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 할 건 해야지(3)
누가 더 손해인가?
협박을 걸고넘어져 봤자 무진은 별다른 피해를 입지도 않는다. 징계나 유예라도 받으면 다행이지, 흑막을 제보한 국민적 영웅이 될 수도 있었다.
그 꼴을 대체 어떻게 보라는 것인가?
“아버지한테 쌍욕을 먹으면서도 돈 달라고 했잖아. 내가 안 준다는 것도 아닌데, 이건 너무하는 거 아니냐고!”
“그렇긴 해.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차고 넘치지.”
“그런데 왜?”
“재밌잖아.”
장위도 모르지 않는다. 자신이 개 같은 새끼라는 걸. 그러나 진정한 개새끼 앞에서는 조족지혈임을 깨달았다. 그저 재미를 위해서 중국 주석의 아들이 묵고 있는 호텔로 무단 침입하는 미친놈이었다. 집요한 광기의 레벨이 차원이 다르다. 이런 놈은 애초에 건드리지를 말았어야 했다.
‘내가 미쳤지!’
상식을 불허하는 녀석이 아닐 수 없었다. 건드릴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될 줄은 미처 몰랐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또 건드릴 것 같아서 무섭기까지 했다.
“왕이 총리가 주석이 되면 더 재밌겠다. 그치?”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그러면 돈은커녕 모두 나가리라고!”
“그럼 고마워해야지, 천극단의 부작용이 보기보다 심각한 것 같은데.”
“그게 사람을 시궁창에 몰아넣고 할 소리야?”
“아직 진짜 시궁창 맛은 못 봤잖아. 게다가 주석의 건강 상태도 안 좋은 것 같고.”
“아버지는 건강하시거든, 대체 무슨 말을 하는…… 설마?”
“그래, 딱 한 방울 남았다.”
무진은 중국이 한쪽으로 치우치기를 바라지 않았다. 돌아가는 사태를 보니 주석보다는 총리가 의심스럽기도 하고. 구대문파와 팔대세가가 서로 치고받아 준다면 여러모로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장위를 선택했다.
원래는 흑막과 엮어서 보내 버리려고 했지만, 그보다는 두고두고 이용하는 편이 낫다고 봤다. 내부에 첩자들을 확인할 도구로, 쓰고 버리는 데도 양심의 가책을 덜 받는다.
“1,000억이면 돼?”
“너하고 같냐? 게다가 이거 한 방울밖에 없어.”
“진짜 너무하네, 돈독이 올랐구나!”
“그 정도면 껌값이잖아. 게다가 공도 세우는 거고. 이대로 가면 가문에서 쫓겨나지 않으면 다행이지 않나.”
무진의 제안은 치명적이었다.
거절할 수 없는 제안에 장위는 한숨을 쉬었다. 효과가 없으면 아쉬워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극독을 해독하고, 천극단의 부작용에서 벗어났다. 약에 찌든 몸에 활기가 돋고, 균형을 이루었다.
“계약할게.”
“그 전에 금제를 좀 하자.”
“이 씨발, 돈 준다는데 이러는 법이 어딨냐고! 너 대체 나한테 왜 이래?”
“넌 입이 싸잖아.”
“그럴 거면 차라리 나 모르게 하라고!”
“존중해 주는 거야.”
금제를 하겠다고 대놓고 말하는 놈은 생전 처음 봤다. 면전에서 떠드는데, 거절할 명분도 없었다. 이미 하찮은 폭력에 굴복해서 대가리까지 박았으니, 지조를 지키겠다는 주장이 먹힐 턱이 있나.
“날 조종하는 건 아니겠지?”
“널 어따 쓰라고?”
네가 필요하다, 너밖에 없다고 말해 줄 순 없냐고? 금제하겠다면서 필요 없다니!
장위의 자존감이 바닥을 쳤다.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냐?”
“쓸모 있다. 됐냐?”
열 받게 하는 재주는 정말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 장위는 다시는 이놈과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무진에게서 산 물약을 아버지한테 직접 전달해야 했다.
‘흑막이 접근하면 땡큐지.’
금제는 환술을 쓸 때 해 놓은 상태였다. 지금은 요식행위에 불과했다.
“나에 대해서 발설하면 머리가 터질 거야.”
“……진짜야?”
“아니.”
“이 미친놈!”
끝까지 가지고 놀고 있었다. 장위는 다시는 상종하지 말자고 되뇌었다. 무진과 만난 이후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만날 것 같아서 소름이 돋는다.
“이제 우린 친구다.”
“친구한테 금제하는 놈이 어딨어?”
“그럼 도모다찌.”
“난 중국인이라고!”
남의 멀쩡한 이름을 한국식으로 부를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한국에 오지 않았다면 애초에 벌어지지 않을 일이었다.
‘돌이킬 수가 없잖아!’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이고, 이 집요한 녀석이 놔줄 것 같지도 않았다.
“체면 세워 줄게.”
“……개새!”
***
새해가 밝았다.
교류전 우승과 습격 사건으로 연말 연초를 뜨겁게 달구었지만, 흑막에 관한 본격적인 수사를 한 것치고는 알맹이가 빠져 있었다. 배신한 교관과 연결점을 찾았지만, 실체는 점점 더 오리무중이었다.
교류전을 습격한 의도가 명확하기에 흑막의 실체를 부정하진 않았다. 반한 감정으로 한국에 책임을 떠넘기는 일부를 제외하면, 흑막의 목적을 염려했다. 어쩌면 이미 깊숙이 파고들어 와 조사 자체가 무의미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번졌다.
그런 염려를 증명하듯, 교류전 습격 사건은 흐지부지 흘러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암중 세력의 꼬리조차 찾아내지 못한 점이 발목을 잡았다.
이는 각국 정부, 길드, 가문, 문파의 무능을 이실직고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내부에 흑막이 침투했다는 오점을 남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한·중·일 간의 경쟁적 관계가 발목을 잡았다.
교류전을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과는 별개로 서로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자국의 무능과 오점을 순순히 인정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든 덮어 두고, 상대국의 책임으로 떠넘기는 편이 낫다고 보았다.
-시끌벅적하게 발본색원한다고 외치지 않았나? 너무 조용하게 넘어가잖아. 아니면 다 짜고 치는 거 아냐.
-이제까지 실체조차 확인하지 못했는데, 찾고 싶다고 찾아지면 진작 찾았지.
-이미 사회 곳곳에 독버섯처럼 파고들어서 암중 세력과 짝짜꿍하고 있을 텐데, 찾아지겠냐? 그러다 모르는 사이에 너도 걸리는 거야?
-까놓고 말해서 자기 집에 악당이 있다고 어떻게 말해. 그거 말하는 순간 내가 멍청하다고 실토하는 꼴인데. 우리, 중국, 일본이 그러겠냐?
-그렇다고 이대로 두고 볼 거야. 쟤들이 또 사고 치면 어떻게 하려고? 그때도 어쩔 수 없다고 어물쩍 넘어갈 거야?
-당장 찾기는 어려우니까, 사태를 덮으면서 조용히 찾으려는 거지. 요란법석을 떤다고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습격 사건도 흐지부지하게 한 달이 넘어가자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렇다고 조사를 멈출 순 없다. 암중 세력의 의도가 너무나 명확했다.
그런 위험한 세력을 내버려 둔다면, 차후 문제가 터졌을 시 규탄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결국은 이해득실과 차후 변명을 위한 조사로 바뀌었다.
무진은 쉐도우 길드에 있었다.
[신의 정화] 열화판의 시제품이 만들어졌다고 연락이 왔다. 기존 치료, 정화 물약과 성능 면에서는 뛰어나지만, 아직 안전성 테스트가 남아 있었다. 성능과 달리 안전성은 임상 시험이 필요하고, 오래 걸린다.
그렇다고 시제품 때문에만 방문하진 않았다. 일전에 요청했던 밀림 던전을 찾아냈다. 권왕가가 나서면 관심을 끌 수 있어서, 쉐도우 길드로 매입을 해 놓은 상태였다.
“참 나, 조사하기는커녕 덮는 분위기잖아. 예상은 했지만, 씁쓸하겠다.”
“자기 집에 도둑이 있다고 동네방네 떠들 순 없으니까. 그걸 이용했다면 똑똑한 거고.”
“그래도 너무 빨리 잠잠해졌어. 언론에서도 교류전 우승만 언급하잖아. 그마저도 MVP인 네 얘기는 쏙 빼 놓고.”
“나 걱정해 주는 거야?”
“누가? 내가? 설마 그럴 리가! 넌 흑막의 규모를 측정할 도구로 쓸 놈이잖아.”
“미국이나 유럽이 잠잠한 걸 보면, 예상보다 더 거대한 세력이라고 봐야겠지.”
한동안은 소식을 전할 뿐, 변방에서 벌어진 소요 정도로 바라보는 시각이었다. 남의 나라의 일에 적극적이지 않은 개인주의적인 서양이라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습격당했다. 확신은 금물이지만, 암중 세력이 개입했을 여지가 있었다.
“그나저나 괜찮겠어? 네가 [신의 정화]를 쓴 건 알려질 수밖에 없어.”
“효과가 너무 좋아서 괜찮을 거야.”
“원래는 반대 아냐?”
“그래서 열화판이 필요해.”
중국과 일본 생도들에게 [신의 정화]를 내어 준 이상, 소문은 나게 되어 있었다. 자기들의 치부라서 되도록 말을 줄이겠지만, 한국 생도들까지 60명이나 목격했다. 마냥 숨긴다고 될 일은 아니다. 내부에 배신자가 있을 수도 있고.
[신의 정화]의 열화판을 만드는 이유이기도 했다. 효과가 뛰어날수록 양은 한정될 수밖에 없고, 열화판이 퍼지면 성분 분석에 들어갈 것이다.
그중에서도 무혈지독의 해독 성분은 중요하다.
“나보다는 교장 선생님과 가족들 주변 경계를 부탁해.”
“아닌 척해도 걱정은 되는 모양이야.”
“당연한 거 아냐, 나 때문에 위험해지는 건 보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누나도 방심하지 마.”
“한 번 당했으면 됐지, 두 번은 안 당해.”
교장에 대한 경호는 권왕가에서 하기로 했다. 쉐도우 길드의 주요 임무는 정보의 전달에 있었다. 또한, 만약을 위해서 아이템이나 장비도 필요할 듯싶었다.
무진은 필요한 얘기를 끝내고 일어서려다 제인 누나의 왼손 약지에 낀 반지를 봤다.
“안 헤어졌네?”
“그게 놀랄 일이야? 날 대체 어떻게 본 거야?”
“금방 싫증 내서 끝날 줄 알았지. 도후 형이 재미는 없잖아.”
“재미는 없어도, 나날이 새롭긴 해.”
“새롭다니, 어디가? 그럴 사람이 아닌데.”
“애들은 몰라도 돼.”
사귀는 연유를 모를 만큼 비교가 되는 커플도, 분명한 이유는 있었다. 헤어질 수 없는 도후 형만의 매력이 있는 모양이다. 솔직히 이해는 안 되지만, 당사자가 그렇다고 하니 넘어갔다.
“그건 됐고, 다시 해 볼래?”
“됐거든, 절대 싫어!”
“이번에는 괜찮을 거야.”
“자꾸 그러면 화낸다!”
무진이 만든 가상현실을 경험한 제인은 학을 뗐다. 최소한으로 했기에 망정이지 정신이 붕괴하는 줄 알았다.
“사람마다 성취가 다르긴 해. 이건 좀 문젠데.”
“아무한테나 하지 마. 나라서 버틴 거지, 그러다 광인이 되는 수가 있어.”
가상현실의 단점이었다. 수련자의 집요함과 정신력이 받쳐 주지 않으면 훈련의 성과를 보기는커녕 역효과가 날 수 있었다.
투귀, 교장의 성과가 전부를 대변하진 않았다. 만족스럽지 않은 성과가 연이어 나왔다.
‘안타깝네.’
하면 되는 일인데.
그렇다고 가상현실을 포기하진 않는다. 연구를 거듭하다 보면 투신과 무신을 불러올 수도 있었다.
길드장실 밖에 서 있는 오공을 보았다.
“천상에 죄를 범한 오공은 절벽에 500년 동안 갇혀 있었다는데.”
“차라리 날 죽여라!”
무진은 죽이지 않고 가상현실로 보내 주었다. 죄인에게 선택의 기회가 있을 순 없다.
털썩!
가상에서 구르고 돌아온 오공은 무릎에 힘이 풀렸는지 바닥에 주저앉았다.
가상공간에 배신당한 사부님이 있었다. 반성하고 이제는 화해했는데, 배신당한 직후에 사부를 보내다니!
“……네가 사람이냐?”
“강해졌으면 된 거지.”
오공은 이를 바득바득 갈았지만, 지옥 같은 시간을 이겨 낸 결과 천병공이 경지에 이르렀다.
무진은 은혜 입은 오공을 뒤로하고, 장훈 형의 연구실을 찾았다. 작은 병이 여러 개 준비되어 있었다.
“이거야?”
“그래.”
한 방울을 마셔 본 후, 이상이 없자 병을 단숨에 들이켰다. 마셨을 때 어떤 작용을 일으키는지 확인했다. 특히 무혈지독을 해독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한 병으로 완전 해독이 안 되는데.”
“중급이니까 그렇지, 최상급이면 1병으로 될 거야.”
“단계를 둔 거야?”
“무혈지독이란 게 평범한 독이 아니잖아. 그걸 1병으로 해독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야. 하급만 해도 어지간한 포션보단 뛰어날걸.”
“성분 특허를 내야겠네.”
“자료는 준비해 뒀어. 임상 시험을 좀 더 해 봐야겠지만. 네가 괜찮다면 끝난 거지.”
대량생산이 가능하단 점이 중요했다. 쉐도우 길드에서 생산하고, 판매는 성운 그룹을 통하면 된다.
무진은 내부를 관조하여 육체의 미세한 변화를 설명해 주었다. 어떤 식으로 열화판이 반응하는지를 일일이 체크했다.
‘봐도 봐도 신기하네.’
장훈은 임상 시험의 위험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무진이 아니었다면 최소 1년은 임상 시험에 매달려야 했을 것이다. 그런 번거로운 작업을 한 번에 끝내 버리는 무진이 인간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제 얼마나 걸릴 것 같아?”
“짧으면 한 달, 길면 석 달쯤 걸리지 않을까.”
“판매는 나중에 하더라도, 최대한 빨리 만들어 줘.”
“알았다.”
조만간 블랙마켓 내 다툼이 벌어진다. 그때 열화판을 퍼트린다면 자연스럽게 효과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면 광고를 하지 않아도, 불티나게 팔려 나갈 것이다.
‘누가 적인지도 알 수 있을 테고.’
블랙마켓과 암중 세력은 연결점이 있었다. 열화판을 간격을 두어 특정 길드에 유포한 후 반응을 살필 계획이다.
‘나에 대한 감시망이 있다면 좀 더 확실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