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 나는 호구였다(1)
치료는 끝이 났다. 더는 독벌레로 인해 고통을 받지 않아도 되었다. 수십 년을 괴롭힌 고질병에서 벗어났다.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이던가.
세계수의 완치는 엘프의 숙원이었다.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더욱이 세계수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엘프들은 정령력이 늘었다. 정령력은 정령과의 소통을 위한 기본 토대다.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엘프 마을의 경사로서 축제를 열어야 마땅했다. 그렇다면 세계수를 치료한 무진은 마을의 은인이었다.
기뻐해야 하거늘 엘프들은 넋이 나간 채 골골거렸다. 은인에 대한 감사와 환호를 보낼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엘프는 밤새, 그것도 2일 동안 한숨도 못 자고 시달렸었다. 이율배반적으로 고통이 클수록 정령력과 교감 능력이 발전했다.
엘프로선 기연이었다.
반대로 동화력이 상승하면서 받아들이는 고통의 양도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졌다. 치료 마지막 날에 가서는 세계수와 하나가 되어 비명을 고래고래 질러 댔다.
그나마 세계수는 민감하지 않은 나무 재질이지만, 엘프는 살과 뼈로 이루어진 생명체였다. 고통의 크기는 세계수가 더 클지 몰라도, 받아들이는 고통은 엘프가 더 컸다.
산고의 고통을 혼인도 안 한 엘프들은 절실히 체감했다. 다들 고통을 참느라, 단정했던 머리카락은 산발이 되어 엉클어졌다.
털썩, 털썩!
다리에 힘이 풀린 엘프는 맥없이 주저앉았다. 치통도 아니고, 온종일 최악의 통증에 시달린 엘프들은 눈이 퀭했다. 피부 미인인 엘프들조차도 다크서클이 턱과 마주하는 처참한 지경이었다.
하아, 하아!
고티아와 대장로의 숨결이 거칠었다. 동공은 붉게 물들었고, 전신에 핏줄이 섰다. 그나마 다른 엘프들은 마을에나 있지, 자신들은 세계수 바로 앞에 있었다.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듯 지친 기색이 완연했다.
“그러니까 마을에 가 있으라고 했잖아.”
“이제 와서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예요!”
“내가 뭘 어쨌다는 거지? 난, 그저 부모와 자식의 올바른 관계를 전했을 뿐인데.”
“……아주 그냥 효자 나셨네요!”
고티아와 대장로는 무진에게 세계수는 어머니와 같다고 누차 주장했었다. 더욱이 조금이라도 뒷걸음질 치면 자식 키워 봤자 아무짝에도 소용없다는 소릴 해 댔다.
그런 말을 듣고 어떻게 자리를 피하냐고? 결국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무진으로선 대수롭지 않았다. 부모를 돌보는 건 자식의 당연한 책임이었다. 오히려 고통을 나누어 받았으니 자식으로서 감사해야 했다.
“어쨌든 치료했고, 기연도 얻었잖아. 그런 주제에 아프다고 투정이나 부리고 말이야. 부모나 자식이나 염치가 없구나.”
세계수는 물론 고티아와 대장로도 치를 떨어야 했다. 3일간의 고통을 상기하면 쌍욕을 해도 시원찮았다.
하아!
한숨이 나왔다. 부들거리는 심정과는 별개로 사실관계는 명확했다. 무진으로 인해 병이 나았고, 정령력이 늘었다.
뼈아픈 진실이었다.
팩트를 부정한다면 은혜도 모르는 금수임을 자인하는 꼴이다. 평화와 조화를 중시하는 세계수와 엘프로선 받아들이기 힘든 참혹한 현실이었다.
무진은 말없이 빤히 보았다. 대화를 하고 싶으면 엎드려 절받기라도 하라는 의도를 담았다.
-고마워.
“은혜에 감사드려요.”
떨떠름하고 마땅치 않지만 세계수, 고티아, 대장로는 감사를 전했다. 갚기 힘든 은혜를 입은 건 사실인데, 고마운 마음이 들지 않는 것도 신기하다.
-스토리 던전 세계수의 미련 98% 공략.
세계수의 인정을 받자 75%에서 멈췄던 공략률이 단숨에 100% 가까이 다다랐다. 보상의 등급도 한 단계 이상 상승하면서 모든 스텟이 올랐다. 특정 스텟이 아닌, 전 스텟의 상향은 흔치 않았다. 여기에 s급 아이템, 장비, 스킬도 주어졌다.
‘안 죽일 걸 그랬나?’
칼리아론을 죽이지 않고 제압만 했다면 남은 2%의 부족분을 메우고도 남았을 터. 어쩌면 미션 이상의 초과 달성도 가능했을 것이다. 넘치는 보상에 아쉬움이 밀려왔다.
세뇌라도 할걸.
흑마법을 배웠다면 언데드도 고려했을 것이다.
‘그래도 아닌 건 아니지.’
스토리 던전의 완전 공략은 욕심이 나지만, 굳이 위험을 감수하진 않는다. 재차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무진은 칼리아론을 살려 주지 않았을 것이다. 예로부터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고 했다. 유사 인종인 엘프도 다르지 않았다.
던전의 보상은 됐고.
“이제 성의를 보여 봐, 내 맘에 드는 걸로.”
-여기서 또 뭘 달라는 거야?
“세계수가 죽으면 세계의 균형이 무너진다며. 바꿔 말하면 내가 세계를 구한 거네. 다른 차원이긴 해도, 인류의 영웅에게 경배를 해라.”
-……빌어먹을, 공치사! 정말 징그러운 인간이구나!
세계수는 아니라고 말하지 못했다. 일부 과장된 표현이기는 해도, 세계수가 가져오는 성장, 축복, 조화는 세계를 지탱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더욱이 저 재수 없는 인간 앞에서 존재의 가치를 부정하고 싶진 않았다. 3일 동안 몸 안을 어찌나 휘저어 놓았는지, 아직도 고통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준 포션이 없었으면 몸 안에 골다공증이 남아 있었을 거야.”
-대체 원하는 게 뭔데?
“세계수는 정령계와 통한다고 했지?”
-정령계는 살아 있는 생명체는 갈 수 없어.
“누가 가겠데? 구경만 한다니까. 열어만 주면 돼.”
인간을 비롯한 어떤 종류의 생명체도 정령계로 들어가지 못한다. 그런데도 세계수는 떨떠름함을 강하게 받았다. 열어 주면 원망의 근원이 될 것 같은 위화감이었다.
그러나 마계수가 되어 세상을 파괴할 뻔했던 미래에서 벗어났다. 이제는 약속을 지켜야 했다.
-열어만 줄 거야.
“알았다니까. 나 못 믿어?”
-널 어떻게 믿으라는 거야?
“이만하면 증명된 거 아닌가.”
-수작 부리면 가만 안 둬!
입이 있으면 한숨이라도 쉬었을 텐데, 세계수는 못 이기는 척 무진의 요청을 들어줬다.
무진은 세계수와 동기화를 했다.
나는 인간이고, 너는 나무인데? 종의 한계를 넘어선 합일이었다. 하나가 된 서로는 공간을 관통하여 새로운 차원을 관조한다.
‘아공간과 접목해 볼 만하겠어.’
차원을 여는 흐름, 아카식레코드와 관련이 있었다. 단순 정보가 아닌, 체계 하나하나에 권능이 실렸다.
보통은 차원을 여는 시도만으로도 흐름에 잡아먹힐 위험이 다분하지만, 세계수와 정령계는 같은 선상에 있었다. 비슷한 흐름임에도 섞이지 않는 물과 기름처럼 공존했다.
‘이건 좀 특이한데.’
차원에 먹히지 않고 창조된 공간을 유지할 힌트를 얻었다. 좀 더 영역을 확장한다면 세계에 열리는 던전을 막을 방법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여닫이만 가능하다면야.’
던전은 위험하지만, 반대로 엄청난 자원의 보고였다. 열고, 닫는 데 자유롭다면 독점도 가능했다.
무진은 세계수와 함께 정령계를 보았다.
퇴적층처럼 나누어진 공간으로 깊숙이 들어갈수록 정령의 등급이 높아졌다. 상급 정령일수록 관찰자 시점에 고개를 갸웃거린다.
‘혼의 사용이 자유로운 공간이네.’
-정령계는 일종의 정신계의 총합체야.
말은 그럴듯한데, 사후 세계와 비슷했다. 죽어서야 갈 수 있는 곳을 오다니, 간증의 중요 자료였다. 모두가 궁금해하는 신비를 풀 수 있을지도.
‘혼에 권능을 유지하면 어떻게 되려나?’
-뭘 하려는 거야?
‘이런 식도 되겠지.’
-이상한 짓 하지 마.
살아 있는 생명체와 혼이 없는 실체는 들어가지 못하지만, 정신을 의지대로 통제할 능력만 된다면? 정령계에서 정령처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을 것이다.
무진은 무진계에서 자신의 여러 자아 중 하나를 꺼냈다. 굳이 본체가 가지 않아도 가품은 많았다.
또 다른 무진이 정령계에 발을 들이자, 세계수는 화들짝 놀랐다. 하나였던 무진도 벅차거늘, 둘이나 되다니! 차원에 망조가 들었나.
-……어떻게?
‘실체를 나눈 거야.’
무진은 혼을 나누어 정령계에 발을 내디뎠다. 의지가 실체화를 이루었기에 물질계에서보다 훨씬 강력한 존재감을 발산했다. 전력을 발휘하기엔 지구가 너무 약하다. 지구의 보존을 위해서 항상 본인을 통제해야 했다.
세계수는 별걸 다 하는 무진의 능력에 혀가 없는 걸 다행으로 여겼다.
-너 대체 뭐야? 인간 맞아?
‘잔재주에 놀라긴, 조화와 균형을 추구한다면서 인간을 너무 얕잡아 보는 거 아닌가.’
-이건 얕잡아 보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잖아. 정말 터무니없는 인간이네!
‘어디 존재감을 확장해 볼까.’
남의 집에 왔으면 초인종을 눌러야지.
도어록 비밀번호가?
정령계의 주인을 만나 볼 심산이었다. 손님이 온 이상 나와 보지 않으면 예의가 아니겠지.
우우우우우웅!
무진의 패도가 확장하며 정령계를 삽시간에 뒤덮는다. 정령계의 지배자들이 화들짝 놀라서 쇄도해 왔다.
세계수는 질겁하며 만류하지만, 닫고 싶다고 해서 닫히지도 않는다. 설령 닫는다고 해도 무진이 알아서 열 방도가 생겼다.
열 땐 세계수 맘이지만, 닫는 건 무진의 맘이었다.
곧, 막강한 존재감을 지닌 기운이 접근했다. 보통 인간이었다면 그 압도적인 존재감에 바짝 엎드렸을 텐데.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난장을 피워!
-인간?
-뭐야, 인간 맞아?
-어쨌든 멈추지 못할까!
딱히 움직이지 않았는데?
숨도 쉬지 말까?
아, 영혼이지.
바람, 땅, 물, 불의 정령왕이 무진의 주변을 포위했다. 인간이 정령계에 들어온 것도 그렇고, 이런 식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일은 처음이었다. 놀람, 당혹, 분노가 뒤섞였다.
바람의 정령왕 슈라이.
땅의 정령왕 베르엠.
물의 정령왕 워처스.
불의 정령왕 프레이.
4원소의 정령왕이 흉흉한 기운을 뿜어냈다. 조화는커녕 속성과는 별개로 성격이 오만했다.
그들은 무단 침입자에 분노하면서도 의아한 기색이었다. 정령계는 아무나 막 드나드는 장소가 아니다. 천계나 마계는 방법이라도 있지, 정령계의 진입 장벽은 다른 어떤 세계보다 두껍고, 영원했다.
-잠깐, 이건 세계수의 기운인데?
-세계수가 어째서 인간과 같이 있는 거야?
-혹시, 세계수가 잠식된 건가?
-이놈, 세계수에 무슨 짓을 한 것이냐?
무진의 혼은 세계수를 통해서 정령계에 닿고 있었다. 세계수의 본질이 흘러나오는 것은 당연했다. 세계수를 잠식했다고 오해한 4원소 정령왕이 분노하여 달려들었다.
‘너희들이 먼저 시작한 거다.’
대화로 푼다고 될 일은 아니었다. 일일이 설득하기도 귀찮고, 가장 단순하고 확실한 수단이 있었다.
무진은 패도에 숨겨 놓은 권능을 담아 본질을 드러냈다. 만물을 깔아뭉개고 오만하게 선, 절대의 패도였다. 나 외엔 누구도 위에 설 수 없다는 패도무쌍의 권능이었다.
움찔!
포위 진형을 갖추었던 정령왕들이 화들짝 놀랐다. 영원불멸한 삶을 살면서도 느껴 보지 못한 기운이었다.
-헉, 이건 대체?
-……인간이 아닌가?
-설마 신의 권능?
-……크악, 그만~~~!
오만의 패도지만, 능동적이었다. 무진의 찾아가는 서비스와 합격 방해가 절묘하게 맞물린다.
바람은 가두고, 땅은 굳히고, 물은 얼리고, 불은 꺼 버린다.
더욱이 장악한 공간을 질식할 듯 압박하는 패도는 정령왕마저 없는 손발을 들게 했다.
맞춤 서비스는 계속되었다.
정령왕들이 멈추란다고 멈출 무진이 아니었다. 안 되겠다 싶어서 세계수가 관여하려다, 같이 엮일 것 같아 한 발 물러섰다.
정령왕치곤, 교전은 싱겁게 끝이 났다.
포승줄에 묶인 대역 죄인을 대하듯, 무진은 훈계했다.
“손님 대접이 형편없군. 접대의 예의를 가르쳐 주겠다.”
-남의 집에 허락도 없이 들어온 주제에 접대는…… 크아악!
“그러게 함부로 집 비밀번호를 가르쳐 주면 안 되지.”
-난 그냥 문만 열어 준 거잖아!
집단속이 이렇게나 힘이 든다. 모르는 나무한테 번호를 알려 주니까, 이 사달이 일어난 것이다.
불조심, 나무 조심.
세계수는 본인의 권능을 사용했을 뿐이라고 항변하지만, 정령왕들은 듣지를 못했다.
“안전 도어록을 설치하도록.”
-……뭔 개소리야!
알지도 못하는 소리를 해 대고 있었다.
맞춤식 상극의 속성에 정령왕들은 미치고 환장했다. 인간이 정령계에서 본래의 능력을 사용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거늘, 이런 무지막지함이라니. 알고 있던 상식이 와르르! 무너지고 있었다.
-이게 말이 되나?
세계수도 혼란하긴 매한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