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 할 건 해야지(1)
하야토가 찾아왔다.
예상보다는 빨랐다. 마음이 정리되면 부르라고 했는데, 일국의 공주라서 그런가 감정 컨트롤이 남다르다. 아니면 지수가 집에 있는 걸 알고서 부른 걸지도.
아카데미의 별관의 외부 중요 인사를 위해서 마련한 건물로 향했다. 공주를 데리고 오기 위해서 전용기를 띄운다고 했으니, 일정은 길어 봤자 2일이었다.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습격을 알고 있었냐고?”
“알고 있었나?”
“교장 선생님이 귀띔을 해 주긴 했어. 다만, 확실한 정황이 아닌 대비에 가까웠지. 시게노 교관도 그 정도 선에선 알고 있었을 거야.”
“그랬군.”
시게노 교관의 대응이 빠르긴 했다. 교장이 사전에 충고했다면 이해는 된다. 하지만 느슨하고, 안일한 판단이었다. 좀 더 신중했다면 본인과 황실 친위대는 목숨을 잃지 않았다.
‘잘 먹혔군.’
무진은 하야토가 마지막에 나타난 로즈를 생각보다는 가볍게 보고 있다는 걸 파악했다. 로즈의 수를 역으로 이용해서 쉬워 보였을 뿐이었다. 만약 연무장에서 결계를 쳤다면 막을 순 있었어도,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을 것이다.
‘불가피한 선택이긴 했지.’
시게노와 남궁천은 그럴 수밖에 없다. 인간은 항상 긴장한 상태로 있을 수 없으며, 습격 후 2차 습격까지 예상하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경계 강화를 위해 강력하게 피력했다면 습격을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번 기회에 흑막을 세상에 알리고,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희생의 가치는 알아서 되새기고.’
무엇보다 시게노와 남궁천이 독자적으로 움직여야 정보를 차단할 수 있었다. 만약의 사태가 발생하더라도 대연무장은 영상 장치가 너무 많았다. 보는 눈이 많은 이상 정보의 노출을 제한하기는 불가능하다.
‘우리의 전력을 다 보일 필욘 없지.’
기존에 알려진 권왕과 마제는 어차피 정보의 노출을 꺼릴 필요가 없다. 대연무장에서 본인의 전력을 모두 선보인 것도 아니고. 반면 생도인 자신과 지수는 전력을 숨길수록 이득이었다.
“최소한의 희생으로 끝냈으면 된 거지. 공주가 살았으니 시게노 교관도 자기 할 일을 한 거잖아. 국장은 못 해 줘도, 따로 넉넉히 보상해 주면 될 테고.”
“한국인은 정이 많다고 하던데, 보기보다 인정머리가 없군.”
“가족도 아니고, 일본인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한다며 가식을 떨 순 없잖아. 너희는 우리와 다른가?”
“다르지 않다.”
하야토는 무진에게 혹독하게 당했었다. 공식적인 결투긴 해도, 악감정이 없다면 거짓말이었다. 그 이후로도 하는 행동이 맘에 들진 않았다.
성향상 상극이기도 했다.
지금은 그러한 성격마저 일관성을 지니니, 솔직해 보였다. 자신을 드러내지 못해 안달인 관종이긴 해도, 뒤에서 음해는 하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공주님과 자신을 3번이나 구하지 않았는가.
‘내가 너무 편향적으로만 봤구나.’
하야토는 자신의 판단이 틀렸음을 받아들였다.
다만, 감동은 오래가지 않았다.
“목숨값을 주겠다면 마다하진 않을게. 기대가 참 크다.”
“준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깔끔하네.”
“여지를 주면 안 될 것 같아서.”
이놈, 눈치 없는 샌님처럼 생겨서는 꽤 습득력이 빠르네.
확실히 처맞고 나니 정신을 차리긴 했다.
고지식한 것보다는 훨씬 낫지만, 손에 들어올 억 단위의 돈이 허공으로 날아가니 입맛이 좀 쓰다. 융통성 없이 원리원칙에 사는 영웅 심리로 똘똘 뭉쳤다면 얼떨결에 계약을 했을 텐데.
하야토도 궁금했다.
무진이 생도긴 해도 무사였다. 무인이 돈에 지나치게 연연하고 있었다. 뼈저리게 가난하다면 이해라도 하지.
“돈을 그렇게나 많이 벌고서도 욕심을 내는 건가?”
“외화벌이잖아.”
“……맞군.”
“국위 선양은 할 수 있을 때 많이 해야 도움이 되거든.”
포장 한번 예술적으로 하고 있었다. 개소린데도 들어 보면 맞는 말이긴 했다. 외화를 벌어 와 국내에서 소비한다면 경제 기반에 도움이 되었다.
“근데 왜 반말이지? 내가 너보다 두 살은 더 많은데. 한국은 동방의 예의지국이 아니었나?”
“오늘부터 깡패 국가가 되기로 했어.”
“……?”
여태까지 삥 뜯겼다는 소리잖아.
대화가 단절되었다.
공주는 별관 내 귀빈실의 거실에 앉아 있었다. 무진이 들어오자, 환하게 웃으며 반겨 주었다.
“강단이 있어서 좋네.”
“방구석에 틀어박혀 눈물이나 질질 짜며, 벌벌 떨고 있을 순 없잖아.”
“그거야 네 소관이고. 어쩐 일이야?”
“고맙다는 인사는 해야 할 거 같아서.”
“비밀을 지켜 달라는 협박처럼 들리네.”
“나만 좋자고 하는 일이 아닐 텐데.”
습격 사건은 알려진 대로지만, 공주의 납치 미수는 숨기기로 했다. 전말이 드러나 봤자 여론만 악화될 테고, 암중 세력에게 정보를 내어 줄 순 없었다. 지수와 무진의 도움도 공식적으론 밝히지 않았다.
“일본도 체면 앞에선 어쩔 수 없구나.”
“국가 관계에서 체면만큼 중요한 것도 없으니까.”
“실리를 따질 줄 알았는데?”
“황실에서도 알려지길 바라지 않거든.”
황실 친위대는 선별해서 뽑은 일본의 엘리트 각성자다. 이들이 손을 써 보기도 전에 당했다는 것과 상황 판단의 미숙함은 뼈아픈 실책이었다.
더욱이 한국의 도움을 받았고, 그 대상이 일개 생도였다. 이 사실이 일본 내에 퍼진다면 황실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바닥을 칠 것이다. 설령 정보가 퍼진다고 해도, 황실로선 단호히 부정해야 했다.
“공식적인 보상은 없다는 말이구나.”
“이젠 놀랍지도 않다.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황궁에서 따로 보상을 해 주겠다고 했어.”
“얼마?”
“황실 보고를 이용하게 해 줄게. 이만하면 가격이 문제는 아니겠지.”
“10개, 콜?”
교장과의 협상으로 보고 이용권에 관해서는 전문가가 된 무진이었다. 그러나 국제적인 교섭력은 떨어지는 편이었다.
“2개, 더는 안 돼!”
“쇼부의 미학이 없네.”
“너랑 협상하느니, 벽 보고 얘기하고 말지.”
안타까운 세태였다. 10을 부르면 5와 7사이에서 쇼부를 봐야 하거늘, 단칼에 거절당했다. 대놓고 달랄 수는 없기에 이쯤에서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가기 전에 일본 황실 보고에 대한 이해와 연구가 필요할 듯싶다.
“훌륭하셨습니다. 공주님.”
“나도 두 번이나 당하진 않아.”
미츠키와 하야토가 전대물의 파이팅! 자세를 취하자, 무진은 살짝 고개를 뒤로 물렸다. 적응하기 힘든 일본의 제스처였다.
그래도 문화적 상대성은 인정해 주었다.
“간바떼.”
“마다마다.”
뭔 소리야?
하지 않을 것처럼 생겨서는, 무진은 하야토의 캐릭터성에 착오가 있었다. 공주가 시키면 싫다면서도 츤데레처럼 다 해 주었다. 어떤 면에선 서로 쿵짝이 절묘하게 잘 맞았다.
이러다 둘이 제로투라도 추려나?
“다시 생각해 봐도 도통 모르겠는걸.”
“뭐가?”
“널 노리는 연유를. 지수보다 전투력이 높은 것도 아니고, 외모도 그냥 그런데.”
“그냥 그렇다니, 내가 우리나라에선 제일미로 통해.”
“다른 건 몰라도 뻔뻔함은 천하제일미다.”
“네가 아직 내 매력을 못 봐서 그런 거야. 여하튼 이 문제는 나한테도 골칫거리야.”
애초에 무진은 세뇌를 염두에 두었으나,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지는 의문이었다.
일본에선 하기 어려웠다는 판단인 건가?
“평소에 지키는 사람이 따로 있냐?”
“친위대가 다야.”
“돌아가면서 하진 않고?”
“그거야 황실에서 알아서 할 일이지.”
공주를 경호하는 황실의 수호자가 따로 있다면 그럴듯한 시나리오가 나오긴 한다. 또한, 이번만 경호에서 빠졌다면 누군가 의도적으로 뺐을 수도 있었다.
“황실에는 어디까지 알렸지?”
“자세한 사정을 아는 사람은 5명 정돈데. 잠깐, 황실에 배신자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확답은 금물이고, 당분간은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아무리 너라도 황실을 모함하는 건 용납할 수 없어.”
“알았다.”
공주와 하야토의 날 선 반응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원래 가족은 건드리지 말라고 하지 않나. 형제나 자매를 예로 들어도, 나는 욕해도 남이 욕하면 싸움 나는 거지.
‘이거면 됐어.’
내부의 일은 외부인이 가타부타 강하게 간섭하면 되레 반발하기 쉽다. 이런 경운 자기 스스로 깨닫는 수밖에 달리 방도가 없다. 끝까지 믿다가 뒤통수를 맞으면, 자기 책임이니 그나마 낫겠지.
“포기가 빠르잖아!”
“나하곤 관계없는 일이니까. 솔직히 우리나라에서만 납치 안 당하면 돼.”
너무 솔직해서 미츠키도 반박하지 못했다. 자기 나라에 피해만 없으면 어찌 되든 신경 쓰지 않겠다는 소리가 아닌가.
그래도 그렇지.
같이 위험을 대처하고 고생했으면서.
“인정머리 없는 놈!”
“그러면 피 좀 뽑자, 성분 파악을 해 보게. 혹시 용혈이나 특이 성향의 피일 수도 있고. 연성에 의한 반응이 있다면 키메라를 제조하는 데 쓰일 수도 있잖아. 그도 아니면 버프용 물약이라든지.”
“날 대체 뭘로 보는 거야?”
“영약이면 좋겠다.”
황실 내부의 치정이나 권력 싸움이 아니라면, 다른 부분을 살펴볼 필요는 있었다.
미츠키는 자신을 영약 취급하는 무진이 얄밉기는 해도, 마냥 무시하진 못했다. 다만, 성분 분석 같은 연구 분야는 일본이 세계 제일이었다. 노벨상에서 평화상밖에 받지 못한 한국이 기초연구 분야에서 톱인 본국과 비교할 순 없다.
“그런 건 우리가 더 잘하거든.”
“그래서 믿을 만하고?”
“……그건.”
미츠키는 머뭇거리고 말았다. 무진의 말을 듣기 전까지만 해도 황실을 전적으로 신뢰했겠지만, 지금은 그러한 믿음의 철옹성에 금이 간 상태였다.
대화를 이어 가는 방향성과, 끌어오는 흡입력이 상당했다. 재주라면 재주고, 천성이라면 타고났다.
하아!
힘없는 한숨이 나왔다.
“너한테 맡길게.”
“너무 쉬운데. 그러다 또 뒤통수를 맞을걸. 아무도 믿지 말고, 항시 경계를 늦추지 마.”
“그거 병이야.”
“차라리 병이 낫지,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것보다.”
공주를 몰아세우는 무진이 맘에 들진 않았지만, 타당한 의견이었다. 실제로 내부 정보를 알고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다.
공주님은 또래에서 적수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강하다. 하지만 그건 또래라는 단서를 붙였을 때다. 더욱이 황실과 총리의 암투를 간과할 순 없다.
“네 말이 맞아. 하~ 이러려고 한국에 온 게 아닌데. 내 화려한 데뷔전이 이딴 식으로 망가지다니!”
“납치돼서 완전히 사육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지.”
“넌 꼭 말을 해도, 왜 만날 최악이야?”
“최악을 상정해야, 현실에서 그나마 버티지.”
부정적으로만 봐서도 안 되겠지만, 안일하게 보다가 된통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최악을 가정할수록, 대응하기가 수월하기도 하고.
“이거 받아.”
“황실패? 이런 거 막 줘도 돼?”
“금패는 어려운데, 은패는 내 개인 권한으로 줘도 돼. 이거 가지면 어지간하면 무사통과야.”
“십대검가도?”
“거기가 무슨 내 안방이야? 너무 심하잖아!”
분위기 전환을 위한 장난이었다.
가만, 자기 안방은 쉬운가?
무진은 공주에게 의심암귀를 씌우고, 연을 맺은 것으로 만족했다. 잘못되더라도 하야토를 통한다면 일본에 입국할 동기는 되었다. 십대검가에도 빚을 지게 했으니 가문의 보고 이용권을 주지 않을까 기대했다.
“무사히 돌아가, 도중에 잡혀가지 말고.”
“걱정해 주는 거야?”
“그렇다고 해 두자.”
“꼭 본국으로 초대할게.”
“공짜겠지?”
“그럴 줄 알았어. 공짜야.”
***
“……살려!”
“일을 이딴 식으로 만들어 놓고 살려 달라고? 진짜로 살려 줄까?”
“……아닙니다!”
“아니면 죽어야지.”
“……안…… 크아아아아아!”
사람의 외형이 서서히 녹아들며 형태를 잃어 가는데도, 죽지 않는 고어한 광경이 펼쳐졌다. 주변에 녹아서 흐르는 이물질의 정체가 밝혀졌다. 자신이 죽어 가는 절망 속에서 비명을 질러 대며 아우성을 친다.
드륵!
문이 열렸다.
금발 포마드의 빈틈없이 격식을 차린 훤칠한 미남형의 사내가 들어왔다. 전형적인 유럽 왕족처럼 걸음걸이, 손짓, 눈빛조차 완벽하다.
“지저분하게 끝내는군.”
“깔끔 떨기는. 시킨 사람은 너면서.”
“처리하라고만 했다.”
“그러니까, 나한테 시키지 말았어야지. 내가 할 줄 아는 게 이런 건데.”
“저급하기는, 그 버릇 좀 고치지.”
“그러니까 밤에 좀 잘해.”
“……시끄럽다.”
극과 극처럼 보였는데, 대화를 들어 보니 커플 같은 느낌을 지우지 못했다.
덜덜덜!
주변의 분위기는 살얼음을 걷고 있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고작 3명에 불과했다. 30명이나 되는 인원을 고통스럽게 죽였다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사내와 여인.
로즈의 죽음이 불러온 나비효과였다.
그리드2, 라이언킹.
그리드3, 레퀴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