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 체질 개선(1)
루이스는 골치가 아팠다.
또 꼬였다.
주석이 멀쩡해지고 나서 재차 독을 썼었다. 그런데도 별다른 증상도 없이 공식 업무에 박차를 가했다. 예상하지 못한 사태의 연속이었다.
“독마의 독이 통하지 않는다는 건가?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어지간한 약으론 치료가 되지 않는다. 만성독을 사용하긴 했지만, 최소한의 증상은 있어야 했다. 시름시름 앓기는커녕 주석의 안색은 그 어느 때보다 때깔이 좋았다.
그것이 실수였다.
아무래도 주석이 눈치를 챈 듯하다. 한 번 사용한 독을 재차 쓴 것이 패착이었다. 독이 통하지 않자 양을 늘렸고, 상태를 지켜봤거늘. 꼬리가 길면 밟히듯 증거를 제공하고 말았다.
장 주석은 구대문파를 은밀히 동원해서 팔대세가를 몰아붙이고, 당 차원에서도 강력히 규제했다.
당장은 총리를 등에 업은 팔대세가가 대등한 듯 보여도 당권을 장악한 주석의 파워를 무시할 수 없는 형국이다.
이런 와중 다급해진 왕이 총리가 주석의 암살을 시도하다 실패하는 바람에 정국이 어수선했다.
“만만히 봐선 안 됐었군.”
장 주석이 본격적으로 나서면서 구대문파는 문파의 전대 고수를 내놓았다. 상대의 수를 예측 못 한 왕이 총리의 실패는 당연했다.
신흥 세력이나 마찬가지인 팔대세가가 당장의 역량은 비슷할지 몰라도, 전대의 고수를 보유한 구대문파와 힘 싸움에선 밀릴 수밖에 없었다. 팔대세가도 이제는 사활을 걸고 총력전을 펴야 하는 형국이 되었다.
“삼천이라고 했지.”
구대문파의 전대 고수, 삼천은 세계의 초인 반열에 올랐다고 봐야 했다. 섣불리 수를 썼다가는 실패할 수도 있었다.
“이들부터 해결해야 하는데.”
한편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독마의 독은 단계가 있었다. 전에 사용한 독보다 3단계는 개량이 되었다. 그런데도 통하지 않는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한국이 문제였어.”
독마가 죽은 이상, 더는 독을 쓰긴 위험했다. 주변에 대한 경계도 강해진 상황이고, 조직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한국에 파견된 그리드에게 항의하긴 껄끄럽다. 결국, 자신이 직접 나서야 했다.
“하는 수 없군.”
원한다면 응해 줘야겠지.
***
초대를 해 줘도 불만인지, 잔소리가 길어졌다. 오늘 해야 할 체력 훈련도 빼 줬건만, 성의를 무시하는 행위였다.
“네놈이 사람이더냐?”
“최선을 다하라면서요.”
“양심이 터진 게냐? 아무리 그래도 4 대 1은 너무하잖아. 게다가 마법에 무공까지 쓰고, 항복할 기회라도 줬어야지! 어른을 학대하고서도 잘 살 것 같아, 네놈은 반드시 천벌을 받을 것이야!”
“천벌은 모르겠고요. 맞아 보지 않으면 보통은 맞는 고통을 모르더라고요.”
“내 나이가 몇인데, 그런 꼴을 당하고 어떻게 얼굴 들고 다녀! 그동안 지켜 온 내 고상한 품위는 어쩔 거야?”
외모는 젊고 수려해도, 마음은 꼰대의 근본 그 자체였다. 나이를 먹을수록 어려진다는 말이 설득력 있었다.
“시조님 정도면 좀 추해도 돼요.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입니다.”
“닥치거라! 그게 말처럼 되면 세상에 꺾이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어!”
의식을 회복했을 때, 소민성은 기함을 질렀다. 전신에 안 아픈 부위가 없을 만큼 다발성 구타증후군에 시달렸다. 뼈가 아리다는 걸 처음으로 느껴 봤다. 점입가경이라고, 방도 아니고 연무장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보기보다 엄살이 심하시군요.”
“엄살이라니! 나이 들수록 뼈 건강이 얼마나 중요한데, 통풍 오면 네가 책임질 거야? 입이 돌아갈 뻔했다고! 날 데리고 갈 애들은 남겨 뒀어야지!”
집안의 어른을 나 몰라라 하고 어디로 갔나 했더니, 사이좋게 골골거리고 있었다.
“패긴 누가 패요, 엄밀히 말하면 수련입니다. 누차 말하지만, 정령가는 체력부터 키워야 합니다.”
“수련을 빙자한 구타겠지, 내 권왕에게 단단히 따지겠다!”
소민성은 아직도 분이 안 풀렸다.
평생 맞아 본 적이 없었거늘, 그날 전부 몰아서 처맞았다. 애들이 보는 앞에서 어린놈한테 일방적으로 처맞아서 더 서글펐다.
“사부님한테 말하는 순간, 우리만의 비밀이 아닐 텐데요!”
“끄응, 그 사부에 그 제자로다!”
항의해 봤자 망신이고, 뚜렷한 해결책이 보이지 않았다. 이후로도 무진은 대련을 빙자하여 자신과 애들을 학대했다. 훈련 자체가 인간적이지가 않았다.
차라리 돈을 달라고 해라!
그러면서 한다는 소리가.
“이게 다 정령가를 위해섭니다.”
“네 속셈을 모를 줄 아느냐!”
“알면 어쩌시게요?”
“네놈이 했다고 폭로할 테다.”
“그러세요.”
소민성의 협박 따윈 씨알도 안 먹혔다. 더욱이 밝힐 엄두가 나지 않았다. 되레 정령가에서 책임을 무진에게 떠넘긴다고 비난받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무진의 초대를 받아 집에 오긴 했지만, 소민성으로선 방도가 없었다. 수왕, 장로들, 유정의 간절한 눈빛이 떠올랐다.
자신만 믿고 있으라고 했거늘.
‘큰소리치긴 했는데.’
무진의 훈련은 일반적이지 않았다. 이상한 수법을 동원해 걸리기만 하면 심상 속에서 족히 10년은 고생했다. 다시 현실로 돌아왔을 때의 공포가 상상을 초월한다.
소민성은 어떻게든 이쯤에서 멈추고 싶었다. 이놈의 심상 훈련을 통해 강해졌지만, 정신적으로 피폐해졌다. 훈련도 적당히 쉬어 주면서 해야 하는데, it's 스파르타였다.
점점 몸이 엘프의 체형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로이던 줄.
‘어쩌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한테 겁나서 말도 못 하고 돌아가면 체면이 말이 아닐 것이다. 가문에서 오랜 시간 구축한 시조로서 품위를 고수해야 했다.
“고기 좋아하신다고 해서 다양하게 준비해 봤습니다.”
“이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느니라.”
“단백질을 보충해야죠.”
“……네가 그럴 줄 알았어!”
소민성은 식탁을 가득 채운 요리에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든 자존심을 지키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해야 했다.
앙, 사르르!
마지못해 하나 집어 먹었을 뿐이거늘.
이거 뭐야?
왜 이렇게 맛있어!
본래의 목적은 잊은 채 소민성은 수저를 멈추지 못하고 순식간에 식탁을 비웠다.
“더 드릴까요?”
“그래…… 아니!”
이런, 빌어먹을!
안 먹는다고 하고선, 라면 한 젓가락만을 시전한 꼴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얄미운 짓을 하고 말았다. 그런데도 더 달라고 할 뻔했다. 초식의 제왕이 아니라, 능히 육식의 제황이었다.
“차원을 넘어오면 입맛이 변하나 봐요.”
“엘프는 원래 음식을 가리지 않아. 우리가 언제 풀떼기만 먹는다고 했더냐.”
“흠, 선입견이었군요.”
“소설과 현실은 엄연히 다른 법이지.”
궁색해진 소민성은 엘프에 대한 인간의 선입견을 거론하며 대충 넘어가려고 했다. 각성의 시대 이전까지만 해도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 낸 결과물에 지나지 않았다. 진짜 엘프를 보지 않았으니, 확인과 검증은 불가능했다.
“제가 알고 있던 것과는 조금 다르네요.”
“사람마다 다른 것처럼, 엘프도 다 똑같을 순 없지.”
소민성은 종족의 특성이 아닌, 취향을 거론했다. 그래야 빠져나갈 구멍이 생기기 때문이다. 언제나 구멍 하나 정도는 미리미리 만들어 놓아야 했다.
“훈련하기 싫으시죠?”
“그럼 하고 싶겠느냐! 그건 훈련이 아니라 학대야!”
“강해지는데요.”
“모두가 너처럼 강함을 추구하진 않는단다.”
“개똥 같은 소리지만, 믿어 줄게요.”
뭐, 이 새끼야!
소민성은 울화가 치밀면서도 반박하지 못했다. 각성자가 강함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딴 말을 믿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하지만 이런 식으로 대놓고 말하진 않는다.
“누가 아예 하지 않겠다고 했더냐. 좀 적당히 하자는 거지? 일방적으로 몰아붙인다고 강해지진 않아.”
“내기하실래요?”
“……도박은 좋지 않단다.”
“전 도박한 적 없는데요. 항상 이겼거든요.”
그 말은 애초에 질 생각도 없다는 소리잖아. 그런데도 뻔뻔하게 내기를 거론하고 있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질 게 뻔한 내기를 받아들일 리 없었다.
“대결의 승자 같은 소린 꺼내지도 마라.”
“싸움이 아닙니다.”
“네놈의 수작에 넘어가지 않아.”
“우리 집에 오지 않겠다고 약속하시면 됩니다. 그럼 훈련도 빼 주고, 돈도 깎아 주겠습니다.”
“그런 얄팍한 수작…… 다시 말해 보거라. 네 집에 오지만 않으면 된다고?”
“그렇습니다. 그 약속만 지키시면 시조님의 승립니다.”
이놈이 미친놈인 줄은 진작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미친놈일 줄이야. 급이 다른 사이코 오브 사이코킹이었다. 피지컬 훈련은 둘째 치고, 갚아야 할 돈도 상당했다. 그걸 없는 셈 쳐 주겠다고 한다면, 가문의 재정에 커다란 보탬이 될 것이다.
‘함정인가?’
원래 의심이 많지는 않았는데, 무진을 만나고 난 후부터 소민성은 사람을 신뢰하지 못하게 되었다. 더욱이 무진의 꿍꿍이를 도저히 모르겠다. 이건 누가 봐도 자신에게 유리한 내기였다.
차라리 승률이라도 꽝이면 선뜻 받아들이겠는데, 자기 스스로 100%라고 밝혔다. 패를 전부 깐 채로 내기를 하고 있었다. 이런데도 망설이면 그것도 쪽팔리는 짓이었다.
‘최면일 수도.’
심상을 가지고 노는 새끼였다. 무진의 눈을 잠깐이라도 바라보다 1년이 더 늘었었다. 그런 새끼다. 거짓말이라고 하기엔 진지하고, 위화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엘프를 이렇게나 고민하게 만들다니, 확실히 방심할 수 없는 녀석이었다.
“싫으면 말고요.”
“누가 싫다고 했느냐, 얘기는 끝까지 들어 봐야지.”
갑을이 명확했다.
전혀 아쉽지 않은 무진의 얼굴을 보자니, 소민성은 다급해졌다. 이 좋은 기회를 제 발로 차고서 돌아간다면 분명 두고두고 욕을 먹을 것이다.
시조로서 품위가 떨어진 것도 한몫했다. 이제는 말로 한다고 해서 들어 처먹을 것 같지도 않았다.
“하마.”
“대신 제가 이기면 시조님과 정령가는 제 명령에 절대적으로 따라야 합니다. 일종의 주종 관계라고 보시면 됩니다.”
“내기 하나로 가문을 먹겠다고?”
“구해 줄 땐 다 내어 줄 것처럼 얘기하시더니, 엘프나 사람이나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네요.”
다들 그렇지 않나. 말로는 뭔 말을 못 해.
그렇다고 진짜로 다 달라고 하면 줄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나? 하물며 무진의 발언은 정령가의 생사여탈권을 쥐겠다는 의미였다. 자신의 판단 하나로 가문의 생사가 걸렸다. 혼자라면 모르겠지만, 섣불리 약속하기가 꺼림칙하다.
‘그래도 이 녀석이라면.’
4대 정령왕을 다루고, 절대마도를 이루었으며, 권공의 극의에 도달했다. 솔직히 이런 괴물과 배척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같은 배를 탄다면 누구보다 든든한 존재였다.
다만 말이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배알이 꼴리는 것도 사실이다.
소민성은 무진을 인정하면서도, 세간의 소문이 틀리지 않음을 실감했다. 생도로서 그만한 업적을 세우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런데도 여론은 무진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실상은 알고 있으면서도, 무시하고 있다고 봐야 했다.
‘어째서 집이지? 오지 않는다고 만나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근본적인 의문이었다.
집에 오지 말라니? 애도 하지 않을 유치한 짓이다. 무진이 그 나이대의 애송이들이라면 또 모를까? 천년 묵은 능구렁이 같은 녀석이라, 섣불리 예측하지 못했다. 숨겨진 함정이 있을 텐데, 도저히 모르겠다.
집의 규모에 비해 마법, 주술, 결계로 내실을 갖추긴 했다. 일개 잡범들이 넘보기엔 과한 경비였다.
“네 집이 대단하긴 해도, 꼭 찾아올 만큼 메리트가 있진 않단다.”
“떠보려는 거면 그만하시죠.”
무진은 계약서를 꺼냈다.
총 네 장이고, 마법 계약서를 찢으면 계약이 성립한다. 절대마도의 권능이 담겨 있는 데다, 세계수를 조항에 걸었다. 내기에서 진다면 소민성은 계약을 반드시 지킬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