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 빚을 받아 내다(1)
정신을 차린 시조, 수왕, 장로들은 헐레벌떡 정령원에서 나왔었다. 대정령목이 불타 죽기 직전인데, 가솔들까지 당했다면 심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본가 곳곳에 충돌의 여파가 남아 있었다. 건물이 반파되고, 정원은 부서졌고, 통로도 엉망진창이었다. 강도 높은 지진이 휩쓸고 지나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의외로 본가의 식솔들은 별다른 피해를 보지 않았다. 본가의 정령사들이 잘 대처했다고 볼 순 없다.
얼빵한 표정들을 하고 있었다. 뒤늦게 숟가락을 얹은 모양새였다.
분가의 권솔 대부분은 항복했다.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대치 구도였다. 기습의 우위를 살린 데다, 수적으로 우위에 있었다. 본가를 습격한 이상, 순순히 항복할 이윤 없었다. 하지만 습격을 주도했던 핵심 분가원과 암중인들의 처참한 상태를 보니 이해가 되었다.
죽거나, 만신창이로 숨만 겨우 쉬고 있었다. 차라리 죽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을 만큼 심각했다. 그만큼 손 속에 사정을 두지 않고 살수를 펼친 것이다. 운 좋으면 살고, 운 나쁘면 뒈져도 상관없는 잔혹한 손 속이었다.
그러니 전세가 기울기가 무섭게 분가원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백기 투항했다. 핵심 분가원과 협력한 암중인이 사라진 이상, 감히 본가에 대적할 엄두가 나지 않았었다.
물론, 순순히 항복한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분가의 반란을 분쇄한 존재. 본인 딴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신 로봇 슈트를 입고 있지만, 정체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는 분가가 반란을 일으키자 거침없이 권공을 뿌리며 무력을 과시했었다.
내지르는 일격에 일살이 아닌 일망타진이었다. 스쳐도 사망, 빗맞아도 사망, 재수 없으면 불구였다. 특히 툭! 치는데도 사람이 수수깡처럼 부러지는 광경은 섬뜩했다.
아주 그냥 물 만난 물고기처럼 분가를 상대로 날뛰었다. 망설임은커녕 파괴력의 범위를 조절하지도 않는다. 닥치는 대로 권기, 권강, 권환을 발출했다.
사태를 정리한 후, 그는 허공으로 솟구친 후 번개처럼 사라졌다고 한다.
“뭔 킹?”
“권왕님이라고 불렀더니, 피스트킹이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제가 보기엔 전혀 숨길 생각이 없는 듯했습니다.”
“그 인간이라면 능히 그럴 만도 하지.”
“그러나 권왕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도움을 받았으니 탓할 수도 없고.”
정황을 들어 보면 권왕은 분가와 암중인을 압도했다. 말 그대로 가지고 놀았다. 한데도 자기 집 아니라고, 남의 집을 철거 대상지로 만들었다.
그러니 한숨이 나올 수밖에.
시조와 수왕은 자칭 피스트킹을 탓하지 못했다. 부서진 집이야 다시 지으면 그만이나, 죽은 사람은 되돌릴 수 없었다. 가문으로선 갚지 못할 커다란 은혜를 입었다.
더욱이 가문을 구하고, 일언반구도 없이 떠났다. 설명하기에 따라서 보상을 바라지 않는 대협의 풍모였다.
‘정체를 몰랐다면 그렇겠지.’
시조는 골이 지끈거렸다.
누가 봐도 권왕인데, 얼굴을 숨겼다고 될 일인가? 이름부터가 피스트킹이었다. 자기를 대놓고 드러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정체를 몰라서 보상하지 못했다는 변명이 통할 리 만무했다. 그렇다고 권왕가를 찾아가 따진들 본전도 못 뽑을 게 분명하다.
‘지지하라 이건가.’
권왕의 노골적인 의도가 읽혔다. 너무 뻔해서 모를 수가 없다. 차마 거절하지 못할 제안이었다. 그랬다간 권왕에게 금수만도 못한 취급을 받을 수 있었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못난 꼴을 보였군.”
“병가지상사라고 했습니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듯 본가는 더욱 강해질 겁니다.”
“가주를 믿지. 나는 정령원으로 가 보겠다.”
“맡겨 주십시오.”
시조는 본가의 정리를 가주와 장로들에게 일임했다. 어차피 일선에서 물러선 상태였다. 자신이 나선들, 가주보다 잘 처리하진 못한다.
하나, 본가와 분가의 관계만큼은 확실하게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암중인이 가담하기는 했지만, 원인 제공을 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시조는 정령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현재 대정령목의 상태가 심각했다. 가문의 모든 수단,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치료해야 한다.
유정은 대정령목을 돌보고 있었다.
자연지기가 줄어드는 게 눈에 띄게 보였다. 소실되는 기운만큼이나 대정령목은 시들어 가고 있었다.
뾰족한 수단이 보이지 않는다. 정령력을 나누어 주어 봤자 그때뿐이지, 언 발에 오줌 누기였다.
유정은 돌아봤다.
언제 가지고 왔는지 모르지만, 무진은 편안한 의자에 앉아 있었다. 태평한 행태가 맘에 들진 않지만, 무진이라면 해결책이 있으리란 기대를 품었다.
“무진아, 어떡하지?”
“시조님이 알아서 하시지 않겠어. 명색이 엘프신데 방법이 없진 않을 거야.”
“시조님이라고 딱히 방도가 있을 것 같진 않은데.”
“그럼 별수 없나, 마음의 준비라도 해야지.”
“남의 일이라고 참 쉽게 말하네. 도와줄 거 아니면 걱정하는 척이라도 하라고!”
“지금도 많이 도와준 거 아닌가?”
유정은 발을 꼬고 앉아 생색을 내는 무진이 얄미웠지만, 탓하진 못했다. 무진의 말대로 갚기 힘든 도움을 받았다. 여기서 더 도와 달라는 건 염치가 없는 행동이었다.
본가를 수습하기 위해서 정령원을 나갔던 시조께서 돌아오셨다. 유정은 시간이 더 걸릴 줄 알았다. 자신도 힘을 보태겠다고 했지만, 방해될 수 있어서 남았었다.
“밖은 정리가 된 건가요?”
“이 녀석한테 물어보거라.”
“무진이가 왜요?”
“아주 발칙한 짓을 했더구나.”
따지고 보면 본가의 정리가 먼저 끝이 났다. 그런데도 무진은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사부와 제자가 짜고, 똥개 훈련을 시킨 것이다. 하는 짓이 무척이나 괘씸하지만, 은혜가 너무 컸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저는 도통 모르겠습니다.”
“계속 발뺌한다면 지지도, 후원도 없다.”
“저는 정령가가 은원이 확실한 가문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약속이란 언제든 깨지기 마련이지요.”
“이놈이, 나를 신의도 없는 사람으로 만들 셈이더냐!”
“엘프시잖아요.”
순간 말문이 막힌 소민성은 허탈한 듯 웃었다. 이 녀석과 말다툼한다고 불타 버린 대정령목이 원래대로 돌아오진 않는다.
하아아아!
검게 그을린 대정령목을 보니 한숨부터 나왔다. 너무 오래 산 모양이다. 자연으로 돌아갔다면 오늘 같은 더러운 꼴을 보지 않았을 텐데.
“내가 부족한 탓이구나.”
“맞아요. 다 시조님 탓입니다. 원하신다면 자연으로 돌려보내 드릴 수도 있습니다. 제가 그런 쪽으론 전문갑니다.”
“이놈이!! 위로는 못 할망정 죽으라고 아예 대못을 박는구나.”
“서푼의 위로가 도움이 되겠어요. 그럴 시간에 방도를 찾는 편이 낫지요.”
“방도가 있었으면 당장이라도 썼지.”
지금으로선 대정령목이 생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버텨 주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확실하지 않은 해결책을 어설프게 썼다가는 도리어 대정령목을 죽이는 짓이 된다. 생과 사는 오롯이 대정령목에 달려 있었다.
“방도가 있다면요?”
“대정령목에 비견되는 정령목이 있다면 가능하겠지, 몰라서 이러는 게 아니니까 함부로 말하지 말거라.”
“있다면요.”
“내가 키워서가 아니라, 대정령목은 특별해. 일반적인 정령목은 접붙이기가 통하지 않아.”
무진은 아공간에서 나뭇가지 하나를 꺼냈다. 나뭇잎이 달린 평범해 보이는 나뭇가지였다.
“그딴 건 통하지 않는다고 내가 누누이 말하…… 그거 뭐냐?”
“알 텐데요.”
무진은 소민성의 코앞에서 나뭇가지를 흔들어 주었다. 냄새라도 맡아 보라고.
피톤치드 향이 나겠지.
엘프는 피톤치드에 목숨 거는 종족일 테니.
킁킁, 크으으응홍!
소민성은 체면도 잊고 코를 벌렁벌렁했다. 그러다 화들짝 놀라서 무진을 황망한 듯 쳐다보았다.
“……말도 안 돼!”
“노안이 오셨나 보군요.”
소민성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엘프인 이상 저 나뭇가지가 무엇인지 모를 수가 없다. 보고만 있어도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했다. 이 세상으로 떨어진 이상 평생 마주하지 못할 줄 알았다. 고향에 대한 향수가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왔다.
“세계수를 어떻게?”
세계수 자체는 아닐지라도, 그 일부인 가지였다. 다시 만져 보기를 얼마나 소원했던가.
획!
간절했던 소민성의 손은 허공을 갈랐다.
손은 눈보다 빠르다.
무진은 세계수 가지를 아공간에 넣고 닫아 버렸다. 소민성의 동공에 습기가 그렁그렁해졌다.
엘프다운 감수성이군.
“안 된다고요?”
“……누가 안 된다고 했느냐, 찾아보면 분명히 방도가 있을 거다. 하하하하.”
완곡하게 부정했던 처지로선 궁박한 웃음이었다. 시조로서의 위엄과 무게는 사라진 지 오래다.
보통은 어른의 체면이라도 차려줄 텐데, 무진은 그런 쪽으론 문외한이었다. 되레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재주를 타고났다.
“세계수예요? 대정령목이에요?”
“……그건.”
“하, 고민을 하네요.”
……이 천인공노할 놈이!
엘프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 그런데도 반박하지 못했다. 설령 강제력을 쓴다고 해도, 만만치 않은 호적수였다.
무진이 소환한 정령은 자신의 최상급 정령조차도 함부로 하기 힘든 정령력을…… 응?
그제야 이상한 부조리함을 깨닫는다. 마화는 어지간한 정령으로 끄지 못한다. 그런데 단번에 마화를 소화하며 원념마저 증발시켜 버렸다.
그런 일이 가능하려면?
“물의 정령왕이었구나!”
“유정이보다 느려요.”
딱히 감이 느리다 아니다 할 만큼 여유롭지 않았다. 안과 밖으로 내우외환과 심적인 충격이 큰 데다가, 대정령목의 목숨이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정신없는 와중, 무진이 정령왕을 소환할 대정령술사일 줄 누가 알았으랴. 선입견일 수도 있겠지만, 당연했다. 그나마 유정은 같이 훈련하면서 무진의 본질을 봤기에 정령왕임을 짐작한 것이다.
“……인생을 헛살았구나.”
완전히 농락당하고 있는데도, 뭐라 할 말이 없다. 전부 맞는 말만 하고 있었다. 명백한 팩트로 두들겨 맞으니 허탈감이 밀려왔다. 수백 년을 살아 봤자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자, 이제 어떻게 하실래요?”
“권왕가를 전폭적으로 지지하마.”
“지지는 사부님에게 하시고요. 저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역시 안 되는군.”
“되겠어요?”
소민성도 무진을 적당히 구슬릴 수 있는 만만한 상대로 보지 않았다. 능구렁이 천 마리는 품고 있는 녀석이었다. 자신의 머리 꼭대기에서 놀고 있는 것만 봐도 가볍게 볼 수 없었다.
그나저나 권왕은 이런 녀석을 어떻게 키운 거지?
권왕은 생긴 그대로 단순 무식의 근본 아이콘이었다. 도저히 무진과 같은 영악한 녀석이 나올 수 없는 데다, 이제는 마권사에 이어 최강의 대정령술사였다. 정령술의 깊이는 자신이 더 높다고 해도, 정령왕을 소환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깡패였다.
기교가 제아무리 뛰어나도 기량 차이가 크면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는 법이다. 힘만 세다가 다냐고 하는데, 그게 다일 수도 있었다.
좀 더 세분화하면 야구에서 속구가 중요한 이유였다. 변화구가 암만 뛰어나도 속도가 꽝이면 안 통한다. 과거 일본의 160에 농락당하던 한국 야구를 보면 답이 나온다. 140만 넘어도 빠르다고 자화자찬한 덕이었다.
더더군다나 정령왕은 정령을 통제하는 권능을 지녔다. 속성마다 통제력이 다르긴 해도, 같은 정령왕이 아닌 이상 너프 당한 채로 싸워야 한다.
“원하는 걸 말해 보거라.”
“세계수의 가지를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나 될까요?”
“정령가를 원하느냐?”
“꼭 그런 건 아닙니다.”
“원한다면 유정이를 주마.”
“됐습니다.”
유정은 울컥했다.
졸지에 현물 거래로 쓰인 것도 억울한데, 일언반구에 까였다. 사귀자고 말도 못 해 보고, 위자료 청구 소송이 마려울 지경이다. 이 정도면 정신적 손해배상을 고려해 족히 5천만 원은 받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