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 우리 편(2)
‘저런 식으로 자신을 숨기니, 알 수가 없지.’
철두철미하게 숨길수록 의심이 가기 마련이지만, 무진은 관종임을 감추지 않았다. 자기를 대놓고 자랑하고 다니니, 신뢰성이 떨어졌다. 그간 쌓아 놓은 빌드업이 무진을 가리키는 데 주저하게 했다.
‘내가 이 녀석의 앞잡이가 됐구나.’
교장으로선 벗어날 수 없는 수렁이었다. 그렇다고 무진이가 그릇된 방향으로 가는 것도 아니고. 속만 썩어 문드러질 뿐, 사회적으로 커다란 성공을 안겨 주었다.
‘저분들도 나와 마찬가지겠군.’
교장은 권왕과 마제를 돌아본 후, 사태 수습에 박차를 가했다. 산정된 피해는 물론, 중국과 일본의 대응을 살필 필요가 있었다.
세상이 그렇듯, 해 준 만큼 받아 내기란 말처럼 간단하지 않았다. 꼼꼼히 따져서 일본과 중국이 꼼수를 쓰기 전에 처리해야 했다.
‘흑막에 대한 조사도 이루어져야겠지.’
교류전 습격으로 암중의 세력이 한·중·일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알아냈다.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 실체를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우리라고 안전한 것도 아니고.’
***
-암중 세력이 진짜로 있었던 거야?
-여태 뭘 본 거야, 흑막이 있으니까 습격당하지.
-빵즈의 음모야.
-음모였으면 더 이상하지. 우리가 바보냐! 멍청하면 가만히나 있어라, 짱개야.
-권왕과 마제가 아니었으면 대참사 확정이지.
-내가 보기엔 그거 자폭 공격이었어. 역사로만 들었지, 가미카제를 진짜로 할 줄이야.
-그렇다면 쪽바리의 음모야.
-이 새끼 아까부터 뭔 개소리를 하는 거야? 이간질 쩌는데, 이거 흑막 아냐?
-아이피 추적하고 있으니까, 잡아 주마. 설령, 흑막 아녀도 넌 뒤졌다.
-개인 정보 유출이야, 그거 범죄라고. 오지 마. 난 그냥 장난이야.
-병신, 저 말을 믿네, 역시 진따는 어쩔 수 없다니까.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교류전에서 사고가 일어난 적은 있었으나, 과욕이 부른 화근이 대부분이다.
이번 교류전처럼 작정하여 습격한 사례는 없었다. 더욱이 한 번의 습격으로 끝나지 않고, 자폭 테러를 감행했다.
이쯤 되면 중국과 일본에서 한국을 비난하는 여론이 일 만도 하건만, 이번에는 좀 달랐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반한 감정을 드러내는 일부를 제외하면 이성적인 시각을 유지했다.
-한국은 싫지만, 이번 일은 한국 탓이 아니야.
-엘리트 생도를 꾸리는 데 포함된 인원은 전부 우리 정부에서 주관했잖아.
-내부에서 흑막이 활동하고 있는데도 여태 몰랐다는 게 말이 돼!
-솔직히 이번 사태가 커져서 한국한테 이로운 게 뭐가 있겠어. 아무리 싫어도 현실은 제대로 보자고.
-교류전을 망가뜨리고, 우리 생도들을 죽이면 한국은 국제적인 고립을 자초하는 격이잖아.
-흑막이 노리는 게 동아시아의 분열이라면, 이럴 때일수록 합심해서 암중 세력을 몰아내야 해.
끊임없이 분탕질을 유도하는 댓글도 꽤 있었지만, 상식적인 선에서 결론이 나오고 있었다. 여론이 긍정적인 연유는 권왕과 마제의 활약 때문이다.
한국은 세대교체에 실패했다고 알려졌다. 과거의 유물이 되어 버린 권왕과 마제도 전성기가 지났다고 봤었다.
하지만 실체를 드러낸 권왕과 마제는 예전만 못하기는커녕 전성기를 훌쩍 넘어섰다.
그중에서도 단연 화젯거리는.
-권왕이 화염 마법사였어?
-속성이 화염이야.
-권강과 융합하여 발출한 건 플레임버스터였잖아.
-플레임버스터는 7계식인데, 대체 언제 마도사급까지 올라간 거야?
-우리나라에서 깽판 칠 때보다 훨씬 업그레이드가 됐잖아.
-저 무식한 주먹왕이 어떻게 마도사냐고?
-이러다가 8계식 대마도사가 되는 거 아냐?
-설마?
-설마는 항상 사람을 잡지. 권왕은 대마법사가 될지도 모른다.
-그럼 이제부터는 뭐라고 부르냐? 화염권왕?
-염화권제 어때?
-염병!
권왕이 화염 속성을 가졌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굳이 숨기지도 않았으니 공공연한 비밀로 취급당했다.
그렇더라도 이번에 보여 준 권왕의 화려한 불꽃쇼는 충격적이었다. 7계식의 마도를 자유자재로 사용하고, 권공과 융합하기까지 했다.
-권왕이 천재였어?
-절대경의 무인이 천재가 아니면 또 뭐냐?
-머리가 좋아야 하는 건 맞지만, 무공은 또 달라. 몸만 무식하게 강한 경우가 더 많아.
-그래도 마법과 권공의 융합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권왕은 불세출의 천재가 맞아.
-그냥 속성빨이야!
권왕의 강함은 화면을 뚫고서도 전달이 되었다. 지금이 전성기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공과 마법의 융합은 받아들일 수 없는 영역이었다. 단순무식깽판의 대명사인 권왕이 새로운 영역의 개척자라니 지나치게 비현실적이었다.
상대적으로 마제에 대해서는 후기가 거의 없는 편이 되었다. 실제로도 마제가 마제했다는 식으로 받아들였다.
이번에 진짜로 주목해야 할 대상은 교장이었다.
권왕과 마제가 교류전에 올 수도 있겠지만, 정체를 숨기고 있었다. 시상식은 대결이 아닌 축제의 장이다. 정체를 숨겨 가면서 참가할 연유가 없다. 그렇다면 사전에 언질을 받았다는 의미가 되었다. 흑막의 의도를 파악하고 미리 대비한 것이다.
-교장은 대체 뭐 하는 사람일까? 속성으로 예지라도 가지고 있나?
-사태를 예견하고 준비하는 능력이 남다르다고 봐야지. 일전에 배신자를 색출할 때도 그렇고.
-색적 능력이 거의 신화경에 이른 것 같아.
-교장의 섭외력도 무시 못 하지. 권왕이나 마제가 오란다고 올 사람인가.
-흑막의 비겁한 수작도 교장에겐 안 통해!
-왕년의 풍신, 다시 돌아왔구나!
교류전을 시작할 때만 해도 노후를 위한 말년 이벤트로 보았었다. 그런 시선을 물리치고 교장은 대반전을 이루었고, 흑막의 출현은 금상첨화가 되었다. 실력과 운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면서 과거의 위용을 되찾았다.
-다들 잊고 있는 모양인데, 교류전의 MVP가 한 짓을 못 봤어?
-아, 맞다! 정수를 물처럼 마시고, 번개처럼 사라졌잖아.
-그러게, 습격이 일어나고 귀신처럼 없어졌어. 위험 회피 능력 하나는 천하무적이구나.
-내가 보기에 정수를 제어하느라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아.
-개소리는, 마시고 난 후 아무 효용이 없는 거 봤는데. 차라리 나를 줘!
-그렇게 부러우면 교류전에 나가서 우승해, 이 루저들아.
-모처럼 나온 교류전 MVP인데. 결국 찬밥 신세에다가 도망자가 됐네.
-화면에만 안 보인 거지, 도망치는 게 말이 되냐.
-웅성거린 거 난 들었어, 무진이 어디 갔냐고?
-안전 관리를 생도한테 맡기냐, 그럼 교관은 뭐 하려고 있어!
-그렇다고 일반인을 내팽개치고 사라지냐!
무진의 시상식 퍼포먼스는 확실히 충격적이었다. 다른 때 같으면 연일 언론에 오르락내리락하겠으나, 현실은 암중의 테러로 도배가 되었다.
시상식에서 보인 무식한 행위는 조용히 넘어갔다. 끝까지 무진을 따라다니며 까는 부류는 있지만, 흑막을 발본색원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
교장은 국무총리와 주요 인사들을 보내고 대연무장을 정리했다. 남은 일은 일본, 중국에서 파견된 조사원과 해결해야 할 사안들이었다.
자국 교관과 생도가 연관되었으니 자초지종을 따로 조사하려는 것이다. 여론이 한국에 우호적인 상황이다 보니 대응이 꽤 조심스러웠다.
선제적으로 해결할 문제를 끝내고 무진을 불렀다. 교류전 우승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고, 수제자로 내세웠으니 자연스러웠다.
“이제 교장 선생님의 앞날은 탄탄대로네요.”
“흑막의 주요 암살 대상으로 찍힌 건 아니고?”
“겁나세요?”
“자기 일 아니라고 쉽게 말하지 말거라.”
“죄송합니다.”
“……?”
순순히 사과하자 교장은 묘한 눈으로 무진을 보았다. 우쭐대며 도발할 줄 알았다. 이러면 보통은 괜찮다고 해야 하나, 이놈의 말은 끝까지 들어 봐야 했다. 넘겨짚다 된통 당한 기억이 한두 번이어야 곧이곧대로 믿지.
“교장 선생님과 가족분들의 경호에 만전을 기하겠습니다. 권왕 사부님과 마제 사부님도 협조하기로 했으니 걱정하는 일은 생기지 않을 겁니다.”
“진짜로 위험한 거구나!”
세상을 우습게 아는 녀석이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경각심을 가져야 했다.
“가짜로 위험한 것도 있습니까?”
“제기랄! 말년에 팔자가 사납구나, 사나워!”
“잘만 활용한다면 한국을 빛낸 위인 100명에 들어갈 수도 있을 겁니다.”
“내 딸이 위험하면 용서 못 한다!”
교장은 흑막에 관해서 자세히는 몰랐다. 무진의 설명을 들을수록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위험한 조직이었다. 흑막과 대립하는 무진의 아군만 봐도, 사실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사춘기에 반항기가 상당하다고 들었는데, 교장은 그런 돼먹지 않은 딸도 사랑으로 대하셨다.
“교장 선생님도 아버지셨네요.”
“너도 자식을 낳아 보면 알게 될 거다. 그 전까지는 죽었다 깨도 그 마음을 몰라.”
“지금도 충분히 알고 있어요. 그래서 교장 선생님을 위한 특별 서비스를 마련했습니다.”
교장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결론적으론 좋을지 몰라도, 하이리스크는 감당해야 했다. 혈기왕성할 때야 어떻게든 해결했겠지만, 나이가 들수록 심장에는 좋지 않았다.
“감언이설은 이젠 안 통한다!”
“신의 정화를 드릴게요. 효과는 들어서 아시죠.”
무진은 교장 선생님을 앞에 내세웠다는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암중 세력이 풍신을 노릴 수도 있기에 대비해야 했다.
실상, 경호만으로 완벽을 기하긴 어렵다.
적들도 바보는 아닐 테고, 습격한다면 만반의 준비를 해 올 것이다. 이미 드러난 실체를 감안한다면, 변수를 만들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풍신의 적극적인 협조가 필요하다.
교장도 [신의 정화]가 만능 해독제란 걸 알고는 있었다.
“독에만 효과가 있는 게 아니었구나.”
“육신의 최적화를 이루게 해 주죠. 어쩌면 환골탈태도 가능합니다. 고개 숙인 가장에겐 가장 필요한 약입니다.”
“숙이긴 누가 숙여! 나 아직도 정정해!”
“아니면 됐고요.”
“이 녀석이! 말을 끝까지 들어 봐야지. 지금은 당당하지만, 후일을 위한 차선책은 항상 준비해야 하는 법이다.”
그럼 그렇지.
무진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자, 교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놈의 약팔이에 넘어갔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사내라면 당연히 탐이 난다. 3번째 스물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요즘 들어 아침상이 굉장히 부실했다. 장어라도 몰래 사다 먹으면, 다 부질없다는 소리만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