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 빚을 받아 내다(3)
-말만 들어 보면 자기가 다 구한 거 같은데.
-권왕도 정령가의 화석에겐 한 수 양보하지 않나, 하물며 무진은 제자 나부랭이잖아.
-정령가의 화석도 못 이기는 적을 어떻게 이겨?
-정령왕을 소환했다고 하는데, 근거를 대라니까 나중에 보여 주겠단다.
-그 나중이 10년이 될지, 100년이 될지 누가 알아!
-뻥을 쳐도 적당히 쳐야 믿지, 이놈은 생각이란 게 없나?
-생각 없는 놈이 교류전 MVP를 먹냐! 저것도 다 계산된 의도가 깔린 거야.
-그래! 아주 계산적인 씹새끼다, 됐냐!
무진은 사실대로 말했지만, 여론이 믿어 주지를 않았다.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 불신 가득한 여론이 진실을 가려 버렸다.
간간이 무진의 계산된 인터뷰라고 주장하는 부류가 있어서 불신을 더욱 키웠다. 마치 그런 것까지 계산해서 본인이 나선 것 같기도 했다.
“너 뭐 하냐?”
“여론 조작이요. 흐흐흐흐.”
밤중에 불도 안 켜 놓고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매만지며 음산하게 웃고 있는 아들을 본 적이 있는가? 차라리 그 나이답게 동영상이라도 보거라.
음산함보다는 건강함이 낫다.
나이 들면 매일이 시무룩하고, 살맛이 안 난다.
하아아!
산하는 한숨을 쉬었다. 날이 갈수록 무서운 짓을 아무렇지 않게 해 대는 아들이었다. 스케일도 이젠 국내를 넘어 세계적으로 놀고 있었다. 흑막의 등장으로 의도치 않게 세계화가 되었다.
모니터를 보았다.
주도면밀한 아들답게 추적을 막는 프로그램이 깔려 있었다. 제인이 원격으로 깔아 놓은 게 분명했다.
이러고 보면 흑막의 주인이 멀리 있지 않았다. 바로 옆에, 내 아들이야말로 암중 흑막의 끝판왕이었다.
특히 아들이 단 댓글은 관심이 하늘을 찔렀다.
“악플이 상당하구나.”
“사실대로 올렸는데도 믿지를 않네요.”
“그럴 만도 하지.”
“불신하면 지옥 가는데.”
산하가 봐도 믿기 힘든 내용이긴 했다. 그러나 아들을 탓할 순 없다. 거짓말을 했으면 모를까, 사실만을 적시했다. 이걸 두고 ‘사실 적시 자기자랑’이라고 해야 하나? 일말의 겸손은커녕 버젓이 자기를 과시하니 여론은 인정하고 싶지 않게 했다.
내 아들이지만, 아주 꼴사납구나.
과장이 섞이지 않았는데도 꼴 보기 싫게 했다.
산하는 여론 조작이 이렇게나 간단하게 이루어질 줄은 미처 몰랐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나비효과였다. 아들이 먹음직한 먹거리를 옜다! 던져 주면 기회는 이때다 싶은 살쾡이들이 부리나케 달려들었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다 보니, 진실은 사라진 채 전혀 다른 사실이 되어 버린다. 이 정도면 아이돌 기획을 해도 대박을 터트리겠다.
모처럼 어둠 속에서 아버지와 대화를 나눌 기회였다. 전기료가 나오진 않지만, 불을 켜진 않았다. 어둠 속에서도 밤처럼 볼 수 있는 눈이 있었다. 습격을 대비한 훈련을 할 겸, 평소에도 정전 훈련은 필수였다.
“아버지는 어때요?”
“남 실장이 빠지면서 일 자체는 편해졌지.”
“독이 바짝 올랐으니, 위험해질 수도 있겠네요.”
“네 말대로 남 실장이 그럴까? 그도 생각이 있으면 이쯤에서 포기하는 편이 낫다는 걸 알 텐데.”
“그럴 사람이면 회장님한테는 말했겠죠.”
남 실장은 실각당하긴 했어도, 해고되진 않았다. 좌천이라고 하기엔 승진해서 계열사의 사장으로 들어갔다. 남은 인생 사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그간의 노고를 진 회장도 인정하고 있었다. 섭섭지 않은 보상에도 반감을 보인다면 다른 의도가 있다고 봐야 했다.
진 회장도 녹록지는 않았다. 아마 남 실장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 지켜보려는 의도가 깔려 있을 것이다. 그룹의 회장다운 냉철함이다. 일생을 바쳐 일해도 주인과 머슴의 관계는 변하지 않았다. 머슴을 시험하는 주인의 배려로 보겠지.
하나, 모든 일이 뜻대로 되진 않는다. 머슴을 만만히 보면 큰코다치기 마련이다.
주인과 머슴의 다툼.
우리로선 나쁘진 않았다.
서로 물고 물리는 상황이야말로 기회가 될 테니.
“일단은 모른 체해야겠구나.”
“아버지도 피는 못 속이네요.”
“그게 아비한테 할 소리냐. 아들아, 제발 보통 아이들처럼만이라도 커 주면 안 되겠니?”
“그러기엔 너무 멀리 왔어요.”
현실을 외면해 봤자, 상황만 곪아서 악화할 뿐. 지금처럼 태평 무사한 시기에 미리미리 대비해야 했다. 사고가 터지고 나서 수습해 봤자, 피해가 사라지진 않는다.
“친구들을 챙기느라 정작 중요한 걸 잊었네요. 이제부터라도 아버지의 훈련에도 박차를 가하겠습니다.”
“잘 나가다가 불똥이 갑자기 나한테 튀는 거냐?”
“3년 내외로 해 드릴게요.”
“이 나이에 절대경에 올랐으면 됐지, 여기서 얼마나 더 잘해야 해?”
“저는 아버지보다 강해지고 싶지 않아요.”
“뭔 개뼈다귀 같은 소리야!”
투귀만 해도 대단하다고 칭찬을 마다하지 않거늘, 정작 아들놈의 평가는 박하기만 했다. 절대경에 오르면서 내공은 융통무애하고, 육체는 탈태환골로 나이를 외면한다. 이젠 아들과 있으면 형제냔 말을 자주 듣게 되었다.
“그렇게 위험하냐?”
“정령가의 화석도 죽을 뻔했습니다.”
“화석은 원래 죽어야 생기는 거고.”
“전투에서 배려받고 싶으세요?”
“하면 되잖아, 매정한 자식. 대체 누굴 닮…… 날 닮았구나. 내가 잘못했네, 잘못 낳았어!”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아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목숨이 오가는 전투에서 컨디션을 거론해 봤자 비웃음을 사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전투란 항상 현재가 중요했다. 변명을 한다고 적이 사정을 봐주진 않을 테니.
“우림이는?”
“세계수하고 있어요.”
“바쁜 중에도 지극정성이구나.”
“그거라도 해야죠.”
엘프가 게임과 SNS 중독이라니.
딸 같은 고티아를 다른 차원으로 보낸 대장로가 이 사실을 알면 땅을 치고 후회할지도.
“권왕 어르신이 고생이구나.”
“용돈 좀 드렸더니 좋아하시던데요.”
“용돈보다 널 위해서 참으신 거겠지.”
“100억 드렸는데요.”
“……참을 만하구나.”
입만 다물고 있으면 100억이다. 마다할 위인이 얼마나 되겠는가. 내 아들이지만, 용돈의 스케일이 황당할 정도로 커졌다.
줄어들지 않는 아들의 통장은 캐시카우, 돈나무였다.
“그렇게 모든 걸 돈으로만 해결하려는 건 좋지 않은 습관이다.”
“아버지 통장에도 1,000억 넣어 드릴 건데요.”
“……크흠, 군사부일체라곤 해도, 아비만 못하지.”
“확실히 돈은 많을수록 좋아요.”
아들은 돈을 벌 줄 알았다. 가히 천부적이다. 딱히 돈에 연연하진 않는데도. 실상, 본인을 위해서 쓴 돈은 많지 않았다. 진짜 필요한 거 아니면 사지 않고, 베푸는 삶에 충실했다.
“아껴 쓰란 말도 못 하겠구나.”
“쓸 때는 써야죠. 피곤하실 테니 출근하려면 이만 쉬세요.”
“너도 열심히 하거라.”
“언젠가는 진심이 통하길 바랍니다.”
무진의 여론 조작은 계속되었다. 여론이 원하는 걸 지속해서 던져 주었다.
‘미치게 해 주마.’
***
여론은 중구난방이었다.
거짓과 진실이 적절하게 뒤섞여 사태 파악을 더디게 했다. 더욱이 정령가는 내부 사정을 정확히 알려 주지 않았다.
와장창!
내던진 유리잔이 와인 진열장의 유리창을 부수며 날카로운 파편이 튀었다. 고가의 붉은 와인이 피처럼 흘러서 바닥을 지저분하게 만들었다.
드륵!
거실로 들어온 사내가 널브러진 광경에 미간을 찌푸렸다.
“분풀이는 이쯤 해.”
“내 직속 권속이 죽었는데, 그런 말이 나와. 혹시 아끼던 거라서 아까워!”
“화를 낸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잖아.”
“그러면서 날 가둔 거야?”
“가두지 않으면 앞뒤 안 가리고 날뛸 게 분명하니까. 더욱이 내 명령이라고 해도, 네가 듣지 않으면 그만이었어.”
그리드3도 알고 있었다.
네르가는 그녀의 권속이자, 수족처럼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패였다. 전투력 못지않게 뛰어난 심계를 지녀 확실한 결과를 만들어 낼 줄 알았다.
그런데도 실패했다.
죽은 로즈가 비웃을 일이었다.
“내 두 눈으로 확인해 봐야겠어!”
“나는 너를 잃고 싶지 않다.”
“대체 언제까지 참으라는 거야?”
“오래는 아니야.”
정령가를 한국에선 대가문으로 추켜세우지만, 동아시아의 작은 가문에 불과했다. 전력 대결을 벌인다면 그리드3의 먹잇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럴수록 정령가의 대응이 미심쩍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치고는 지나치게 여유롭다.
‘허허실실일지도 모른단 말이야.’
각계각층의 포섭한 고위직을 동원해서 정령가의 사정을 살폈지만, 의혹만 더 커졌다. 마치 우리가 행동하기를 바라는 듯한 흐름이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가문의 성세를 복원하기 위한 술책이라면?
놈들의 수작에 놀아난 격이 된다.
‘아무것도 아니라면 반드시 후회하게 해 주마!’
칼춤을 춰 줄 독 오른 암사자가 눈앞에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리드3의 무력만큼은 조직 내에서도 발군이었다.
***
“각오는 되었느냐?”
“전 언제나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어르신이야말로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실 텐데요.”
“그 입심은 여전하구나.”
“방심해서 졌다는 핑계가 두 번이 되면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거 아시죠?”
“네놈은 존장에 대한 예우를 밥 말아 먹었느냐! 이 썩을 놈, 오늘 호되게 당해 보거라!”
“꼭 할 말이 없으면 언성을 높이더라.”
가문의 은인이라서 내버려 두었더니, 머리 꼭대기까지 기어오르고 있었다. 예의를 가르치려면 세상의 쓴맛을 알려 줄 필요가 있었다.
되바라진 놈! 권왕의 가르침이 세간에 알려진 것보다 엄하지 않은 모양이다.
패배를 통해 인성을 배우길 바란다.
그렇다고 방심하진 않는다.
소민성은 처음부터 만전을 기했다. 뇌전의 정령, 운뢰를 소환하여 정령합신을 이루었다.
우우웅, 파앗!
피부가 찌릿할 정도로 가공할 기파가 발생했다.
소민성이 괜한 말을 하진 않았다. 번개의 신 인드라, 제석천의 강림을 보는 듯. 뇌전풍이 발생하며 소요를 일으킨다. 바람에 실린 번개가 닿기만 해도 강렬한 스파크를 발생했다.
치지지직!
접근을 불허하는 소민성의 뇌기였다. 뇌정령과 합일한 뇌정지기는 살아 있는 듯 주인의 뜻을 따랐다.
오오오!
수왕과 장로들은 시조의 정령합신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전에 봤을 때와 또 달라져 있었다. 정령과 완전히 동화하여 극의에 도달한 듯했다.
‘대정령목이 시조님을 각성시켰나 보군.’
수왕은 가문의 누구보다 시조님의 정령합신을 잘 알고 있었다. 가로막고 있던 벽을 넘으신 것이다. 최상급에 머물렀던 정령도 주인과 동화하여 단계를 뛰어넘었다. 능히 정령왕에 필적한다고 봐도 무방했다.
무진이 정령왕을 소환한다고 해도 시조님을 능가할 순 없다. 그런데 한층 업그레이드가 되셨다.
‘꼴 보기 싫긴 했지.’
무진이 없었다면 가문은 두 동강이 나는 것을 넘어 암중 세력의 도구로 전락할 뻔했다.
분가의 규모가 커지면서 세력이 강해지기는 했어도, 분가를 다스리는 수뇌부는 가문의 주인이 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암중 세력은 그러한 맹점을 알기에 분가와 결탁하여 본가를 친 것이다.
끔찍한 사태를 막아 준 무진은 명백한 가문의 은인이다.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 무엇을 주어도 아깝진 않았다.
다만, 하는 짓이 눈꼴신 건 사람인 이상 어쩔 수가 없다. 가문을 휘젓고 다니며 은인 대접을 노골적으로 바랐다.
‘은인인 거 모르는 것도 아니고.’
꼭 생색을 내야 시원하더냐!
가문의 기둥뿌리를 뽑을 만큼 막대한 보상금까지 챙겼다. 거절, 겸손, 겸양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임자 제대로 만난 줄 알거라.’
시조님도 쌓인 게 많았다. 대화할 때마다 열불이 터지셨다. 참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