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 나는 호구였다(2)
4대 정령왕을 가지고 노는 것부터가 인간적이지 않았다. 혼은 분명 인간인데, 권능을 자유자재로 사용하고 있었다. 만약 무진이 악의를 가졌다면 어떤 사태가 벌어졌을까?
-악의가 없다고 하기도 그렇잖아.
악의가 가득해 보이는데, 선의만 받고 있었다.
그것이 인간의 위선과 위장이라면? 세계수는 이 인간을 이대로 놔두어도 되나 걱정이 앞섰다. 어쩌면 자신이 열어선 안 되는 걸 열었는지도 모르겠다.
-망하는 건 아니겠지!
세계수는 세계를 넘어 차원의 균형이 망가질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더욱이 인간에게 주어진 힘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권능이었다.
“정령계라, 좋은 곳이구나.”
-……전혀 안 좋아!
-굉장히 지루할걸!
-정령계는 시간이 멈추는 무한의 세계라고!
-매일 반복되는 세상이 재밌을 리 만무하지.
무진이 정령계에서 눌러앉을 것처럼 얘기하자 정령왕은 고통받는 와중에도 화들짝 놀랐다. 이대로는 집주인이 강도한테 집을 공짜로 빼앗기는 꼴이었다.
그러니 어떻게든 손님 대접을 해야 했다. 강도로 돌변하기 전에.
“하긴, 텔레비전도 없고, 컴퓨터도 없고, 핸드폰도 안 되는구나.”
-……그. 래. 뭔지 몰라도 다 안 돼!
-가족을 못 본다고.
-암, 가족은 중요하지.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부모님을 생각해.
들어 보지 못한 단어지만, 어쨌든 안 돼서 다행이었다. 됐으면 진짜로 머물지도 모른다.
“번호.”
-……?
반응이 늦자.
“안 되겠네.”
-……누가 1번인데?
이번 건 예리했어.
“엎드려.”
-……망할!
무진은 살짝 당황했었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예리하게 찌르고 들어오다니, 과연 정령왕이었다. 일반 정령들과는 다르게 머리가 잘 돌아갔다.
안타깝게도 머리를 쓰든, 정령술을 쓰든 결론은 같았다.
똑똑하다고 안 처맞는 거 아니거든. 사실 알면 알수록 속 터지는 세상이었다.
정령왕들의 볼품없는 꼬락서니에 세계수는 당황하면서도 웃음이 터져 나왔다.
-흐흐흥, 재밌잖아.
동업자 정신을 위반한 행위지만, 세계수도 근간에 맺힌 게 있었던 모양이다. 세계수는 정령과 엘프의 계약을 주선하는 중개자로서 근 3천 년이 되도록 정령왕과는 계약을 따내지 못했다.
더욱이 병이 들어가고 있는데, 병문안은 하지 않더라도 안부는 물어볼 수 있잖아.
자기들만 잘난 줄 알고 설쳤던 정령왕이 처맞는 광경은 보는 맛이 있었다. 세계수는 최고급 수액이라도 마시며 관전하고 싶어졌다. 불러도 오지 않은 괘씸죄를 더하면 좀 더 맞아도 괜찮았다.
“중립 외교가 힘든 이유지.”
-뭔 소리야? 전혀 안 재밌어! 흐흐흥!
무진은 정령왕의 나태함을 마른 수건 쥐어짜듯 빼 주었다.
한 번 정령왕이 영원한 정령왕일 거란 무사안일주의가 이렇게나 위험했다. 수명이 100년도 안 되는 인간이 이만큼이나 강해질 동안 무한의 생을 사는 정령왕이 고작 이 정도 수준이라면 문제가 있었다.
“너희들에게 나와 계약할 수 있는 혜택을 줄게.”
-혜택이라고?
“눌러살까?”
-혜택이구나!
계약 후 부를 때마다 보는 편이 그나마 낫지. 정령계에서 얼굴 마주 보고 오순도순 있을 걸 생각하니 정령왕들은 소름이 돋았다. 자신들이 직접 나서지 않고, 하위 정령들을 대신 보내도 되고. 일단은 저 새끼를 돌려보내야 했다.
-그 전에 우리와 계약하려면 각각의 정령력이 있어야 할 텐데. 넌 땅의 정령력이 없잖아.
“없으면 만들어야지.”
-……우리가?
“그럼 내가 하리?”
무진의 무대포에 정령왕은 물론, 세계수도 어이가 없었다. 강제로 계약을 맺는 것도 억울한데, 정령력 서비스까지 해야 했다. 그토록 오랜 세월을 살아왔지만, 이토록 말도 안 되는 일방적 계약은 처음이었다.
-을은 갑의 부름에 무조건 응한다.
-을은 갑의 없는 정령력을 알아서 채워 준다.
-갑의 부름에 응하지 않을 시 소멸에 동의한다.
-을은 갑의 정령을 키워 줄 의무가 있다.
……등등의 278개 조항에 전적으로 자발적인 계약임을 인정한다.
-……?
정령왕들은 할 말을 잊었다. 맹목적인 강제 계약도 억울한데, 조항 하나하나가 주옥같았다. 그러나 어차피 계약서에 불과했다. 저걸 굳이 지킬 필요가 있나?
우우웅!
무진이 계약서에 권능을 부여했다. 이제부터 하는 말은 전부 효력이 있었다. 권능의 각인이 정령왕에게 찍히는 것이다. 저항하고 싶으면 무진보다 권능의 질을 개선하면 된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부당 거래라고!
-정령신께서 노하실 거다!
-우리에게도 노동권이 있을걸?
무진의 계약서를 다시 확인하려고 했으나, 낙장불입이었다. 아무 계약서에 사인하면 영원에 족쇄가 채워지는 법이다. 이제라도 배웠으니 후일에는 당하지 않기를 바란다.
***
정령왕과 자발적인 계약을 마친 무진은 세계수와 보상을 정리했다. 일단 주기로 했던 씨앗, 열매, 뿌리, 줄기, 잎사귀는 챙겼다.
-씨앗을 심으려면 자연지기가 넘치는 곳이어야 하고, 심고 나서도 관리를 잘해 줘야 해. 내 분신이라서 굉장히 예민하거든.
“엘프만 한 정원사도 없지.”
-엘프를 데리고 가겠다고?
“지원자를 받을게.”
-아무리 그래도 생이별은 너무하잖아.
“세계수를 관리하는 일인데도.”
그토록 막중한 일을 인간에게 맡겨 둘 거냔 무진의 정석적인 논리에 세계수와 엘프들은 고민에 휩싸였다.
씨앗을 주지 않았다면 모를까, 분신체가 담겨 있었다. 인간이 관리하다 잘못되면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더욱이 세계수를 노리는 어둠이 있었다.
-엘프는 내 자식과도 같아.
“정 그렇다면 내가 관리하는 수밖에.”
-그래도 잘 키우려면 엘프가 필요하긴 하지.
“알다시피 시간이 없다.”
지원자를 받겠다는 무진의 시선에 엘프들은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마을을 구해 주고, 세계수를 살린 은인 이전에 무단 침입한 폭력범이었다.
더욱이 치료 과정을 생생하게 느꼈다. 살아생전 겪어 보지 못한 극심한 고통은 자살 충동을 불러일으켰다. 그런 인간이 잘 대해 주겠다며 꼬시고 있었다.
“이거 먹을래?”
무진은 꼬마 엘프에게 초콜릿을 선물로 주었다.
아~~!
일단 인간이 주는 음식은 의심부터 해야 하나, 발사믹과 흑임자에 중독된 지 오래였다. 그 맛을 알기에 감히 거절하지 못했다. 일단 맛이라도 본 엘프들은 천상의 황홀함에 취하고 말았다.
‘허, 마약 장사하냐?’
제인과 쉐도우 전사단은 무진의 악랄한 수법에 혀를 내둘렀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전부 계획적이었다.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구해 주고, 맛을 들이고. 순진한 엘프들로선 무진의 마수를 버텨 내기란 불가능했다.
‘이러니 우리나라가 마약 청정국에서 벗어났지!’
실로 다양하고, 다채로우며, 재기발랄한 수법으로 마약을 들여오고 있었다. 그 기발한 창의성을 다른 곳에다 썼으면 우린 진작 세계 최강국이 되었을 것이다.
‘몬스테민은 진짜 위험한데.’
마물의 피로 만들어 내는 신종 마약이 최근 말썽을 부렸다. 중독성도 강하지만, 일종의 도핑 효과가 있어 초인적인 힘을 낸다. 각성자도 복용하면서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누가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없어져야 할 약이었다.
‘그래도 생각은 있구나.’
초콜릿이 강렬하기는 해도, 엘프들도 바보는 아니다. 선뜻 나서지 않은 채 눈치만 보고 있었다.
나는 아니더라도, 너는 해라.
나만 아니면 된다는 마인드는 유사 인종도 다르지 않았다.
‘나 같아도 안 가지.’
무슨 꼴을 당할 줄 알고, 제인은 엘프의 심정을 이해했다. 모르긴 몰라도 엮이는 순간 망하는 거다.
그렇다고 강제로 데리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엘프는 우리 차원에서 국제 협약에 의해선 난민과 같은 보호 대상이었다. 의사에 부합하지 않은 채 강압적으로 대하면 처벌을 받을 수 있었다.
“정령왕과 계약하고 싶지 않나?”
-……진짜 갈 데까지 가는구나!
이제는 엘프들의 교감력이 많이 높아졌다. 전과는 달리 세계수와 의사소통은 아니더라도, 의미의 전달은 가능했다. 노력하면 정령왕과의 계약도 머지않았다.
그런데 무진은 정령왕을 인질로 삼아 교감 능력이 높아도 계약 못 하게 방해하겠다는 의도를 다분히 내비쳤다. 정령왕과 상호적인 계약을 맺은 이상, 선택권은 무진에게 있었다.
“제가 갈게요.”
“고티아, 안 된다! 어째서 네가?”
“그럼 대장로님이 가실래요?”
“……같이 고민해 보자꾸나.”
저 인간하고 떠난다고 상기하니 다들 고민이 깊어졌다.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었다. 더욱이 고티아는 하이엘프였다. 성인식도 치르지 못한 하이엘프를 마을 밖으로 내몰 수도 없는 노릇이다.
엘프들은 딜레마에 빠졌다. 자진해서 간다는 엘프가 또 있다면 모를까?
무진은 시큰둥했다.
“대장로가 나을 것 같은데.”
“대장로님은 연세가 너무 많으세요. 나이 든 엘프를 구박하면 마계로 떨어져 영원히 저주받는다고 했어요.”
“흠, 알고서 먹이는 것 같은데.”
“무슨 말씀을 하는 거예요?”
“아니라면 너도 제법 천부적이구나.”
무진은 누가 가든 상관하지 않았다. 어차피 엘프로서의 쓰임새는 정원사였다. 세계수만 잘 관리를 하면 된다.
‘고로수에 피톤치드는 못 참지.’
그럼에도 고티아를 순순히 내어 줄 줄은 몰랐다. 명색이 하이엘프였다. 일족이 보호해도 부족할 판에 외유를 허락했다. 그것도 던전이 공략된 이상, 다시 돌아온다는 보장도 하기 힘든 다른 차원으로.
‘세계수 간에는 통하는 게 있는 모양이지.’
정령계를 연결하는 흐름을 읽은 무진은 세계수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령왕과의 계약을 다소 일방적으로 맺은 연유였다. 정령계와 소통하려면 당장은 매개체인 세계수가 필요했다.
세계수와 고티아 간의 모종의 협약이 있는 것 같았지만, 무진은 따로 묻지 않았다. 둘이서 뭘 하든, 크게 문제가 될 사안은 아니다.
시간이 남았다. 자고로 시간은 금이라고 했으니, 무진은 옛말을 따랐다.
“엘프주 만드는 법도 알려 줘.”
“엘프의 등골을 다 빼먹을 셈이에요.”
“어차피 다른 세계잖아.”
“진짜 염치라고는 씨알도 없는 사람이군요.”
“나는 하이볼 만드는 법을 알려 줬잖아.”
“자기가 만든 것도 아니면서.”
“누가 만들면 어때, 맛있으면 그만이지.”
무진은 엘프 마을의 보물과 비법을 샅샅이 뒤져서 필요한 걸 챙겼다. 혹여 잊어 먹고 놔두고 간 것이 없나, 재차 확인은 필수였다. 누가 보면 엘프 마을에 맡겨 둔 물건을 가지고 가는 줄 알겠다.
흑흑흑!
미안하다!
고티아는 대장로 이하 엘프들과 눈물의 고별식을 행했다. 그럴 거면 본인들이 간다고 말이라도 했어야지. 결정을 내린 후, 눈물을 짜는 건 감성팔이일 뿐이다.
“그만하고 가지.”
“당신에겐 공감 능력이란 게 없어요?”
“난 순혈주의라서.”
“자꾸 이상한 소리 할 거예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나도 취향이라는 게 있어.”
“도무지 말이 안 통하네요.”
숲의 끝자락까지 대장로가 따라왔다. 무진은 양심에 찔리는 대장로를 다독여 주었다. 따지고 보면 어린 손녀쯤 될 테니, 할머니의 기우였다.
“평생 남자 손 한번 만져 보지 못하고 처녀 엘프로 살도록 단속할 테니 염려하지 마세요.”
“그건 좀.”
“딸을 멀리 보내는 어머니의 심정을 압니다.”
“하아, 부탁드립니다.”
그렇게까지 하지 말라고 하기도 애매했다. 무진의 차원에서 엘프를 만나기는 요원하다. 그러나 손 한 번 잡아 보지 못하고 늙어 죽으라니, 저주 아닌가? 그렇다고 인간과 만나라고 할 수도 없었다.
던전의 입구로 가는 경계에 도착했다.
무진은 작별 인사를 하고 던전의 통로를 나왔다. 던전을 나오자마자 레벨업과 보상이 나열되었다.
[던전 공략]
-투혼나팔.
-용맹무쌍.
-최후영광.
투혼나팔은 군기 강화로 단체전에서 전력을 배 이상으로 끌어 올리고, 용맹무쌍은 버프형으로 개인 전투력을 상승시키며, 최후영광은 목숨이 경각일 때 소생 아이템이었다.
“폴리모프.”
무진은 고티아에게 변형 마법을 걸어 주었다. 엘프로 등록을 해도 되지만, 눈에 띄었다. 일반 엘프도 특이한데, 하이엘프라면 표적이 될 수 있었다.
국제 협약이 있다고 해도, 그런 걸 신경 쓰지 않는 부류는 항상 존재한다. 남자라면 엘프에 대한 환상과 매력이 있으니 돈 많은 종자들이 가만둘 리 만무하다.
고티아의 동공이 잘게 흔들렸다. 일종의 경외감이 담겨 있었다.
“드래곤 아니다.”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대마법을 쓰면 간혹 도마뱀으로 보는 경향이 있더라고. 의심해서 미안하다.”
“사과도 할 줄 아네요.”
“상식적이거든.”
대체 어디가 상식적인지는 모르겠다. 차원이 다르다고 해서 받아들일 수 있는 범주를 벗어났다. 더욱이 대마법 중에서도 폴리모프는 아무나 사용하지 못한다.
‘이 인간이 특별한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