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4. 패륜전(1)
본가와 분가.
기본적으론 직계와 방계로 구분하나, 씨족사회가 아닌 이상 가문을 유지하려면 혈족만으론 불가능하다. 유능한 인재를 들이고, 경쟁을 유도하여 전력을 끌어올려야 도태되지 않는다.
현시대는 다인종, 다문화다.
풀이 많아야 꽃도 많듯, 저출산이 만연해지면서 인재를 뽑기도 수월하지 않았다. 더더군다나 각성자 중에서 정령사는 소수에 불과했다.
가뜩이나 수도 적은데, 등급 선별은 어불성설이었다. 그렇다고 혈족만으로 운영하자니 다른 가문이나 길드와 경쟁력에서 밀리는 게 불을 보듯 자명했다.
정령가도 결국 시대의 흐름을 받아들이고 분가를 세웠다.
한데, 세월이 지날수록 분가의 규모가 너무 커졌다. 숫자만 놓고 보면 본가는 8개의 분가 중 하나보다 못했다. 이쯤 되면 본가와 분가를 구분해 봤자 의미가 없어졌다.
그런데도 정령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요직은 직계혈족이 도맡았다. 분가의 역량과 규모가 나날이 늘고 있는데도 변하지를 않으니 불만이 쌓일 수밖에.
물론, 단순히 직계라서 가주가 되진 못한다. 가주는 정령가에서 가장 뛰어난 정령사여야만 했다.
수왕의 정령력은 최상급이고, 정령투법은 적수가 많지 않았다. 그뿐인가, 정령합신의 동기화율이 최소 80%가 넘었다.
수왕이 가주가 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정령가는 평균연령이 워낙 높았다. 가주뿐만 아니라 본가의 장로와 요직을 직계가 도맡아서 하고 있었다. 새로운 인재가 그 자리를 대신해야 하는데, 세대교체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다.
정령가가 노령가(老齡家)로 불리는 연유였다.
분가는 나날이 발전하고 있지만, 본가는 요지부동이었다. 감이 익어 떨어지기를 바랄 수 없었다. 분가로선 본가의 방식이 너무나 고리타분하고, 불합리해 보였다. 결국 더는 본가에 끌려다니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며 세를 모았었다.
분가가 연합한다면 본가를 넘어설 충분한 역량이 있었다. 그런데도 궐기하지 못한 이유는 시조의 건재함 때문이다. 본래 가문이나 문파를 창건한 시조는 제사상의 명패로 남아 있어야 하거늘. 가문의 평균연령을 대폭 늘이는 살아 있는 화석이 문제였다.
시조는 여타의 정령사와 차원이 다르다. 본가, 분가의 모든 정령술, 정령투법, 정령합신을 가르친 스승이었다.
한국 정령계의 근본 그 자체라고 봐도 무방하다. 격이 완전히 다른 존재가 떡하니 버티고 있는 이상, 본가에 대항한다는 건 섶을 지고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짓이었다.
더욱이 부모이자 스승의 등에 칼을 꽂는 패륜이란 꼬리표를 떼기 힘들었다. 아무리 권력이 좋아도 섣불리 결행하기 어려웠다. 시조의 상징성만으로도 분가는 절대 본가를 넘보지 못했다.
분가로선 속으로만 담아야 했던 욕망이었다.
그러던 중 도무지 죽지 않을 불멸자 같았던 시조가 두문불출하게 되었다. 갑자기 노환이 왔다고 하기엔 도저히 믿기 어려운 기사였다.
초반엔 시조의 짓궂은 성향으로 볼 때 분가를 시험하려는 의도로 비쳤었다. 하나, 세월이 흘러도 시조가 움직이지 않았다. 시조에게 무언가 좋지 않은 일이 있음을 직감했다.
억눌렀던 욕망이 활화산처럼 피어올랐다.
분가는 계획을 세웠다.
시조가 없다고 해도 수왕과 그 직계가 있었다. 본가의 저력은 분가로선 넘기 힘든 벽이었다. 직계의 친화력과 재능은 천성에 가까웠다.
분가는 자질의 격차를 극복하기 위해서 재력을 바탕으로 한 물량전으로 갔다. 아이템과 장비를 사고, 정령석을 복용했다.
막대한 재력을 소모하고서야 직계와의 격차를 좁힐 수 있었다. 이제 시조의 특혜, 일종의 벌모세수인 정령전이를 받지 않으면 수왕과 같은 존재는 등장하지 않을 것이다.
드디어 분가에도 미래가 있을 줄 알았다. 웬걸! 시조께서 건재하단 정보가 흘러나왔다. 믿기 힘든, 아니 믿고 싶지 않은 청천벽력이었다.
10년이 넘도록 정령원에서 두문불출했던 시조가 멀쩡하다니. 분가의 기둥뿌리를 갈아 넣은 노력이 일순간 물거품이 되어 버린 것이다.
시조가 건재한 이상 순리적으론 물러서야 마땅했다. 그러나 이미 욕망에 불을 지핀 지 오래였다. 또다시 직계에 밀려서 변방의 분가로 만족할 순 없었다. 차라리 시작하지라도 않았다면 포기가 빨랐을 텐데.
오늘을 위해서 막대한 투자와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자식들이라도 본가의 요직에 앉기를 바랐다. 그것이 부모의 마음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현실은 냉혹하다 못해 잔인하다.
의식을 치를 나이는 됐으나, 고작 열여덟 살에 불과했다. 그런 아이가 벌써 저만한 정령력과 친화력을 가진다? 이건 누가 봐도 특혜였다. 시조가 나서서 직계혈족에 혜택을 주지 않고서야.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던 본가에 대한 미련마저 버렸다. 오늘을 기점으로 정령가는 새롭게 탈바꿈하리라. 본가가 독식하는 구조가 아닌, 모두에게 기회가 있는 공정한 가문으로.
대의명분은 우리에게 있었다.
본가의 독식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가문은 결국 다른 가문에 밀려 도태되고 말겠지.
시조가 두렵기는 하나, 그들의 말대로라면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었다. 시간을 더 준다면 시조가 완전히 회복할 수도 있었다. 그 전에 끝을 내야 한다.
의식을 행하는 오늘이야말로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우우우웅!
사전에 준비한 대로 발동시켰다.
정령과 상극을 이루는 마령(魔靈).
사악한 어둠이 정령원을 뒤덮기 시작했다. 친화력이 강할수록 마령에 오염될 위험성이 컸다. 포기하면 제압되고, 저항할수록 정령력에 타격을 입게 된다.
저벅.
4분가의 분가주 김준수가 앞으로 나섰다.
그가 분가를 규합하여 대의를 천명한 대표자였다. 이미 자신의 목소리를 냈기에 시조는 무심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다.
“과연 가문을 세운 시조다우시군요.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은 후예로서 보고 배워야겠습니다.”
“여태 배우지 않고 뭘 했는지 모르겠구나.”
“자주 왕래하지 못해 송구할 따름입니다. 앞으로는 그럴 일이 없을 겁니다.”
“능력이 된다면 얼마든지 그리하거라.”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가족끼리 덕담을 주고받는 줄 착각할 테지만, 말 속에 가시가 있었다. 분가주는 본가의 독식을 비꼬고, 시조는 자질을 지적했다.
“저는 그러길 소원하나, 시조께선 그럴 생각이 없으시지 않습니까?”
“나는 본가든, 분가든 차별한 적이 없다.”
“저 아이를 보고도 그리 말씀하시다니, 갈수록 뻔뻔해지시는군요.”
“내가 정령전이를 했다고 생각하는구나.”
“아닙니까?”
“세계수께 맹세할 수 있다.”
김준수를 비롯한 분가주들이 움찔했다. 세계수의 가치를 모르지 않았다. 대정령목도 세계수에 비할 바는 아니다.
“있지도 않은 세계수를 언급하다니, 참으로 대단하군요.”
“나를 겪어 봤으면서 네놈이 감히 세계수님의 의지를 비웃는 것이더냐!”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시조도 이때만큼은 격노한 눈빛을 보냈다.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더라도, 그에게 있어 세계수는 존재의 이유였다. 본가를 세우고, 분가를 나누었을 때도 마찬가지로 세계수의 의의를 비췄었다.
-본가는 언제나 세계수의 의지를 잇는다.
그 염원을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면전에서 대놓고 무시하다니. 정령가의 근원을 배척하는 행위였다.
‘이렇게나 삐뚤어져 버렸단 말인가?’
한편으로 본가와 분가의 반감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크다는 걸 깨달았다. 하긴, 가문의 신성한 정령원에서 이렇게까지 과감하게 나오려면 작심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다.
“너희들이 서운해하는 바를 모르진 않는다. 하나, 정령의식은 가문의 거룩한 의식이다. 나는 결단코 사적인 감정으로 의식을 행하지 않았다.”
“신뢰를 운운하기엔 오늘 갑자기 등장하신 분이 할 소린 아닌 줄 압니다만.”
폐부를 찌르는 한마디였다. 지금까지는 이런 행동을 해도 별다른 일이 없었지만, 대놓고 언급하니 말문이 막혔다. 기행으로 치부했던 과거의 행동들까지도 싸잡아서 비난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그때는 괜찮았지만, 이제는 무례한 일이었다. 시조는 연이은 팩트 폭격에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 모든 사태를 스스로 자초했음을 실감한 것이다.
‘못 볼꼴을 보이는군.’
분가주의 말이 틀리진 않으나, 작금의 사태는 인정과는 별개로 선을 한참은 넘은 행위였다. 비난을 하더라도, 정해진 절차를 무시해선 안 되었다.
“내가 무심했던 건 인정하마. 그러니 너희들도 이쯤에서 그만하거라.”
“여전히 우리를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군요.”
“어둠을 품은 마령이 정령과 상극이기는 하나, 이 정도로 나를 어찌할 수 있을 것 같으냐?”
“그 말도 맞기는 합니다.”
김준수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조와 수왕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전대 가주들과 전대 장로들이 있었다. 정령가를 평가할 때 가장 무서운 전력이 바로 저들이었다. 나이만 들었을 뿐, 전성기 때와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완숙한 경지에 이르렀다.
“오늘만 아니라면요.”
“무슨 짓을?”
시조는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무진은 정령원에 마령이 깃들고, 분가와 대치하자 곧바로 유정이의 뒤로 섰다. 다른 사람들이야 알고 지낸 사이도 아니고, 최소한 동기 사랑 나라 사랑이었다.
방패막이 아닌 것 알지?
몰라도 상관없지만.
“세계수가 실존하는 걸 알면 놀라시겠네. 그치?”
“……말 안 했다니까!”
무진이 속삭이자, 유정이 질겁했다.
행여나 실수로라도 세계수에 대해 발설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이나 다름이 없었다. 설령 정령가의 염원이라고 해도, 시조의 개인 사정이었다.
진작에 대화를 나누었다면 분가도 이 사달을 일으키진 않았을 텐데. 무진으로선 할 말이 많았으나, 남의 일엔 가급적 나서지 않는 편이 이롭기는 했다.
“시간을 잘 끄네.”
“그런다고 상황이 달라질 리 없잖아. 전력상 분가와 본가의 차이는 커.”
“아~! 그러니까 이 안에 본가의 주 전력이 다 있다는 거구나.”
“비꼬진 말고.”
“그걸 분가는 모르는 거냐?”
“당연히 알지. 솔직히 시조님이 없어도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야.”
시조님의 업적이야 아버지가 귀에 딱지가 생기도록 얘기해 주었다. 전설과도 같은 분으로 권왕도 한 수 접어준다고 했었다. 하지만 아버지, 고조부, 증조부, 할아버지가 건재한 상태였다. 전력 대결을 벌인다면 순식간에 제압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저러는 거지?”
“내가 너무 잘해서 시기 질투하는 거 아닐까? 하여간 이놈…. 년…. 재능이란.”
“……?”
무진은 유정이의 머리를 열어 대뇌, 소뇌, 중뇌, 연수, 교뇌 등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연구해 보고 싶어질 정도다. 이만큼이나 힌트를 계속 줬는데도, 전혀 다른 답을 내놓는 건 뇌 구조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방증이다.
이쯤 되면 두개골에 뇌수만 들어차 있다고 봐야 했다. 무겁게 대가리를 왜 들고 다니는지 모를 지경이다.
‘지수가 낫네.’
둘이 짝짜꿍할 땐 조금 많이 소름이 돋는다. 아랫집에 사는 순영이가 갑자기 떠올랐다. 어릴 때 곧잘 놀아 줬던 기억이 있었다. 어리지만 굉장히 영특한 아이였다. 누가 데려갈진 모르겠지만, 언급할 때마다 지수가 굉장히 날 선 반응을 보이긴 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직계가족이잖아. 요즘 같은 분열과 소멸의 시대에 대가족은 드물지. 안 그래?”
“다 같이 사는 것도 나쁘진 않아.”
“다 같이 죽기도 딱 좋지.”
“말을 해도, 아무리 너라도 선을 넘…… 설마?”
“나 같으면 그랬을걸.”
이제야 위화감을 느낀 유정이었다. 평소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도 이쯤 되니 외면하기 힘들었다.
언뜻 보면 지나친 기우였다. 본가의 경비는 허술하지 않았다. 외부인은 절대 뚫고 들어오지 못한다.
문제는 분가를 외부인이라고 단정할 수 있느냐였다. 분가에서 인정받은 인원만 본가로 올 자격이 있기는 하나, 배신을 알아채기는 불가능했다.
‘그럴 리가 없어.’
이게 말이 되나, 선을 넘어도 한참 넘은 행위다.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사태로 번지는데. 그걸 감수하더라도, 대외적인 시선을 무시하긴 어려웠다.
당장 칠대가문의 회합이 얼마 남지 않았다. 다른 가문이 이를 순순히 받아들이겠는가.
“절대로 그럴 일은 없어.”
“세상에 절대란 없어. 게다가 아무리 친해도 결국은 남의 가문이야.”
가족이 아닌 이상, 사정을 모른다. 다른 가문에서 감 놔라, 배 놔라 일일이 따지고 들진 않는다. 되레 정령가를 흔들어 대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칠대가문의 유대는 그 정도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하물며 가문의 이익과 맞물린다면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친 결정은 하지 않는다.
우우웅!
아니나 다를까.
마령이 증폭하며 정령원을 어둠으로 물들인다. 대정령목이 저항은 하나, 겨우 막아설 뿐. 마령은 정령력을 잡아먹으며 증식하기에 시간이 더 흐른다면 승패를 장담하기 힘들었다.
멈칫!
서둘러도 부족한 시간이거늘.
시조, 수왕, 장로들은 분가를 저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예상을 연이어 빗나가고 있어 당황한 눈빛들이었다. 당연하게 여겨왔던 사상이 무너졌을 때와 비슷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