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 MVP(4)
최소한 무진은 정도를 지켰……겠지?
초상권을 획득한 무진은 교류전을 심층적으로 분석해 흑막의 성향과 의도를 파악했다.
“조던을 대신하여 온 로즈란 여인의 성미가 상당히 과격한 듯하네요. 우리의 허를 찌른 날카로운 수는 높이 사지만, 그간의 행적과는 궤를 달리하거든요. 이후로는 더욱 과격한 수단을 동원할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이제는 정체를 숨기지 않는다는 것이냐?”
“그보다는 지금처럼 조심스럽게 빌드업하지는 않으리란 겁니다. 다만, 중국과 일본의 경각심은 의도하지 않았을 테니 차후의 대응을 보고선 살필 수밖에 없습니다.”
“빌어먹을, 공격은커녕 매번 방어만 하다가 끝나겠군.”
공격이 최고의 방어란 말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현대전이 될수록, 각성의 시대가 될수록, 공격이야말로 중요한 방어 수단이다.
전쟁을 예로 들어도, 처맞고 시작하면 반격을 해 봤자 피해를 산정하기도 어려운 타격을 입기 때문이다. 그만큼 병기의 파괴력이 예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여하튼 조급해질수록 과격한 수단을 동원하게 된다. 원치 않는 주목을 받게 됐으니 로즈도 상부의 압박을 받게 될 처지였다.
조던도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서 급하게 서두르다 실체를 드러냈듯, 이번에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로즈의 성향은 조던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공격적이다.
“수법은 뻔해도, 방비가 수월하진 않을 겁니다. 오히려 예측하지 못한 과격한 수단을 동원할 수도 있어요.”
“그래서 어쩌려고?”
“최대한 우리가 대응이 가능한 범위로 좁혀야겠죠.”
“말처럼 쉬우면 교류전 사태도 일어나진 않았겠지.”
무진도 지나치게 원론적이란 걸 너무나 잘 안다. 하나, 대체로 사건의 실마리는 원론의 정확한 해석으로부터 나오기 마련이다. 다행히 저들이 노리는 바를 입체적으로 분석할 단서를 제공해 주었다.
“교류전이 흑막의 의도대로 흘러갔다면 우린 국제적으로 고립되었을 겁니다. 또한, 중국과 일본의 노골적인 견제와 침탈을 견제할 수단과 명분도 잃었을 테고요. 그런데 우리의 피스트킹이 일거양득의 기회를 만들어 낸 겁니다. 이제 그 과격한 손길이 어디로 향하겠습니까?”
“이 사부를 칼받이로 쓸 셈이더냐!”
“싫으세요?”
“아니, 너무 흥분되는구나! 이번에야말로 전에 당한 것까지 곱빼기를 쳐서 갚아 줘야지! 안 그러냐?”
“이래서 사부님이 좋다니까요.”
“대신, 확실하게 해야 한다.”
“범위를 좁히고 좁혀서 확률을 최소한으로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걸 원하시진 않겠죠. 제 정체가 드러나는 한이 있더라도,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오냐, 네가 만든 판에서 원 없이 날뛰어 주마! 언제든 말만 하거라!”
이 정도면 궁합은 볼 필요도 없다. 사부와 제자의 합이 딱딱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소외된 지수가 물었다.
“그럼 나는?”
“사부님을 보조해.”
“아니, 왜?”
“졌잖아.”
“성좌의 선택을 받으면 달라.”
“억울하면 이겨.”
이 빌어먹을 자식이! 가장 중요한 회귀자를 보조자로 쓰면 어떻게 해?
그러나 할아버지를 능가하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전의 할아버지가 어땠는지 몰라도, 무진과 짝짜꿍한 할아버지는 강했다.
‘언제까지 강해지실 거냐고요!’
할아버지가 손녀의 창창한 앞길을 막고 있었다. 이러면 든든해야 하는데, 소외되는 기분이다. 후일 모든 사태가 해결된 후 무진이 최고의 파트너를 할아버지로 정한다면 자괴감이 들 것 같았다.
‘만만치가 않아.’
성좌의 선택만 믿고 있기에는 할아버지의 전투력 업그레이드가 지나치게 가파르다. 이대로 할아버지에게 뒤처질 순 없다는 위기감에 의욕을 불태웠다.
“할아비를 따라오려면 백만 년도 이르단다.”
“흥! 곧 따라잡을 거니까, 그때 가서 후회나 하지 마세요!”
무진은 조손의 투지에 흐뭇했다.
예나 지금이나 할아버지와 손녀는 피 터지게 치고받아야 제맛이었다. 선혈이 튀는 시산혈해 속에서 꽃피우는 혈육의 정은 아름다웠다. 확실히 위기가 와야 현실을 자각한다.
‘미래와 비교하면 좀 더 확실하겠지.’
무진은 흑막이 교류전을 노릴 걸 예상하고 대비를 했었다. 반면 지수의 미래는 무방비로 교류전이 치러졌으며 일본이 교류전에서 승리한다.
하나, 일본 공주의 납치 미수로 한일 간의 감정의 고조가 극에 이른다. 이때 고위력 마력탄이 터지면서 한·중·일 생도가 절반이나 죽었다.
후일 한국이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이 되었다.
수년째 교류전의 성적이 좋지 않은 가운데, 안방에서도 패배하자 보복했다는 논리였다. 설상가상으로 중국과 일본 생도의 피해가 한국 생도보다 유난히 많았다.
일본과 중국으로서도 내부의 들끓는 여론을 다독이려면 희생양이 필요했고, 한국은 요리해 먹기 딱 좋은 먹잇감이었다. 굳이 해명을 들어 줄 필요도 없고, 오해해도 부담이 없었다.
지수의 말대로라면 한·중·일은 중국과 일본의 주도로 한국을 장악하는 그림이 그려졌다.
‘우리가 제일 만만했군.’
손쉽게 여긴 한국에서 애를 먹으니 짜증이 날 수밖에. 그러니 과격한 수단을 동원했다고 봐야 했다.
단, 이번에도 실패하면서 경각심이 높아졌을 것이다. 계획을 수정하여 중국과 일본부터 노릴 수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용의주도한 흑막치고는, 일본 공주 납치 미수가 의심스러웠다.
‘그건 남의 일이고.’
우리부터 안전을 챙기고 난 후에 중국과 일본이 있었다. 그 전에 흑막에 완전히 잡아먹힌다고 해도 문제는 되지 않았다.
“온 김에 무의 극의를 이뤄 보자고요.”
“말 참 쉽게 하는구나.”
“자고로 즐기는 자를 따를 수 없다고 하잖아요. 즐겁게 훈련하다 보면 결과는 자연히 따라올 겁니다.”
“너만 즐겁겠지!”
“투신류와 무신류의 결합, 오늘의 미션입니다.”
“우릴 실험체로 쓸 셈이구나!”
“겸사겸사죠.”
***
교류전 시상식 날.
5일간의 회의를 거친 끝에 MVP가 결정되었다. 교류전의 수상은 개인전 순위와 단체전 성과를 합한 객관적 지표로 정해지기에 변동 사항이 크진 않았다.
개최국 이점으로 점수 차이가 크지 않을 경우, 순위를 조절한 적은 있으나 말도 안 되는 무리한 수를 두진 않았다.
-아, 얼마 만의 우승이냐, 정말!
-아득히 먼 옛날이라, 기억도 안 난다.
-이번 1학년들이 황금세대였어.
-우린 꼭 설레발치면 안 되고, 기대치가 낮으면 잘되더라고.
-솔직히 이번엔 너무 압도적이라 긴장감은 없었어.
-그래서인지 속은 편안했잖아.
단체전에서 사고가 터졌을 당시만 해도 온갖 추측성 음모론이 난무했었다. 일희일비하는 여론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다. 필터링을 타이트하게 한 듯 청정한 편이지만, 시비가 아예 없진 않았다.
-이번 대회는 빵즈의 음모가 분명해!
-오늘은 맘껏 짖어도 욕 안 할게. 짱개야.
-조센징이 독을 탔다고 왜 말을 못 해! 진실을 밝히라고!
-쪽바리가 빠지면 섭하지. 음모론 괜찮았어, 어서 진행시켜!
-겨우 한 번 이겼다고 기고만장이 하늘을 찌르네. 그래 봤자 너희들은 자격지심의 소국이야!
-오늘따라 욕도 달달하냐. 더 해 줘, 해 줘!
-칙쇼! 대일본의 무사라면 할복해! 조센징의 비아냥거림을 어디까지 들어 줘야 해!
중국과 일본은 어떻게든 한국의 음모로 몰아가고 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개인전, 단체전이 결과를 증명하고 있었다. 음모론으로 몰고 가 봤자, 승패를 인정하지 않는 몰염치한 행위가 되었다.
스윽!
무진은 대연무장을 둘러보았다. 관람석엔 우리나라 사람들로 들어차 있었다. 중국과 일본의 관람객은 10명 중 1명도 많았다. 자국 생도의 패배로 일찌감치 본국으로 돌아간 것이다. 반면, 우리는 교류전의 승리로 더 많이 모였다.
우리 안마당에서 우리만의 잔치가 되었다.
‘이 정도면 됐겠지.’
시상식을 위해 정부 주요 인사와 칠대 가문과 길드에서도 사람을 보내 시상식을 빛냈다. 들러리가 된 중국과 일본의 교관은 참석하고 싶지 않겠지만, 체면상 자리는 했다.
단상에는 교장을 중심으로 교관들이 앉아 있었다. 내색하지 않으려고 해도 희비가 엇갈렸다. 안 보였던 인사들도 얼굴 도장을 찍겠다고 자리를 마련해서 앉아 있었다.
특히 한태무 국무총리의 참석은 이례적이었다.
“이번에 정말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제가 한 일이 있겠습니까, 다 교관과 생도가 부단히 노력한 결과입니다.”
“아카데미 예산을 늘려 드릴 테니,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확정을 해 주신다면야, 고려해 보겠습니다.”
교장의 확답을 바라는 응수에 한 총리는 미소와 달리 내심은 편치 않았다. 교장을 입맛에 맞는 인사로 교체하려다가 노선을 전면적으로 바꾸었다. 당장 전 교장을 해임했다가는 다음 대선과 총선에 지장을 줄 판이다.
‘조사한 것과 다르군.’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참석한 연유는 풍신의 미온적 태도 때문이었다. 연임을 망설이자 여론의 낌새가 이상했다. 풍신의 성향을 고려하면 주변에 조력자가 있다고 봤었다.
한데, 만나 본 풍신은 여간내기가 아니다. 예산이란 미끼를 던져서 연임을 유도했건만, 확정으로 받아쳤다.
알다시피 예산은 국회에서 처리한다. 총리의 말 한마디로 정해지진 않는다. 여야의 팽팽한 대립을 중재해야 겨우 예산을 확보하며, 그마저도 시일이 걸린다. 실제로 교장이 연임하더라도 당장은 불가능했다.
“연임 내에 최대한 힘을 써 보겠습니다. 또한, 임기를 마친 후 정계에 입문할 의향이 있다면 확실하게 밀어 드리겠습니다.”
“정계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생도를 바르게 이끄는 일조차 버겁습니다.”
한 총리가 한발 물러서는 선에서 끝이 났다. 애초에 이길 생각으로 오지도 않았다. 전 교장의 성향을 알아본 것으로 만족했다. 예산 확보가 어려운 일이긴 해도, 교장의 업적을 무시하긴 야당으로서도 껄끄러웠다.
‘확실히 주의해야겠군.’
섣불리 회유책을 썼다가는 되레 당하는 수가 있었다. 대세 흐름을 거스르는 것도 위험하고.
“MVP는 정해진 겁니까?”
“그렇습니다.”
“누군지, 참으로 궁금하군요.”
“지금 밝히면 시상식이 재미가 없을 겁니다.”
대외적으론 무진의 활약이 전부 밝혀지지 않았다. 사건의 전말을 알려면 중국과 일본의 협작부터 알려야 했다. 해독에 관해서도 밝혀져서 좋을 게 없기에 숨겼다.
그렇기에 개인전에서 무진이 우승했음에도 권왕의 손녀인 유지수와 성운 그룹의 후계인 진태수가 거론되었다.
어차피 MVP는 한국 생도였다.
누가 받아도 상관은 없었다. 그렇다면 권후와 성운맹주에게 주는 편이 낫다고 봤다. 지나치게 나대는 무진은 호불호가 심한 것도 한몫했다. 좋건, 싫건 하루건너 사고를 치니 얼굴마담으로 내세우기도 난감한 것이다.
-무진이 받겠지?
-의문이 붙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돼. 개인전 우승자가 MVP가 되는 건 관례라고.
-점수도 가장 높지 않나? 그런데도 회의가 길어진 걸 보면 이놈도 대단해.