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 그 남자들의 사정(2)
영웅은 어려운 시기에 나온다고 했던가.
반성운맹주, 배준상.
그분은 성운맹의 부정을 밝히고, 미세한 타격이라도 입히셨다. 일례로 강무진이 밥을 먹고 있다가 의자가 부서지면서 엎어져 망신이 뻗쳤었다. 사전에 부실한 의자를 준비하고, 그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도록 인원을 배치한 것이다.
강무진과 함께 성운맹의 핵심 맹도인 유정, 혜진, 상원, 4인방도 난감한 상황을 겪었다. 범인을 찾으려고 사방팔방을 돌아다녔음에도 결국 밝히지 못했다.
잔뜩 위축되었던 반성운맹도들에겐 작은 위안거리라도 주었다.
완벽한 소확복, 소소하지만 확실한 복수였다.
“보았느냐?”
-보았습니다, 위대한 맹주님이시여!
-맹주님의 전과를 찬양하라!
광신도가 따로 없었다. 망신당한 성운맹도의 영상을 볼 때마다 속이 시원했다. 특히 그들에게 당했던 맹도들은 열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들은 뭘 해도 안 됐거늘, 맹주께선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고 있었다.
“너희들도 할 수 있다. 포기하는 순간 끝나는 것이다. 자신감을 가져라.”
-우리를 이끌어 주시옵소서!
“하나, 경거망동은 맹을 위태롭게 할 뿐, 매사에 계획적으로 신중히 행동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우리의 세상은 반드시 올 것이다. 믿느냐?”
-천명을 따르겠나이다!
이토록 음산하고 눈에 띄지 않는 지하의 넓은 공간은 어떻게 빌렸대?
음지에 모인 반성운맹의 수가 꽤 되었다. 하나 모사재인 성사재천이라고 했다. 아직은 때가 되지 않았기에 세력을 모으고 있었다. 성운맹의 부정이 밝혀지는 순간 거사를 일으켜 혁명을 이루리라.
한껏 신이 나서 선동하고 있지만, 준상의 내심은 현타가 세게 오고 있었다.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이라고 했던가. 이게 다 무진이 준비한 수에 지나지 않았다.
-당해 줄게.
성운맹에 반기를 든 생도들이 연일 실패하는 것과 달리 준상이 성공하는 연유였다. 다만, 언제까지 이 약발이 통할지는 미지수다. 선동, 날조, 왜곡만으로 집단을 통제하진 못한다.
핵심 수뇌부와는 따로 얘기를 나누었다.
“광기만으론 복수할 수 없어. 칼을 담금질하듯이 마음속에 비수를 심도록 해.”
“너도 참 대단하다.”
“그 자식한테 당해 봐.”
“이러다 큰일 날지도 몰라.”
“두려운 녀석은 빠져.”
준상은 거사를 주도하는 생도의 면면을 살폈다. 무진이 내어 준 진실의 아이템을 사용해 속셈을 파악했다.
‘미안하지만, 나라도 살고 봐야지.’
무진의 말대로 의도를 숨긴 채 암약하는 위험한 녀석들이 있기는 했다. 어쩌면 진짜는 이놈들일지도. 지령이 내려오는 즉시 거사는 행해질 것이다.
단, 반성운맹에 이롭지는 않았다.
‘너무 조용하잖아!’
그럴 새낀가.
***
사박, 사박!
흰 눈이 내려와 바닥에 소복이 쌓인다. 설경에 취하지 않고, 이걸 언제 다 쓸까? 그런 걱정을 한다면 당신은 군바리 체질.
정원에 대형 텐트가 있고, 바비큐 화로대에선 붉디붉은 숯이 고기를 원한다. 모든 고기를 익혀 버리고 말겠다는, 숯의 화력이었다. 전설의 백탄이라도 사용하고 있는 건가? 캠핑에서 쓰긴 아까운 화력이다.
불판에 고기를 올리자, 캠핑의 낭만이 폭발한다. 고기가 익는 소린지, 빗소린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츠으으으!
안심, 등심, 토시, 채끝이 익어 가는 소리는 떨어져 내리는 눈처럼 아름다웠다. 소시지와 김치찌개는 캠핑의 국룰로 보글보글 맛있게 익는다.
도심의 아파트에선 즐기지 못할 정원 있는 단독주택의 낭만이 이런 건가? 대형 텐트를 쳐도 부족하지 않을 넓은 정원이 있기에 가능했다. 물론, 확장 마법과 방음 마법이라면 아파트에서도 가능하나, 운치는 덜했다.
무진은 기대하는 지수, 고티아를 돌아보았다.
“눈 내릴 때는 캠핑이지.”
“초여름에 눈이 낭만이냐? 좀 상식적으로 살자!”
“눈이 내리지 않으면 이 맛이 안 나잖아.”
“보통은 맛을 내겠다고 계절을 바꾸진 않아!”
결계를 조절하여 사계절을 제 맘대로 통제할 수 있었다. 여름에도 눈이 내리는 광경을 만들어 내, 캠핑의 낭만을 즐겼다. 재미를 위해 자연의 이치를 마음대로 어겼다.
“우림아, 밥 먹을 때 핸드폰 보는 거 아니다.”
“이것만 보고.”
“자꾸 그러면 압수다.”
“안 돼! 이건 내 생명이라고!”
언제부터?
실내 정원에서 잘 자라고 있는 세계수가 들으면 서운할 소리였다. 내부에 스마트 TV를 비롯해서 편의 시설을 설치해 놓았더니 밤새도록 틀어 놓고 있었다. 나무도 잠을 자야 잘 자란다고 하지 않나, 빛이 강해서 세계수에 영향을 받으면 곤란했다.
‘적응이 빨라서 좋다고 해야 할까?’
무진은 신제품 컴팩터를 수집하는 고티아의 정보력에 혀를 내둘렀다. 아직 국내엔 출시도 되지 않은 물건들이 방에 쌓였다. 가르쳐 주지도 않은 해외 직구는 어떻게 한 거야?
‘돌아가고 싶다고 징징거리지 않아서 다행이긴 한데.’
사람이 사람답고, 엘프는 엘프다워야 했다. 이젠 고티아가 하이엘픈지, 히키코모린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그나마 자기 할 일은 잊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더덕주를 꺼냈다. 일반 더덕이 아닌 던전에서 자라는 더덕으로 일반 더덕보다 향과 맛이 진하다. 술을 담그면 소화 향상에 도움이 되었다.
“술은 낮술이지.”
“기자들이 알면 벌 떼처럼 달려왔을 텐데.”
“알코올제로 각성자에겐 면죄부를 줄 때도 되지 않았나.”
“와, 이젠 기득권 발언도 서슴지 않네!”
고기에 술이 빠지면 쓰나.
고티아도 고기를 먹게 되었다. 처음에는 거부했지만, 맛을 들이자 없어서 못 먹는 육식주의 엘프였다.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른다고. 영영, 숲의 마을로는 돌아가기는 글러 버린 상태가 되어 갔다.
무진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던 파파라치들도 많이 줄었다. 끝까지 기회를 노리고 있는 파파라치는 있으나, 단독주택의 결계를 통과하지 못했다. 밖에서 보기엔 결계에 저장된 영상이 송출될 뿐이다.
조용하다 못해 지나치게 단조로운 일상이라, 굉장히 이질적인 위화감이 들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언론이란 빨리 끓어오르고, 빨리 식는다. 언제까지 다큐멘터리를 의리로 봐 주진 않는다.
그저 언제든 터질 때를 대비해 킵해 놓기는 한다. 알다시피 여론은 과거의 잘못을 용서하는 아량 따윈 없다. 더 강하게 물고 늘어져서 짓밟으면 짓밟았지.
성운맹주로 추대된 지수는 무진의 뜻대로 생폭 방지 캠페인을 강화했다.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부분도 없다고 하기 힘들었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할 수도 있었다.
“강압적이란 비판도 있던데, 이대로 운영해도 탈이 나지 않을까?”
“생폭러는 영원히 고통을 받아 마땅하지. 작은 부작용은 무시하고 넘어가.”
“갱생의 기회조차 주지 않는 거야?”
“그 시간에 선량한 생도들만 지키면 돼.”
“얄짤없네.”
무진은 성운맹의 배후에서 생폭을 저지르는 생도의 블랙리스트를 작성해 놓았다. 사회에 나가서도 절망하도록, 장기간에 걸친 계획이었다. 남의 눈에 피눈물 나게 했으면, 본인도 연좌제를 당해 봐야지.
선한 사람이 잘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성운맹, 가문, 길드, 재계를 연계한 것이다. 암암리에 인생이 잘 안 풀리면 생폭임을 인정해야 했다. 본인이 한 짓을 잊었어도, 그 상태로 영원히 고통받으면 된다.
“독재 같은데.”
“현명한 독재가 아둔한 민주주의보다 나을 수도 있지.”
“그거야 네가 하는 거니까 유지되는 거고. 그다음은?”
“기도할게.”
“졸라, 무책임하네!”
한 치 앞을 장담하기 어려운 현실이었다. 무진은 자신의 사후까지 걱정할 만큼 멀리 보진 않았다. 그때에도 현명한 사람이 없으면 시스템을 뭉개 버리면 그만이었다.
내가 만들었으니, 내 손으로 무너뜨린다.
지수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번 칠대가문과 대형 길드의 연합도 수상하다. 전적으로 무진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한 번은 운이지만, 운이 겹치면 고의가 다분하다.
“잠깐, 가문과 길드 연합의 부정적인 여론도?”
“살짝 불만 붙였지, 나머지는 알아서 활활 잘 타던데.”
“유정이가 불쌍하다.”
“모처럼 의욕을 불태우는 녀석한테 못 하는 말이 없구나.”
친구의 성장을 위해서라는 무진의 가증스러움에 지수는 먹고 있던 고기를 토할 뻔했다. 순전히 본인의 계획을 위해서면서, 저래도 되나 싶었다. 친구 관계를 알뜰, 살뜰, 발골하고 있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출입 허가를 받은 유정이 결계 안으로 들어왔다. 캠핑을 즐기고 있는 무진, 지수, 고티아를 보며 헛바람을 삼켰다. 그도 그럴 것이 텐트 주변만 눈이 쌓였다.
“생쇼도 가지가지로 하네.”
“지수가 너 불쌍하대. 나도 강요는 안 해. 그만하고 하산해라.”
가고 싶으면 가라는 무진의 축객령에 유정이 발끈하며 지수를 노려보았다.
“섬에서 무슨 하산이야! 그리고 지수야, 너 이러는 거 아니다. 내가 지금 얼마나 중요한 고빈지 알면서 이러기야?”
“이게 다 너 이용하려는 개수작이라고!”
“내가 몰라서 그래!! 너도 알다시피 멈추란다고 멈출 수 있는 상황이 아니잖아!”
“충고를 해 줘도 지랄이네! 네가 자초한 거니까, 나중에 후회하거나 질질 짜지 마, 존나 처맞는다!”
“당근빠따지!”
지수도 유정이 포기할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무진이 설계한 덫은 치명적이었다. 발을 들인 이상, 정령술사는 절대 빠져나갈 수 없다. 그녀의 정령력과 정령술이 한 단계 비상할 기회였다. 무엇보다 가문 내 경쟁 구도를 유리하게 바꿀 수 있었다.
짝!
무진은 박수로 열기를 환기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일단 먹어.”
“죽기 전 사형수도 진수성찬을 대접하지.”
“도축 전 돼지가 포동포동하더라고.”
과연 지수와 유정은 무진의 친구들이었다. 항시 의심하고, 곡해하는 데 특화되었다. 매번 무진에게 당하다 보니 피해망상증 말기였다.
“부정하지는 않을게.”
“보통은 부정하지 않나?”
“너무 솔직하잖아!”
포식한 후, 원하는 대로 토할 때까지 훈련하는 거다.
고티아의 안색도 시퍼렇게 질렸다. 무진의 훈련은 빡세다는 기준점을 언제나 초월했다. 게다가 오늘처럼 의욕을 불태우는 날이면 오버트레이닝 확정이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자신은 가만히 있다가 봉변을 당하는 것이다.
고티아는 억울하다.
난 가만히 있었다고 항변해 봤자, 이미 흥정에 들어갔다.
“1년 치로 해 줄게.”
“……3개월로 하자!”
무진의 심상 훈련이 정상 궤도에 올랐다. 3년 내외로는 시간 조절이 가능해졌다. 빠듯한 훈련 일정에서 시간 단축하는 데 심상 고문…… 훈련만 한 게 없었다. 당하는 입장에선 악몽이지만, 단기 훈련의 성과는 확실했다.
심상 훈련 후에는 현실에 적응해야 했다. 깨달은 그 기분 그대로, 심득의 감각이 사라지기 전에 육체를 최적화하는 것이다. 심상 훈련과 실제 훈련의 병행은 굉장히 효과적이었다.
“이제 유정이도 우리 식구지.”
“……배신하면 가만두지 않는다는 말로 들린다!”
비밀의 공유.
유정은 무진의 실체를 알아 갈수록 막막했다. 지수가 괴물처럼 강해서 무진과 비슷한 줄 알았다. 웬걸, 이놈은 상식적인 범주에서 판단하면 곤란한 괴력난신이었다.
지금도 봐라, 눈을 한곳에만 내리게 하고. 훈련을 위해 심상을 제 맘대로 조절한다. 이게 생도가 할 수 있는 일인가? 이제까지 당한 이유가 있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어떻게든 한 방이라도 먹이겠다고 발버둥을 쳤다니.
‘존나! 억울하네.’
애초에 불가능한 일에 도전한 꼴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맨땅에 헤딩하고 편하게 기절했지.
“훈련하자.”
무진은 친구들을 심상 속으로 날려 버린 후 흐름을 예의 주시했다. 궤도에 오르긴 했어도, 갈고닦을 필요는 있었다. 만사 불여튼튼이라고, 준비는 항상 위험하지 않을 때 해야 한다. 닥치고선 어떻게든 되겠지는, 굉장히 무책임한 발상이었다.
‘권능을 레벨업하려면 심상을 극한으로 다듬어야 해.’
무신과 투신을 불러올 발판도 중요했다. 심상으로 최대한 똑같이 구현해도, 실제보다 효과적이진 않다. 투신과 무신을 필요할 때 부르는 것도 나쁘지 않고.
‘하나의 패로 쓰기엔 적절하겠지.’
이제는 훈련이 아니라, 만약의 사태를 방지하기 위한 묘수였다. 투신과 무신이라면 사부님과 비슷한 수준으로 봐야 했다. 암중 세력의 허를 찌르기에 충분하다.
물론, 투신과 무신의 허락은 구하지 않았다. 나중에 받아도 되고. 원래 세계에서 권태기에 빠진 무인을 꼬드기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였다. 강자를 만나게 해 준다고만 해도 밥도 안 먹고 찾아올 테지.
정 안 되면 직접 패면…… 대련을 빙자…… 대결을 해 드리면 된다. 무림인에게 약육강식만큼 합리적인 수단이 어디 있겠는가.
흐억!
지수, 유정, 고티아는 언제나처럼 비명을 지르며 현실로 돌아왔다. 매번 받는 훈련인데도 적응은커녕 항상 그 이상으로 괴랄하다. 특히 지수가 느끼는 감정은 섬뜩함이었다.
‘세상을 구하려고 발악한 내가 병신이었네!’
굳이 미래에서 돌아오지 않더라도, 무진이 있는 세상이 망할 리 만무했다. 훈련의 유무는 중요하지 않았다. 자기 스스로 최적화된 결과를 찾는 데 특화했다. 그만큼 작금의 현실이 주는 충격이 엄청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