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 집들이(1)
뉴스는 던전에서 사망자가 나왔다고만 하고 간략하게 지나갔다. 비일비재하진 않더라도, 대량의 유혈 사태가 아니면 던전 사고에 무덤덤해졌다. 현대인의 각박한 세태는 각성의 시대가 와도 변하진 않았다.
빠직!
그리드2의 흠집 없이 반듯하고 잘생긴 얼굴에 실금이 생기며 일그러진다.
흠.
실패의 책임을 물어 기존의 조직 체계를 대대적으로 물갈이했다. 새로이 데리고 온 수하를 배치하고, 확실한 방법으로 한국 내 지배력을 늘려 가는 중이다.
그러는 가운데 보고가 하나 올라왔다.
블랙마켓에서 치료 회복 포션이 나왔다고 한다. 대단치 않은 일일 수도 있으나, 독마의 독이 통하지 않았다. 교류전 실패의 단서를 찾을 수 있다는 의미가 되었다.
어차피 블랙마켓은 한국의 시장 지배력을 확보하기 위한 발판이었다. 일전의 실패를 만회하는 것도 있고, 괜찮은 선택지였다.
조던이 마무리하지 못한 일을 처리한다면, 자신의 입지에도 도움이 될 테고. 다른 곳에 투입해야 할 인력을 보내지 않아도 될 가벼운 사안인 데다.
독마가 자청하여 나서기로 했다. 조직에서 요긴하게 쓰기는 해도, 독마는 관련성이 적었다. 문제가 될 여지를 확 줄였다. 곧 블랙마켓을 장악했단 보고가 올라올 줄 알았다.
한데, 아무 소식이 없다.
그리드2로선 예상하지 못한 사태였다. 한국 속담에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했지만, 이번 경우는 해당하지 않았다.
희소식이 아니더라도, 지나치게 잠잠하다.
돌아가는 정황을 알아봤을 땐 더욱 기가 막혔다.
블랙마켓의 길드장과 수뇌부가 사라졌고, 독마는 장기 휴가를 냈다고 한다. 하도 어처구니가 없다 보니 침묵이 길어졌다. 누가 봐도 상식적이지 않은 보고였다.
“실패했구나.”
“당연한 걸 오래도 고민한다.”
그리드3이 다가와 그의 어깨와 뺨을 매만지며 이죽거렸다. 맘에 들지 않는 행위긴 하지만, 그녀라 대수롭진 않았다.
“이 보고서대로라면 교장과 쉐도우 길드장이 모종의 협약을 했다는 뜻인데.”
“죽일까?”
“그러고 싶군.”
“말만 해.”
그리드2는 알고 있었다. 말하는 순간 그녀는 주저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것이 설령 불구덩이라도 망설이지 않는다. 하나, 이번 사안을 그런 식으로 해결하기에는 걸리는 점이 많았다.
블랙마켓의 4개 길드가 동원되었다. 그런데도 쉐도우 길드는 아무런 일도 없이 지나갔다. 각 길드장과 핵심 수뇌부를 소리 소문 없이 지워 버렸다는 소린데.
블랙마켓 길드가 비록 한국의 칠대가문이나 대형 길드와 비교하면 부족하긴 해도, 이번 일은 심상치가 않았다. 조직의 정보망에 구멍이 났거나, 쉐도우 길드가 전력을 숨기고 있었다고 봐야 했다.
“쉐도우 길드의 전력을 파악하지 못했다.”
“자기야, 나야!”
살짝 토라지며 몸을 배배 꼬는 야릇하고 자극적인 포즈가 눈길을 끈다.
“안다. 그러니 안 된다.”
“자기답지 않은데.”
“신중한 거다.”
그리드3이 따로 하는 일이 있는 데다, 교장과 쉐도우 길드의 유착 관계도 의문이었다. 전혀 어울리지 않으며, 연관성을 찾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독마의 장기 휴가는 교장의 선택이었다. 소식이 끊어지기가 무섭게 보고도 없이 휴가를 냈을 리 만무했다.
‘교장은 권왕과 마제와도 연관이 있을 테고.’
교류전의 실패는 권왕과 마제의 개입이 컸다. 교장이 중간에서 가교 역할을 했다는 점이 걸렸다. 그런데 보란 듯이 독마의 장기 휴가를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마치 내가 했다고 광고하는 듯하다.
‘유인책인가?’
우리를 끌어들이려는 수작이 분명했다. 물론, 그녀를 믿는다. 양동작전을 써서 빈틈을 노린다면 확률을 높일 수 있다.
‘확률 따위로 계산할 순 없지.’
블랙마켓을 장악하기 위한 전략을 완벽히 부수었다. 그만한 두뇌를 가지고 있다면 섣부른 행동은 역효과를 부를 수 있었다.
하!
예감이 좋지 않았다.
조던, 로즈의 실패가 우연이 아님을 실감하게 했다. 세계를 장악해 나가고 있는 유니크스에 오점을 안겨 준 것만 해도.
“자기를 이토록 망설이게 하다니, 보통 버러지들은 아닌가 보네.”
“우릴 노리는 것이 분명하다. 게다가 그대는 할 일이 있지 않나?”
“그 일부터 끝나면, 바로 처리할 수 있는 거지?”
“노력해 보지.”
그리드2는 결단을 내리기까지는 신중한 편이지만, 언제까지 기다리진 않는다. 준비가 끝나면 실행력 하나는 발군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날 곤란하게 한 대가를 치러 주지.’
아주 비싸게.
***
“영종도로 이사 가자고?”
“미단시티 인근으로 알아봤어요. 아카데미에서도 가깝고, 대지도 넓은 데다가 던전이 오픈된 지역이라 헐값이에요.”
“아예 새로 지을 셈이구나.”
“제 신분이 생도라서 자격증을 따도, 집을 지으려면 관할 구청의 허락을 받아야 해요.”
“자잘한 일은 내가 알아보마.”
무인도에 지은 집과 달리 규정을 준수해야 했다. 맘대로 지었다가 나중에 문제를 제기하면 귀찮은 일이 생긴다. 정해진 규정과 규격 내에서 계획적으로 준비해야 했다.
다행스러운 점은 영종도가 아예 시골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중요했다. 환경보다 사람이 힘들기 때문이다. 일례로 도시 촌놈이 시골 텃새 맛을 보면 귀농이 얼마나 피곤한 일인지를 알 수 있었다.
건물을 지을 수 있는 규정과 인력은 아버지에게 맡겼다. 다만, 단독주택의 설계는 전적으로 무진이 하기로 했다.
‘핵 방공호는 되어야겠지.’
집이야말로 남자의 로망이 아니던가. 돈도 남아돌겠다, 원하는 설계대로 작정하고 만들 생각이었다.
예산은 대충 계산했더니 50억 정도다.
“아버지는 걱정되지 않으세요?”
“뭐가?”
“돈을 제 맘대로 쓰잖아요.”
“다시 벌면 그만이지. 괜찮으니까 얼마든지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산하는 아들이 돈 낭비를 한다고 타박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 돈이 펑펑 쓴다고 해서 티가 나는 것도 아니고. 아들이 맘먹으면 언제든 다시 채울 수 있었다.
‘상전벽해긴 하네.’
50억이면 보통 사람은 평생 벌어도 모으지 못할 액수일 텐데, 아들의 통장을 보면 속된 말로 조족지혈이었다. 50억을 써도, 한 달 안에 다시 채워지는 매직을 볼 수 있었다.
‘용돈으로 천억을 받으면 그럴 수 있지.’
무지막지한 증여세를 내고도, 굉장히 너그러워졌다. 화가 날 일도 통장을 보고 있으면 한결 편안해진다. 한편으로 서글프기도 했다. 돈이 없으면 화를 내지 않아도 될 사소한 일로 화를 내게 된다. 사람마다 다르긴 하나, 돈이 여유를 만들었다.
“저 때문에 아버지가 고생이세요.”
“이 녀석이, 못 하는 소리가 없구나. 부모란 자식을 위해 아낌없이 내어 줄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느낀단다.”
아들한테 천억을 받았는데, 고생이랄 게 있느냐.
그래 봤자 영종도도 인천이었다. 맘 같아서는 부산에서도 출근할 수 있었다.
하~~!
고티아는 부자의 화기애애한 모습에 헛바람을 삼켰다. 엘프 마을을 휩쓸었던 가공할 폭력을 상기하면 도저히 같은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아버님이 실세였어.’
인간 집의 위계 서열을 확실히 깨닫는 순간이다. 저토록 엄청난 인간도 아버지 앞에서는 아들에 불과했다.
찌릿!
뒤통수를 자극하는 기운에 고티아는 바르르! 떨었다. 실세는 아버님이 분명하나, 안주인은 따로 있었다.
이 집에 신세를 진 다음 날부터 불현듯 쳐들어왔다.
스윽!
언제 봤다고 다짜고짜 어깨동무하며 친근히 대하지만, 왠지 모르게 굉장히 껄끄러웠다.
“우리 엘프 친구가 뭘 그리 뚫어지게 보고 계실까?”
“아버님과 무진 군이 참 화목하구나 싶어서.”
“저 안에 끼고 싶다거나, 가지고 싶다거나. 굴러들어 온 돌처럼 욕심이 나지는 않고.”
“전혀, 난 그런 몰염치한 엘프가 아니야.”
“과연 엘프는 욕심이 없는 순수한 종족이구나. 난 앞으로도 그렇게 알고 있을게.”
친하게 지내자고 할 때부터 고티아는 불편했다. 마치 조강지처를 두고 바람피운 비운의 상간녀가 된 기분이랄까? 아침 드라마에서 자주 보던 설정이었다.
‘초면에 물세례, 따귀가 날아올 줄 알았는데.’
그 정도로 막장까지 가지는 않았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지나친 몰입은 현실과의 괴리감만 커질 뿐이다.
다만, 정기 훈련을 통한 서열 정리는 있었다. 하이엘프로서 실력을 선보일 기회는 개뿔, 이 세계의 인간들은 상식적인 범주를 가볍게 넘어섰다.
“나중에 내가 좋은 엘프 나오면 소개해 줄게.”
“고마워.”
좋은 엘프는 죽은 엘프라고 말하는 것 같아 섬뜩했다. 처신 똑바로 해야 할 듯싶었다.
“종족의 순혈주의는 지켜야 해.”
“당연하지.”
지수는 고티아의 등장에 위기감을 느꼈었다. 자신도 한 미모 한다고 자부하지만, 고티아의 아름다움은 한 차원 다른 경지에 있었다. 처음에는 인간이 맞나 싶었는데, 그나마 엘프였다. 우리 무진이는 종족의 한계를 초월하진 않는 편이다.
여하튼 한동안 무진의 집에서 살게 되었다고 한다. 무진이가 일반적인 남자애들과는 기질적으로 다르긴 해도, 질풍노도의 시기의 피 끓는 청춘이었다. 엘프가 집에서 편한 레깅스로 돌아다니는데, 아무런 감정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것도 문제였다.
‘유사 인종에 매력을 느끼는 건 아니겠지?’
매력적이고 육감적인 소녀가 옆에 있었다. 야릇한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게 더 어불성설이었다. 사내라면 응당 매력에 빠져 허우적거려야 마땅했다. 고자가 아닐까, 의구심이 들었으나 다행히 아버님 찬스가 있었다.
무진이보다 아버지를 공략하는 편이 수월하다. 미래의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끈끈한 유대감이었다.
“지수야, 집에 안 가냐?”
“우리 고티아가 먼 타향살이에 혼자 외롭게 지내고 있잖아. 그나마 내가 있어야 외롭지 않지.”
“그렇다고 짐 싸서 우리 집에 사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아버님이 아무 말 안 해?”
“주말에는 간다고 했어.”
졸지에 주말 부녀를 만든 느낌이다.
무진은 지수의 경계심을 알면서도,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나올 줄은 미처 몰랐다. 의도치 않게 지수의 질투심을 자극한 모양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어쩌랴? 천하무적의 매력적인 사내를 놓치고 싶진 않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