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류최강 남사친-252화 (253/374)

252. 나는 호구였다(4)

부르르를, 부들부들!

주르르르!

한계를 초월하는 고통에 독마는 눈물, 콧물, 땀, 소변, 대변을 배출했다. 티끌조차 용납하지 않은 신의의 모습이 가식이라고 해도, 독마의 자존심을 고려하면 믿기 힘든 추레한 광경이었다.

“고작 10분인가요? 실망입니다.”

고통이 멈췄지만, 독마는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뇌리를 파고든 한 줄기 음성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고작이라니, 가당치도 않았다. 빌어먹게도 화를 낼 기력조차 없다. 의식이 점점 가라앉으려고 했다.

“꿈에서 만나요.”

“……?”

수면에 빠져든 독마였다. 그러나 고통에서 해방되진 않았다. 오히려 더욱 최악을 맞고 있었다. 방금 당한 고통을 의식의 저 멀리에서 쉬지도 않고 겪어야 했다.

부르르르르!

독마는 마구 떨었다.

흐억!

쿨럭!

투귀와 교장은 취조실 매직미러를 사이에 두고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방금 무진이 펼친 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들이었다. 심상 속 수련 지옥이었다. 본인들에게 최악을 선사했던 상대와 미친 듯이 싸웠던 술법이다. 그걸 독마는 고문으로 겪고 있을 것이다.

“……독한 놈!”

“차라리 죽이지 그러냐.”

교장은 수십 년 동안 속인 독마를 찢어 죽이고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진의 지독한 수법에 치를 떨어야 했다. 저걸 당하고도 멀쩡한 정신을 유지한다면 독마의 끈기를 인정해야 했다.

드륵!

밀실에 들어온 무진을 보자마자 투귀와 교장이 물었다.

“몇 년이냐?”

“짧게 했어요.”

“그러니까, 몇 년?”

“20년쯤이요.”

“미치는 거 아니냐?”

“그럼 말고요.”

무진의 성의 없는 대답에 투귀와 교장은 기겁했다. 그 말은 자신들도 아니면 말고란 소리잖아. 그런 무서운 짓을 태연히 자행하고 있었다.

흐아아아아아악!

20분쯤 지나자, 독마가 고성을 지르며 깨어났다. 무진은 문을 열고 나와서 독마를 내려다보았다.

부르르르르, 흐어어어억! 제발, 그만해!

반쯤 미쳐 있었다. 횡설수설은 기본이고, 침을 질질 흘리며 공포에 젖어 경련을 일으켰다. 현실의 고문을 시간의 흐름이 사라진 정신세계에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20년을 당했다.

“……말할게. 뭐든지…… 물어봐! 그러니 제발 그만해!”

“안 궁금한데.”

“내가 말하고 싶다고~~~!”

“그렇다면 세뇌에 동의해.”

“……얼마든지, 어서 해!”

30분 전까지만 해도 독기를 품고 맹렬히 저항했던 독마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고분고분했다. 살고 싶은 마음보다 고통에서 해방되고 싶은 것이다.

“받아들여.”

9계식의 통제 마법에 권능을 실어 독마의 정신을 완벽히 사로잡았다. 저항이라도 했다면 정신이 붕괴했을 텐데, 심상의 끝에 도달하기까지 아우토반이었다.

‘조직에 대해선 알 필요 없지.’

무진이 원하는 건 독마의 독과 그가 중독시킨 대상이다. 정신세계를 살펴보니 금제나 저주는 당하지 않았다. 독마는 암중 세력에서 필요할 때마다 연구 재료를 받고, 독을 제조해 주었던 것이다.

‘프리랜서였군.’

필요한 지식을 얻은 후에 제거하면 그만이다. 굳이 독마를 살려 둘 생각은 하지 않았다. 세상은 원래 프리랜서에게 따뜻하지 않은 법이다. 필요하면 쓰고, 필요 없으면 버리는 부속품에 지나지 않는다.

교장과 투귀가 들어왔다.

“이제 어쩌려는 게냐?”

“제 뜻이 중요한가요?”

“당연하지, 우리는 어리다고 사람을 막 다루고 그러지 않아요. 암암, 항상 존중하는 편이지.”

“그래서 존경하고 있습니다.”

대화는 훈훈한데, 상당히 꺼림칙하다. 무진의 계획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은 투귀와 교장의 발버둥처럼 보인다. 조금이라도 엇나가면 어찌 될지 독마가 증명했다.

“당분간은 아무 일도 없는 겁니다.”

“그게 말로 한다고 되는 일이냐?”

“그러니 더더욱 이상하게 느끼겠죠. 우리가 주시하는 걸 알면 더 좋고요.”

“흠, 시간을 벌 수 있겠구나.”

사고가 터졌는데, 아무 일도 없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의문이 드는 게 인지상정이었다. 조사가 들어올 테고, 이를 노리려는 움직임을 보인다면 섣불리 행동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놈의 머리통은 어디까지 내다보는 거야?’

‘상대의 머리 꼭대기에서 노는구먼.’

도저히 일개 생도로 보이지 않는다. 무진의 적이 되지 않은 걸 평생 감사하며 살아야 할 판이다.

***

업무의 일환으로 회식을 끝낸 후, 집으로 돌아왔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기이한 광경을 목격했다.

아들이 아닌 웬 미소녀가 대형 TV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다채널을 틀어 놓은 채 누가 들어오는지도 모를 만큼 집중력이 대단했다.

크흠.

언제까지 현관문에 서 있을 순 없으니.

아!

인기척을 느낀 고티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추었다. 지식 전이를 통해 산하의 정체를 알기에 조심스러웠다. 엘프라서 그런지 몰라도 일어서는 모양새마저 우아하고 아름답다.

“저는 숲의 일족인 고티아라고 합니다. 아버님.”

“……아버님이라고!”

며느리를 본 기분에 당황했던 산하는 곧 신색을 회복했다. 만약 의미를 부여했다면 지수가 많이 서운해했을 것이다. 그간 쌓인 정을 무시할 수 없었고, 눈앞의 미소녀는 초면이었다. 지수의 성깔도 보통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집에서 난장을 까면 그땐 감당이 되지 않는다.

‘잠깐, 충정공파, 서파공파도 아니고 숲의 일족?’

그런 족보는 처음 들어 봤기에 미소녀를 다시 보았다. 외국 이름이기는 해도, 아마존도 아니고 숲을 모태로 말하는 경우는 들어 보지 못했다.

그런 의문을 알고 있다는 듯 고티아는 정체를 밝혔다.

“저는 하이엘프예요.”

“그렇구나, 엘프처럼 예쁘기…… 엘프?”

“변신을 풀어서 보여 드리고 싶지만, 제가 건 마법이 아니라서요.”

“알겠다. 밥은 먹었고?”

“망고가 맛있네요.”

“그렇구나.”

세상이 바뀌었으니 엘프가 집에 있어도 아주 이상하진 않았다. 던전이 오픈되면서 다른 세계의 지적 생명체와 교류를 트고 있었다. 특히 드워프는 국가의 중요 전략 자산으로 분류가 되었다.

미국이 요새 내놓은 혁신적인 신제품에 사람들은 드워프를 고문하지 않았느냐는 주장이 있었다. 외계인 고문설 이후로 상당히 신빙성이 있기는 했다.

“하이엘프면 엘프 사회에서도 귀한 존재일 텐데. 돌아가지 않아도 되는 건가?”

“당분간 신세를 지게 됐어요. 폐가 될까요?”

“폐라니, 방은 넉넉하니 얼마든지 머물다 가거라.”

“감사합니다. 아버님!”

아버님 소리가 그리 듣기 싫진 않았다. 스무 살만 넘었으면 당장이라도 혼인시키련만. 요즘에는 서른은 넘어서 가는 추세지만, 돈만 많으면 한 살이라도 젊을 때 가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마흔 살에 애들 분가시키고, 여유롭게 부부 생활을 즐기면 좋지 아니한가.

같이 여행도 하고, 캠핑도 하고, 등도 긁어 주고.

해 줄 게 많았었는데.

아쉽구려.

너무 일찍 떠난 아내가 떠올랐다. 이 나이를 먹고도 이러니, 아직은 젊었다.

‘당분간이면 별일 없겠지.’

산하의 계산은 인간의 관점이었다. 엘프에게 당분간은 최소 100년은 먹고 들어갔다. 만약 100년이 지나도록 집에 있다면, 재건축을 2번은 더 해야 할 듯싶다. 조합에 가입해서 욕심을 좀 부려.

“불편한 건 없고?”

“아주 좋아요. 그래도 생기면 물어봐도 되나요?”

“얼마든지! 하긴, 진이가 어련히 알아서 했겠지, 보던 거 마저 보렴.”

“시리즈라 다음이 궁금하긴 했어요.”

한국식 엔딩의 맛을 아직은 보지 못한 듯했다. 그 맛을 보면 저런 순진한 표정을 짓지는 못할 텐데.

산하는 씻고 나와서 고티아와 TV를 보다 방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고티아는 드라마를 마저 보았다.

무진이 집에 왔다.

“누가 오는 줄도 모르고, 재밌나 봐.”

“숨어서 듣는 사람이 있는데, 비밀을 말하는 건 또 뭐예요? 게다가 누가 봐도 저년이 범인 맞는데, 왜 눈치를 못 채요?”

“스토리 전개를 위해서야. 우리나라 아침 드라마는 숨어서 못 들으면 진행이 안 되거든. 게다가 벌써 잡히면 시리즈가 되냐.”

“내가 답답해서 못 보겠다고요!”

“새벽 4시다.”

“……벌써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입했던 고티아는 화들짝 놀랐다. 솔직히 답답했던 것과는 별개로 다음 편이 궁금했었다. 자신도 모르게 다음 편을 유료 결제한 것이다. 안 보고선 잠을 자지도 못하게 하는 사악한 결제 시스템이었다.

“정보 수집을 위해서였어요!”

“뻔뻔한 대답이지만, 그렇다고 해 줄게.”

밖이 궁금하다며 사방팔방으로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낫다. 신분증이 없어서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제인 누나에게 말해 뒀으니 조만간 신분증을 발급받게 될 것이다.

난민 신청이라도 해야 하나?

썩을.

휴전을 핑계 대긴 글렀다.

“세계수는 어디에 심을 건가요? 봐서 알다시피 자연의 정수가 받쳐 주지 않으면 성장에 어려움이 있을 거예요. 더욱이 한 번 심으면 옮겨심기가 여의찮아요.”

“보기보다 말 돌리는 재주가 좋네.”

“아니거든요, 아주 중요한 문제잖아요!”

“그렇다고 당장 할 일은 아니지.”

다른 세계에 오자마자 세계수부터 심으려고 하다니, 기특하기는커녕 성급하다. 그런 모순을 고티아가 모를 리도 없고, TV 중독을 모면해 보려는 얄팍한 의도가 다분하다. 조금 더 지나면 엘프 히키코모리가 될지도. 은둔형 습관이 본성인 엘프라면 능히 그리하고도 남았다.

‘스마트폰을 사 줘, 말아?’

TV에 이어 스마트폰까지 중독 증상을 보인다면 곤란하다. 자칫 세계수 관리에 소홀할 수도 있었다. 하나, 현대인의 필수품을 사 주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로마에 가면 시저의 뺨을 후려치라고 하지 않던가.

‘세계수를 심기는 해야 하는데.’

아파트에 심으면 좀 곤란하다. 공간 확장 마법을 건다고 해도, 공동주택이었다. 리모델링이 지나치면 모두에게 민폐였다. 최소한 이웃에 피해가 가지 않는 선은 유지해야 했다. 더욱이 이제는 흑막과의 암투도 고려할 필요가 있었다.

‘들켰을 때도 준비해야겠지.’

그러려면 공동주택에서 벗어나야 했다. 개인이 원하는 대로 조건을 맞추기 위해선 단독주택이 필요하다. 편의성을 위해서 아파트에서 살지만, 흑막을 상대하려면 이사를 해야 했다.

주변 이웃을 인질로 잡는다고 항복할 것도 아니고. 이웃을 구하기 위해서 최선은 다하겠으나, 목숨을 버리진 않는다. 무진의 인생에서 인질범과의 협상은 절대 없었다.

“하이엘프는 엘프를 감지할 수 있다고 했지?”

“제가 성인식을 치르지 못해서 거리 제한이 있어요.”

“성인식이 중요한 거야? 능력이 중요한 거야?”

“성인이 되면 자연스럽게 능력이 생기는 거죠.”

“뱀처럼 잘도 빠져나가네.”

성인식이 단순히 상징적인 거면, 훈련을 통해서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요망한 하이엘프가 상징이 아닌 실체를 거론했다.

성인이 되었을 때 하이엘프가 킹크랩도 아니고 변태를 한단다. 무인으로 따지면 일종의 환골탈태였다. 그때부터는 자연의 정수와 정령력을 받아들이는 그릇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고 했다.

그럼 성인식 전에 바탕을 만들면 더욱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방금 표정이 굉장히 사악했거든요.”

“성인이 되려면 13년이나 기다려야 하잖아. 그동안 방구석에서 TV나 보고 있겠다는 거야?”

“어쩔 수 없는 순리예요. 그리고 13년 금방이거든요. 정말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가요.”

“훈련하기 싫다는 핑계는 아니고.”

그렇다고 잠자코 시간을 질질 끄는 건 무진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안 되는 일도, 될 때까지 해 보라고 했다. 미리부터 포기한다면 되는 일도 안 된다.

더욱이 엘프 레이더는 나중에도 필요할 수 있었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먼저 가는 세상이지만, 미리 준비를 해 놓는 편이 이로웠다. 갈 때 가더라도, 쓸모는 다해야지.

“근시일 내에 정령술의 근간이 될 만한 마나컨트롤을 만들어 볼게. 그때까지 육체 개조에 들어가자.”

“그 정도는 제가 알아서 할 수 있어요!”

“엘프의 시대착오적인 훈련이 도움이 될까? 내가 만들어 낸 최신 버전의 육체 개조술이 효과적일까?”

“어차피 안 한다고 해도 할 거죠?”

“똑똑하네.”

남의 집에 살려면 밥값을 해야 했다. 공짜로 숙식 제공에 TV 유료 시청까지 할 수 있는 집은 많지 않았다. 더욱이 PT를 받으려고 해도 돈을 받는 세상이다. 공짜로 심법과 무공을 알려 준다고 하지 않는가.

‘역시나 나는 호구였군.’

이런 착한 호구가 어디 있는가.

나중에 다 갚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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