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 정령의식
“사고를 거하게 쳤더구나.”
“건드리기에 좀 놀아 준 겁니다.”
“놀리는 값치고 100억은 과하지.”
“할부로라도 갚겠다는데요.”
무진과 두 형제의 다툼은 수왕의 귀에도 들어갔다.
오늘 벌어진 일이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았다. 그새를 못 참고 고자질하다니, 소씨, 강씨 형제의 입이 굉장히 저렴했다. 그러고서 누가 누굴 보고 고자질쟁이라고 욕하는지, 원.
실상은 소씨, 강씨 형제의 부모가 눈치가 빠른 것이다. 아들들이 본가에 오자마자 표정이 굳어 있으니 이상하게 보일 만도 했다. 표정 관리 못 한 소씨, 강씨의 연약한 심성 탓이었다.
“찔러본 거냐?”
“분가의 사업성이 훌륭한 겁니다.”
“아니라면?”
“가주님이 알아서 하셔야죠.”
언제부터인가 본가와 분가 사이에 벽이 쳐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단순히 기분만으로 분가를 감시하고 관리하려고 한다면, 더욱 소원해질 수밖에 없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본가의 뜻을 알아주리라 보고 기다렸었다.
‘이상하긴 하군.’
수왕은 될수록 가문 내에서 분란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랐다. 본가와 분가는 따로 떨어져 있지 않았다. 외부에선 본가가 분가를 차별한다는 소문도 있으나 진실을 오도한 것이다. 정령가의 본질을 위한 선별적인 조처이자, 시조께서 제정한 율법이었다.
‘자정을 바라기엔 문제가 있군.’
가문의 본질과 다르게 인간의 본능을 부정할 순 없다. 오랜 세월 희석되었고,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변화하는 세상에 발맞추어 나갈 필요가 있었다.
‘의도했든 아니든, 날카로운 구석이 있어.’
가문에서 무진의 출입을 두고 말이 많은 걸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무진의 요구를 거절할 수도 없었다. 어떻게 구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결과가 명확하게 나왔다. 따지고 보면 가문의 은인이었다. 무진의 요구는 과하기는커녕 대수롭지 않았다.
“정말로 그것으로 되겠느냐?”
“사부님을 지지해 준다면 더할 나위 없겠죠.”
“그건 좀 과하군.”
“나중에 제 개인적인 부탁을 하나 더 들어주세요.”
“내 선에서 들어줄 수 있으면 들어주마.”
“소씨, 강씨 형제와 달리 일가의 주인은 대단하네요.”
“묘하게 먹이는 재주가 있구나.”
따지고 보면 수왕도 소씨다. 같은 피를 타고 나왔는데, 다르다고 해 봤자 제 얼굴에 침을 뱉는 격이었다. 나이 많은 조카 녀석들이 무진에게 당한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의도하지 않았다면 타고났고, 의도했다면 용의주도한 녀석이었다.
“권왕이 대단한 제자를 뒀군.”
“그런 말 자주 듣습니다.”
“골치는 많이 썩겠어.”
“인생에 굴곡이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살겠어요.”
말은 청산유수였다.
수왕은 생도와 대화하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속에 무얼 품고 있는지 읽히기는커녕 감도 오지 않는 천 년 묵은 능구렁이를 대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운이 좋아서 이 자리에 있다는 세간의 평가야말로 무진을 모르고 한 소리일지도.
‘흠, 그건 좀 너무 나갔군.’
외부의 평가가 잘못되었다면 모를까, 그마저도 무진이 의도했다는 건 지나친 생각이었다. 그건 생도의 수준을 넘어 칠대가문의 주인이라도 하기 힘들었다.
“정이의 일은 고맙구나.”
“기회를 준 거죠.”
“대체 어떻게 한 것이냐?”
“유정이의 재능입니다.”
“뛰어난 건 알고 있어. 하지만 근래에 급성장한 것도 사실이지.”
“그러니까 제 비기를 알려 달라는 거죠?”
“크흠, 서로 돕고 살자는 거지. 무례했다면 미안하구나.”
수왕은 궁금했지만, 강요는 하지 못했다. 비인부전의 비기를 알려 달라는 건 싸우자는 얘기나 다름이 없었다. 그럼에도 욕심이 나는 것은 당연했다. 그만큼 딸의 성취가 실로 놀라웠다. 마치 시조의 전성기 시절을 보는 느낌이었다.
“다른 가문에선 모르겠지만, 정령의식은 가문의 중요한 행사다. 외부인인 네가 말썽을 피우면 나로선 굉장히 곤란해.”
“얌전히 보고만 있겠습니다.”
“이해가 안 되는군. 본가로선 중요한 일이나, 네겐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닐 텐데. 아깝지 않겠느냐?”
“그건 전적으로 제 소관입니다.”
주는 사람이 뭘 주든, 받는 사람이 만족한다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니 무진과 수왕의 협상은 훌륭한 거래였다.
“본가는 언제든 열려 있다.”
“명예 제자로 만족합니다.”
“그러나 유정이는 안 된다.”
“아무렴요. 관심도 없습니다.”
“……어째서?”
“인기가 많거든요. 하하하.”
좋게 보려던 수왕의 인자한 얼굴에서 미세한 실금이 갔다. 눈에 실제로 넣으면 아프겠지만, 딸은 자신의 하나뿐인 소중한 금지옥엽이었다. 그런 딸이 이딴 대접을 받다니, 믿을 수 없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정신 못 차리는 놈들이 부지기수거늘.
솔직히 지수와 비교하면 자신의 딸이 훨씬 예쁘다. 그런 딸과 스캔들이 났을 때 얼마나 걱정을 했던가.
‘거짓말이겠지?’
첫눈에 반해도 이상하지 않거늘, 화룡가의 애송이도 자기 주제를 모르고 유정이를 노렸었다.
정아, 아빠는 다 안단다.
그런데 이놈은 정말 모르겠다.
뻔뻔하기도 하고.
자기 스스로 인기가 많다고 하는 놈치고 제대로 된 놈은 없어야 하거늘. 무진을 유심히 지켜봐도, 수왕으로선 판단이 서지 않았다.
“시간이 되면 부르마.”
“예, 내 집처럼 쉬고 있겠습니다.”
누가 보면 남의 집처럼 불편하게 있는 줄 알겠다. 이미 자기 집처럼 생활하고 있었다. 오늘 밤에 있을 정령의식의 금지를 제외하면 무진에겐 출입 제한이 없다. 이는 가문의 장로급에 해당하는 자율이었다.
‘말을 요상하게 하는 재주가 있군.’
선을 넘었다거나 과하진 않은데, 듣다 보면 기분을 묘하게 했다. 마치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이 받아들인다. 누가 주인인지, 손님인지 판단이 서지 않는 주객전도였다.
‘나중에 가르침을 줘야겠군.’
자신감이 좋기는 하나, 조금만 선을 넘으면 과유불급이 되어 버린다. 그 전에 가르침을 핑계로 모난 부분을 두들겨 주면 최고급 보석으로 탈바꿈되겠지.
***
무진은 유정과 거실의 소파에 앉아 TV를 보며 차를 마시고 있었다. 차는 유정의 어머니께서 직접 담근 둥굴레였다. 고소하고 담백한 맛이 일품이었다.
“방에서 마시자니까.”
“그럴 순 없지.”
여사친의 방은 금지였다. 오해의 시발점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안방에서 힐끔힐끔 보는 어머님의 시선이 느껴졌다. 와서 같이 마시자고 하면 자긴 그런 고지식한 엄마가 아니란다. 지수가 틈틈이 영상통화를 요구하기도 하고.
“오빠들한테 돈을 받을 거야?”
“약속은 약속이지.”
“사기 친 거잖아.”
“세상엔 순진한 호구들이 많아. 후후후.”
“그렇지, 호호호…… 응?”
같이 비웃던 유정의 얼굴에 웃음기가 가셨다. 사촌 오빠들을 호구라고 해 봤자, 자기도 못지않게 무진에게 털리고 있었다. 한편으로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무진과 비교해서 그렇지, 자신과 오빠들도 기득권에 속했다. 이렇게 속절없이 당할 만큼 어수룩하진 않았다.
“다 자라려면 얼마나 걸릴까?”
“나야 모르지.”
“어서 빨리 다 컸으면 좋겠다.”
“지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우리 집이 부서지길 바라는 거야?”
“집이 좁으면 우리 집은 어때?”
“날로 먹으려는 거면 곤란하지. 더더군다나 묘목도 아니고, 뽑았다 심으면 죽을지도.”
다 큰 세계수를 본 적이 없으니, 유정이가 헛소리를 하는 것이다. 직접 봤다면 정령가도 작다고 했겠지.
세계수는 하늘을 떠받드는 일종의 천주(天柱)였다.
‘다 자라는 데 천 년이 걸린다고 했지, 아마.’
성장 속도가 매우 느린 것처럼 보이지만, 나무의 수명을 고려하면 세계수는 빠른 축에 속했다. 하물며 세계수는 최소 1개의 구(區)보다 더 크다.
‘성장촉진제가 없다면 말이지.’
각성과 과학의 결합을 통해 성장 속도를 끌어올릴 수 있었다. 지금도 이 분야에선 우리나라가 제법 선구자 축에 속했다. 성장촉진 비료에 마법과 강화술로 강화한다면 더욱 빨라질 수 있었다. 다만, 인간이나 생물에게 쓰기에는 노화 촉진의 부작용이 크다.
여사친과 노가리를 깠더니 시간은 잘 갔다. 영상통화 속 지수도 감시의 눈초리를 끄지 않아서 아슬아슬했다.
자정이 되어 갔다.
무진과 유정은 소파에서 일어났다.
유정에게 이번 정령의식은 중요했다. 가문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즉, 미래 정령가를 이끌어 갈 후계를 정하는 자리였다. 본가와 분가 내 후계자들의 정령력을 판별한다.
정령의식은 정령가의 밀지에서 이루어진다. 밀지는 거대한 수목원을 방불케 했다. 내부에 들어갈 수 있는 인원은 용인된 직계혈족과 가주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돔처럼 되어 있는 밀지, 정령원.
무진은 수왕과 유정의 뒤를 따랐다. 정령가의 장로, 분가의 분가주와 후계자들이 정령원으로 모였다.
소씨, 강씨 형제도 있었다.
씨익!
무진은 그들을 보고 웃었다.
소씨, 강씨 형제는 외면하지 않은 채 소리 내지 않고 으르렁거렸다. 배후로 선 소씨 형제의 아버지 소연준과 강씨 형제의 어머니 소연해가 불편한 심기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맹랑한 짓을 했더군.”
“누가 보면 제가 먼저 건드린 줄 알겠네요. 저는 가만히 있었습니다. 굳이 와서 시비를 걸기에 고대로 갚아 줬을 뿐입니다.”
“네놈이 권왕을 믿고 설치는 모양인데,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세간의 눈이 걸리긴 하지만, 사부님이 과연 그런 걸 신경 쓸까요?”
“끝까지 해보자는 거냐?”
“약속을 지키면 되는 일입니다.”
소연준은 매서운 기운을 압축하여 위압을 가했다. 이 건방진 애송이가 더는 설치는 꼴을 두고 보지 않았다. 하물며 숭고한 정령의식에 외부인이 들어오는 것도 못마땅했다.
스윽!
기세가 끊어졌다.
소연준이 위압을 끊어 낸 수왕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형제긴 하나, 가주와 직계의 차이는 넘을 수 없다.
“이놈을 감싸는 거냐?”
“말이 짧구나, 동생아.”
수왕의 무심한 표정에 소연준은 속으로 이를 갈 뿐, 드러내진 못했다. 가주 경합에서 압도적으로 발렸던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 정도로 수왕은 가문에서도 천재로 인정받았다.
“……송구합니다.”
“다 큰 애들이다. 그쯤 하거라.”
큭!
애들 싸움이라고 하기엔 자식들의 나이가 많았다. 유정이를 늦게 낳아 족보가 꼬였다고 봐야 했다. 여하튼 이 문제를 걸고넘어지면 자신들이 자식 교육을 잘못했다고 시인하는 꼴이 된다.
그렇다고 해도 이대로라면 저 싹퉁머리 없는 새끼한테 고스란히 100억을 뜯길 판이다. 한두 푼이면 더러워서 주고 말지, 100억이 그런 액수인가? 주지 못할 정도는 아니더라도, 무척이나 아까웠다.
소연준과 소연해는 분하지만, 이쯤에서 물러섰다. 괜히 긁어 부스럼이 되어 자식들의 앞길을 막을 수 있었다.
“의식이나 공정하게 진행해 주십시오.”
“네가 걱정할 일은 없을 거다.”
의식을 가주가 진행하면서 유정이에 대한 혜택을 염려하는 소연준과 소연해였다. 비록 못난 짓을 하기는 했어도, 최소한 자신들의 뒤는 이을 수 있어야 했다.
드륵!
이중으로 되어 있는 정령원의 문이 안에서 열렸다.
수목원처럼 생겼지만, 기존의 수목보다 족히 배는 더 크고 길게 뻗어 있었다. 천장이 워낙 높아서 닿지 않을 뿐. 밤이 되자 달이 3개가 떴다. 만월의 달과 천장에 인위적으로 달을 2개 더 달아 놓았다.
수목원의 중심으로 들어서자, 의식을 치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특히 천장과 가장 가까이 있는 거대한 수목이 인상적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세계수로 착각할 수도 있으나, 정령목 중에서도 s급 대정령목이었다.
수목원의 나무들이 일반 나무보다 큰 연유가 대정령목의 영향이었다. 정령원의 구조상 정령력이 집중되어 외부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하고 있었다.
대정령목의 중심에는 세계수처럼 물웅덩이가 있었다. 수액이 고이고, 고인 웅덩이였다. 다만, 세계수가 거대한 호수를 연상케 한다면 크기와 농도의 차이가 있었다.
정령수 앞으로 가문의 어른인 장로들이 모였다. 수명이 다른 가문보다 길고, 동안이라 나이를 가늠할 수 없으나 가장 어린 장로가 90살이다.
응?
가주가 의식을 진행할 줄 알았던 분가는 의아한 기색이었다. 앞으로 서서 의식을 진행해야 할 가주가 장로들과 나란히 서 있었다.
곧 의문은 경악으로 바뀌었다.
“……시조시여!”
“시조께서 어찌?”
가문의 시조가 되는 사내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시조라고 하지만, 동안이라는 표현은 어폐가 있었다. 굉장히 젊은, 나이를 먹지 않은 20대라고 해도 믿을 수 있었다. 시대가 바뀌었다고 해도, 상식적이진 않았다. 하지만 사위를 지배하는 명경지수의 눈빛은 세월이 전해졌다.
정령가의 시조, 소민성.
직계혈족으로 따지면 갭이 최소 100년이 넘게 차이가 난다. 아직까지 살아 있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이다. 누군 관뚜껑에 들어가서 백골이 되어 있을 텐데, 누군 생생하게 청춘을 유지하고 있었다.
정령가의 살아 있는 화석이라고 불리는 연유가 있었다.
“내가 나온 게 못마땅한가 보구나.”
“……아닙니다!”
“쾌차를 경하드립니다!”
시조의 등장에 놀란 분가의 가주와 직계는 즉시 고개를 숙였다. 10년이 넘도록 얼굴을 비추지 않아 시조께서 등선했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정령가에서 시조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가주조차도 시조의 명을 따른다. 즉, 정령가는 시조의, 시조에 의한, 시조를 위한 가문이었다. 고로 시조의 뜻에 반대되는 일은 행할 수 없다.
“의식을 진행하도록.”
“예, 시조님!”
정령의식이 가문의 숭고한 의식임은 분명하나, 식이 특별하진 않다. 정령수를 마시고, 시조의 세례를 받으면 끝이 난다.
의식은 곧바로 시작했다.
“달빛 숲의 자손이여, 대정령의 가호가 있기를 바라나이다.”
어째서 자정이 넘어서 의식을 치르는지 알 수 있었다. 만월에 근원의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역순으로 8분가부터 차례로 정령수를 마시고, 시조의 세례를 받았다.
의식을 치를 때마다 정령력이 요동을 친다.
호오.
마지막 순에 있던 유정이 나서자, 시조는 이채를 띠었다. 지금까지 여러 후손을 봐 왔지만, 유정이는 달랐다.
솨아아아!
정령력이 휘몰아쳤다.
스윽!
시조, 소민성이 무진을 보았다. 이 녀석이 온 후, 몸과 마음을 갉아먹었던 탁기와 배덕한 어둠을 해결했다. 그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거늘, 이제는 정령가의 미래를 보여 주었다.
“너야말로 달빛 숲의 주인이자 미래이니라.”
시조의 인정.
세례를 받은 이후로 누구도 저와 같은 찬사를 받은 적이 없다. 이제 다음 세대는 정해진 바와 다르지 않았다.
크크크크!
그 순간이었다.
신성한 의식을 비웃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로선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이제야 비로소 자신들의 차례가 왔다고 여겼거늘, 과거의 망령이 나타나 일을 망치고 있었다.
“끝까지 다 해 처먹는군.”
솨아아아!
사악한 어둠이 요동치며 정령원을 뒤덮는다.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모두가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