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 세계수(2)
‘나무도 고통을 느끼나?’
-뭔 짓을 하려고 그딴 걸 물어봐?
‘내 기운을 느꼈을 테니, 어찌할지 감이 올 거 아냐.’
-그새 벌레를 전부 찾은 거야?
‘총 1,024,811마리야. 하나만 남아도 자웅동체라 곧바로 퍼질 거야. 더욱이 한 마리가 죽으면 일정 거리 내에서 같이 죽는 동귀어진의 성질이라 굉장히 까다로워.’
-그래서 어쩌려고?
‘어쩌긴, 기절시켜서 태워 버려야지.’
-내 몸에서 태우겠다고?
‘밖으로 일일이 빼기에는 너무 깊숙이 있어. 그럴 바엔 안에서 태우는 편이 낫겠지. 싫으면 말고?’
-치료만 해 줘, 참아 볼게.
꺼림칙했지만, 세계수는 다른 뾰족한 수가 없음을 인정했다. 한편으로 그 짧은 시간 내부에 퍼진 벌레를 전부 파악한 무진의 능력에 소름이 돋았다.
-어떻게 한 거야?
‘내가 살리는 건 잘 못 해도, 죽이는 건 전문가거든.’
무진은 기운을 세계수와 동화하여 모든 벌레를 타깃 했다. 범위와 거리를 조절하더라도, 족히 백만 마리를 넘어섰다. 더욱이 애벌레치고는 손바닥만 한 크기인 데다 독까지 한꺼번에 태워야 했다.
‘됐다.’
독을 태우는 수술에 들어갔다. 사람이라면 하기 힘들지만, 세계수는 나무였다. 조금 태운다고 죽지는 않는다. 사정을 두지 않고 과감히 진행했다.
화르르르!
-까아아아아악, 아파! 너무 아프잖아!
‘난 분명 아프다고 했다.’
-……언제~~~!
세계수는 혼자가 아니었다.
고티아와 대장로도 같이 발광했다. 서로가 공동 생명체란 걸 보여 주는 대목이었다. 아니면 혼자만 당하기 싫은 세계수의 물귀신 작전이거나.
까아아아악!
크아아아아!
환목(患木)과 보호 엘프의 고통 공조로 서로를 많이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반사회적 인격 장애를 고칠 수 있을지도. 사람이란 내가 당해 보지 않으면 남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법이다.
-……언제 끝나!
‘금방이야.’
-……아까도 그랬잖아!
‘다 왔어.’
등산할 때 산악인의 응원과 다르지 않았다. 이제 다 왔다고 하면 최소 3시간은 더 걸린다는 뜻이었다. 가도 가도 오르고 또 올라도 하늘 아래 뫼는커녕 안 보인다. 병장이 이병에게 제대 날짜를 묻는 기만행위였다.
“……이거 언제 끝나…… 까아아!”
“다 됐어.”
“……아까도 그랬잖아!”
“자식은 부모를 닮는 법이지.”
앙탈은.
지금 가장 힘든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무진이었다. 환목과 보호 엘프는 치료받고만 있었다. 정작 힘든 사람은 가만히 있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징징댄다면 적반하장이었다.
‘심력만 낭비할 순 없지.’
내가 아닌 대상과의 공조는 신검합일과 비슷했다. 단순히 검과 하나가 되는 경지가 아닌, 내 의지를 대상에 실어 뜻대로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세계수와 신목합일을 이룰 수 있다면 그 어떤 대상이라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을 것이다.
‘신의 정화를 쓴다면 좀 더 수월할 순 있겠지.’
전체를 정화하는 방식으로 한다면 [신의 정화]로도 턱도 없을 테지만, 타깃 하여 사용한다면 양을 조절할 수 있었다.
무진은 세계수를 실험 삼아 본인의 경지를 늘릴 방도를 찾았다. 이러려면 어려운 길로 돌아갈 필요가 있었다.
솔직히 세계수만큼 편한 실험체도 드물었다. 어지간해서는 죽지 않을 테니, 맘껏 활용할 수 있었다.
‘세계수 간의 소통 방식도 필요하고.’
방법을 알아낸다면 미래, 과거, 차원 간의 소통도 어쩌면 가능할지 모른다. 지수의 불완전한 기억을 보완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그렇기에 세계수의 본질을 낱낱이 파헤쳐 볼 절호의 기회였다.
‘나무가 말을 하는 것부터가 상식적이지 않지.’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니 철저히 준비해야 대응할 수 있다.
-……개수작 부리는 거면 가만 안 둬…… 까아아악!
“집중해도 부족한 판국에, 쯧! 네가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벌레를 놓쳤잖아.”
확실히 자기 몸이라서 그런지 세계수는 조금만 수상쩍어도 눈치를 챘다. 그럴 때마다 무진은 가스라이팅으로 책임을 전가했다. 어차피 고통은 있어도 결과는 같았다. 그렇다면 서로에게 득이 되는 결과를 찾아야 했다.
‘상부상조하자니까.’
치료가 길어지자, 고통의 전이가 엘프 전체를 향했다. 그 덕에 소통이 되지 않았던 엘프들도 세계수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는 하이엘프만의 권능을 모든 엘프에게 나누어 주어 널리 이롭게 하는 홍익엘프의 토대가 되었다.
‘힐에 권능을 담으면.’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가 분명했다.
무진은 수백 차례의 실패를 겸허히 받아들이며 성공하기 위해 나아갔다. 포기하지 않는 도전 정신에 박수갈채를 보내야 마땅했다.
성공을 위한 고통은 당연지사.
-……언제 끝나!
“……언제 끝나냐고요~~~!”
세계수와 엘프의 비명은 안 들렸다. 무진의 집중력이 그만큼 경지에 이르렀다는 의미였다.
“금방 끝나.”
그러면서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했다. 속 터지는 세계수와 엘프들이었다.
그런데 환장하게도 치료는 되고 있었다. 몸 안에서 벌레가 사라지면서 의지를 갉아먹던 어둠의 의념이 옅어졌다. 점점 자애롭던 자신을 찾아가고 있었다. 원래부터 세계수가 애처럼 징징거렸던 건 아니었다.
“3일 남았다고 했지.”
-……너 설마…….
“그냥 물어본 거야.”
-……지옥에나 가 버려!
원래 그런 성격일지도.
그러거나 말거나 무진은 치료에 박차를 가하며 시간을 꽉꽉 채웠다.
***
허억, 허억!
턱 끝까지 호흡이 차올랐다. 가빠 오는 숨을 다스리고, 한시라도 빨리 상처를 치료해야 했다. 하지만 당장은 그럴 때가 아니다. 한 걸음이라도 더 나아가야 한다.
‘……함정이었다니!’
함께 왔던 보부상 길드는 전멸한 지 오래였다. 쉐도우 길드에 진입할 때까지만 해도 이런 최악의 결과는 예상하지 못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파악할 여유도 없었다.
‘하필이면 단전 부위를!!’
단전과 심장을 노린 암수. 전혀 눈치를 채지도 못했다. 설령 알고 있었다고 해도 막기 힘들었다. 더욱이 비수에 독과는 극상성을 띠는 신성이 있었다.
‘어떻게 안 거지?’
완벽한 계획인 줄 알았거늘, 되레 완벽하게 당했다. 실로 소름이 돋는 일련의 과정이었다. 상대의 손바닥 위에서 철저하게 놀아났다.
생애 처음으로 겪은 처참한 패배였다.
‘여기만 벗어나면 된다!’
어떻게든 빠져나가기만 하면 기회는 있다.
독마는 가지고 있는 모든 수를 썼다. 통로에 대인살상의 이대지독을 풀어 추격을 차단했다.
이제 됐다.
제아무리 완벽하다고 해도, 이대지독인 몰살의 악몽을 피하진 못한다.
슈웅, 푸욱!
독을 살포한 직후 별안간 암기가 날아와 왼쪽 어깨와 오른쪽 옆구리에 박혔다.
“어딜 그리 바삐 가시는가.”
정면을 가로막는 그림자, 빛이 가시며 존재를 확인한 독마의 두 눈에 불신이 담겼다.
“교장!!”
“억울해할 사람은 따로 있지 않나.”
딱딱 들어맞는 일련의 과정을 돌이켜 보면 풍신이 개입하지 않고선 불가능했다. 독마는 그제야 어이없이 당한 연유를 깨달았다.
“나를 가지고 놀았구나!”
“신의 임자성, 그대야말로 우릴 철저히 가지고 놀지 않았는가.”
풍신은 분노했다.
생도를 위해 헌신적이었던 아카데미의 신의가 사실은 모두를 농락하고 기만한 독인이었을 줄 누가 알았으랴.
“어떻게 알았지?”
“그대가 아니고선 생도들을 은밀히 중독시킬 수 없지 않나.”
“여태 때를 기다렸던 거구나!”
“해독제가 나온 이상, 움직이지 않고선 못 배겼겠지.”
독마는 풍신의 의도대로 끌려다녔다는 사실에 이를 갈았다. 자신이 언제 이처럼 농락을 당했던 적이 있었던가.
그렇더라도 이대로 당할 수만은 없다.
“명색이 아카데미의 교장이 블랙마켓과 손을 잡아도 되는 것이냐?”
“쉐도우 길드는 좋은 길드지.”
인식의 문제였다. 의도가 좋다고 해도, 쉐도우 길드는 블랙마켓이었다. 교장과 쉐도우 길드가 손을 잡았다는 소문이 돈다면 권위에 타격이 될 수밖에 없다. 독마는 그 점을 노렸지만, 되레 시간만 잡아먹고 말았다.
“인정하마, 아주 훌륭해! 하나, 네놈 혼자서 나를 막을 수 있을 것 같아!”
“혼자라고 한 적 없네만.”
“그따위 허접한 수작……!”
독마는 폐부를 찌르는 위화감에 서둘러 오른쪽으로 물러섰지만, 쇄도해 오는 그림자가 너무 빨랐다. 일순간 공간이 소용돌이치며 제공권 안으로 사로잡힌다.
꽈아아앙!
공간을 파쇄하는 붕멸권.
독마는 반사적으로 회피했음에도 충격에서 완벽히 피하지 못했다. 마나 실드와 스킬을 펼쳤지만, 유리잔처럼 깨져 나갔다. 가공할 전사경이 파고 들어와 내부를 진탕시켰다.
울컥!
핏물이 토해져 나왔다.
“……뭐냐?”
“아직 한 발 더 남았는데.”
충격에 휘청거리면서도 거리를 벌렸던 독마는 아차 싶었다. 쉐도우 길드에서 추격했던 자를 잊고 있었다.
경천무쌍의 살격이 독마의 등을 노렸다.
퍼어어어엉!
크억!
부지불식간 이어진 연격에 치명타를 입은 독마였다. 간신히 정신을 부여잡지만, 풍신의 폭풍신권이 날아들었다.
퍼퍼퍼퍼펑!
풍신의 철혈삭풍이 독마를 정신 못 차리게 했다. 막아설 때마다 바람이 폭탄을 머금은 듯 연쇄적인 폭발을 일으켰다.
무진의 도움으로 전성기를 넘어선 풍신의 진면목은 실로 놀라웠다.
정면은 풍신, 좌측은 투귀, 배후는 지수.
삼각의 아름다운 편대를 구성하여 독마를 가두었다. 그 안에서 정신없이 처맞아야 했다. 개개인의 실력도 한 수 처지는 판에 합격마저 완벽하니, 독마로선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았다.
퍼퍼퍼퍼퍼퍽!
손발이 하나씩 느리다. 속성과 스킬을 쓸 타이밍도 나오지 않았다. 막기는커녕, 손 속을 회피하지도 못했다. 모든 공격이 급소를 노리고 들어와서 빗맞아도 의식이 흐릿해졌다.
“……비겁한…… 놈들…… 커억!”
독마는 무인의 자존심이라도 건드려서 빈틈을 찾으려고 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지수, 풍신, 투귀는 무진의 악랄한 수법에 통달했다. 독마의 수작은 무진의 손바닥 안에 있었다. 어떤 수를 쓸지, 훤히 보였다.
더더군다나 상대는 독마였다. 독을 쓰는 독인에게 틈을 주는 행위는 어리석었다.
지수, 풍신, 투귀는 호신강기를 융합해 강력한 결계를 형성했다. 독마가 최후의 발악을 할 때도 염두에 두었다.
“……다 죽어랏!”
더는 벗어날 방도가 없자, 독마가 최후의 수를 썼다. 천독공의 운기행로를 역으로 돌려 독기를 방출하는 동시에 일대지독인 천살망령을 사용하기로 했다.
커억!
이미 대비한 데다가 셋의 내력이 독마의 행로에 개입한 상태였다. 천독공은 제어되었고, 천살망령은 채 살포하기도 전에 가로막혔다.
털썩!
제대로 독을 써 보지도 못하고 당한 독마는 억울함에 몸서리를 쳤다. 이렇게 허무하게 당하려고 여태 버텨 오지 않았다. 천하제일의 극독을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던가. 마지막 비원인 심독을 만들기 위한 바람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이대로…… 푸악!”
“뭐라는 거야.”
지수의 손날이 독마의 백호혈을 후려쳤다. 자칫하면 백치가 될 수 있는 사혈이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죽거나, 바보가 된다고 해도 놓치는 것보다는 나았다.
파파파팟!
독마가 쓰러지자, 투귀가 팔대혈을 눌러 점혈했다.
풍신은 마나와 육신을 통제하는 제어구를 씌웠다. 이런 상태에서도 도망칠 수 있다면 그때는 인정해야 했다.
“아카데미의 신의가 독인이었다니, 말세로군.”
투귀는 손을 털면서도 한숨을 내쉬었다. 간단히 제압한 것처럼 보일 뿐, 조금이라도 방심했다면 화를 자초할 수 있었다. 그만큼 독마의 독은 치명적이었다. 호신강기의 일부가 녹아내린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아카데미는 교장의 영역이었다. 밝혀진 신의의 정체에 풍신은 자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두 제 부덕의 소산입니다.”
“맞아요, 전부 교장 선생님의 탓이에요.”
“……뭐?”
“라고 무진이라면 말했을 거예요.”
“……잘 어울리는 한 쌍이구나!”
어떻게 된 녀석들인지 점점 닮아 갔다. 상대방을 열 받게 하는 재주가 나날이 업그레이드되었다. 이 모든 결과물은 무진의 탓이었다. 그 녀석에게 물들면 지수처럼 되고 만다.
“저희가 그렇게 잘 어울려요?”
“끄응, 꼭 결혼해서 너희들 빼닮은 자식을 낳거라.”
“무진이가 많아 부족하지만, 제가 잘 가르쳐서 사람 만들어 볼게요.”
“……성공을 기원하마.”
발그레한 홍조를 띠며 몸을 배배 꼬는 지수의 괴행에 풍신은 이미 글렀음을 직감했다.
그렇다면 반드시 무진이 데리고 살아야 했다. 지수를 방치하는 행위는 옳지 못했다.
‘그나저나 강하구나.’
지수의 진짜 실력을 확인한 풍신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무진이 안심하고 맡긴 연유가 있었다.
쉐도우 길드에서 독마를 혼자서 몰아붙인 것만 봐도 보통이 아니었다. 지금도 이럴진대, 후일 성좌의 선택을 받는다면 어찌 될지, 대단한 녀석들이었다.
사삭!
투귀의 제자가 도착했다.
“처리했습니다. 사부님.”
“수고했다.”
독마와 보부상 길드를 안으로 끌어들여야 하는 상황이었다. 일반 길드원이라면 희생자가 나올 수도 있기에 김삼진과 김오진이 위장한 채 대기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