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 계산된 역공(3)
그렇게 애만 태우고 있을 때, 테라 길드에서 연락이 왔다. 협상안을 제시한 걸 보면 냄새를 맡은 것이다. 미심쩍은 부분은 있었지만, 테라 길드의 배후가 자신과 같았다.
한편으로 허탈했다. 그들은 같은 조직임에도 서로 간의 정보를 차단한 것이다. 실로 주도면밀한 자들이 아닐 수 없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불감청고소원이라, 테라 길드의 협상을 거절하지 않았다. 손바닥 위에 놓고, 통제하려는 저들의 의도가 맘에 들진 않으나. 무시하긴 위험하단 판단이 섰다.
테라 길드의 신지석과 같이 움직였다.
신지석은 테라 길드의 정예를 데리고 왔고, 나연준도 전투 길드원으로 팀을 꾸렸다. 쉐도우 길드에서 의심하지 않도록 신중에 신중을 기했었다.
총인원 60명.
수적으로도, 질적으로도 우위에 있었다.
신지석도 최측근인 전준명을 데리고 왔었다. 최근 들어 쉐도우 길드가 약진하고 있지만, 결과는 자명해야 했다.
정글 코볼트의 각성으로 위장해서 정부와 혈천 길드의 의심을 피하려고 했거늘.
예상을 벗어난 참상이 펼쳐졌다.
다른 의미로.
츠으으으으, 화르르르!
핵 폭격을 당한 듯.
수림이 흔적도 없이 날아가고, 일대는 불바다가 되었다. 쉐도우 길드를 기습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길드원 절반이 공격 한 번 해 보지 못하고 증발했다.
남은 절반도, 멀쩡하지 않았다.
지축을 거칠게 흔들어 댄 마나 폭탄의 파편은 가공할 흉기였다. 수류탄의 수백 배에 이른 파괴력과 속도에 길드원은 난자당하거나 관통당했다.
간신히 마나 실드 스킬을 펼쳐 범위에서 벗어났음에도, 나연준과 신지석의 일그러진 안면은 펴질 줄 몰랐다.
60명의 전력이 반의반 토막이 되어 버렸다.
그간 준비해 놓은 정예를 한순간에 잃어버렸다. 이게 뭘 의미하겠는가?
미리 알고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다.
빠드드득!
망연자실한 참상에 나연준과 신지석은 이를 갈았다. 평정심을 가지기에는 분함이 앞섰다. 계집의 수작에 철저하게 놀아났다는 걸 깨닫자, 냉철한 이성이 붕괴했다.
“산 채로 씹어 먹도 시원찮을 년이! 가만두지 않겠다!”
“이번에는 그대의 말에 전적으로 동조하지 않을 수 없군.”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데스 나연준의 분노에 그린피스 신지석도 동조했다. 죽음과 평화의 흔치 않은 조합이 공공의 적에 의해 통합을 이루었다.
부글부글!
분노로 마나가 불타오른다.
나연준과 신지석의 살의는 실로 대단했다. 살의에 마나가 실리며 가공할 기세를 형성한다. 살아남은 길드원도 살의에 동화하여 복수자가 되었다.
파슥, 파스슥!
걸을 때마다 재가 되어 부서진다.
무진과 제인이 화마에 뒤덮였던 수림에서 걸어 나왔다. 분노에 이글이글 타오르는 나연준과 신지석을 보며 혀를 찼다.
쯧!
가해할 때는 신났던 것들이 본인들이 당하니 억울하다 이건가. 학폭 연예인, 운동선수, 인플루언서, 정치인의 심정이 이럴까? 그 시절의 장난으로 치부하는.
“너희 같은 것들은 무슨 적반하장이 기본 옵션이냐?”
“몰랐어? 쟤들의 전매특허야.”
“자기들만 억울하지.”
“작당모의나 일삼으며 뒤통수치려던 것들이 말이야. 양심은 집에다 놓고 나온 거지, 뭐.”
무진과 제인의 태연한 만담은 나연준과 신지석의 분노에 기름을 붓는 행위였다. 실제로 맞는 말인 데다, 정곡을 찔러서 더욱 화가 치밀었다.
솨아아아!
명백한 무시와 조롱이었다.
신지석과 나연준은 무시무시한 살의를 발산했다. 단순히 죽이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죽여 달라고 빌게 해야 했다.
“이 연놈들이 감히! 산 채로 껍질을 벗겨서 소금에 절여주마!”
“아토믹 캐논.”
무진은 지체하지 않았다. 말을 하기 전에 발사되었다. 일전에 경험한 로즈의 수법을 개량했다. 비록 적이라도 좋은 게 있으면 받아들이는 융통성이었다.
펑!
박 터지는 소리에 나연준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시선에 신지석이 있었다. 한데, 대화를 주고받을 얼굴이 사라져 버렸다.
털썩, 철퍼덕!
머리를 잃은 신지석의 육신이 무릎을 꿇더니 맥없이 바닥에 고꾸라졌다. 블랙마켓의 한 축을 담당했던 테라 길드장의 죽음치고는 허무함의 극치였다. 죽으면 다 똑같다고 해도, 저런 식으로 죽게 될 줄 누가 알았으랴.
펑, 펑, 펑, 펑!
나연준은 넋을 놓고 있어선 안 되었다.
아토믹 캐논은 시작에 불과했다. 정교하게 다듬어져 겉으로 드러난 위력은 별거 아닌 듯 하나, 정작 피할 수가 없었다. 마치 방향을 가리키면 죽어 버리는 언령처럼 느껴졌다.
“……오빠, 살려……”
죽고 싶지 않은 꽃뱀 지연희의 최후는 허망했다. 발버둥 치는 제인을 구경하려고 왔다가 최후의 봉변을 당하고 말았다.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당하려고 오지는 않았다.
명색이 그레이 길드의 길드장인 꽃뱀의 허무한 최후였다. 그나마 신지석도 같은 최후라서 자괴감이 들지는 않겠지.
씨익!
무진이 다시 물었다.
“어떻게 하겠다고?”
귀에 손바닥을 대고 자세히 들어 보겠다는 예의였다. 우리나라는 얼마든지 말할 수 있는 자유민주주의를 근간으로 두었다.
죽기 전에 한마디는 괜찮잖아.
***
교류전의 실패에 이어 중국 주석이 멀쩡히 활보했다. 한 번은 운이라 쳐도, 실패가 거듭되었다. 상관이 없다고 방관하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독마는 계획의 성패보다 독이 통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중점을 두었다. 일대지독이 아니라고 해도, 문제가 되었다. 삼대지독은 당장 발휘되는 급성독이 아니라, 장기간에 걸쳐 상태를 조절하는 일종의 만성독이었다.
단숨에 죽이는 급성독이 위력적이긴 해도, 실제 해독하는 과정은 만성독이 훨씬 어렵다. 해독 자체가 불가능해야 마땅하거늘,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
그는 교류전의 단체전 당시 중국과 일본 생도를 해독한 강무진 생도를 주시했다. 운이 맞물려 최상급 엘릭서를 가지고 있었다면 모를까, 자체적으로 생산이 가능한 치료제라면 곤란했다.
그렇다고 일개 생도가 치료제를 개발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만한 실력을 갖춘 연금술사와 치료술사는 세계로 범위를 넓혀도 손가락에 꼽혔다. 잠재 속성이 최상급의 연금술과 치료술이라고 해도 세월이 걸린다.
그러나 강무진 생도의 주변엔 권왕과 마제가 있는 데다가 교장까지 싸고돌기에 조사하기가 여의찮았다. 당장의 궁금증을 해결하겠다고 위험을 감수할 순 없다. 더더욱이 강무진 생도를 조사한다고 답이 나올 거라 장담할 수도 없다.
그렇게 막막하게 기다리던 중 의외의 장소에서 해결책이 나왔다.
블랙마켓.
그제야 삼대지독을 해독한 연유를 찾았다. 놀랍게도 포션은 삼대지독과 극상성을 띠었다. 믿기 힘든 결과물이 아닐 수 없지만, 삼대지독을 해독하기 위해 만든 포션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해독 포션을 만들었다는 자체가 중요하다. 이후에도 자신의 독을 방해할 수 있었다.
이는 좋지 않았다.
또한, 놈이 가진 능력이 탐이 났다.
포션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조사했다. 유통로를 교란하긴 했어도, 판매자는 블랙마켓의 쉐도우 길드였다.
한낱 암시장의 길드가 이토록 놀라운 포션을 제조했다니 믿기 힘들었다. 물건을 사서 단순히 유통했을 수도 있다는 가정을 했다.
그런데 쉐도우 길드의 동향이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직접 생산하지 않고서는 하기 힘든 조치였다. 심증이 점차 확증이 되자 그로서도 더는 은인자중하지 못했다.
때마침 일전에 실패했던 계획을 실행할 여지가 생겼다. 블랙마켓을 장악해야 했지만, 쉐도우 길드의 역공으로 보류된 상태였었다. 되레 그레이 길드만 타격을 입고 총통 길드에 흡수되었다.
쉐도우 길드를 고립시켜 블랙마켓을 장악하려던 고사 작전도 새로운 포션의 생산으로 물 건너가고 말았다.
그런 와중에 쉐도우 길드를 처리할 명분이 생겼다.
답은 명확했다.
시기의 문제일 뿐 조직은 블랙마켓을 지배하고, 자신은 연금술사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연금술사가 가진 지식을 온전히 습득한다면 한 차원 다른 독을 만들 수 있으리라.
때가 왔다.
쉐도우 길드장이 정예를 이끌고 던전 공략에 나섰다. 사전에 쉐도우 길드의 본진을 찾아야 했었다. 일전 습격 이후로, 쉐도우 길드장의 거처는 베일에 싸여 있었다.
꽤 애를 먹고 나서야 찾아냈다.
어지간한 일에는 직접 나서지 않을 테지만, 연금술사의 확보가 중요했다. 조직에서 먼저 손을 대면 그것도 골치다. 자신이 먼저 확인한 후에 그리드 넘버와 타협해야 한다.
쉐도우 길드 본진 공략에 보부상 길드가 나섰다.
길드장 이산과 그 형제들로 구성된 활빈대가 주축이었다. 겉으로는 평범한 사람들처럼 보여도, 길드의 정예를 이끌고 온 걸 보면 원하는 바가 큰 듯했다.
“협조에 감사합니다.”
“저도 필요해서 협력하는 것이니 부담 가지지 않아도 됩니다.”
“말씀만으로도 힘이 되는군요.”
“저도 그렇습니다.”
외양만 보면 독마와 이산 길드장은 맘씨 좋은 옆집 할아버지와 아저씨였다. 길 가다 봤을 법한 평범함이 상황과 장소로 인해 되레 이질감을 느끼게 한다.
“오늘은 빨리 끝날 것 같군요.”
“그렇게 되도록 최대한 노력해 보겠습니다.”
독마가 물러섰다.
이산 길드장은 활빈대와 앞으로 나섰다. 주변이 시끄러워지면 곤란하기에 공간 결계 아이템을 발동했다.
우웅!
일대를 잠식한 공간은 외부와 단절되었으며, 내부의 형상을 복사하여 형태가 변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으면 의심할 수도 있으나, 그때쯤 되면 목적은 달성하고도 남는다.
“신속히 처리해.”
“맡겨 주시오, 형님.”
활빈대는 과거 홍길동의 활빈당을 모태로 했지만, 하는 짓거리는 주인의 허락도 없이 남의 집을 무단 침입하는 도적단과 다르지 않았다.
이산과 40인의 도적단.
쐐애애액!
그들은 거침없이 쉐도우 길드를 향해 나아갔다. 방해는 기대하지 않는다. 쉐도의 길드의 허를 제대로 찔렀다는 확신이 있었다.
하아아!
영상을 본 지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된 게 무진의 말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들어맞았다. 이 정도면 거의 예지나 다름이 없으나, 실상은 계산된 흐름에 지나지 않았다. 상대가 무진의 의도대로 움직여 주기만 하니 허탈한 감정이 들었다.
‘내가 너무 무능했네.’
미래에서 손도 못 써 보고 일방적으로 당했던 걸 떠올렸다. 그때는 감히 대적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랬던 거악(巨惡)이 이제는 하찮다 못해 우습게 보이기까지 했다.
미래의 지식만으로 이런 차이가 드러날 리 만무하다. 단편적인 지식을 한 가지로 엮지 않고, 사고력을 확장한 무진의 역량이었다.
‘이것도 받아먹지 못하면? 으악,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네.’
다 차린 밥상을 걷어찼다며 두고두고 비웃음거리로 전락할 것이다. 다른 건 다 참아도 그 꼴은 못 참지.
‘나, 이러려고 회귀한 거 아니라고!’
지수는 회귀자로서 존재 가치를 증명해야 했다. 하는 것 없이 받아먹기만 하면 굳이 회귀할 필요가 있었을까.
왜 하늘은 무진을 낳고, 나를 낳으셨단 말인가?
잘 낳으셨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