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 빚을 지우다(4)
퍼어엉!
정령력을 수심(手心)에 모아 중첩하여 발출하는, 일종의 장풍이었다. 위력은 보다시피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직격당한 네르가의 신형이 수목 사이로 쏘아져 나갔다.
“이제 끝내…… 어?”
정령소가 특제 정령장(精靈掌)에 적중당한 네르가가 갑자기 허공을 박차며 정령원의 중심으로 향했다.
도망치려는 최후의 발악이었다면, 추적하여 막아서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정령원의 중심에는 대정령목이 있었다.
네르가의 의도에 시조, 수왕, 장로들은 다급해졌다. 만약을 대비해 도주로를 막아섰거늘, 애초에 도망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목숨에 연연하는 인간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엘프의 특성을 망각했다.
착!
대정령목에 선 네르가가 돌아서며 외쳤다.
“멈춰라, 더 이상 다가온다면 대정령목은 한 줌의 잿더미가 될 것이다.”
네르가의 손엔 마화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마령에 생명력을 더한 대마령 소멸 주문이 발동되었다. 본인의 생명력을 담보로 한 수법이었다.
멈칫!
시조, 수왕, 장로들로선 낭패한 기색이 완연했다. 마령에서 해방되어 운신이 자유로워지면서 승기를 잡았다. 그것이 오히려 상대를 과소평가한 원인이 되었다.
사로잡아서 사주한 자나 세력을 밝히려고 했건만, 오만이었다. 네르가는 호락호락하게 사로잡힐 위인이 아니었다.
‘이런, 젠장!’
인간이라면 나무를 인질로 잡는다고 선택을 바꾸진 않는다. 그러나 대정령목은 세계수가 없는 이계에 정착해서 살아가게 해 준 가문의 상징이자 근원이었다.
네르가의 협박을 무시할 수 없는 연유였다.
시조는 자조하는 대신 네르가의 목적을 물었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수왕을 죽여라.”
“그런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들어줄 성싶으냐?”
“해야 할걸, 대정령목이 잿더미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닥쳐랏, 되지도 않는 선택을 들어줄 것 같으냐!”
“내가 죽더라도 대마령 소멸 주문은 해소되지 않는다. 어디 그만한 각오가 되었다면 나를 죽여 보거라.”
결사 항전을 직감한 시조는 난감해졌다.
내 손으로 후손을 죽이라니, 그딴 짓을 할 리 없지 않은가. 놈의 요구는 가당치도 않았다.
‘네놈이라고 별수 있을 것 같으냐.’
네르가로선 계획의 실패에 대한 책임이 있었다. 주인은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다. 죽어서도 지옥을 봐야 한다면, 죽더라도 정령가에 심대한 타격을 주어야 한다.
정령을 다루는 일은 심적인 영역이다. 정신적인 충격이 남을수록 심마가 찾아올 테고, 마령은 그 틈을 놓치지 않는다.
네르가는 정령왕을 소환한 수왕을 시조보다 우선으로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보았다.
“대정령목보다 가족이 중요하겠지. 이제는 엘프가 아니라 사람이 다 됐구나.”
네르가의 조롱에 시조는 분노를 숨기지 못했다. 엘프라면 선택은 정해져 있었다. 설령 미련하고 잔인한 일이더라도. 그것이 엘프의 삶이었다. 절대 천륜에 얽매여 근원을 잊진 않는다.
비록 대정령목이 세계수는 아니더라도, 시조에겐 외딴 세계에 떨어져 의지했던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정령가를 세우고, 현재의 자신을 만들어 준 어머니와 같았다.
푸슥.
낙엽이 부서지는 불협화음에 네르가가 고개를 틀었다. 고양이처럼 은밀히 접근하는 존재가 있었다.
“멈춰라!”
“시간만 끌어도 밖에 있는 가솔들은 죽어 나가겠지.”
무진은 멈추지 않고 일보 일보를 밟았다. 그러면서 네르가의 꿍꿍이를 파헤쳤다.
“애초에 살아 나갈 생각도 없잖아.”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잘도 하는구나. 어서 이 미친놈을 제지하지 않고 뭘 하는 것이냐!”
“가솔들이 죽고, 대정령목이 잿가루가 된다면 심적인 타격이 상당할 거야. 공교롭게도 마령은 심마를 먹으며 살아간다고 했지, 아마.”
“더 이상 다가온다면 대정령목을 남김없이 불태우겠다.”
네르가는 마화를 피우며 무진의 접근을 불허했다. 당황하기는 했어도 금세 신색을 회복한 듯 보였다. 반대로 정곡을 찔린 속내는 다급했다.
‘이놈은 대체?’
마치 자신의 속을 들여다보고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단숨에 의도를 꿰뚫어 보았다. 일개 생도의 통찰력이 아니었다. 장난처럼 실실 쪼개면서도 핵심을 관철하는 날카로운 섬뜩함이 있었다.
더욱이 머리만 뛰어난 녀석도 아니다. 어떤 스킬이나 속성인지 알 수 없지만, 분가를 혼자서 처리해 버렸다. 그 실력이 진짜라면 생도라고 얕볼 수 없었다. 다가오는 녀석을 섣불리 처리하지 못하는 이유였다.
“우물쭈물하다간 어느 것도 못 지킬 텐데. 이렇게 답이 명확한데도 고민하는 것 보면 시조께선 엘프치곤 참으로 인간적이시네요.”
무진은 시조, 수왕, 장로들의 망설임을 없애 주었다. 그들도 느끼고 있었다. 고민한다고 답이 나오진 않는다. 더욱이 무진의 말대로 된다면 그 후폭풍을 감당하지 못한다.
저벅!
결심을 굳힌 시조, 수왕, 장로들이 네르가를 향해 움직였다. 후손을 죽이라는 요구도 시조의 망설임을 유도한 것이었다. 둘 다 지키지 못할 바에는 하나라도 지켜야 했다.
부르르르!
네르가로선 최악의 상황이었다.
“……농담이 아니다, 정녕! 대정령목이 잿가루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더냐!”
“맘대로 해라!”
더는 협박이 통하지 않았다. 시간을 질질 끌어서 심적인 타격을 주려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이 모든 실패의 원흉이 무진이었다.
“네놈 때문이다!”
네르가의 분노는 오롯이 무진을 향했다.
무진은 멈춰 서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입가에 맺힌 웃음은 명백한 조소였다. 올 수 있으면 얼마든지 와 보라고, 까딱거리는 손가락은 덤이었다.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주지는 못할망정, 귀싸대기를 후려 버렸다.
“억울하면 일대일로 붙든가. 혹여라도 이긴다면 무사히 보내 줄게.”
무진은 면피성 발언을 일단 했다.
어차피 네르가가 일기투에 응해 주리란 기대는 애초에 하지 않았다. 자폭하려는 놈이 대결을 받아들이는 것도 수상쩍고. 대정령목을 지키려고 노력은 했다는, 증인이 필요할 뿐이다.
“쫄리는 모양이야, 하긴 날 상대로 이길 순 없겠지. 그런 주제에 암중 흑막의 실세처럼 행동하다니 유치하지 않나?”
무진은 돈 주고도 안 사는 전매특허 도발 연속기를 시전했다. 지금 당장 덤빌 수도 없거니와 시조, 수왕, 장로들이 먼저였다. 네르가는 시선을 고정하며 강렬한 분노를 표할 뿐, 실제론 꼼짝도 못 했다.
“쫄보, 다크엘프구나! 줄여서 쫄다. 더 줄이면 쪼단가?”
무진은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구식 개그를 남발하여 들을수록 거북하게 만들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좋다, 일대일로 붙자! 이 개자식아!”
이걸 받아?
의외의 상황이었다. 자폭을 준비했던 네르가가 무진의 일기투를 받아들였다. 심정은 납득이 간다. 자기 나이 반 토막은커녕, 티끌도 되지 않는 무진이 약을 계속 올리니, 피가 거꾸로 솟을 수밖에.
예상을 벗어난 일에도 무진은 당황하기는커녕 흔쾌히 받아 주었다.
“호오, 사내로서 기상은 갖추었구나. 시조님, 잠깐 멈추세요.”
“네가 그러길 바란다면.”
의외로 시조는 순순히 받아들였다.
네르가는 회심의 미소를 속으로 삭이다, 당황하는 기색을 비쳤다.
쐐액!
슈아아앙!
시조와 수왕이 별안간 속도를 올리더니 정령력을 응축한 권강을 발출했다. 정확히 대정령목과 네르가의 중간 지점을 노렸다. 회피한다면 무사할 수 있겠지만, 피하지 않는다면 심대한 타격을 각오해야 했다.
꽈아아앙!
화르르르!
거친 굉음이 정령원을 뒤흔들 때, 음산한 어둠을 머금은 화염이 분출되었다.
“……비겁한 놈~~~!”
“그걸 믿냐.”
무진과 네르가는 서로를 믿지 않았다. 약속하는 찰나 전음으론 공격하라고 했다. 거리를 좁혔으니 약간의 타이밍만 있으면 되었다.
네르가도 일기투를 벌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처음부터 시간을 끌어서 확실하게 대정령목을 태워 버릴 속셈이었다.
“……대정령목이 잿더미가 되는 건 모두 네놈의 탓이다!”
“응, 아냐.”
네르가의 육신이 불의 화신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권강에 적중하여 대정령목과 거리가 벌어지긴 했어도, 마화의 범위에 있었다. 불길이 치솟으며 대정령목을 뒤덮어 버린다.
“물의 정령을 소환해서 불을 꺼라!”
안타깝게도 정령원에 소화기가 배치되어 있지 않았다. 정령을 맹신하여 소방시설을 갖추지 않은 것이다. 허가를 내준 소방공무원으로선 징계감이다.
화르르르르!
역소환된 정령을 재소환하기는 어려웠다. 당장은 등급을 낮춰서 하급 정령을 소환했다. 하지만 저 불의 근원은 마화, 물을 붓는다고 해서 꺼지진 않았다.
화르르르르!
불길에 녹아 버린 네르가의 원념이 마화와 융합하여 대정령목을 태운다. 생목은 완전히 붙기 전에는 잘 타지 않는데. 마화는 백화처럼 닿기만 해도 주변을 태워 버린다.
“빌어먹을, 꺼지지가 않잖아!”
“대정령목에 놈의 원념이 달라붙은 듯합니다.”
자신을 불태운 네르가의 원념이 대정령목의 완전연소를 바라고 있었다. 대마령 소멸진과 융화한 마화는 대정령목이 잿더미가 되지 않는 이상 끌 수 없는 듯했다.
“내 실수로구나!”
“아직 기회는 있습니다!”
물의 정령은 마화에 닿기가 무섭게 끓어오르며 수증기를 발생시킬 뿐, 화염은 줄어들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대정령목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시조로선 괴로웠다.
그러자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합류한 유정이 무진에게 잔소리를 시전했다.
“야, 지금 뭐 하는 거야?”
“불구경.”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남의 집 불구경이야? 엥! 그건 맞지만, 아까 그분 다시 불러!”
무진은 유정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사실 다시 소환할 필요도 없다. 워처스는 마령을 제거한 후, 기척을 죽인 채 지켜보고 있었었다.
“끌 수 있지?”
-하! 나, 물의 정령왕이야. 저딴 불 쪼가리쯤은 입김만 불어도 끌 수 있지!
“과연 대소화기 전용답다.”
-대소화기 전용이 뭔데? 흠! 있어 보이긴 하는군.
정령왕이나 정령이나 문화 수준은 딱히 대단치 않았다. 조금만 띄워 주면 우쭐해하는 모습이 어린아이와 다르지 않았다.
순진하다고 해야 할지, 멍청하다고 해야 할지.
솨아아아아!
워처스의 아쿠아 샤워가 발동하자 대소화기 전용답게 스프링클러처럼 대정령목에 달라붙은 화염을 씻어 내린다.
츠으으으으!
네르가의 원념이 담긴 마화가 끝까지 항전하지만, 정령왕의 샤워에는 권능이 담겨 있었다. 원념마저 깡그리 전소시키며 불길을 단숨에 잡았다.
하아아!
안도의 한숨도 잠시,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짧은 시간 대정령목은 절반 이상이 잿더미가 된 데다가 남은 부분도 성치 않았다. 원념이 깃든 마화라서 그런지, 대정령목의 정령력에도 타격을 입혔다. 이대로라면 대정령목은 회복이 되기는커녕 시들어서 죽어 버릴 것이다.
아~~~!
시조, 수왕, 장로들은 원래의 상태를 잃어버린 대정령목을 두고 망연자실했다. 이런 식으로 허무하게 가문의 근원을 눈앞에서 잃게 될 줄은 몰랐다. 차라리 막지 못할 일이었다면 자책하진 않았다. 막을 수 있는데도 방심으로 인해 피해를 봤으니 자괴감이 들 만도 했다.
넋 놓고 있는 정령가를 위해서 무진이 나섰다.
“하나부터 열까지 외부인인 내가 다 했구나. 이러면서 간섭하지 말라고 한 건 도대체 무슨 자신감이야?”
“……!”
자기 자랑 같지만, 돌려 말하면 정령가의 무능을 대놓고 지적한 것이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하지도 못하면서 외부인 취급을 했으니 낯짝이 두껍지 않은 이상, 말문이 막힐 수밖에.
“와, 아무리 그래도 그런 말을 어떻게 제 입으로 하냐? 나도 나지만, 넌 진짜 상종 못 할 개새끼가 분명해!”
“따님을 아주 잘 키우셨습니다.”
……!
멕이는 재주가 천의무봉에 이르렀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말이 이렇게나 잘 어울릴 수 있을까.
“밖은 괜찮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