사해서 어느 정도는 파악이 된 상태예요.”
“확실히 보통은 아니구나.”
몰랐을 때야 의심하지 않고 넘어갔겠지만, 암중 세력이 가담했다면 관점을 달리할 수밖에 없다. 그간 가문, 길드, 정부의 요직에 있는 자들의 내력을 집중적으로 조사했다. 독마를 통해 얻은 정보가 큰 도움이 되었다. 회유와 제거에 독마의 독만큼 유용한 수단도 드물었다.
그래서 당분간은 독마의 정보를 활용하지 않았다. 독마가 실종된 상태에서 바로 움직이면 암중 세력에게 정보를 주는 꼴이 된다. 최대한 연관을 배제하고, 확실한 정보를 수집하는 데 집중했다.
교장은 단순한 ‘신입생 군기 잡기’가 아님을 체감하고 있었다. 이놈은 시작은 미니멀한데, 결말은 스펙터클이었다.
“일망타진을 노려 보려고요.”
“인생이 계획대로만 되지는 않는단다.”
“그래서 열불이 터지는 거죠. 정령가처럼요.”
“꼭 움직일 것처럼 말하는구나.”
“아니면 다음 기회를 노리면 됩니다. 좀 더 긁어 대면 지들이 배기겠어요?”
여론을 조작, 선동하여 칠대가문 대회합 일정을 잡은 연유였다. 암중 세력은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순조롭게 진행되기를 바랄 것이다. 그런데 사전에 물밑 작업 해 놓은 것들이 번번이 실패했다. 암중 세력도 인내심에 한계가 왔으리라 판단이 되었다.
“그래서 원하는 건 뭐냐?”
“MVP의 소원권을 행사하고 싶습니다.”
아카데미에 소원권 같은 게 있을 턱이 없다. 무진이 그걸 모를 리도 없을 테니. 없으면 만들어 달라는 강요였다.
미루어 짐작하건대.
“밀어 달라고?”
“저와 지수를 팍팍! 밀어주시고, 일정 부분 특혜도 원합니다.”
“그거 부정 청탁이잖아!”
“아카데미의 경쟁력을 높이는 방안으로 하시죠.”
교장은 입맛이 씁쓸했다.
어른이 나서서 해야 할 일을 일개 생도가 도맡아서 하고 있었다. 한편으로 교류전 이후로 안일했던 자신을 반성하게 했다.
“위험한 행동은 하지 말고. 그래도 할 거면 지금처럼 얘기라도 하거라.”
“걱정해 주시는 겁니까? 감동인데.”
“걱정은 무슨! 내 노후가 걱정돼서 하는 소리다, 이놈아!”
“연금 오래 타게 해 드릴게요.”
그 전에 고갈되면 하는 수 없고.
한편으로 고갈될 걸 알면서도 계속 붓는 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아닌가. 어차피 사라질 연금이면 미래에 짐을 지우기보다는 점진적으로 줄여 나가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다. 한데, 이미 받는 사람들이 있어서 줄이기는커녕 더 많이 부어야 할 판이다.
‘주다 뺏으면 화나기 마련이지.’
사람은 다 똑같았다.
본인은 안 그런 척해 봤자, 공짜로 들어온 돈을 마다하긴 쉽지 않았다. 게다가 매달 주는 돈을 줄이거나, 없앤다고 해 봐라. 어떤 사태가 벌어질진 보나 마나다.
‘다 된 밥엔 재를 뿌려 줘야 제맛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