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 빚을 받아 내다(2)
“원한다면 전부 내어 주마.”
“얼마나 있으세요?”
“백지수표에 경 단위로 쓸 녀석이구나.”
“그러니까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함부로 하시면 안 되죠.”
소민성은 선을 지키도록 무진을 심리적으로 유도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이만하면 보통은 미안해서라도, 선을 넘지 않을 텐데. 흐름을 유리하게 끌어가는 협상력과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안면 몰수가 생도답지 않게 발랑 까졌다.
“가문이 아니라 내가 가진 전부로 한정하면 어떻겠느냐?”
“자연인의 끝판왕인 엘프의 뭘 믿고요. 말이 자연인이지, 현실적으론 거지잖아요. 더욱이 가주한테 재산 다 증여한 거 모를 줄 알아요.”
자식한테 재산 몰아주고, 부양가족으로 올린 후 국민연금으로 꿀 빨고, 건보료 혜택까지 받으면서.
대체 얼마나 타 먹은 거야?
끄응!
벌써부터 상속, 증여를 알다니 예상대로 범상치 않았다. 그러니까 부자가 된 거냐? 어릴 때부터 가장 중요한 공부는 금융 지식과 사기당하지 않는 법이다. 학업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 돈 버는 능력은 다른 분야였다. 무진의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뵙고 싶어질 지경이었다.
“게다가 사부님보다 많이 약하면서.”
“뭐라! 정상적인 상태였으면 당하지도 않았다! 하물며 내가 전성기 때 권왕은 젖병 끼고 다녔어!”
“어차피 정령술사는 정령빨이잖아요.”
“네놈도 정령술사면서 정령술을 모독하는 것이냐! 진정한 정령술사는 정령과 몰아일체의 정인합일(精人合一)을 이루지 않고서는 도달하지 못할 무극무아의 경지다.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하지 말거라!”
동화율 100%의 정령합신이야말로 정령술사의 극의라 할 수 있다. 소민성의 변명이 아예 근거가 없지는 않았다. 정령을 소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다크엘프를 밀어붙인 걸 보면 나이를 똥구녕으로 많이 처먹지는 않았다.
“사람이든 엘프든 꼭 지고 나서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변명을 하자는 게 아니다! 정령왕을 소환했어도 본인을 갈고닦지 않으면 전력을 다할 수 없는 법이다. 정령술사의 극의를 알고 싶다면 네놈의 그 잘난 정령술로 도전해 보거라. 내가 지면 정령가를 통째로 내주지. 단, 패한다면 그간의 모든 은혜는 사라진다는 걸 명심해라.”
오늘따라 소민성의 혓바닥이 길었다.
이쯤에서 합의를 보거나, 이거라도 먹고 떨어지라는 의도였다. 설마 지금까지 받은 걸 걸고 도박하진 않겠지?
그럴 줄 알았는데.
“콜.”
“……용기는 가상하구나.”
어째 말린 것 같다.
호미로 갚을 거 가래로도 못 갚는 거 아냐. 가주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덜컥 약속을 잡자마자 위화감이 밀려왔다.
한데, 어쩌냐? 이제 와서 다시 생각해 보자고 내뺄 용기는 없었다.
그건 너무 모양 빠지잖아.
‘이기면 되겠지.’
정령왕을 소환한 무진을 무시하진 않았지만, 뇌 속성은 등급을 무시하는 최강의 정령이었다. 정령합신을 이룬다면 무진을 상대로 애를 먹는 것 자체가 망신이었다.
“계약서부터 작성하죠.”
“계약서를 들고 다녔어?”
“현대인의 필수품이잖아요.”
“넌 대체 어떤 인생을 살아온 것이냐?”
계약서가 어째서 현대인의 필수품이 되냐고, 소민성은 요즘 생도들은 그런 건가, 잠시 의아해했으나 유정이를 보면 또 그런 것도 아니고. 이놈이 이상한 게 분명했다. 꼼꼼한 걸 넘어서 집요한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계약서에 사인한 이상 구속력을 가진다. 이제는 빼도 박도 하지 못했다.
“자요.”
“오오, 세계수의 가지를 죽기 전에 다시 보게 되다니!”
“이제 죽어도 소원이 없지요.”
“……이놈이, 나는 무병장수할 거야!”
엘프나 인간이나 주둥이론 ‘늙으면 죽어야지.’ 노래를 부르지만 진짜로 죽기를 원하진 않는다.
음.
세계수의 가지에 담긴 순수한 자연력에 소민성은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예상을 상회하는 자연력을 품고 있었다.
특히 자연력에 의지가 일부 담겼다. 세계수 자체와 비교할 순 없어도, 그 차이는 완전히 다르다. 이는 세계수가 직접 본인의 의사로 가지를 내어 주었다는 의미가 된다.
‘세계수가 내어 줘?’
이해하기 힘든 일이긴 했다. 세계수가 직접 내어 주는 경우는 흔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진이 직접 받았다고 볼 순 없다. 누군가가 받은 걸 던전 공략으로 얻었을 수도 있으니까. 세계수의 가치는 정령술사, 그 안에서 합신을 이룰 수 있는 고위급은 되어야 알 수 있었다.
더욱이 이 가지는 일반적인 세계수와 격이 다르다. 차원이 다르니 일일이 비교하기는 힘들어도, 자신이 알고 있는 세계수보다 월등했다. 가지에 불과한데도, 세계수로 느껴지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접붙이기할 줄 아세요?”
“나를 뭘로 보고 그딴 망발을 지껄이는 것이냐?”
“그냥 붙이기만 하는 건 접붙이기가 아닌데요.”
“엘프를 얕보지 말거라.”
“마법집속진은 그릴 줄 아세요? 특제 성장촉진제는 있고요? 성장의 근원인 물의 정령왕은 소환할 줄 아시고요? 쪼개서 끼운 후 테이프로 묶으실 생각은 아니시죠? 설마, 엘프가 그럴 리가.”
“……?”
접붙이기가 언제부터 이렇게 어려운 분야가 된 거냐?
저런 게 다 있어야 한다고?
과학적인 접근을 넘어 마법과 정령술까지 이용했다. 이쯤 되니 엘프의 우월성으로 접근해 봤자 명함도 못 내밀 판이다. 그렇다고 자존심을 부리기엔 대정령목의 생사가 걸려 있었다.
“부탁하마.”
“이번은 전부 제 선의입니다.”
고양이 쥐 생각 해 주냐!
“……고마워서 눈물이 다 앞을 가리는구나!”
“알고 계시니 다행이네요.”
어째 한 번을 져 주지 않는다. 나이 든 엘프를 이리 모질게 대하다니, 천인공노할 녀석이었다.
작업은 어렵지 않았다.
무진으로선 이미 해 본 작업이었다. 세계수의 씨앗을 심기 위해서 자연지기를 끌어오는 집속진을 연구 개량했었다. 굳이 직접 그리지는 않는다. 인챈트한 마법진을 대정령목 주변에 각인하면 그만이었다.
스걱!
손날로 대정령목의 윗둥을 쳐 냈다. 타 죽어서 생명력이 소실된 부분이었다. 그루터기를 만든 후 세계수의 가지를 박았다. 장훈 형 특제 고속 성장촉진제를 주사기에 담아 찔러 넣었다.
“워처스, 물 뿌려라.”
-내가 물뿌리개냐!
투덜거리긴 해도 시키는 대로 하는 워처스였다.
모든 작업을 마치자 실로 놀라운 광경이 실시간으로 펼쳐졌다. 마치 인간이 사라진 지구를 100배속으로 돌리는 영상처럼. 줄기가 자라고, 잎사귀가 핀다. 어느새 세계수의 가지와 대정령목이 하나가 되어 융화를 이룬다.
우우우우웅!
집속진, 성장촉진제, 물의 정령의 융합으로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대정령목이 원래의 모습을 찾아갔다.
다만, 세계수의 의지가 대정령목과 융합하면서 새로운 형태가 되었다. 이전의 대정령목보다 신성스러운 자연력을 발산했다. 대정령목이 레벨업되면서 세계수에 근접했다고 볼 수 있었다.
소민성, 나프티엔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어머니!”
늙어서 주책은.
무진은 볼썽사나운 신파에 신속히 돌아섰다. 유정은 깊은 한숨을 쉬며 멀뚱히 서 있어야 했다.
‘이 새끼는 진짜 공감 능력이 제로네.’
그보다는 귀찮아서 빠진 것 같긴 했다.
***
정령소가의 본가와 분가의 분쟁은 언론을 탔다. 감추기에는 사상자가 너무 많이 나왔다. 명분을 위해서라도 정황을 명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각성의 시대가 되면서 정당방위의 범위가 넓어지긴 했어도, 사실 확인은 필수 불가결이다.
정령가의 분가 8개 중 6개가 가담했고, 사상자만 해도 200명이나 되었다. 정밀 분석하면 사망자 20명, 나머지는 중상자였다. 뜻하지 않은 대형 사고였기에 정부에서도 요원이 파견되어 정황을 면밀히 살폈다.
밝혀진 내막은 이렇다.
암중 세력이 분가와 결탁하여 본가를 친 일종의 역모로, 정령소가의 중대사인 정령의식을 행하는 밤중에 일어난 반란이었다.
그나마 본가의 대응이 시기적절했는지 무고한 희생은 발생하지 않았다. 반란의 증거는 CCTV를 통해 명확하게 드러났다.
본가의 대응이 과하다고 보진 않았다. 자세한 내막은 조사를 더 해야 하나, 일전 교류전에서 테러를 일으킨 암중 세력이 관여한 정황이 있었다.
-어쩐지 조용하다 했어, 내 이럴 줄 알았지. 우리나라는 조금만 우위에 있으면 부하처럼 부려 먹지 못해서 안달이거든. 분가를 차별하니까 이 사달이 나는 거잖아.
-차별 좀 당했다고 밤중에 식구들 등에 칼을 꽂냐! 대체 어떤 뇌 구조로 되어 있어야 살인을 당연하게 여기는 거야!
-차별을 가볍게 여기는 것도 문제지만, 같은 식구들인데 대화부터 했어야지.
-대화충답네, 언제부터 말이 통했다고. 말로 해서 들어 처먹었으면 진작 해결됐지. 당장 너부터가 말로 안 되잖아!
-얼마나 죽었다고 이 난리야.
-20명이 죽고, 180명이 중상인데 난리가 안 나는 게 이상하지. 각성의 시대 이전엔 한두 명만 죽어도 난리였잖아.
-다들 논점을 빗나가고 있다고. 가문 내 반란 정도로 보는 거면 아직 사태 파악이 안 되는 거잖아. 이건 분가의 반란이 아니라 암중 세력이 칠대가문을 오래전부터 노리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이제야 제대로 된 말이 나오는구나. 분가가 하루아침에 돌변했을 리도 없을 테고, 암중 세력과 오랫동안 사전에 치밀하게 결탁한 게 분명해.
-혹여 분가가 반란에 성공했다면 암중 세력은 칠대가문의 대회의에서 어떤 식으로든 분탕질하거나, 이득을 챙길 수도 있었겠지.
-정령가와 결탁한 세력이 교류전에서 테러를 자행했던 세력과 같다는 소문도 있던데.
-그만한 세력이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졌을 리는 없고, 충분히 타당성이 있다고 본다.
여론은 불같이 끓어오르다 빨리 식기는 해도 어리석진 않았다. 암중 세력이 정령가를 장악하기 위해서 분가를 충동질했다고 보았다. 더욱이 국내에 대형 악재를 불러왔던 흑막이 이번에도 가담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의혹이 쌓이는 중 정부의 대처도 잘못되었다. 음모론과 유언비어를 단속하겠다고 나서면서 여론의 의심을 부추기는 꼴이 되었다. 후폭풍이 거세지자 정부는 뒤늦게 그럴 의도가 없었다고 호소하지만, 씨알도 안 먹혔다.
의혹으로 설왕설래가 벌어지는 가운데, 정령가를 제집처럼 드나들던 무진의 행보가 눈에 띄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마침 정령의식을 행하는 날에도 정령가를 찾았다.
-이놈은 또 여기 왜 끼는 거야?
-몰랐냐, 지수 보는 앞에서 대놓고 바람을 피운 거잖아. 나 때는 몰래몰래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했는데. 참, 시대가 좋아졌지.
-이 미친놈이 뭐라는 거야? 바람에 왜 시대를 따져!
-시대를 따지는 게 당연하지! 중세나 왕권 시대에 첩을 두지 않는 왕이나 양반이 있기나 했냐! 나도 그때 태어났어야 했는데.
-그럴 거면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까지 가지 그러냐!
-애들끼리 붙어 다닌다고 바람이면, 요즘 세상에 바람이 아닌 경우가 어디 있어. 압구정이나 홍대 클럽은 바람의 왕국이냐?
-이 정도면 가는 날이 장날이 아니라 무진 가는 날이 장날 아니냐.
-거봐, 아주 치명적인 녀석이라니까. 나쁜 남자가 대세긴 해. 착하면 일단 못생겼다고 봐야지.
-듣기로는 권왕이 깽판을 쳤다고 하던데. 이거 뭐 있나?
-보면 모르냐, 무진이 해결한 거잖아.
-그렇게 따지면 흑막은 무진이겠지.
무진이 반란에 끼어 이상할 순 있으나, 올해 초부터 드나들었으니 공교롭진 않았다.
가는 날에 반란이 일어났을 뿐.
한편으로 재수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는 모호했다. 운이 없다고 하기엔 잘 해결했고, 운이 있다고 하기엔 죽을 수도 있었다.
다 잘 끝났으니 된 거 아니냐고 하기엔 생도보고 목숨 걸라는 소리가 된다. 자기 자식이면 그딴 말 못 하지만, 무진은 전적으로 남의 자식이었다.
이러면 무진을 위로하는 여론이 형성될 텐데, 입이 방정이었다. 그새를 못 참고, 자신이 있어서 정령가가 무사했다고 인터뷰했다. 근거나 증거도 없이 활약상을 과장하는 바람에 안 먹어도 될 쌍욕을 먹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