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 빚을 지우다(1)
반전의 연속.
시조의 등장으로 반란은 끝이 나는 줄 알았지만, 분가는 그마저도 대비하고 있었다. 겉으론 혈육에 대한 정이 없는 듯 보여도, 시조는 직계를 신용했다.
직계와 그 가족을 인질로 삼아 시조를 제어할 수 있다고 보았다. 한데, 무진이 나서면서 흐름이 꼬였다. 시조는 결단을 내렸고, 분가를 제압하며 종결되는 결론을 기대했었다.
“후후후, 많이 기대했을 텐데. 제법 머리를 쓰기는 했더구나. 기습이기는 해도 실력도 나쁘진 않았고. 그만하면 아카데미를 뒤흔들 만해. 하지만 애들 노는 물에서 조금 뛰어나다고 해서 함부로 날뛰면 큰코다치는 법이지. 이제부터 어른의 맛을 보여 주마.”
장난은 여기까지였다.
김준수는 기세를 끌어 올리며 무진을 압박했다. 결과는 바뀌지 않았지만, 원하는 방향과는 거리가 있었다. 다크엘프 네르가의 도움은 될수록 받지 않으려고 했었다.
그가 나선 이상, 가문의 의사 결정권을 더 내어 주어야 한다. 일종의 지분 싸움과 같았다. 누가 더 많은 지분을 가지느냐에 따라서 권한이 높을 수밖에 없다.
‘다른 놈은 몰라도 네놈은 친히 손을 봐 주마!’
철모르고 설치고 다니면 어찌 되는지 알게 해 줘야겠지. 그래야 어른 무서운 줄 알고 자중하지 않겠어.
반성할 기회가 생길지는 모르겠지만.
씨익!
웃어?
무진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김준수는 미간을 찌푸렸다. 겁에 질려서 벌벌 떨지 않으면 다행이거늘.
감당할 수 없는 현실에 정신 줄을 놓기라도 했나?
“미치기라도 한 것이냐?”
“계획대로라서.”
……뭐?
이 와중에 허세를!
김준수는 기도 안 차는지 혀를 찼다.
요즘 세대를 이해하기 어렵다고는 하나, 이쯤 되면 뇌절 그 자체였다. 얼마나 뇌절을 해야 저딴 마인드가 형성되는지 머리 뚜껑을 열어서 연구해 보고 싶어질 지경이다.
“더는 들어 줄 수가 없구나.”
“맞는 말이야.”
결단을 내렸으니 행한다.
무진은 잡고 있던 소연생의 목을 으스러뜨렸다.
우드드득!
……어?
차기 가주였던 소연생의 허망한 최후였다. 자신이 죽을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는지, 목이 으스러지고도 감지 못한 두 눈은 어리둥절할 뿐이다.
죽음을 인식조차 못 하고 죽었으니 축복받았다고 해야 할까. 가족을 배신한 패륜아에겐 관대한 처사였다.
휘익!
의미는 부여하지 않는다. 무진은 용도를 다한 소연생을 치웠다. 영혼을 잃은 늘어진 주검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죽을 짓을 했으면 죽어야지.’
무진은 여지를 남겨 둘 생각이 애초에 없었다. 그러나 외부인인 자신이 처음부터 살수(殺手)를 썼다면 정령가에 반감을 살 수 있었다.
본가로선 분가의 반란도 가내의 일이다. 자체적으로 해결하기를 바랄 테고, 살수를 쓸 상황으로 보지 않았었다. 그래서 분가가 계획하고 있는 수를 전부 쓰도록 유도했다.
이를 위해 적을 과소평가한 시조, 수왕, 장로들을 극한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인질극은 작금의 구도를 만들기 위한 빌드업의 일환이었다.
이제는 시조, 수왕, 장로들이 나서서 사생결단의 의지를 드러냈다. 분가를 죽이지 않으면 자신들이 죽는다는 걸 직감한 것이다.
‘정령가의 협조를 위한 거름으로 써 주지.’
무진으로선 더는 손 속에 사정을 둘 필요가 없어졌다. 소연생은 본인의 가치를 다했으니, 세계를 구한 용사처럼 토사구팽 해 주었다.
움찔!
김준수는 화들짝 놀랐다. 보고서도 믿기 어려운 현실과 마주한 것이다.
“네놈 무슨 짓을?”
“어른의 맛을 알려 주겠다며. 혹시, 살려 줄 줄 알았어? 보기보다 많이 순진한 아저씨였네.”
“이 미친놈이 기어이 끝장을 보자는 것이냐?”
“사설이 길어.”
사태를 분석하고 주도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김준수였다.
비록 변수를 만들긴 했어도, 이제는 애송이의 목줄을 손안에 얻은 줄 알았다. 그런데 이 애송이는 보통을 넘어 미친놈이 분명했다. 소연생을 죽인 이상,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화르르르!
김준수는 죽이는 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핏덩이로 인해 이처럼 분노하게 되리라고는 미처 생각도 못 했다.
그제야 이놈의 별명이 뇌리에 새겨졌다.
평지풍파.
누가 지었는지 모르지만, 이토록 완벽한 별명도 없다. 자기 죽을 줄도 모르고 날뛰는 걸 보면 미친놈이 분명했다. 어째서 여론이 떠들썩했는지는 실감하게 해 주었다.
“이제는 빌어도 소용없다. 사지를 잘라서 개 먹이로 던져 주마.”
“말은 누구나 그럴싸하게 하더라고.”
사설이 길었다는 말을 증명하듯, 무진은 대뜸 김준수를 향해 쇄도했다. 정령을 소환하기 전에 끝장을 내려고 선수를 치는 것처럼 보였다.
“후후, 느리구나.”
그래 봤자 생도였다.
아직 배움을 끝내지도 못했고, 성좌의 선택도 없었다. 기습으로 우위를 점해 소연생을 사로잡았다고 자신마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여기다니.
흥!
김준수는 쇄도해 오는 무진을 비웃었다.
어린놈에게 현실의 무서움을 알려 줄 요량으로 기다려 주었다. 간발의 차이로 막아 낸 후, 역량의 격차를 뼈저리게 체감시켜 줄 것이다.
“너무 가까운데.”
“그거야 네놈의 생각일 뿐이지.”
거리감은 언제나 상대적이다. 무진은 가깝다고 했지만, 김준수에겐 무한한 가능성의 공간이었다. 굳이 정령을 소환하지 않아도, 복용한 단약으로 몇 배의 역량을 갖추었다.
결과는 명확하다.
속도와 속도의 대결이었다면.
-홀드.
명백한 동상이몽이었다.
애송이가 건방지게 나대는 것처럼 보이도록, 김준수의 방심을 유도한 것이다.
무진은 상대가 전력을 쓰도록 기회를 주지 않았다. 나의 강점은 강화하고, 적의 강점은 상쇄한다. 그것이야말로 전투의 필승 전법이었다.
크윽!
생과 사가 갈리는 찰나.
김준수는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육신을 옥죄는 정지 마법 자체는 저계식이나, 마도의 극에 이른 마력이었다. 정령을 소환하여 대비했다면 기회라도 있었을 텐데, 순간의 방심이 뼈아프다.
그렇다고 하나, 일개 생도가 절대의 마도라니!
이게 말이나 될 법한 일인가?
누구도 염두에 두지 못한 부분이었다. 먼치킨 소설이나 만화에서도 개연성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만큼 터무니없었다.
‘……설마?’
김준수는 주마등이 펼쳐지는 가운데, 점점 깨닫고 있었다. 아카데미의 사건 사고의 중심에 누가 있었는지를. 주연이든, 조연이든, 꼽사리든, 항상 존재했다.
그런데도 사건을 해결한 주연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여론은 매번 무진을 배제하고, 다른 방향으로 검토했다.
그것이 전부 유도한 대로라면?
……이놈이다!
그 모든 사태의 주역이 무진이었다.
일개 생도가 그토록 엄청난 일을 주도했다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그러니 답을 내놓더라도 항상 오답일 수밖에. 정답을 빼놓고 답이 나오는 것도 말이 되지 않았다.
김준수는 이제 안다.
이놈이 계획의 주동자란 걸.
“……비겁한…… 놈!”
무진이 내지르는 주먹을 실시간으로 보면서 죽음을 맞이하는 중이다. 대가리에 주먹이 닿는 그 순간까지도 두 눈 부릅뜨고 봐야 했다. 순간적인 공포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차라리 눈을 감고 참수형을 기다리는 편이 덜 무서울 것이다.
퍼어어억, 푸아아앗!
죽고 싶지 않았지만, 김준수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얼굴의 중심인 코가 뭉개지면서 권경이 스며들어 뇌를 잘게 잘게 박살 낸다.
스윽!
움찔!
거슬리는 걸 처리한 무진의 개운함에 소씨, 강씨 형제는 얼어 버렸다. 방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4분가주가 다가올 때까지만 해도 다 끝난 줄 알았었다.
결과는 어떠한가?
무진의 주먹에 4분가주의 머리통이 산산이 부서지며 목 위로 아래턱만 남아 있었다.
그 섬뜩한 광경을 만들어 낸 주인공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무진의 담담함이었다.
‘……이런 미친!’
‘……저 새끼 대체 뭐야?’
‘……생도 맞아!’
‘……저런 놈한테 시비를 털었다고?’
보지 않았다면 모를까, 보고 나니 잊어버릴 수가 없다. 비록 이해하기는 힘들지만, 어쨌든 4분가주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원래도 실력자로 평판이 난 데다가, 분가를 연합했다면 감추고 있는 기량은 더할 것이다. 그런 4분가주가 일격에 저세상으로 직행했다.
‘수작을 부렸나?’
‘스킬이든, 아니든 저걸 대체 어떻게 이겨?’
‘그렇다고 머리통을 박살 내냐?’
‘이러면 100억을 갚아야 하잖아!’
생도가 살수에 거침이 없다. 평소 사람을 가축처럼 도축하지 않고서야. 생도가 도살자일 리 만무하고, 천성이라면 더더욱 무서웠다.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 기질을 타고나더라도, 저토록 깔끔하진 않았다.
무진은 검지를 입술에 살포시 대며.
쉿!
움찔!
함부로 나불거리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소씨, 강씨 형제의 뇌리에 시나리오가 완성되어 펼쳐졌다.
‘망했다!’
꽈아앙, 푸아앙!
분가와 본가의 전투가 본격적으로 펼쳐졌다.
정령 역소환으로 온전한 상태는 아니지만, 본가의 주 전력은 경험이 많은 백전노장이었다. 마령단으로 전력을 끌어 올린 분가를 상대로 불리한 형국에서도 접전을 펼쳤다.
그런 가운데 시조와 네르가의 격전은 압권이었다.
다른 이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정령을 소환하지 못하는데도, 시조의 정령투법은 굉장한 완성도를 보였다. 뇌기를 바탕으로 뇌격, 뇌광, 뇌폭을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퍼퍼펑, 쩌어어엉, 찌리리릿!
천지개벽을 일으키는 뇌성벽력.
중첩된 뇌기가 섬전처럼 뻗어 나가 여러 가지로 분산되는 광경은 아름다우면서도 섬뜩했다.
일반적인 상대였다면 끝장을 냈을 텐데, 네르가의 대응은 여유가 있었다. 어둠 속에서 춤을 추듯, 쉐도우댄스가 뇌격을 피해 냈다. 더욱이 그를 중심으로 번지는 음산한 어둠이 시조의 뇌기를 탐욕스럽게 먹어 치웠다.
“정령투법은 무공과 스킬을 융합한 형태로군.”
시조는 일정 부분 손해를 감수하고 전력을 발출했었다. 어둠을 이용한 정령이라고 해도, 흡수력엔 한계가 있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기만 할 뿐이다.
허억, 허억!
시조의 숨이 거칠었다. 정령과 합신한 상태에서도 펼치지 않았던 뇌기였다. 강력한 위력만큼이나, 정령력과 체력의 소모가 평소보다 훨씬 빨랐다. 더는 뇌기로는 답이 나오지 않기에 육탄전으로 전략을 수정했다.
“조금만 더했으면 위험했을 텐데, 아쉽게 됐군.”
“마치 다 이긴 척 건방을 떠는구나.”
“나야, 시간만 끌면 되거든. 버틸수록 불리한 건 너지. 아, 밖의 식구들이 많이 걱정되겠군.”
“닥쳐랏, 죽여 주마!”
시조로선 조급해질 수밖에 없다. 정령원을 뒤덮고 있는 마령이 심신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수왕을 필두로 장로들이 분전하고 있지만,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었다. 더욱이 정령원 밖의 일도 걱정이었다. 분가의 습격을 예상하지 못한 상태라면, 기습을 막아 내긴 불가능했다.
네르가는 전력의 우위에도 심리전을 거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시조의 약점을 정확히 찔렀다. 시간을 끌수록 불리한 데다가 가솔의 안위가 걱정될 테니.
‘상처 입은 호랑이를 상대하는 기분이군.’
상처를 입어도 호랑이는 호랑이다. 여전히 위력적이고, 날카롭기는 했다. 온전한 상태에서 정면 대결을 벌였다면 꽤 고전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이만하면 자신이 사용하고 있는 마정령, 흑마(黑魔)의 성질을 알아차렸을 테지만. 그런다고 뾰족한 해법이 나오진 않는다. 상황을 뒤집기에는 정령원은 완벽한 자신의 공간이었다.
‘너도 곧 마령에 사로잡히겠군.’
시조, 수왕, 장로는 분가와 달리 마령으로 세뇌할 가치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시조는 하프 혼혈이 아닌 순혈 엘프였다. 마령을 흡수한다면 다크엘프가 되어 자신의 오른팔이 될 수 있었다. 그만한 가치가 있기에 곧바로 제압하지 않고 시간을 끌었다.
그 전에 격의 차를 조금은 알려 줄 심산이다.
퍼억!
휘청!
네르가와 시조의 주먹이 교차했다. 물러선 시조의 두 눈에 놀람이 깃들었다. 접근전을 피하기에 정령투법에서는 앞설 줄 알았거늘, 예상을 벗어난 차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