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6. 패륜전(3)
외부인이 물 만난 물고기처럼 날뛸 줄 누가 알았으랴. 더욱이 인질이 사로잡혀 있어서 손을 쓰기도 곤란했었다.
대체 뭘 믿고 저런 짓을 벌였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설마 돌아가는 사태를 모르는 건가? 그렇다고 하기엔 아이큐 30만 넘어도 지능에 문제가 있을 리 만무했다.
크아아아악!
이 와중에도 소연생은 갓난아이처럼 비명을 질러댔다.
통증 주사라도 놔 주기를 바라나, 중독되면 좋지 않았다. 나중을 위해서라도 멀쩡한 정신으로 참는 편이 나았다. 전적으로 소연생의 척추를 고려한 배려였다.
부릅!
시조의 기를 눌러서 의기양양했던 김준수가 무진을 노려보았다. 계획된 의도에서 벗어난 사태에 화가 치밀었다.
“네놈은 뭐냐?”
“그렇게 물어본다면 대답해 드리는 게 인지상정이겠지, 아카데미의 신성 강무진이다.”
……뭔 성?
자기 멋대로 갖다 붙인 건 둘째 치고, 일개 생도 따위가 끼어들 판이 아니었다. 정령가의 미래를 결정하는 자리를 애송이가 주제 파악을 못 하고 나대고 있었다.
그런 의미를 다 떠나서 방금의 행동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도대체 뭘 믿고 나대는 건지 모르겠다. 맘 같아서는 뼈째로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았다. 하나, 함부로 손을 쓰기에는 간판으로 내세워야 하는 소연생이 사로잡혔다.
‘멍청하긴!’
명색이 정령가의 가주를 노리는 자가 일개 생도한테 허점을 내보여 당하다니, 예상보다 더 어리석은 놈이지 않은가. 그 점이 마음에 들어서 회유하기는 했지만, 막판에 속을 썩였다.
그렇다고 일개 생도에게 질질 끌려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다. 김준수는 판을 깨려고 한 애송이에게 책임의 뼈아픈 대가를 씌워줄 심산이었다.
“네놈이 뭔 짓을 하는 건지 알고 있는 것이냐? 본가의 인원은 총 150명이다. 이들이 죽는다면 그 무게를 네가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으냐!”
김준수는 무진을 흔들어 댈 요량으로 책임을 떠넘겼다. 그도 무진을 모르진 않았다. 작년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한참 여론을 뜨겁게 달구었던 천지 분간 못 하는 망아지였다.
그러나 아무리 유명해 봤자 약관도 되지 않은 애송이에 지나지 않았다. 과연 본인으로 인해서 사람이 죽었을 때의 무게를 견딜 수 있을까.
‘사람의 목숨은 가볍지 않다, 네깟 녀석이 버틸 수 있겠느냐!’
돌아가는 사태를 모르고 난장을 깠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이토록 막무가내로 행동할 리 없지 않은가.
“내 가족도 아니잖아.”
“그래, 인질을 구하려…… 뭐라고?”
“남이야 죽든 말든 나하고 무슨 상관인데? 따지고 보면 내가 죽인 것도 아니잖아. 당신이 죽이고서 그게 왜 내 책임이야. 게다가 난 아직 미성년자야.”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것이냐?”
무진의 대책 없는 책임 회피에 분가는 물론, 본가마저도 헛바람을 삼켰다. 저런 식으로 무책임하게 나올 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최소한 실수를 인지하고, 죄책감을 느껴야 하거늘. 남의 가족이라 상관없다니! 이 무슨 개 같은 소리인가? 이놈은 최소한의 공감 능력도 없는 사이코패스였다.
“내가 지금 농담을 하는 것으로 보이느냐!”
“주둥이만 까는 걸로 보이긴 하네, 나 같으면 본보기로 절반은 죽이고서 시작할 텐데.”
“……뭐?”
섬뜩한 한기가 정령원을 훑고 지나갔다. 사태 파악을 못 하는 거라면 이해라도 하지. 다 알고서 하는 말이다. 너희들이 죽든 말든 의미 없다는 단호함에 다들 기겁했다.
능히 그리하고도 남을 태연함이었다. 적반하장으로 소연생의 목을 잡고 협박을 가하고 있었다.
“직계가 사라지면 계획에 차질이 있지 않으려나?”
무진은 소연생의 목을 힘껏 쥐었다. 그립감이 좋아서 전완근의 힘이 아귀에 확실하게 전달되었다.
꽈악!
크어억!
아파서 뒈지겠다는 소연생의 비명이었다. 정신을 차리기는커녕, 혼비백산하며 흰 거품을 뿜어냈다. 반쯤 정신이 나가 버린 상태였다.
무진은 혀를 차며.
“엄살은.”
엄살치곤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였다. 눈을 까뒤집은 채 산소 공급 부족으로 혈색이 퍼렇게 질려 갔다. 시간이 더 지나면 안색이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이는 어서 빨리 원하는 답을 내놓으라는 협박이었다.
빠득!
김준수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새끼의 농간에 이를 갈았다. 소연생을 인질로 이 사태를 모면해 보려는 모양인데, 어른을 가지고 놀면 어찌 되는지 확실하게 보여 주어야 했다.
천지 분간 못 하는 애송이에게 세상의 쓴맛을 알려 줄 때다. 나중에 울고불고 매달린다 한들, 때늦은 후회였다.
김준수는 굳이 직접 손을 쓰지 않았다. 그러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한 패가 있었다.
“시조님, 저놈을 죽이십시오! 본가의 멸문을 바라시지 않는다면요.”
“네놈이 끝까지 나를 능멸하는구나!”
“그놈만 죽이면 아무도 죽지 않습니다. 저는 한 입으로 두말은 하지 않습니다.”
“이놈, 대체 어디까지 가려는 게냐!”
시조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체하기 힘들었다. 이 모든 사태의 시발점이 분명하거늘, 4분가주의 요구에 고민하는 것 자체가 망신이었다. 자신이 저 핏덩이한테 손을 쓴다면 그 후엔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할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쯧!
시조, 수왕, 장로들의 행태에 무진은 혀를 찼다. 연이어 당하다 보니 가장 중요한 걸 잊고 있었다.
“의식이 끝나지 않고선 나가지 못한다면서요. 통신도 제한된 장소겠다, 전부 처리하면 될 일인데, 고민이 깊네요.”
아~!
직계가 인질로 잡히면서 사고가 편협해졌다.
안에서 벌어진 일을 외부에서 알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길지 않다곤 하나, 그 전에 해결하기만 한다면 분가의 수작을 피해 없이 단죄할 수 있었다.
허!
대책 없이 난동을 부리는 줄 알았더니, 치밀한 계산이 깔려 있었다. 당장 직계의 안위를 챙긴 것부터 이 모든 사태의 핵심을 관통한 것이다. 재수가 좋아서 아다리가 맞아떨어졌을 수도 있지만.
“과연 그렇군. 우리가 어리석었어.”
“저딴 애송이의 말에 놀아나시다니, 지금 큰 실수를 하는 겁니다!”
“그거야 두고 보면 알겠지.”
“그만하시지요, 제 인내심을 자극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내 인내심은 이미 바닥을 쳤다.”
시조가 손을 쓰려고 하자, 김준수의 인상이 무섭게 구겨졌다. 적당히 시조를 구슬려 제약을 가한 후, 본가를 장악하기만 하면 나머지는 일사천리였다.
시조와 수왕은 가장 큰 걸림돌인 동시에 얻을 수만 있다면 가장 확실한 패이기도 했다. 더욱이 정면 대결을 해 봤자 제 힘을 갉아먹는 짓이었다.
다 된 밥에 재를 뿌렸다. 손에 잡혔던 보석이 모래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빌어먹을, 다 저놈 때문이구나!’
외부인의 의식 참여가 탐탁지는 않았으나, 언제든 처리할 수 있는 날벌레인 줄 알았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판을 깨는 브레이커가 될 줄 알았을까?
“가주와 장로들은 배신자를 처단하라.”
“명을 받듭니다!”
시조의 명이 떨어지자 수왕과 장로들은 정령을 소환했다. 하지만 정령과 교감을 이루려는 찰나 정령원을 뒤덮었던 마령이 폭발적으로 증폭한다.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하기 힘든 마령이 정령을 짓누르며 정령사와의 교감을 끊어 버린다.
쿨럭!
정령이 되돌아가자, 반진력이 발생하며 그 빈틈을 마령이 파고들었다. 일순간에 몇 배의 반진력이 정령력에 충격을 주었다.
정령술이 마스터급에 이른 시조와 수왕조차 버티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정령의 등급이 높을수록 반발력이 컸기 때문이다.
‘……또, 당했구나!’
시조가 다루는 정령은 특이하게도 뇌전이었고, 세계수가 없는 현실에선 최강의 정령이었다. 더욱이 뇌전은 여러 원소 중에서도 가장 강한 신화급으로 알려졌다. 소환하여 정령합신을 이룬다면 사태를 최대한 빨리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그것이 패착이었다.
어둠의 마령이 정령과 상극이기는 해도, 소환 자체를 끊어 낼 만큼은 아니었다. 그 정도의 제한은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분가의 배신을 유혈 사태 없이 마무리할 욕심에 숨어 있는 암계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가 정말로 인질만 믿고 거사를 일으켰다고 본 겁니까? 고인 물은 썩는다더니, 시조께서도 어쩔 수 없는 모양입니다.”
정령원에 펼쳐진 대마령진의 진정한 목적은 정령의 역소환에 있었다. 정령사의 가장 큰 힘은 아무래도 소환된 정령인 만큼, 역소환의 반진력도 클 수밖에 없다.
대마령진의 1차 증폭과 2차 증폭은 3차 증폭을 위한 미끼에 불과했었다. 더욱이 역소환이 되면서 생긴 공백에 마령이 스며들기에 재소환하기도 어려웠다.
그것이 김준수와 분가가 정령을 소환하지 않은 이유였다. 그 대신 품에 가지고 있던 검은색 단약을 먹었다. 대마령진에서도 제약받지 않기 위해서 특별히 제조된 마령단이었다.
날파리가 끼어들어 흐름이 틀어지긴 했어도, 김준수는 실패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 어차피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
이왕지사 틀어진 판.
직계를 내세워 명분을 세우려던 귀찮은 일도 치웠다. 어차피 가문 내의 사정에 불과했다. 다른 가문이 가내의 사정에 왈가왈부할 권리는 없었다.
힘만 세다고 돌아가는 세상이 아니다. 시조나 가주나, 현실 파악이 느렸다. 그런 머리를 가지고 가문을 이끌 생각을 하다니, 현명한 사람에게 맡겨야 할 때였다.
이제 다 끝이……?
우우웅!
파파파팟!
일순 뇌기가 소용돌이를 치며 사방으로 번진다. 뇌전풍의 중심에 선 시조가 뇌기를 밍크코트처럼 두르고 있었다. 뇌정령을 소환하지 않았음에도, 뇌기를 다루다니 실로 놀라웠다. 흡사 뇌공을 극성으로 익힌 무인을 보는 듯했다.
“정령을 소환하지 못한다고 해서 원하는 대로 될 성싶더냐!”
“역시나 무식하긴 해도 힘은 장난 아니군요. 하지만 시조님의 상대는 제가 아닙니다.”
“닥쳐랏!”
뇌기 그 자체가 되었다. 한 줄기 섬전(閃電)으로 화한 시조는 김준수를 향해 쇄도했다.
쩌어어엉!
분가를 살리려고 했던 마음을 버렸다. 이제는 주저하지 않고 뇌기를 담은 권격을 발출했다. 정령투법의 완성형에 가까운 권형이었다. 권왕조차도 시조가 펼치는 뇌형권을 경시하진 못할 것이다.
콰아아아앙, 찌리리리릿!
빛과 어둠이 마주하자 뇌성벽력이 내리치며 암광이 공간을 분쇄했다. 일대를 휘몰아치는 기운의 여파에 모두의 입에서 경탄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가장 놀란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소민성이었다.
시조는 세 걸음이나 밀려나 있었다.
크윽!
뇌정령을 다루면서 습득한 극뢰기였다. 오랜 고련을 통해 정령투법에 투사한 뇌형권으로. 정령합신을 이루었을 때와 비교하면 3할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쳐 낼 줄은 몰랐다.
스륵!
언제였을까?
김준수의 앞을 가로막고 선 외인이 있었다. 시조의 뇌기를 막아 내고 밀어낸 자였다. 뒤집어쓴 장포가 충돌의 여파로 벗겨지면서 본모습을 드러냈다.
“……엘프!!”
사내의 외형은 인간적이지 않은 외모와 길쭉하게 뻗은 귀를 가지고 있었다.
단순히 엘프라서 놀라진 않았다. 엘프의 상징과도 같은 백옥 같은 피부가 검게 물들어 있었다.
정령이 아닌 마령, 어둠을 품은 엘프.
다크엘프였다.
“네르가다. 머나먼 타지에서 일족을 만났군.”
“닥쳐랏, 어둠에 귀의한 마물 따위가 일족임을 주장하는 것이냐?”
“너무하는군. 어차피 우린 일족에서 낙오된 이탈자가 아닌가. 굳이 일족의 법칙에 따를 필요는 없을 텐데.”
“어둠을 멀리하라. 세계수님의 의지를 배반한 놈의 말 따윈 듣지 않겠다.”
설득을 기대했다고 하기엔 네르가는 태연했다. 힘의 우위에서 나오는 여유였다. 통상적으로 엘프와 다크엘프의 우열은 역사가 증명했다. 다른 차원이라고 해도, 엘프라는 종족 자체의 특성이 바뀌진 않았다.
“고집불통이긴 해도, 아쉽게 됐군.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흥미로웠을 거다.”
“함정을 판 주제에 역겨운 소리를 잘도 하는구나.”
“의심했으면 마땅히 조처했어야지. 여유를 부려서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들고선 남 탓을 하는 건가? 그 만연한 오만이 그대의 발등을 찍었다고 생각하지 않나. 쯧쯧, 애꿎은 이들도 가엽게 휩쓸렸군.”
“얄팍한 심리전은 통하지 않는다. 그만하고 오너라!”
“호오, 일족답지 않게 객기를 부리는군. 시간을 주는데도 마다하겠다면, 원하는 대로 해 주는 수밖에.”
담담한 척 허세를 부렸을 뿐, 네르가의 말대로 호기에 불과했다. 소민성은 그 어느 때보다 긴장하고 있었다. 불시에 생겨난 균열로 이 세상에 불시착한 이후로 오늘과 같은 위기는 처음이었다.
‘너무 안일했구나.’
사고란 일어나지 않으면 괜찮으나, 발생하는 즉시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들이 문제가 된다. 위기를 겪어 보지 않은 안전 불감증이 소민성에겐 뼈아픈 역린이 되었다.
자신과 수왕도 완전한 상태가 아니었다. 분가라면 몰라도, 상대는 일족의 대적자인 다크엘프였다. 하물며 정령원에 숨어 있는 줄도 몰랐다. 기척을 죽이는 아이템이나 스킬을 썼을 수도 있으나, 경시할 수 없었다.
‘전력을 다한다!’
사생결단의 의지가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