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 집들이(2)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은 아니다.
‘돈만 있으면, 동거할 수 있지.’
고딩 엄마, 아빠가 문제가 되는 건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부모에 의지하는 행위 때문이다. 딴에는 돈보다 사랑이라고 주장하지만, 현실은 돈 앞에서 철저하게 무너지곤 했다. 이마저도 극복하고 자립해 나가는 예는 흔치 않았다.
성인이 돼서도 부모에게 의지하는 것도 문제지만, 자기 앞가림도 못 하는 주제에 가정을 차리는 행위도 문제였다.
‘나완 상관없는 일이지.’
무진은 아버지의 명예에 흠집이 날 행위는 철저히 차단했다. 성인이 되었다면 모를까, 미성년자 신분에 어긋나는 행위는 하지 않는다.
지수와도 적정한 선을 그었다. 지금 죽을 것같이 사랑해도, 불같은 열정은 오래가지 않는다.
‘사랑보다는 정이지.’
그 사람에 대한 정은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는다. 곁에서 오래 보면서 됨됨이를 확인했을 때 비로소 신뢰를 할 수 있었다.
무진은 사랑보다는 예의, 의리, 정을 중시했다. 아무리 사랑해도 예의가 없으면 제외했다. 특히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가부장적인 마인드를 존중해야 한다. 고리타분하다고 욕해도 어쩔 수 없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듯, 그게 싫으면 본인이 떠나야겠지.
“아카데미에 소문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우리 사이에 문제 될 건 없지 않나. 그만 튕기고, 이제 좀 편하게 하자. 이 나이 먹고 언제까지 질질 끌라는 거야? 너 알잖아, 나!”
“갑자기 너무 적극적인데.”
“그래서 싫어?”
“한 여자에게 정을 주기엔 날 사모하는 애들한텐 슬픈 일이니까.”
“……미친놈!”
무진의 자뻑 가득한 응수에 지수는 뒷목을 잡을 뻔했다. 이제 잡은 고기다 이건가, 밀당의 차원이 다르다. 아니면 말고에 특화되었다. 이쯤 되면 화가 날 만도 한데, 이 개 같은 스타일에 적응이 된 내가 싫다.
‘잘못 끼면 상간녀 되는 거야, 조심해야지.’
자기 위치를 정확히 파악한 고티아였다. 아침 막장 드라마가 해롭기만 하지 않은 순기능이었다. 눈치가 빨라지고, 듣는 귀가 밝아진다. 다만, 주인공이 아닌 악녀가 될 뿐이다.
“그리고 고티아?”
“왜, 무진 군?”
“이제부터 고티아가 아니라 고우림이라고 했잖아.”
“스미마센, 실수!”
“이번에는 일드냐.”
제인 누나를 통하니, 신분증은 금방 나왔다. 블랙마켓이 일 처리 하나는 엄청나게 빨랐다. 공식적인 루트는 산더미 같은 서류 준비는 물론, 소관이 아닌 경우 담당 부서를 오고 가기를 반복해야 했다.
고티아의 이름은 고우림, 나이는 20세로 무진의 집에서 정원사로 일하기로 되었다.
지수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언니라면 이번 기회에 블랙마켓을 휘어잡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잠잠하네.”
“견제를 피하면서 자연스럽게 흡수하기 위해서야.”
“그래 봤자 눈 가리고 아옹일 텐데.”
“그게 중요한 거지, 증거가 없는 이상 의혹만 남거든.”
블랙마켓의 주요 길드장과 수뇌부가 한순간에 증발했다. 더욱이 신분과 동선이 노출되지 않았다. 쉐도우 길드가 의심스럽지만, 그들로선 진실을 밝히지도 못한다. 자초지종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더라도, 길드에 남은 수뇌부는 알고 있을 테니.
제인 누나는 지금 시위하는 중이다.
통제가 헐거워진 상태로 의혹이 쌓일수록 길드원들은 혼란스러울 테고. 쉐도우 길드와의 전쟁을 알게 된 이후, 급격한 이탈은 불을 보듯 자명했다.
블랙마켓의 변화는 외부에서도 주목하고 있었다. 외부의 시선에서 자유롭기 위해선 명분을 쌓아야 했다.
반면 블랙마켓에 소속된 길드원은 명분보다 힘이 중요하다. 쉐도우 길드가 4개 길드의 연합보다 강하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약육강식의 강자존이 블랙마켓의 생리인 이상, 시간의 문제일 뿐 쉐도우 길드에 흡수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교장 선생님도 아무 말이 없었구나.”
“대외적으론 독마를 제거하기 위한 연대일 뿐이야. 명색이 아카데미 교장님이신데, 블랙마켓과 지속적으로 협력할 순 없잖아.”
“아주 그냥 이런 쪽으론 머리가 팍팍! 돌아가는구나.”
“그러니까 너는 성운맹이나 신경 써. 신입생 중에도 활약할 생도가 있을 거 아냐.”
“귀찮은 일은 다 나한테 몰아주는 것 같아.”
신입생 선발이 시작되는 주였다. 1학년 때 무진의 활약상이 있었던 만큼, 귀추가 주목되었다. 더욱이 4학년이 되면서 태수 선배가 고학년의 타깃이 될 수 있었다. 성운맹을 직접 건드리는 것보다는 효과적이었다. 그런 만큼 2학년인 지수가 중심을 잡아 줘야 했다.
“아니면 네가 전체를 관리하면 돼.”
“시키는 대로 할게!”
무진이 내어놓으려고 하자, 지수는 식겁하며 물러섰다. 그럴 리 없다는 가정은 중요하지 않았다.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는 작금의 체계는 모두 무진이 만들어 놓았다.
그 안에서 톱니바퀴의 역할을 하는 편이 편할까? 전체를 관리하는 것이 편할까? 사람마다 차이가 있을 순 있으나, 전자가 확실히 편하다.
지금까지 순탄하게 흘러가서 편해 보일 뿐, 무진이 나서지 않았다면 엉망진창이 되었을 것이다. 지수는 그런 중책을 위임받아 원활히 수행할 자신은 없었다. 행동대장에 어울리는 자신의 위치를 되새기는 순간이었다.
“우림이는 내가 알려 준 심법을 확실하게 익히도록 해.”
“그런데 이름이 좀 그렇지 않아?”
“자연지존패천공이 어때서?”
“대체 어디가 정령술과 관련이 있다는 거야?”
자연이란 이름만 갖다 붙이면 되는 일인가. 뒤에 이어지는 단어는 중2병을 가득 담은 패도무쌍의 신공이었다.
고티아의 무공을 본 지수도 이번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삼라만상의 조화를 이루어도 부족할 하이엘프에게 지존군림보 같은 보법을 가르치는 것부터가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자연은 거스르지 않는 게 아니라, 통제하는 거야.”
“그 반대지.”
태극의 반대인 역태극이 아니라 거의 역천마공의 가르침이었다. 하이엘프를 패도의 마인으로 만들 심산인가?
“언제까지 자연에 굴복하며 비굴하게 살 거야. 엘프도 이제는 변해야 할 때야.”
“다크엘프의 가르침이잖아.”
고티아는 찜찜하면서도 무진을 믿고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 세상에서 자신을 알고 가르쳐 줄 존재는 무진이 유일했다. 더욱이 그가 보여 준 파격적인 괴행은 전부 강력한 힘을 기반으로 한다.
실제로 무진이 가르쳐 준 무공은 무진공에 패도와 자연을 짬뽕했을 뿐이다. 하나, 유치한 이름과는 달리 공능까지 유치하진 않았다. 패도를 지향하면서도 자연의 이치를 담고는 있었다. 외견상 자연력으로 무장하기에 순진한 엘프를 유혹하는 데도 효과적이었다.
“무진 군의 말대로 정령사가 아닌, 전사가 되겠어!”
“거봐.”
언제까지 당하고만 살진 않는다. 엘프도 세상을 살아가려면 강력한 힘을 가져야 했다. 중도를 지키지 않고, 어둠으로 빠지지만 않으면 되었다.
모처럼 고티아는 자기주장을 내세웠다. 엘프 마을에서도 모든 결정을 대장로가 했기에 의견을 주장하진 못했었다.
‘아주 카리스마 있었어!’
요즘 드라마의 트렌드가 걸크러쉬였다.
하나, 언제나 그렇듯 적정한 선을 지키지 않으면 무례가 되는 법이다. 시대가 바뀌었다고 해서 무례한 행동이 정당화되진 않는다.
***
통상 단독주택을 짓는 데 짧으면 2개월, 길면 1년이 걸린다. 한데, 10일이 걸리지 않았다. 급박한 날림 공사로 보일 수도 있었다. 주택의 기초공사를 하고, 콘크리트가 굳는 데도 보름은 짧았다.
무진은 시간적인 문제를 무공과 마법으로 해결했다. 마법을 배운 이후로 일상의 편의성이 대폭 올라갔다.
기초공사 할 대지를 디그 마법으로 깊이 파고 반듯하게 다졌다. 철근콘크리트는 건조, 압축, 강화로 1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전기, 상하수도는 기본이고.
설계도대로 완성된 단독주택이 아공간에 있었다. 기초공사 한 토대에 올려놓으면 끝이 난다.
주택과 기반은 마법으로 녹인 후 이어 붙였다. 원래라면 기둥이 약해지겠지만, 강화 마법으로 때려 박았다.
공사는 2일 안에 끝이 났고, 주소지를 등록하고 허가를 받는 데 8일이 걸렸다. 권왕가에서 보증했기에 그래도 금방 끝이 났다.
건물을 세운 후에는 내외부에 확장, 결계 마법을 걸었다. 공사하는 과정을 숨기기 위해서 담벼락부터 설치한 상태였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기문진과 마법의 결합이었다. 절대급의 마법이 아닌, 아이템과 장비를 이용한 것으로 비쳐야 했다.
단독주택은 지상 3층, 지하 2층의 구조로 방은 8개, 훈련장과 창고로 구성되었다. 아버지와 둘이 살기에는 넓지만, 미래는 모르는 법이다.
주택에서 도로까지 거리가 있었다. 중간에 도로를 연결할 때 타인 명의의 대지가 있는지도 꼼꼼히 검토했었다. 집을 짓기 전에는 마음씨 좋은 이웃처럼 보이다가, 다 짓고 난 후에는 알박기 하는 행태가 종종 있었다.
완공된 이후에는 일사천리였다.
제일 신경 쓴 공간은 집의 결계로, 평상시에는 인식된 인원만 출입할 수 있으며, 외부인은 내부에서 열어 줘야 했다. 4m 높이의 담벼락으로 둘렀고, 정문과 후문은 스마트키 도어록을 부착했다.
최첨단 기술, 마법, 결계, 권능의 결합이었다.
집의 설계와 건축은 심상 구현을 통했다. 이는 무진의 권능이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진 못하더라도, 존재하는 만물을 이용하여 얼마든지 변형할 수 있는 경지에 다다른 것이다. 과학으로 따지면 원소 단위로 분해하여 새로운 물질로 합성하는 이치였다.
“이제 자연지기를 끌어오면 되겠지.”
땅의 지력과 만물의 정수를 흡수, 응집하여 주택의 생기를 극대화했다. 이쯤 되면 언데드도 자기가 살아 있는 줄 착각할 생명력이었다.
물론, 넘침은 부족함만 못하다고 했다. 생명력을 세계수를 심을 터에 집중하였다. 나노 단위의 집중 마나회로를 그려 넣고, 권능을 각인했다.
단독주택 전체 결계와 집중 마나회로를 연결, 외부의 자연지기가 응집되도록 구축했다. 간략히 설명하면 쏟아지는 빗물이 한곳으로 모이도록 저장하는 장치와 같았다.
실내 정원은 세계수의 크기를 고려해서 확장성과 돔 형식으로 지붕을 여닫을 수 있었다. 식모를 위해 의자, 탁자, 가구, 텔레비전을 비롯한 편의 시설을 설치했다.
담벼락 결계는 외부의 출입 시 자발적으로 나가도록 미로, 환영, 저주 마법을 걸어 놓았다. 보호 3중으로 1차는 미로, 2차는 환영, 3차에 저주를 걸어 의도를 구분했다. 모르고 들어왔으면 도로 나가면 되지만, 기어코 들어온다면 피가 마르는 미라의 저주가 깃든다.
집은 다중 강화 마법을 걸어 핵이 떨어져도 흠집이 나지 않을 견고함과 내구력을 갖추었다. 내외부의 출입은 정해진 인원과 공간이동 마법진을 통하도록 했다.
전기는 자가발전, 상하수도 오물 처리는 자체 처리가 가능했다. 전기, 가스를 연결은 해 놓지만, 실제 비용은 제로였다. 자체로 전기를 생산하는 구조로 돈을 벌 수 있었다.
지구 환경을 위한다면 마법과 정령은 필수였다. 가정의 기본 소비 전력과 가스 소비를 줄일 수 있었다. 친환경 탄소 배출 감소에 이바지했다.
단독주택의 외형은 동서양의 조화를 이루었다. 보기 좋은 떡은 먹기도 좋다고, 누구나 살고 싶은 집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