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 빚을 지우다(3)
“오늘 일 말할 거야?”
“절대 발설하지 않을게, 다른 건 몰라도 우리가 입은 꽤 무거워!”
“너희들 부모님은 아닌 듯한데.”
“우리가 말한 게 아니라고!”
“괜찮아, 말하고 싶으면 말해.”
“……진짜로?”
“그래. 내가 다 죽였다고 해. 난 그런 일로 강요하는 사람이 아냐.”
하긴.
이놈은 자신의 공적을 떠벌리지 못해서 안달인 녀석이다. 굳이 비밀로 할 필요가 없다니 안도했다. 행여나 소문이 나면 어찌할까, 고민했거늘. 물어보는 족족, 매스컴에 널리 알려 주기로 마음먹었다.
응?
알려지면 좋을 리 없다. 죽어 마땅한 자라도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사회적으로 문제가 될 테고, 명분이 있더라도 굉장히 귀찮을 것이다.
그런데도 조심성이 없다.
상식적이지 않았다.
아!!
소씨, 강씨 형제는 그제야 무진이 입단속을 하지 않은 연유를 깨달았다. 매스컴에 알리는 즉시 자신들은 대한민국 공식 구라쟁이로 낙인이 찍힐 것이다. 혼자서 분가를 초토화시켰다는 말을 누가 믿을까? 믿지도 않을뿐더러, 스스로 정령가의 위신을 깎아 먹는 짓이 된다.
소씨, 강씨 형제로선 소문이 나는 걸 적극적으로 막아야 할 판이다. 행여나 무진이 떠들지 않을까, 노심초사해야 했다.
“자식 키워 봤자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하더니, 부모님부터 살펴야 하지 않겠어. 상태를 보아하니, 내년에 제사를 지내야 할 판인데.”
“아! 아버지!”
“어머니!”
소연준과 소연해는 여전히 검은 피를 흘리고 있었다. 독검에 당해서인지 갈수록 상태가 악화했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무진은 주변에 널브러져 있는 주검을 살폈다. 놈들이 먹은 단약의 성분을 확보해야 했다. 가지고 온 장훈 형 특제 포션에 희석해 보았다.
‘아직은 괜찮네.’
암중 세력으로선 독마의 실종이 꺼림칙할 테지만, 당장 기존의 독을 대체할 시간이 부족했다. 더욱이 독마의 독은 누구나 만들 수 있을 만큼 간단하지 않았다.
성분이 독마의 독인 이상, 심증이 확증으로 변했다.
‘이로써 칠대가문을 노리고 있는 게 확실해졌군.’
밝혀진 것만 해도 권왕가, 창황가, 정령가였다. 나머지 가문이라고 해서 멀쩡하다고 단정하기 힘들었다. 암중 세력의 목표가 칠대가문과 대형 길드임을 알 수 있었다.
이것만 처리하고 상황을 살피려고 했는데, 한껏 사투를 벌이고 있어야 할 유정이 다가와서 두 눈을 부릅뜨며 화를 냈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그러는 너는 같이 싸우지 않고 여기 왜 있냐?”
“우리 집안의 대가 끊기기를 바라는 거야!”
“외인이 간섭할 일이 아니라잖아.”
나는 시조와 수왕의 의사를 존중해 주었다. 어른이 말하면 들어 주기라도 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씀을 따랐다.
그런데도 상황이 여의찮아 손을 쓰고 말았다. 이번에도 나서면 시조와 수왕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짓이라며 항변했다.
“이런 씨발, 지금 그따위 예의나 따질 때야! 왜 갑자기 약속을 칼같이 지키는 거야?”
“갑자기라니, 나는 언제나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한다고.”
“시조님도 아버지도 이해하시니까 빨리 거들라고! 자꾸 뭉그적거리다가 잘못되면 진짜로 용서 안 해!”
“그럼 지금까지 한 일도 괜찮은 거지? 정령가의 이름으로 보증을 해 줬으면 좋겠는데.”
“알았으니까, 빨리 해!”
유정이 무진에게 올 수 있었던 이유는 전투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풍야와 화야만 소환했기에 가능했다.
포위 진형을 갖출 때까지만 해도 끝난 줄 알았지만, 다크엘프는 괴물이었다. 마령과 합신을 이루자 대치 구도가 급격하게 무너졌다. 겨우 버티는 수준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놈의 자식이 한가롭게 노가리를 까고 있었다. 고작 약속을 운운하면서 말이다.
“다크엘프가 장막처럼 두른 어둠만 치우면 되는 거 아닌가?”
“아니 그걸 못 하니까 그렇지! 지금 누굴 놀려!”
유정이는 귀도, 코도, 입도 다 막혔다. 어린애한테 사탕 뺏듯 말하는데, 다크엘프가 미치지 않고서야 자기 목숨 줄이나 다름없는 소환 마령을 돌려보내겠냐고.
말처럼 간단한 일이었으면 우리 가족들이 죽을 둥, 살 둥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지도 않는다.
“흠, 고작 저런 걸로 힘들어하다니, 동맹을 맺어도 되는지 모르겠네.”
“……그 말 취소해! 너, 우리 가문 무시하는 거야? 함정에 빠지지만 않았으면 애초에 당하지도 않으셨어! 이게 진짜 오냐오냐하니까 우리가 핫바지로 보이냐!”
역시 팔은 안으로 굽는 모양이다. 자기도 뒷담화를 깠으면서, 남이 하니 얼굴을 붉힌다. 까도 내가 깐다, 우리 민족 고유의 특성이었다. 아무리 거지 같은 가족이라도, 남이 까는 걸 용납하지 못했다.
명성황후가 좆같아도 쪽빠리의 칼부림은 용납하지 못하는 것처럼. 단죄해도 우리가 해야 했다. 다만, 동학농민운동, 임오군란을 외세를 끌어들여 저지한 민비의 영악함을 과연 민초가 감당할 수 있었을까?
그건 그거고.
가족 같은 유정이를 위해서 무진은 다크엘프의 어둠을 걷어 주기로 했다.
“나와라, 워처스.”
무진의 부름에 대마령진이 뒤틀리며 버티지 못하고 흩어져 버린다. 정령의 소환만으로 마령을 흩어 내는 광경은 예사롭지 않았다.
정작 소환된 정령왕은 입맛이 썼다. 다른 정령왕 놔두고, 25%의 확률을 끝내 극복하지 못했다.
-왜 하필?
“물이 어둠과 상극 아닌가?”
-그건 신성력이지?
“마를 정화할 순 있잖아.”
치료와 정화를 헷갈린 게 아니고서야! 맞는 말 같으면서도 아니라고 하기도 애매하긴 했다.
치료의 극에 이른 정화, 물의 정령왕이라면 일반 정령과 다른 영역이었다. 하급 정령은 하기 힘들어도, 정령왕쯤 되면 반쯤 신성을 갖추고 있었다.
부정해 봤자, 저 인간이 믿어 줄 것도 아니고. 설령 진짜로 아니어도, 되게 하라고 할 인간이었다.
-그런데 왜?
“저것 좀 처리해.”
-잠깐만, 아까부터 찜찜하다 했더니, 저거 마령이잖아? 이 주변에 있는 것들도! 이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잡것들이 어떻게?
마령이란 어둠에 물든 정령을 의미했다. 더욱이 잠식된 마기에 의해서 태어난 마령은 정령을 잡아먹고 힘을 키운다.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선택 신중히 해라.”
-……하면 되잖아!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이기도 했다. 정령왕에게 있어 마령은 반드시 없애 버려야 하는 척살 대상이자, 만악의 근원이었다. 무진이 따로 명령하지 않아도, 마령을 본 이상 외면하지 못한다.
부르르르!
워처스가 마령을 제거하기 위해서 출전한 후에도, 유정은 한동안 굳어 있었다. 일반인이 아닌 상급의 정령사이기에 워처스의 정령력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저거…… 아니, 저분 대체 뭐야? 시조님의 최상급 정령도 저 정도는 아니라고!”
“그럼 답 나왔네.”
“오, 맙소사! 지저스 크라이스트!”
“너희 집 불교 아니냐.”
집 안에 만(卍) 자가 가득했다. 특이한 집구석이 아닐 수 없다. 한편으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자유로운 집안이기도 했다. 다행히 법이 바뀌면서 우리나라는 상호 호혜주의였다. 너희가 인정 안 하면 우리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정령왕께서 강림하시다니, 이게 말이 되는 거야? 아!! 말이 될지도.”
“별거 아냐.”
“이 미친놈이, 아주 그냥 다 가졌네!”
“노력하면 너도 할 수 있어.”
“정령 계약이 무슨 영어 수강인 줄 알아!”
아무나 다 됐으면 가문에서 정령왕이 나와야 마땅했다. 이 사실을 정령사들이 알았다면 다들 접싯물에 코 박고 죽으려고 할 것이다.
무진이 정령술을 본격적으로 배운 시기는 고작 1년에 불과했다. 1년 만에 상급 정령도 아니고, 정령왕과 계약을 맺다니 친화력이 대체 얼마나 대단한 거야?
“그래도 그렇지, 세계수가 성목이 된 것도 아니잖아. 어떻게 계약한 거야?”
“정중히 부탁했지.”
“정령왕은 오만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보기보다 괜찮은 호구…… 정령왕이야.”
호구라고 한 것 같았는데, 기분 탓이겠지.
워처스가 들었다면 경기를 일으키다 못해 수증기가 되어 증발했을 것이다. 정령왕으로선 받아들일 수 없는 헛소리였다. 갑자기 남의 집에 들어와서 다짜고짜 두들겨 패고, 계약할래, 안 할래? 강제로 한 계약서에 잉크도 마르지 않았다.
“어쩐지 널 볼 때마다 내 정령들이 벌벌 떨…… 어? 그럼 이게 다!”
“우리 요나처럼 줏대가 있어야지.”
“네가 주인이니까 그런 거고! 진짜, 불공평해!”
“현실은 원래 불공평의 연속이야. 언제는 평등했었나?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하고 최선을 다해.”
유정의 앙탈은 받아 주지 않았다. 때마침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정령원을 뒤덮은 검은 장막이 새벽의 여명에 닿은 안개처럼 사라져 버린다.
크아아악!
이제까지 여유롭게 시조, 수왕, 장로들을 압박하던 네르가의 입에서 찢어질 듯 비명이 터졌다.
“……이게 무슨?”
부지불식간 일대를 뒤덮은 가공할 정령력에 흑마는 역소환은커녕 소멸되어 버렸다. 전혀 예상치 못한 건 둘째 치고, 이처럼 강대한 권능을 지닌 정령은 처음이었다.
“……설마?”
흑마는 최상급 어둠의 마령이다. 역소환도 아니고 소멸할 수 있는 존재는 하나뿐이다. 정령의 왕, 여전히 남아 있는 정화력을 고려한다면 물의 정령왕이었다.
“……수왕, 네놈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발뺌해도 소용없다! 세계수도 없이 도대체 어떻게 정령왕을 소환한 것이냐?”
“마령에 물들더니 정신이 나갔군.”
시조와 수왕에게 마령이 사라진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당장은 가문을 짓밟은 원수를 처단해야 했다. 다시 어둠을 불러온다면 승부를 장담하기 어려웠다. 가지고 있는 역량을 전부 동원할 때다.
“가문의 흉수를 죽여라.”
“명을 받듭니다.”
정령합신이 풀린 반진력을 고스란히 받은 네르가였다. 원래 상태였다면 모를까, 지금으로선 회피도 어려웠다. 스텝과 스킬을 이용해서 피하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빌어먹을, 어째서?’
이건 말이 되지 않았다. 완벽한 계획이었다. 설령 도중에 변수가 있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 정도는 얼마든지 극복할 실력이 있었다.
당장은 자신감의 근원이었던 마령을 잃고, 대마령진마저 무너졌다. 자신은 중요한 패를 잃었고, 상대는 옥죄던 족쇄를 풀었다.
‘어쩌지?’
정령왕을 소환한 이상 실패는 불을 보듯 자명했다. 마령을 다시 불러온다고 해도 반전을 기대하긴 어렵다. 그렇다고 포위망을 뚫고 밖으로 나가기도 여의치 않았다. 도주를 염두에 두었는지 정령원의 출입구로 가는 방향을 막아섰다.
‘내가 이대로 포기할 것 같으냐!’
속내와 달리 네르가는 어떻게든 정령원을 빠져나가려는 제스처를 보였다.
퍼퍼펑!
마령합신을 쓰진 못하더라도, 네르가의 운신은 대단히 가벼우면서도 폭발적이었다. 다크엘프 특유의 패도가 정령투법과 절묘하게 맞물렸다.
차작!
시조가 정면을 막고, 수왕이 뒤를 막았다. 장로들은 시조와 수왕을 보조하면서 네르가의 도주로를 차단했다.
‘최대한 빨리 끝낸다.’
시조는 내외상이 심하긴 했어도, 마령의 방해가 사라지자 점차 정령력을 회복하고 있었다. 운신의 자유로움을 찾은 것만으로도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전투력을 선보였다. 점차 네르가의 정령전투에 익숙해지면서 일대일로도 밀리지 않았다.
쑤앙!
정령사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스피드였다. 더욱이 속도와 비견되는 굉장한 피괴력이었다. 피육이 닿을 때마다 포탄이 터지는 굉음이 들렸다.
이윽고.
파파파팟!
정령기로 단련된 시조의 철권이 네르가를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네르가의 공수에 균열을 일으킨 수왕의 조력도 무시할 순 없다. 시조와 가주의 합격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며 네르가의 수비를 무너뜨렸다.
크윽!
시조의 철격에 적중당한 네르가가 신음을 토한다. 이화접목의 수법으로 충격을 밀어내지 않았다면 위험했었다.
휘청!
비틀거리는 네르가의 틈을 수왕은 놓치지 않았다. 스텝의 속도를 높이더니 회전력을 실어 머리를 노렸다.
후아아앙!
간발의 타이밍이었다.
머리를 맞았다면 네르가의 다음은 존재하지 않았다. 첩첩산중이라고, 한숨을 돌리기엔 장로들의 합격이 남아 있었다. 정령원의 도주로를 막아서면서도 네르가의 약점이 보이면 교대로 가차 없는 손 속을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