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 체질 개선(4)
시간 끌지 않았다.
연무장으로 간 지수와 수왕이 마주 섰다. 서로를 대하는 눈빛이 여느 때와 달리 긴장감이 넘치긴 했다. 장로들은 수왕의 선전을 기대하는 눈치였다.
‘만만치 않은데.’
유정은 무진을 논외로 두지만, 지수도 만만치 않다고 봤다. 아버지가 10초 안에 제압할 수 있을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100초로 하면 좀 낫지 않을까?’
유정이도 결국 안으로 굽는 팔뚝이었다. 지수와의 우정보다 가족이 중요했다. 더욱이 친구에게 아버지가 처맞는 걸 보고 싶은 딸은 세상천지에 없다.
‘설마 지진 않겠지?’
그리고 펼쳐진 광경은 유정과 장로들의 예상을 아득히 상회했다. 관전하는 사람이 이 모양인데, 정작 대결에 임하는 수왕의 심정은 오죽할까?
“저럴 수가!”
“속성까지 꺼냈는데.”
수왕의 속성 [수중결계]가 발휘되고 있었다. 공간 자체를 물의 정령이 최상으로 펼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런데도 대결은 팽팽하게 진행이 되었다. 누가 이길지 모른다고 해야 할까. 처음부터 속성을 꺼내지 않은 수왕의 패착일 수도 있었다.
에헴.
우쭐해하는 권왕의 표정이 압권이었다. 능히 그럴 만했다. 손녀의 성장을 기뻐하지 않을 할아버지가 어디 있겠는가.
“고것 참 그새 더 성장했구나. 껄껄껄! 패는 맛이 더 좋겠어.”
……?
입맛을 다시는 할아버지, 그것도 모르고 전심전력을 다하는 손녀였다. 같은 장면을 봐도 보는 사람에 따라서 관점이 다를 수는 있겠지만, 저런 식으로 생각하다니. 권왕가는 다들 상종 못 할 인간들만 있는 건가?
하긴, 그러니 저런 괴물들이 탄생하지.
혈육에 얽매이지 않고 강함을 추구하는 권왕가였다. 어째서 다른 이들과 차원이 다른지를 깨닫게 한다.
후우우!
수왕은 심호흡하며 놀란 감정을 추슬렀다. 10초에 가까워질수록 조급해졌고, 10초가 넘어가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뒤늦게 정령합신과 수중결계를 개방한 것이 패착인 줄 알았거늘.
‘능히 자웅을 겨룰 만하다.’
수중결계를 개방하자, 지수도 광폭화를 개방했다. 속성이 없는 상태로 싸울 때보다 더욱 강력해졌다. 속성마다 단계가 있지만, 증폭형의 속성을 완벽하게 통제하기란 말처럼 간단하지 않았다. 그것이 간단했다면 증폭할 수단만 있으면 되는 일이었다.
‘놀랍도록 완벽하게 통제한다.’
익숙하다고 해야 할까?
차분해진 수왕은 본래의 전투 스타일로 바꾸었다. 물의 철벽으로 불리며 수왕으로 칭해진 자신이었다. 선수비 후역공에 최적화를 이루었다. 후발제인의 스타일을 버리고, 선공을 취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수왕의 판단에는 커다란 오판이 있기는 했다. 일반적인 2학년 생도는 지수처럼 강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투란 항상 현재를 뜻한다.
“최선을 다하마.”
“바라는 바예요.”
지수로서도 모처럼 만난 호적수였다. 무진이와 할아버지는 호적수라고 하기에는 너무 강했다. 한계를 돌파하게 해 줬지만, 매번 지는 것도 지겨웠다. 그렇다고 선배나 친구를 이겨 봤자 간의 기별도 안 오고.
-광폭화 4단.
-수중결계 3중압.
서로의 전력을 꺼내 놓은 팽팽한 대결이 되었다. 약속마저 잊은 용호상박의 혈투였다.
부들, 부들.
시조는 ‘그렇게 됐다’ 이후로 가주를 이용해서 맹약에서 벗어나 보려고 했다. 약속은 지켜야 하나, 사제 새끼들한테 두들겨 맞은 걸 생각하니 독이 바짝 올랐었다. 권왕은 몰라도, 그 손녀라면 충분히 제압하고도 남을 줄 알았거늘.
‘이놈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났구나.’
권왕이 짜 놓은 덫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무진이 말해 준 대로였다. 그 안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흘러가는 걸 보니 소름이 돋는다.
‘귀신 같은 놈!’
하는 수 없게 되었다. 이젠 빼도 박도 못 한다. 이렇게까지 해 줬는데도 싫다고 뻗대면 염치도 없는 짓이었다.
***
정령가는 분가의 반란을 제압했다지만, 속히 정상화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칠대가문의 대회의가 코앞으로 다가온 이상, 그 전에 가문을 원상 복귀해야 하기에 다급했다.
반란이 제압되고 얼마간은 별다른 사고 없이 지나갔다. 가주와 수뇌부가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이때 분란의 상처를 감추기 위한 보여주기식 쇼란 의문이 제기되었다. 이를 증명하듯 가내의 문제를 감추기 위해서인지 정보를 통제했다. 외부엔 알려져도 관계없는 정보만 내보냈다.
그러다 권왕이 정령가에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칠대가문 내의 통상적인 교류라고 하기엔, 분가의 반란을 권왕이 도왔다는 말이 나왔다.
내부적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은 정령가를 권왕가가 간섭하고 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설상가상으로 반란 후 공식적인 회견을 가졌던 수왕도 외부와 접견을 일절 갖지 않았다.
시조, 수왕, 장로들이 아닌 1, 2분가의 분가주가 정령가의 대리로 나서고 있었다. 1, 2분가주가 반란에 가담하진 않았다곤 하지만, 본가의 행동은 수상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의혹은 사실로 굳어져 가는 분위기였다. 권왕가가 반란 제압을 빌미로 정령가를 흡수하려는 것 같았다.
설령 정령가를 합병하지 않더라도, 곧 열리는 칠대가문의 회합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었다. 이는 권왕이 대회합에서 대가주의 자리에 오르려는 야욕을 드러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돈도 많은 인간이 한겨울에도 티셔츠 차림이더만, 권왕이 욕망의 화신이었어?
-딱히 욕심이 없다고 한 적은 없는데. 더욱이 구해 줬으면 보따리는 내놓아야지.
-칠대가문끼리 돕고 사는 거지, 도움 받을 때마다 보상을 해 줘야 하는 거냐?
-당연히 보상해야지! 하물며 재수 없으면 죽을 뻔했는데, 구명지은을 입고 입을 닫는 게 상식이냐!
-칠대가문의 대회합에서 대가주에 오르려면 어쩔 수 없지 않나.
-권왕이 대가주가 된다고? 칠대가문이 망하려고 작정했나!
-요즘 권왕이 얼마나 잘나가는데, 보기보다 머리도 잘 쓰더라고.
-샤프한 권왕이라니!! 대가주가 되려고 벌써부터 이미지 관리하나?
여론은 권왕가와 정령가의 담합을 의심했다. 이러면 보통은 강하게 부정할 텐데, 정령가는 별다른 입장 표명을 하지 않았다.
권왕의 개입으로 칠대가문 내에서 파벌이 형성될 조짐이 보였다. 다른 가문으로선 권왕이 대가주가 되는 걸 탐탁지 않아 했다.
더욱이 다들 대가주를 넘겨줄 마음이 없기에 세력 다툼이 벌어졌다. 7개의 가문이 사분오열되어 회합이 아니라 혼란이 가중되었다.
-권왕은 그렇다 치고, 제자는 난봉꾼이 다 됐던데?
-존나 부럽다, 주변에 여자가 끊이지를 않아.
-거구긴 해도 딱히 잘생긴 줄은 모르겠던데.
-요즘엔 남자 아이돌처럼 예쁘장하게 생긴 걸 선호하긴 해도. 저 정도면 솔직히 잘생겼지. 운동 안 해서 뒤룩뒤룩 살찐 것도 아니고.
-그만하면 남자답게 생긴 건 맞지. 하지만 권왕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다니는데, 다른 가문의 여식과 같이 다니는 게 말이 되나?
-같이 다니면 안 되는 거냐? 정분이라도 난 것처럼 말하네. 너희들, 동기들끼리 몰려다니지 않고, 독고다이 아싸만 했냐!
-이제는 일처다부제, 일부다처제 다 허용하자. 출산율도 낮은데, 돈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낳아야지.
-이거 미친놈일세, 사회가 동물의 왕국도 아니고! 부부가 되려면 서로 진실한 사랑을 해야지! 게다가 있는 사람들만 사냐? 없는 사람들도 행복하게 살아야 사회가 건강하게 발전한다고.
-평생 한 사람만 사랑하기는 어렵잖아. 두루두루 사랑하면서 살자고^^ 어차피 안 되는 연놈들은 안 돼!
-동물의 왕국을 원하면 아랍이나 남아공으로 꺼져! 괜히 우리나라에서 살지 말고!
의외로 논쟁거리가 되어서 갑론을박이 팽팽하게 맞서는, 웃기지도 않는 해프닝이 일었다. 진지하게 따져도 일부다처제, 일처다부제는 우리나라의 헌법에 위배되었다. 애초에 성립 자체가 되지 않는데도, 이걸 가지고 분탕질하는 부류가 꽤 있었다.
방학이 끝나고, 2학기도 중반이 지나갔다.
무진은 친구들과 아카데미 라이프를 즐겼다. 정신없던 1학년 때와는 비교가 되었다. 이유는 있었다. 태수 선배와 친구들이 고학년과의 전쟁의 최전선에서 든든한 방패막이가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인생은 무진처럼’이란 말이 돌았다.
꽃밭에서 탄탄대로를 걷는 무진의 행보는 선망의 대상이 되어 갔다. 이대로 졸업할 때까지 아카데미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하리란 분위기였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듯, 무진의 전성기를 고깝게 보는 부류도 적지 않았다. 특히 반성운맹은 나날이 세력을 넓혀 가며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쯤 됐으면 선전포고를 할 법도 한데, 무진을 건드리기에는 부담이 되었다. 무진을 인정하긴 싫어도, 보여 준 것이 많았다. 대결을 청해 봤자 중간에서 컷! 당하기 일쑤였고, 무진의 주변을 에워싼 꽃밭도 아카데미 최상위에 속했다.
결국, 눈치만 볼 뿐 도전하지 못한 채 2학기도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공사다망했던 1학년을 상기하면 2학년은 맹숭맹숭했다.
그렇게 2학년을 마칠 줄 알았는데, 1학년 중에 도전자가 나왔다.
예상외였다.
2, 3학년도 가만있는데, 1학년이 도전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언뜻 무모해 보였지만, 1학년다운 패기였다. 더욱이 1학년은 무진의 실력을 전적으로 선배들의 이야기와 소문에 의존했다. 대결이란 항시 변수가 존재하고, 실제로 붙어 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이다.
아카데미의 평지풍파가 소문처럼 대단한지 1학년은 궁금했다. 물론, 이면에 숨은 욕망도 무시할 순 없다. 무진은 1학년 때부터 아카데미에서 유명세를 떨쳤다. 이기기만 한다면 무진이 가지고 있던 명성을 단숨에 차지할 수 있었다.
구도도 좋았다.
무진은 아카데미의 중심이면서도,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었다. 악명도 자자해서 악당을 제거하고 아카데미를 구한 용사의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무진은 1학년의 도전을 흔쾌히 받아 주었다. 여태 주변에 맡겼던 양상과는 달랐다. 1학년의 도전 정신과 패기를 인정해 주는 듯했다.
저벅.
남녀가 섞인 5명의 도전자 중 가장 몸집이 큰 1학년이 나섰다.
각이 선명해서 남자답게 생겼다.
“도제진가의 설영범입니다. 선배님의 명성 많이 들었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름만큼이나 시원시원하구나. 그래, 서로 최선을 다해 보자.”
설영범은 거구임에도 군더더기가 없이 단련된 신체를 지녔다. 도제진가의 삼대무력대인 적운대주 설천기의 아들로 백운도결을 수련했다. 각성하기 전부터 도제진가에선 엘리트로 평판이 높았다.
‘소문은 언제나 과장되기 마련이지. 그녀가 보는 앞에서 선배를 무릎 꿇려 주겠어.’
설영범의 눈이 결투장의 한쪽을 향했다 원래대로 돌아왔다.
한 살 터울이었던 가주의 직계 진천예를 조심스럽게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보여 주고 싶었다.
-대결 시작.
설영범은 자신이 있었다.
소문은 소문일 뿐, 직접 부딪쳐 보지 않으면 알기 어려웠다. 더욱이 각성으로 얻은 [도압] 속성은 가문 내에서도 일절로 평가받았다. 아버지나 다른 어른들조차도 [도압]과 백운도결을 결합한다면 학년 내에서 경쟁자가 많지 않을 거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실제로 1학년 내에선 적수가 없었다. 승률도 90%가 넘어가며 2학년에게 밀리지 않았다. 더욱이 지금을 위해서 백운도결의 비기 백운뇌격을 숨겨 놓았다.
‘보여 주마!’
모두가 보는 앞에서 아카데미의 평지풍파를 꺾는다면 그가 가진 악명을 부순 영웅으로서 명성을 떨칠 수 있었다. 특히 결투장 한쪽에서 지켜보고 있는 천예 누나에게 강하게 어필할 절호의 기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