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 집들이(4)
‘저 노인네들이 치매가 들면?’
‘가까이 가면 안 되는 거 아냐!’
권왕과 마제 정도면 친분을 다져야 하나, 저런 식이면 다가가기도 겁난다. 왜 다른 칠대가문과 대형 길드에 비해 권왕가 무극 길드의 인원이 적은지 이해가 되었다. 저런 성질머리를 가진 주인이 떡하니 위에 있는데, 들어가고 싶은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이는 군대와 같았다. 환경이 힘든 게 아니라, 사람이 힘들다는 말이 나온 연유였다. 실제로 훈련이 힘들다고 자살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사람이 힘들어서 자살하지.
끄응!
권왕가의 가주, 유경중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저출산 시대에 인재를 뽑아도 부족하거늘.
무진의 친구들을 꼬드기고 있는데, 저러면 대체 어쩌란 건지. 가문의 이름에 먹칠하지만, 아버지인 데다가 주먹이 깡패였다.
하나, 명색이 가주가 한마디도 하지 않으면 모양새가 빠질 수밖에 없다.
일단, 정중히 말렸다.
“아버지, 그만하시지요.”
“아들아, 이놈이 하는 말을 듣지 않았느냐. 내가 유치해서, 참 나!”
“오늘부로 가문을 닫을까요?”
“말이 왜 그렇게 나오냐?”
“저도 이런 꼴 그만 보고 싶어서요. 다시 가주 위에 오르세요. 그리고 맘대로 하시면 됩니다.”
“이놈아, 나는 줬다 뺏는 몰염치한 인간이 아니다.”
“주긴 뭘 줘요, 그냥 놓고 갔으면서!”
용돈으론 이제 협박이 안 된다. 무진이 이놈이 돈이 썩어 나는지, 가문에는 협조하지 않으면서 아버지의 용돈으로 200억을 드렸다. 아버지한테 200억을 줬으면, 장인한테는 최소 300억은 줬어야지.
쩝!
권왕은 아들의 강경 발언에 꼬랑지를 말았다. 다시 가문을 맡는다고 상상하니,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답이 안 나온다.
“너, 운 좋은 줄 알아라.”
“내가 할 소리다.”
권왕과 마제의 말싸움은 끝까지 유치했다. 저것이 정말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초인들의 다툼인지 참담함을 금할 수 없다. 어디 가서 말도 못 할 지경이다. 세계에 내놓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무진은 친구들과 있었다.
지수를 필두로 유정, 혜진, 상운, 예슬, 태수, 구용, 4인방이 자리했다. 이렇게 보니 구용 선배를 제외하고 교류전의 주역들이었다. 아카데미의 장래가 밝았다. 진심을 떠나 기뻐하고 있는 교장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이쪽은 고우림이라고, 우리 집 식모야.”
“반가워, 고우림이라고 해. 스물두 살이니까, 센빠이라고 하면 된단다.”
“……?”
여자들은 경계심을, 남자들은 이상향을. 줏대 없는 상원이는 고우림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역시 남자는 처음 만난 미녀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포용적인 존재였다.
유정은 묘한 느낌을 받았다. 자신을 상회하는 미녀는 좀처럼 만나기 힘들다. 그러나 눈을 떼기 힘든 이 감정은 이상했다.
혹, 여자한테 매력을 느끼는?
‘난, 정상이야!’
무진은 성운맹의 핵심 멤버들에게 추후의 방향을 물어보았다. 성운맹도 2년 차가 됐으니 집들이와 함께 시무식을 겸했다. 각자가 생각하고 있는 방향이 있을 것이다. 이제까지는 목적을 위해서 성운맹을 창립했다면, 차후에는 맹도들이 만들어 가는 성운맹이 되어야 한다.
“손 떼려는 수작 모를 줄 알아!”
“이제 귀찮다 이거지.”
“하긴, 빼먹을 대로 다 빼먹었지.”
“단물 빠진 성운맹은 필요 없다는 거냐!”
문제는 이 동기 새끼들이 자신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점이다. 합리적인 민주화를 만들어 보려고 했더니, 독재를 선호하고 있었다. 그 말은 자신들은 책임지기 싫다는 것이다.
“우리가 누굴 닮겠니?”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끝까지 책임져라!”
우리는 다 너를 보고 배웠다는, 상원의 면피성 발언에 어찌 된 연유인지 모두가 공감했다. 배움에 위아래가 없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내가 설마 그러겠어. 애초에 그럴 작정이었으면 우리 지수를 내세우지도 않았지.”
“와, 우리 지수래!”
“이럴 때만 우리 지수였어!”
이것들이 이제는 내 속을 다 들여다보네.
하아, 호랑이 새끼들을 키웠구나.
동기라고 방심했다가는 등에 칼이 꽂히겠는걸.
무진은 기꺼운 마음이었다. 귀찮은 일은 질색이기는 해도, 경쟁심은 전력 향상에 중요한 기반이었다.
‘왜 지수만 우리냐고!’
‘우리도 있는데.’
‘아직 기회는 있어.’
남자의 마음은 갈대라잖아.
유정, 혜진, 예슬은 포기하지 않았다. 언제든 빈틈이 생기면 지수의 빈자리를 차지할 준비를 했다.
마음을 몰라주는 선배와 동기의 외면에도 무진은 친절을 잃지 않았다.
“그럼 온 김에 집 안 구경할래?”
“훈련장으로 데려가려는 거 모를 줄 알아!”
“내가 설계해서 그런 게 아니라, 훈련장이 참 좋더라고.”
“이젠 감언이설에 넘어갈 레벨이 아냐.”
이렇게나 진심을 몰라주다니, 아주 눈치가 빠르다. 무진은 그 즉시 다른 방법으로 접근했다.
“마나컨트롤이나 심법을 운기해 봐.”
“그런다고 할 것 같아!”
“해 보고 나서 말해.”
“안 되는 건 안 돼.”
무진의 개수작이 분명하나, 충신은 있기 마련이다. 구용 선배가 놀란 얼굴로 돌아보았다.
“주군, 마나가 쌓이는 속도가 다릅니다.”
“그럴 리가!!”
여기가 계룡산의 용한 폭포도 아니고, 간척 사업을 한 매립지였다. 마나의 농도가 다른 곳보다 높을 리 만무할 텐데. 하나둘 심법을 운용하자, 놀란 기색이 완연하다.
씨익!
무진의 미소를 본 선배와 친구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부정해 봤자 소용없는 짓이었다.
“훈련장은 더 잘되는데.”
“……진짜 개자식이네!”
확실히 오고 싶게 하는 집이다. 마나를 하루라도 빨리 쌓으려면 무진의 훈련장으로 와야 했다.
무진은 친구들에게 집을 보여 주면서 겸사겸사 훈련을 시켜 주었다. 밥 잘 먹다가 졸지에 특훈을 받게 된 것이다.
점심부터 시작한 집들이는 저녁까지 이어졌다.
끊임없이 나오는 음식에 배가 부를 텐데도, 멈추기 힘든 요리의 향연이었다. 한국, 중국, 일본, 태국, 유럽, 미국, 남미의 요리가 입맛에 맞게 개량되어 나왔다.
“더는 못 먹어!”
“음식으로 우릴 죽이려고 하는 것 같아!”
“근데 왜 맛있어!”
“미치겠네, 이거 정말 네가 만든 거야?”
“어떻게 이래!”
진 회장의 식구들도 놀라는 기색이었다. 어설픈 요리였다면 맛만 보고 끝낼 텐데, 정말 기도 안 차는 솜씨의 향연이다.
집들이를 마무리한 후, 무진은 유정을 2층 방으로 데리고 왔다.
“할 말이 뭔데?”
“정령술을 배워 보고 싶어서.”
지수가 아래층에서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 기대는 했지만, 무모한 짓은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무진의 말은 예상외였다. 무공이나 마법이 두드러질 뿐, 정령술도 탑급에 속했다. 따로 정령술을 배운다고 특별히 달라지진 않는다.
제멋대로 나와서 돌아다니는 요나만 봐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외관상 느껴지는 기운은 중급인데, 그 이상 같았다. 지금부터는 꾸준히 정령력을 수련하고, 정령과의 교감 능력을 키우는 것이 전부였다.
실제로 정령술은 정령 친화력의 유무가 마법사의 마나보다 더 중요했다. 정령 친화력이 없으면 애초에 진입하기 힘든 분야였다.
“솔직히 나보다 청출어람이잖아. 다시 배우겠다는 것도 아니고, 이해가 안 되는데.”
“정령술 하면 정령소가, 정령소가 하면 정령술이잖아. 권왕가나 무극 길드처럼 날 후원해 주면 더 좋고.”
요컨대 간판이 필요하시다.
이렇게 대놓고 노골적인 요청은 처음이라 천하의 유정이도 당황스러웠다. 순간 가문에 똥칠한 적이 있나 지난 과거를 돌이켜 보게 했다. 다행히 준수한 성적표를 받았다.
“우리 가문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아무나 후원하진 않아.”
“정령가의 금지옥엽이 부탁하면 좀 달라지지 않을까?”
“그거야 그렇지만, 내가 왜?”
“협조하면 우리 집에서 훈련할 수 있게 해 줄게.”
유정이는 코웃음을 쳤다. 무진의 집이 정령 친화적이긴 하지만, 정령목이 있는 가문보다 낫다고 할 정도는 아니다.
“나 쉬운 여자 아니거든!”
“네 정령도 여기서 놀고 싶어 할걸.”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는 거야?”
“못 믿겠으면 불러서 물어봐.”
다른 사람이 말했으면 물어보기는커녕 정령을 소환하지도 않았겠지만, 유정은 무진의 괴행을 너무나 많이 봐 왔다.
계약 정령인 풍야를 불렀다.
-나는 좋아.
“우리 집보다?”
-응.
“어째서?”
-정령계 같아서.
소환된 집보다는 자기 집이 낫기는 하지만, 수년을 함께한 정령가보다 좋다니. 유정으로선 배신감을 느꼈다.
‘잘했다.’
-……별말씀을!!
무진의 시선에 풍야는 움찔했다. 이전에 봤을 때와는 다른 느낌, 정령왕의 권능이 전해졌었다. 감히 호의를 거절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우리 같이 정령사로서 마스터에 올라 보자고.”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같은데.”
“정령합일도 완성해야 하지 않겠어.”
“진짜 이런 놈이 아닌데?”
지나치게 건전해서일까, 유정은 심한 위화감을 느꼈다. 마치 자신을 발판으로 삼고 교두보를 세우려는 것 같았다.
“언제까지 금지옥엽으로만 살 거야? 혹시, 네 친척 오빠에게 양보하려고?”
“누가 그렇대!”
유정이 발끈했다. 근래에 들어 가문 내의 기류가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가문의 율법이 폐쇄적인 편이라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석연치 않았다. 그런 데다 백부와 숙모의 파벌이 강성해졌다.
‘권력이란 그런 거지.’
규모가 클수록 어떤 가문이든 마찬가지였다. 내부를 단속하려면 누구도 함부로 넘보지 못할 힘을 가져야 했다. 균형이 깨지는 순간 언제든 역린이 되어 최악의 상황이 되기 마련이다.
‘조만간 있을 가문 회의가 재밌겠는걸.’
정기적으로 칠대가문은 연합하여 회의를 연다. 이를 위해 지수 아버님과 은밀한 밀담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