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 빚을 받아 내다(4)
“준비는 다 된 겁니까?”
저 봐, 저 봐!
건방이 흘러넘친다. 저게 수백 년이나 차이 나는 어른에게 할 소린가. 저 짧은 문장 하나로 빡치게 만드는 것도 재주였다. 굳이 묻지 않아도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냐는 뜻이 담겼다.
“오냐, 오늘 제대로 교육을 해 주마.”
“진짜 다 된 거죠? 나중에 딴말하는 거 아닙니다.”
“그런 말은 날 이기고서나 하거라.”
“그렇다면 저도 소환하겠습니다.”
“어서 소환하지 않고 뭘 망설이는 것이냐!”
소민성은 물의 정령왕을 기대했다. 무진의 정령술론 정령왕을 완벽히 통제하기는 무리겠지만, 오늘의 패배를 거름 삼아 한층 더 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슈라이, 베르엠, 워처스, 프레이 나와.”
-우리가 똥개도 아니고!
-진짜 이러기야!
-우릴 다 부를 만한 상대는 아니잖아.
-너무하네.
정령왕들은 투덜대면서도 정령계에서 급히 튀어나왔다. 조금만 늦어도 정령계로 찾아와 난장을 까지 않는다고 장담하기 힘들다. 지금 당장은 불가능해도, 어린 세계수가 말도 못 하게 쑥쑥! 크고 있었다.
“……?”
……?
소민성은 물론 수왕, 장로들도 말문이 막혔다. 뒤늦게 합류해서 대결을 기대하던 유정이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전개의 연속이었다. 물의 정령왕과 계약을 맺은 것도 믿지 못할 일이거늘.
“4원소 정령왕과 계약을 한 것이냐?”
“그런데요.”
“……어떻게?”
“계약하자고 정중히 부탁했습니다.”
4대 정령왕들이 속으로 저주를 퍼부었다.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고 있었다. 다짜고짜 찾아와서 주먹부터 날렸으면서, 네놈의 예의는 주먹으로 시작하는 거냐?
우우우웅!
정령왕들은 울화가 치밀었으나, 정작 당사자한테는 화를 내지 않고 소민성을 향해 분노를 토했다. 괜히 물어봐서,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났다.
솨아아아아!
뜬금없이 화풀이 대상이 되어 버린 소민성은 식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령왕들이 동시에 뿜어내는 기운이 상상을 초월했다. 하나도 버거울진대, 넷이나 되니 운신조차 하기 힘들 지경이다. 정령의 통제력이 일순 몇 배로 증폭한 것 같았다.
후우우!
소민성은 운뢰를 다스려 정령합신을 유지했다. 호랑이 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었다. 하물며 자신과 함께하는 운뢰는 정령왕에 필적할 만큼 강해졌다. 전력에선 뒤진다고 해도, 기량에서는 앞선다고 자신했다.
정령술의 극의는 정령합신을 통한 동화력에 있었다. 친화력이 높아 정령왕과 계약했어도, 온전히 발휘하기는 힘들다.
“정령왕은 나와 하나가 되어라.”
“……뭐?”
땅, 물, 바람, 불의 정령왕이 무진에게 스며들어 합신을 이룬다. 사지로 분산이 된 정령왕이 각각의 위치를 고수하며 위력을 과시한다.
우우우웅!
후아아아앙!
사방으로 휘몰아치는 정령의 권능에 모두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상상을 초월하다 못해 상종 못 할 짓을 보고 있었다. 하나도 아니고, 4원소의 정령왕과 합신을 하다니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 보통은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뼛조각도 찾지 못해야 했다.
“이제 갑니다.”
“……이건 말도 안 돼!”
보고도 믿기지 않는 거짓말 같은 광경이었다. 저걸 대체 어떻게 믿으란 건가? 몸이 무쇠 덩어리라도 버티기 힘들어야 마땅하거늘.
진짜로 4대 정령왕과 합신을 이루었다. 전대미문, 전인미답의 경지였다. 이론적으론 가능해도 실제로 행하는 미친놈이 있을 줄 누가 알았으랴.
정령왕이 순순히 합신을 허락한 것도 이상했다.
차원이 달라서 정령왕의 성향이 바뀌었나?
애초에 정중히 부탁한다고 들어줄 정령왕들이 아니다. 자신들이 정한 기준을 통과하지 않으면 계약은커녕 소환에 응하지도 않았다. 정령왕과 계약을 맺은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거늘.
“갑니다.”
“……잠깐!”
이미 늦었다.
땅, 물, 바람, 불이 하나가 되어 일치단결했다. 모든 속성 중 으뜸인 뇌기도 다구리엔 장사가 없었다. 불 주먹, 바람 주먹이 권강의 형태로 날아오자 뇌기가 암반에 부딪힌 꼬챙이처럼 튕겨 나갔다.
크억!
정령권강에 처맞고 날아간 시조가 허공을 차며 날아올랐다. 위기를 감지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땅에서 솟구친 흙이 창이 되어 시조를 쫓는다.
솨아아아!
하늘에서 내려온 거센 폭우와 마주했다. 땅의 정령왕과 물의 정령왕이 합작하여 시조는 샌드위치가 되었다.
“……뇌정탄!”
“대지의 절망.”
소민성이 최후의 수법으로 뇌정령을 응축하여 뇌강을 발출하자, 무진은 기다렸다는 듯 땅의 정령왕으로 공간을 토벽으로 둘러쳤다.
두두두두두!
땅의 정기가 함축된 토벽은 금성철벽과 같았다. 뇌정지기의 응축된 포격, 뇌정탄이 스며들어 연쇄 폭발하는데도 순식간에 회복했다.
“아쿠아 랜스, 화염포효, 윈드 사이클론.”
합신을 이룬 무진의 정령술은 시차를 두지 않았다. 공수가 동시에 이루어졌다. 소민성이 발버둥을 치며 반격하지만, 땅의 정령왕이 펼친 디펜스를 뚫기는 역부족이었다.
한 번 반격하면, 세 번 처맞는다.
불공정한 공수.
“홀드.”
전장의 유리함을 더욱 강화한다. 무진은 절대마도를 꺼내 들어 시조의 움직임을 봉쇄했다.
바르르를!
시조는 홀드에 저항은 하지만, 움직임이 현저히 느려졌다. 이때다 싶은 불의 정령왕이 화기를 체인처럼 휘두르며 휘감는다.
휘리리릭, 화르르르!
꽈악!
극렬극염.
백화의 사슬이 육신을 사로잡았다.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이 화형인 걸 고려한다면 소민성에겐 최악의 수였다. 뇌기의 방패, 뇌령갑을 둘렀음에도 타는 듯한 열기가 사방을 불태운다.
“아쿠아 블래스터, 대지의 분열, 스톰 블레이드.”
무진의 연계는 쉴 틈 없이 지속되었다. 세 가지 이상으로 공격 루트가 다양했다. 불과 물이 만나 뜨겁고, 차갑고를 반복하자 시조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겨우 육신을 붙잡고 있지만, 한계에 다다랐다. 공격력이 강한 뇌기가 반격은커녕 방어에도 급급했다.
-무진류 신화권극 분쇄경.
잡아 놓고, 절대권경을 발출한다.
무진은 이 일격에 권의를 담았다. 정령가의 진정한 화석으로 거듭나도록.
부르르!
무진의 권심을 본 소민성은 시간의 상대성을 경험하고 있었다. 주마등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인간의 수명이 길어 봐야 100년이라면, 그에겐 수백 년의 세월이 압축기장 되었다.
‘……죽는다!’
맞으면 진짜로 죽는다. 전신이 갈가리 찢어지며 뼛조각도 남기지 않고 갈려 나갈 것 같았다.
오래 살았으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는 호상이어야 하는데.
소민성은 삶에 대한 진득한 미련을 느꼈다.
엘프로서 언제든 자연으로 돌아갈 준비가 되어 있는 줄 알았더니, 인간처럼 삶을 지향했다.
‘이대로 죽는다고?’
초연해지고자 했던 부동심이 위선임을 깨닫는다. 엘프도 결국 인간과 다르지 않았다. 은연중 선을 긋고 인정하지 않았던 것에 불과했다. 그러면서 인간을 내려다보려고 했다니, 얼마나 가증스러운 일이던가.
‘인정했어야 했어!’
수백 년의 삶이 압축되어 지나가지만, 하나하나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오르며 후회와 번민이 교차한다. 좀 전만 해도 받아들이지 못했던 감정을 이제는 깨닫게 된다.
인정, 번민, 후회, 성찰.
인간적인 희로애락을 외면하지 않고 받아들이자 새로운 단계가 보였다. 가로막았던 벽이 허물어지면서 정령과 진정으로 하나가 되는 길이.
이것이야말로 몰아일체, 정령합신의 극의였다.
‘잘못 알고 있었구나.’
환희가 피어오르며 격이 상승했다. 운뢰가 정령왕급에 도달했다고 자신했건만, 진정한 의미의 정령왕이 되진 않았다.
파파파팟, 찌지지짓!
벽이 허물어지면서 시조의 몸이 변하고, 정령의 격이 상승했다. 새로운 정령왕의 탄생을 목도하는 중이다.
솨아아아!
승천, 하늘로 솟구치는 극락경의 환희가 휘몰아친다. 소민성은 느껴 보지 못했던 희열이 심신을 장악한다.
자신감이 차오른다.
누구라도 상대할 수 있었다.
어서 오너라.
빠악!
이미 왔구나.
탈현경이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 초월급에 도달한 소민성을 두들겼다. 권격에 처맞은 소민성은 나아가지 못한 채 허공에서 멈추었다. 4대 정령왕이 소민성의 사지를 붙잡고 있었다.
“……잠깐!”
환희는 곧 절망으로 바뀌었다. 다급해진 소민성이 멈추라고 소리쳤으나, 무진은 가는귀가 먹었다.
퍼퍼퍼퍼퍼퍼퍽!
크어어어억!
폐부에서 솟구쳐 오르는 진심이 담긴 비명이었다. 육신을 관통하여 영혼에 충격을 주고, 정령까지 휘말렸다.
소민성과 운뢰는 몰아일체가 되어 고통을 받았다.
혼자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하기엔 실시간으로 소민성의 얼굴이 변해 가고 있었다. 완벽한 외모도 주먹 앞에서는 무의미했다.
능히 성형권이라 불릴 만하다.
-……아파!
동반자였던 운뢰마저 합신을 풀고 정령계로 돌아가려고 했다.
-어딜 가냐.
-같은 급이라고 다 같은 줄 알아.
-선배를 봤으면 인사부터 박아야지.
-신고식부터 세게 하자.
운뢰가 정령왕이 되었다는 인증식이었다.
하나, 올 때는 맘대로 왔을지 몰라도, 갈 때는 허락을 받고 가야 했다. 막 격을 허물고 왕의 자격을 갖춘 운뢰로선 이미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4대 정령왕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퍼퍼퍼퍼퍼퍼퍽!
계약자의 도움을 바라기엔 형편이 최악이었다. 방어는커녕 일방적으로 처맞고 있었다. 실시간으로 곤죽이 되어 가며 비명을 지르기에 바빴다.
크아아아악!
소민성은 처음이었다.
맞는 게 이렇게나 아픈 줄은 몰랐다. 평소 고작 그런 걸로 징징거리냐며 후손들을 타박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땐 왜 그랬을까? 맞는 건 무섭다.
‘……언제 끝나!’
차라리 기절하고 싶은데, 이 미친놈은 절묘하게 간극을 지켰다. 의식이 살아 있으면서도 고통이 심신으로 전달되었다. 이런 식으로 고통이 반복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경이롭기는…… 개뿔!
아프다고, 이놈아!
허!
입이 쩌억! 벌어진다. 바퀴벌레가 입으로 들어가도 모를 지경이었다. 수왕, 장로들, 유정은 말문이 막혔다. 눈으로 보는 장면이 차라리 가상공간의 영화였으면 이해라도 하지.
현실에서 적나라하게 펼쳐졌다.
시조님이 누구시던가?
정령가의 근본이자, 대한민국 최고의 고령자시다. 젊어 보인다고 함부로 대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더욱이 정령가 최강의 정령술사였다.
솔직히 시조님이 아이처럼 비명을 고래고래 질러 댈 줄은 미처 몰랐다. 설령 처맞더라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참아 내실 줄 알았다.
‘시조님도 우리하고 다르지 않군.’
‘인간적이시네요.’
그런 걸 다 떠나서 시조님을 저처럼 일방적으로 두들겨 팰 수 있는 존재가 한국에 얼마나 될까? 권왕이 온다고 해도 불가능한 일이다. 하물며 그 제자가 정령가의 시조를 패고 있었다.
이건 명백한 노인 학대였다.
동방예의지국의 경로사상 우대국에서 일어날 수 없는 만행이었다. 비록 정정당당한 대결이라도 이쯤 했으면 그만해도 될 법한데.
씨익!
수왕과 장로들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시조를 패면서 웃고 있는 무진을 보았다. 태생이 사이코패스가 아니고서야, 잘못하면 자신들도 맞을 수 있겠다 싶었다.
“……그만해, 이 미친놈아!”
참다못한 유정이 소리쳤다.
무진은 손 속을 멈추었다. 시조는 끊어지지 않는 의식을 겨우 끊어 낼 수 있었다.
철퍼덕!
흐물흐물해질 대로 물러진 소민성은 바닥을 매트리스 삼았다.
동서남북 포위되었던 운뢰도 겨우 정령계로 돌아갈 수 있었다. 번개의 정령답게 빛보다 빠르게 사라졌다.
무진은 승자로서 대가를 밝혔다.
“이제부터 제가 됐다고 할 때까지 정령가의 모든 정령술사는 저와 훈련해야 합니다.”
“……뭐?”
수왕, 장로들, 유정은 좆됐다는 걸 깨달았다. 차라리 가문을 내어 주는 편이 나을 듯싶다.
이젠 싫다고 해도 강제집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