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 세계수(1)
파티가 끝난 후.
잠에 빠진 새벽 시각, 뇌리를 울리는 전언에 고티아는 나무 침대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처음에는 너무 많이 마셔서 환청이 들리는 줄 알고 무시했었다.
-내가 원한 건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니라고, 이거 어떻게 할 거야?
“……세계수님!”
고티아는 세계수의 또렷한 울림에 기겁했다.
세계수가 의지를 건네는 일은 흔하지 않았다. 하이엘프로서 사명감을 느낄 영광스러운 대사건이었다.
다만, 위대한 세계수께서 자꾸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전언에 원망이 섞였다.
“왜 그러시는지 말씀해 주세요!”
-이러려고 세계의 법칙을 거스르진 않았다고, 이게 다 그놈 때문이야.
대화가 쌍방이 아니라 일방통행이었다.
고티아는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세계수의 전언을 듣고만 있어야 했다. 내막은 모르지만, 한 가지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자신들이 한 일이라곤 가만히 있다가 무단 침입자에게 두들겨 맞은 게 전부였다.
“이 사람 때문에 세계수께서 화가 나신 게 분명해!”
원인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 사람이 아니라면 과묵하신 세계수께서 이렇게 수다스러울 리가 없지 않은가.
평생 한 마디를 들어 보지 못하고 수명을 다해 자연으로 돌아가는 엘프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오늘 평생 들어도 남아돌 문장을 듣고 있었다.
“이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해!”
답은 뻔히 나와 있었다. 아는데도 망설여진다. 그 사람한테 부탁해야 하는 현실에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제 어쩔 거야? 다 끝장이라고, 자기는 상관없다 이거지!
세계수의 짜증, 울분, 앙탈은 계속되었다. 무엇보다 점점 더 전언의 강도가 강해지고 있었다. 단순히 기분이 좋지 않아서가 아닌, 근원적인 문제가 있음을 의미했다.
최근 들어서 세계수의 잎들이 바래져 가고, 결계의 흐름이 부자연스러웠다.
“이 작자가 결계를 부숴서!”
그럴 가능성도 있으나, 결계야 다시 치면 그만이었다. 결계가 망가졌다고 해서 세계수에 영향을 끼치진 않는다.
여하튼 그자의 첫인상이 워낙 강력했었다. 어지간하면 외면할 텐데, 세계수의 요청이었다.
결심이 선 고티아는 집에서 나왔다.
뜻밖의 엘프가 기다리고 있었다.
“대장로님이 어쩐 일로?”
“세계수께서 노하셨더구나.”
“들으셨어요?”
“들었다기보다는 느꼈다고 해야겠지. 나는 하이엘프가 아니니까.”
세계수의 축복을 받은 하이엘프의 권능이었다. 현실을 체감할수록 대장로는 씁쓸했다. 비록 반대편에 섰고, 마을의 율법을 어기기는 했어도 오랜 세월 함께했던 칼리아론이었다.
종족을 배반하고 세계수를 위협한 칼리아론이지만, 허망한 죽음이었다. 만약 그가 세계수의 축복을 받았다면, 참담한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그런 가정을 떠올릴 때마다 자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죄송해요.”
“네가 죄송할 일은 아니지. 전적으로 우리가 부족해서 벌어진 일일 뿐이야.”
과거에는 하이엘프가 아님에도 정령왕과 계약한 엘프가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세계수의 권능을 이어받을 수 있는 엘프가 하이엘프로 한정되었을 뿐이다.
이에 반감을 품은 칼리아론은 종족의 율법을 어기고, 세계수를 공격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세계수가 점점 약해지고 있는 걸 이제야 느꼈다.
“그 사람을 안내해도 괜찮을까요?”
“세계수께서 이리 부르시지 않느냐. 어쩌면 저들이 말한 미션과도 연관이 있을 듯싶구나.”
“달라지셨네요.”
“세상이 달라졌으니 우리도 바뀌어야겠지.”
종족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완고함이 그 인간의 등장으로 한순간에 무너졌다. 이대로 법칙에만 얽매이다가는 종족의 미래가 없다는 불안감도 컸다. 더욱이 세계수의 상태가 악화하고 있었다. 이대로 세계수가 말라 버린다면 엘프는 희망을 잃는다.
고티아는 대장로와 인간의 집을 찾았다. 아공간에 집을 넣고 다니는 희귀한 인간이었다. 어디로 튈지 예측이 되지 않아 난감했다.
어?
그 인간이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면 여태 잠을 자지 않고 있었나?
엘프주에 톡톡 튀는 술을 섞어 마신 후, 대부분 곯아떨어졌었다. 맛은 진짜 기가 막히게 좋은데, 주량 이상으로 마시면 정신을 못 차렸다.
“어쩐 일이세요?”
“나를 찾아온 것 같은데 의문형으로 묻는 건 떠보려는 수작 아닌가.”
정곡을 찔린 고티아가 멈칫하다, 원래의 신색을 회복했다. 여기서 당황해서 버벅대면 사실을 인정하는 꼴이었다.
“이 시간에 안 자고 어째서 나와 있냐는 거죠.”
“너와 같아.”
엘프와 인간의 신경전이었다.
먼저 말을 하지 않으면 나도 말하지 않겠다는 무진의 단호함이었다. 의도대로 되기는커녕 상황이 꼬인 고티아로선 난감했다.
“남의 집에 찾아온 엘프치곤 말이 없네.”
“그렇게 따지면 여긴 우리 집이죠!”
“등기부등본에 잉크도 마르지 않았어!”
“……그게 대체 뭔 소리예요?”
“그런데 갑자기 자기 집이라고 하면 전세 사기지.”
“하아, 그만해요!”
대화가 전혀 통하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등기부등본은 뭐고, 전세는 대체 뭐야? 이 세상에 없는 단어를 쓰고 있었다. 다른 차원에서 왔다고 유세를 떠는 건가?
“고티아, 이쯤 하는 편이 낫겠구나. 숨길 일도 아니니, 사실대로 말하거라.”
“알았어요.”
이대로는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는다. 어차피 인간들은 3일이 지나면 원래의 차원으로 돌아간다. 그리되면 세계수를 치료하기는커녕 원인조차 알아내지 못한다.
“세계수가 징징거리기라도 했나 봐.”
“……설마, 들렸어요?”
“매너 없이 밤새 떠드니, 잠을 잘 수가 없더라고.”
“알면서 여태 저랑 말장난한 거예요?”
“그러니까! 정작 아쉬운 쪽은 그쪽인데, 나하고 실랑이를 벌였네.”
이게 다 너 때문이라는, 무진의 교묘한 화술이었다.
울컥했던 고티아는 말문이 막혔다. 무진의 말에서 허점을 찾기는커녕 대화가 길어질수록 불리해졌다. 더욱이 인간이 세계수의 전언을 들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세계수께서 당신을 찾으세요.”
“그래.”
영광스러운 일이거늘, 시큰둥했다. 세계수의 부름을 하찮게 여기는 것 같았다.
“그게 다예요?”
“욕심이 과해. 혹시, 이번에도 아무런 대가도 없이 도와 달라는 건 아니지?”
“당신의 미션이 걸린 일일 수도 있잖아요!”
“그건 부차적인 문제지. 절대적인 건 아니야. 이러는 시간에도 세계수는 점점 나빠지고 있을 텐데. 쯧쯧쯧!”
무진이 혀를 차자, 고티와와 대장로는 헛바람을 삼켰다. 이 인간이 벌인 만행을 상기하면 이래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면 엘프의 은인이었다. 도움을 바란다면 마땅히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내어 주어야 했다.
“엘프의 친구라든지, 평생의 은인이라든지 그런 상투적인 보상은 안 되는 거 알지? 쓰지도 못할 대가를 내어 주는 건 기만이거든.”
당장 도움이 되는, 현실적인 대가를 바랐다.
속물적이지만, 고티아와 대장로는 입맛이 썼다. 엘프의 약속이 지닌 무게를 고려하면 과하다고 볼 수 있으나. 다른 차원의 인간이었다. 친구가 된다고 해서 도움이 될 턱이 없다.
“은인께서 원하는 보상을 드리겠습니다.”
“그런 식으로 얼렁뚱땅 넘어가시면 곤란합니다. 제가 여기에 뭐가 있는 줄 알고 고릅니까?”
엘프 마을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알 수 없다. 교장이 보고 이용권을 주면서 원하는 대로 가져가라고 할 때와 비슷했다. 도움을 원한다면 엘프는 마땅히 보물의 가치를 정확히 알려 주어야 한다.
“우리가 가장 자신하는 보물을 드리지요. 이러면 되겠습니까?”
“이제야 올바른 거래를 틀 수 있게 됐습니다.”
무진의 허락에 대장로와 고티아는 진이 다 빠졌다. 맘 같아서는 주저앉고 싶으나, 세계수의 부름이 거세지고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오라고 떠들어 댔다.
대가를 확실하게 명시한 무진은 그들을 따라 세계수의 정수가 담기는 장소로 향했다.
설명을 들어 보니, 세계수의 정수는 일종의 나무 수액이었다.
‘고로수쯤 되려나?’
됫병에 조금은 담아 가도 되겠지. 저 거대한 세계수라면 품고 있는 수액의 양도 어마어마할 테니, 티도 안 날 것이다.
그런 기대는 세계수의 정수를 보자마자 날아가 버렸다.
[오염된 세계수의 정수]
이상하진 않았다. 건강한 사람도 가난하고 병이 들면 짜증을 부리기 마련이다. 세계수의 징징거림으로 봤을 때 몸도 마음도 병들어 있었다. 현재로선 정상적인 수액을 바라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세계수의 전언이 뇌리를 시끄럽게 울렸다. 오는 내내 얼마나 징징거렸던지, 세계수답지 않았다. 일반 판타지 소설의 세계수는 모성 본능 그 자체였거늘.
-네가 그 아이를 죽여서 방법이 사라졌다고! 이거 어떻게 책임질 거야!
‘회귀는 아닐 테고, 세계수는 시간을 거슬러 소통할 수 있나?’
-아니거든! 난 그냥 다 알아!
‘그랬었군.’
세계수는 부정하지만, 지수를 통해 미래를 알고 있었다. 또한, 칼리아론을 보자마자 죽인 연유였다. 그는 세계수를 오염시켜 마계수로 만든다.
결국, 스토리 던전은 공략이 되지 않아 현실로 나타났다. 대량의 유혈 사태가 벌어졌으며, 마계수가 된 세계수는 정령소가에도 타격을 주었다.
이 일련의 사태를 경험한 세계수는 그리되기 전에 과거의 자신에게 기억을 전해 준 것이다. 스토리 던전의 미션은 현재가 아닌, 미래의 세계수가 가진 미련이었다.
‘엘프의 어머니다운 마인드야.’
-아니라니까! 네가 그 녀석을 설득해서 나를 고쳤어야지! 그랬다면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고 끝났을 거라고!
세계수는 자신에게 독을 심은 엘프마저 품으려고 했다. 말로는 독을 치료하기 위해서라지만, 자식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마음이었다.
‘설득한다고 될 일은 아니었어.’
-그렇다고 말도 해 보기 전에 죽이냐고! 이러다 내가 마계수가 되면 세계가 위험해질 거야!
‘그건 너희 세계지.’
-와, 이 이기적인 인간 보소!
‘인간은 원래 이기적이야.’
칼리아론을 설득해 봤자, 그 주체인 어둠의 군주를 처리해야 했다. 더욱이 실체를 숨기고 있는 어둠의 군주가 세계수의 요청을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안된 일이지만, 설득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마계수가 된다고 해도 우리 현실에 영향을 주진 않는다.
‘저세상에도 용사나 드래곤이 있을 테니 해결해 주겠지.’
-내가 오염되면 정령왕도 영향을 받는다고, 어떻게 이리 무책임할 수가 있어!
‘마치 내 책임처럼 몰아가는데, 아닌 거 너도 알잖아.’
-알았어, 뭘 주면 돼.
이제야 세계수는 대화할 자세가 되었다. 여태 괜한 말로 시간을 끌었다. 도움을 바라는 거면 낮은 자세로 임해야 했다. 책임을 전가하면서 감성에 호소한다고 해결책이 나오진 않는다.
우리가 자주 만나서 친분을 다진 사이도 아니고, 오늘 처음 봤다. 세계수가 뭔데, 자기를 구하면 우리 세계의 환경오염이라도 줄어드나?
‘일단 무엇을 줄 수 있는지부터 고민해 보자고.’
-나보고 설명부터 하라는 거야?
‘보잘것없으면 구할 이유가 없잖아.’
-인정머리 없는 인간! 어째서 너 같은 놈이 들어온 거냐고!
‘이러는 시간에도 상태가 악화되는 거 알지?’
시간 관계상 정리에 들어갔다.
세계수는 일단 정령력을 강화하여 상위 정령과의 계약을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는 정령에게도 해당이 되는데, 강화를 통해서 등급의 상향이 가능하다.
다만, 확 끌리지가 않는다.
정령술은 노력하면 되는 일이고, 요나는 알아서 잘 크고 있었다. 세계수의 도움이 없어도 되는 일에 심력을 소모하고 싶지 않았다.
‘별론데.’
-내 분신인 씨앗, 뿌리, 열매 다 줄게! 됐지! 더는 없어!
‘고로수도.’
-이럴 거면 네가 알아서 다 가져가!
‘백지 위임이라, 나야 좋지.’
-……나는 안 돼!
손이 있었으면 가슴을 가렸으려나?
더 했다가는 나이테까지 탈탈 털리겠다 싶어지자, 세계수는 즉시 계약을 정정했다. 이 터무니없는 인간은 자신의 모든 걸 탈탈 털어 가다 못해, 통으로 뽑아 갈지도 몰랐다.
협상을 타진한 무진은 치료에 돌입했다. 일단은 검진이 먼저였다. 어떤 증상인지를 알아야 치료를 하지. 정수가 모이는 장소라 세계수를 관조하기는 용이한 편이다.
“치료할 수 있겠어요?”
“해 봐야 알지.”
당연한 말이지만, 무진은 치료를 확답하지 않는다. 두루뭉술하게 회피할 구석을 만들어 놓았다. 그렇다고 환자를 돈벌이로 본다는 착각은 금물이다. 고치지 못하더라도, 최선을 다해 봐야 하는 거 아닌가.
“절대로 실패하면 안 돼요! 성공한다면 제 모든 걸 드릴게요!”
“위험한 발언인 데다가, 사람을 너무 쉽게 믿는 거 아냐?”
“세계수가 없으면 우린 살아도 산 게 아니니까요!”
“걱정하진 마. 네가 딱히 필요하지도 않거든.”
고티아는 안심이 되면서도 울컥! 하는 감정을 간신히 다스렸다. 살아오면서 당해 보지 못한 무심함이었다. 시간이 된다면 자신을 증명하고 싶었다.
무진은 고티아의 변화를 신경 쓰지 않았다. 치료는 세계수와의 소통이면 족하다.
‘조기에 치료했어야지.’
고독과 비슷한 종류로 알을 낳고, 번식하여 숫자가 상당했다. 이제까지 버틴 것도 용할 지경이다. 그나마 퍼지는 걸 최대한 막아 놓기는 했다.
‘전체로 퍼졌으면 해독이 여의찮았겠어.’
[신의 정화]가 있기는 해도, 세계수의 규격을 고려하면 전부를 써도 부족했다. 그러면 치료한들, 치료비 대비 적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